최종편집 : 2024-03-18 10:38 (월)
“내 최고의 명예, ‘만나교회 담임목사’”
상태바
“내 최고의 명예, ‘만나교회 담임목사’”
  • 정윤석
  • 승인 2016.01.27 22: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년 인터뷰] 김병삼 목사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
▲ 최고의 명예는 '만나교회 담임목사'라고 강조하는 김병삼 목사(사진 Look&Link 김한수 PD)

김병삼 목사(53, 만나교회)는 천상 목회자다. 이름은 불꽃 병(炳)에 석 삼(三)자를 쓴다. 김병삼 목사의 ‘삼자’에는 차남이 평생 목회자로서 삼위일체되신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갈망했던 아버지 김우영 목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부친의 염원대로 김 목사는 경기도 분당에서 불꽃처럼 자신을 사르며 목회하고 있었다. 기자(기독교포털뉴스)는 2016년 1월 22일(금) 만나교회 7층 목양실에서 김 목사를 만났다. 그는 진회색 콤비와 체크 무늬 셔츠를 입고 기자를 맞았다. 김 목사와의 대화는 한편의 감동적인 강연을 듣는 거 같았다. 때론 웃었고, 때론 울었다. 아직 소장파에 속하는 목회자이지만, 소위 ‘목회 세습’을 했다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그였지만 12년째 만나교회를 담임하며 쌓은 목회의 내공은 만만찮아 보였다.

‘세습목회’라는 꼬리표와 공황 장애
김병삼 목사의 선친, 김우영 목사도 천상 목회자였다. 김우영 목사는 2002년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쓰러지셨다가 2004년 별세했다. 당시 3천여명이 출석하는 교회였지만 선친은 이렇다 할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교회의 빚만 100억원을 상회했다. 아버지의 통장에는 잔액 2만 4천원 밖에 없었다.

▲ 만나교회 교인들에게 선물하는 나무 십자가(사진 Look&Link 김한수 PD)

김병삼 목사는 선친의 장례식 조의금으로 들어온 1억원을 교회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강원도 원주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놓은 토지가 하나 있었다. 그것을 팔자 2억 5천만원이 됐다. 그 돈은 전교인들 가정에 달아 놓을 십자가를 제작해 선물했다. 십자가는 검은색 나무로 정갈하게 만들었다. 만나교회 성도들 집에 가면 이 십자가가 달려 있다. 김 목사의 사택은 만나교회내에 있다. 교인 1만여명에 육박하는 대형교회지만 김 목사는 사택을 교회 안에 뒀다. 그는 아버지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김 목사가 어떤 철학을 갖고 목회를 하든, 사람들은 그에게 ‘꼬리표’ 하나를 붙여 준다. ‘교회 세습’이다. 그러나 만나교회 성도들의 생각은 다르다. 만나교회에서 인사구역위원회(감리사가 와서 사회를 진행하는 가운데 개교회 목회자의 이·취임을 진행하는 위원회)가 있었다. 감리사가 ‘세습목회’라는 말을 꺼내자 장로 한명이 발언했다. “감리사님, 우리가 세습목회를 하고 있다는 얘기는 취소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습이 아니라 교인들이 무기명으로 투표를 해서 현 담임목사님을 세운 겁니다!”

만나교회 내부적으로 김병삼 목사의 담임 승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외부에서의 지적과 시선에선 자유로울 수 없었다. 김 목사의 부친이 갑작스레 쓰러졌을 당시 김병삼 목사는 만나교회에서 기획목사로 사역했다. 이때부터 1년간 김 목사는 설교를 담당했고 2004년, 부친이 별세한 후 담임목사가 된다. 그후로 김 목사의 마음에는 늘 개척해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세습’이란 딱지를 김 목사 스스로 떼어내고 싶었다. 2004년, 3천명이던 교인들은 1년마다 1천명씩 늘었다. 3년이 지나자 3천명이 더 증가하며 급성장을 했다. 그 때 김 목사의 마음엔 ‘이제 나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2007년, 덜컥 공황장애가 왔다. 힘들고 아팠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휴가 한번 가지 못하고 하얗게 태우듯 모든 걸 걸고 목회를 해왔다. 교회 개척이 눈 앞에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아프면서 모든 걸 접게 됐다. 그때 비로소 김 목사는 마음으로 깊게 자문했다. ‘너는 왜 개척을 하려는가?’ ‘나는 아버지가 아니어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교회 개척을 계획하면서도 참된 목자로서 주님의 양들을 목양하겠다는 생각이 먼저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아니어도 잘할 수 있다는 자만심,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내가 목자인데, 내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교회를 개척하려 했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때 정말 많이 회개했습니다.”

공황 장애가 오기전까지 그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부담이 있었다. ‘목회를 잘 해야 한다’, ‘내분이 없어야 한다’, ‘잡음없이 부흥시켜야 한다’는 갖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또 한가지는 죄책감이었다. 선친도 김 목사도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스타일이었다. 부친과 김 목사간에는 목회적 갈등이 있었다. 예를 들면 고전적인 형태의 강단을 현대적으로 다 뜯어 고치는 등의 행동이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그 때 김병삼 목사는 ‘우리가 꿈꾸는 교회’라는 책을 냈다. 출판사에서 “담임목사면 모르겠는데 부목사가 이런 책을 내면 교회에서 짤린다”고 염려했다. 김 목사는 교회를 나갈 생각으로 책 출판을 강행했다. 그러는 과정에 김우영 목사가 소천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 너무 소신껏 밀어붙이기만 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떠나지 않는 죄책감에 김 목사의 마음이 무거웠다.

공황장애를 벗어나기까지 5년여의 세월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는 건강관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일주일에 4일 정도는 7km 정도를 걷고, 빙상장에서 스케이트를 탄다. 한의사가 '산보다는 바다를 보며 몸과 마음의 휴식을 얻는 게 좋다'고 해서 바닷길 걷기를 참 좋아하게 됐다. 그는 “정말 바닷길을 걸으면 몸과 마음이 치유를 얻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몸이 건강할 때는 몰랐는데, 아프고 나니까 걷기가 좋다는 게 정말 느껴집니다.”

그의 가장 기쁜 일은 선친이 임명한 장로의 아들이 신앙의 대를 이어 만나교회에서 장로로 세움 받았을 때다. 마찬가지로 선친이 주례해서 결혼한 성도의 자제가 김병삼 목사의 주례로 또 결혼할 때다. 그는 이를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부의 세습이라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김 목사는 아버지에 이어 담임목사가 된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믿음과 영성을 유산으로 이어받아 목회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그는 4대, 5대가 지속적으로 목회자로 헌신하는 가정이 있다는 건,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 중의 하나로 보는 또다른 시각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것을 교단에서 법으로 막아 놓는다는 건 사회의 편협성과 폐쇄성이라고 지적했다.

▲ 김병삼 목사(사진 Look&Link 김한수 PD)

“‘우리 목사님’으로 기억하면 된다”
김병삼 목사는 자신을 순종형이었다고 소개한다. 목회자가 되기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신학교에 갔고 목회자가 됐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많은 방황을 했다. 그가 목사 아들, 게다가 유명한 부흥사의 아들이라는 걸 주변 사람들이 다 알았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모범생이었지만 뒤에서는 신나게 놀았다. 신학대생 1학년 때 이미 당구가 300이었다. 내기 당구를 좋아해 ‘노름’에도 빠져 있었다. 신학교 3학년 때까지 그룹 사운드에 소속해 기타치며 노래를 불렀다. 소명이 없었음에도 군목시험을 봐서 만 25살에 목사 안수까지 받았다. 군목 2년차가 돼서야 일주일간 기도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비로소 갖게 됐다. 그 이후로는 공부에 전념해 미국 시카고의 Garrett신학교에서 M.Div와 United신학 연구원에서 박사 과정까지 5년만에 마쳤다.

김 목사는 자신이 ‘딴따라’를 했기 때문에 열린 마음으로의 목회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김 목사는 “‘놀았던 경험’이 없었다면 내 목회는 바리새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열린 마음은 아들(웅기)을 향해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아들이 중 2때였다. 소위 ‘중2병’으로 유명한 시기다. 갑자기 말했다. “아빠, 나 공부하기 싫어!” 서울에서 세미나가 있어서 아들을 데리고 갔다. 종로 낙원상가쪽에 포장마차가 즐비했다. 그곳을 지나며 “공부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놀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줬다. 이후 상위권을 달리던 아들의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김 목사는 염려치 않았다. 담임선생님에게 아들이 불려갔다. 그러나 아들도 당당히 말했다. “우리 아빠가 놀아도 괜찮다고 했어요!” 김 목사는 말한다. “저도 놀다가 사명 받았어요. 아이들이 방황하는 거, 노는 거에 조바심 내지 않아요. 저도 소명 받으면서 뭐든지 해냈는데, 우리 아이들도 그건 마찬가지예요. 공부가 인생의 전부도 아니구요.”

그는 어떤 목사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교인들이 나를 ‘우리 목사님’으로 기억하면 된다”고 답했다. 이 말은 짧지만 강렬했다. 끝까지, 교인들을 품고 사랑하는 목자,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전부,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목자여야 한다는 생각이 진하게 우러나왔다. 김 목사는 자신의 최고의 명예는 ‘만나교회 담임목사’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김 목사는 종종 10년 전에 했던 설교를 들춰본다. 처음 담임목회를 했던 때의 마음과 결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처음 목회자가 됐을 때 품었던 그 마음, 10년이 지나도 20년을 목회해도 동일한 그 마음을 품겠다는 것이다.

▲ 설교하는 김병삼 목사(사진 만나교회 제공)

2005년 만나교회를 담임한 지 1년이 지나던 해 송구영신 예배였다. 김 목사는 성도들에게 가정의 기도제목과 가족 사진을 함께 제출하라고 했다. 교인이 3천명 이상이 되자 얼굴을 다 기억하지 못했다. 김 목사는 교인들의 가족 사진을 보며 기도하고 싶었다. 당시 “개인사를 공개하기 싫어하는 가정들이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렸다. 그러나 김 목사는 실천에 옮겼다. 결과는 놀라웠다. 교인 1천여명이 가족 사진을 제출했다. 다음 해부터 김 목사는 기도제목을 제출한 1천 가정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며 일일이 자필로 답장을 보냈다. 답장을 보내는 데만 9개월이 걸렸다. 김 목사는 이를 계기로 성도들이 자신을 진정한 목자로 생각하게 된 거 같다고 평가했다.

또 한가지 귀중한 경험도 한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과일 나누기를 시작했다. 교인들이 과일 박스를 갖고 오면 그 과일을 지역 사회의 독거 노인이나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는 행사다. 이것을 하면서 지역 가게들에 과일이 동나는 일도 생겼고 교회 현관앞에 과일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이는 일도 있었다. 이게 만나교회의 전통이 되면서 2015년 추수감사절에 모인 과일 박스만 800박스였다. 김 목사는 “교인들이 모두 개인적인 생활에 바쁘다고는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동기부여만 제대로 시켜 주면 얘기가 달라진다. 성도들에겐 몸으로 실천하는 저력이 있었다”고 말한다.

교회의 목적은 ‘크리스천 만들기’
김 목사는 한국교회의 개혁과제를 말하며 급진적인 제안을 한다. 인터뷰를 하며 ‘교단이 없어져야 한다’는 얘기까지 했다. 교단의 존재 이유는 선교와 개교회를 돕기 위해서다. 그런데 지금은 교단이 개교회를 돕는다기 보다 개교회들이 교단을 돕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교권 싸움의 희생물이 되기도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교단이 권력 기구가 되면서 부패가 생겨났다”며 “한국교회에 교단과 교권이 빨리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단이 예전엔 힘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교단에 권력과 돈이 생겼다. 돈과 권력이 생기면 타락한다. 그래서 돈과 권력을 해체시켜야 한다. 그러면 한국교회가 많이 좋아질 거라 생각한다. 전통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교단이 하나님은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크리스천을 만드는 것이지 감리교인을 만드는 건 아니다. 교단이 싸우고 서로 비난하고··· 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인가.”

세상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가고 있다. 대통령도 권위가 잃은 탈 권위의 시대다. 그런데 교회는 전근대적 권위주의에 빠져 교권 다툼을 벌이는 모습이 답답하다고 한다. 교단에서 정치싸움하는 사람들 보면 가슴이 터질 듯 아프고, ‘지금 저런 싸움을 할 때가 아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김 목사는 한국교회가 ‘개독교’라는 말을 듣기까지 20~30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말한다. 그기간 동안 끊임없이 한국교회가 사회속에서 가치를 잃어왔다는 것이다. 회복하려면 그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는 아들 웅기가 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반대의견을 펼쳤다. 김 목사는 말했다고 한다. “너 잘 생각해 봐라. 네가 목사돼서 은퇴할 때까지 너는 정말 힘든 시간을 지낼 것이고, 그 시간을 잘 지내면 너의 다음 세대가 혜택을 볼 거다.”

▲ 김병삼 목사와 인터뷰하는 정윤석 대표기자((사진 Look&Link 김한수 PD)

김 목사의 세대는 전 세대의 공로와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으로 혜택을 보는 세대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진 시대를 살아간다. 그야말로 가시밭길이라는 설명이다. 기독교가 회복하기 위해 많은 헌신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가 가난했을 때는 영향력이 컸는데, 오히려 많은 것을 가진 뒤에는 영향력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교회의 잘못된 것이 눈에 띌 때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다’는 생각을 가져달라고 주문했다. 김 목사가 감리교신학대학을 다니던 시절 읽었던 책이 있다. 이현주 목사의 <나의 어머니, 나의 교회여>라는 책이었다. 그 책을 읽으며 김 목사는 생각했다고 한다. ‘교회는 어머니 같은 존재구나!’ 우리의 삶의 가장 고달픈 곳에서 생각나는, 그래서 결국은 돌아가고 싶은 곳, 아무리 못나고, 누군가 욕해도 나의 어머니라 내가 감싸야 하는 곳. 언제부터인가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보이는 곳이 되어 마음이 아프지만,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곳. 부족함으로 가득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곳···.

문제를 덮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가자는 의미가 아니다. 크리스천이라면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고 건전한 비판으로 교회를 다시 회복하고 세워가는 바른 지향점을 잃지 말자는 의견이었다. 안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토론하고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밖에서만큼은 극단적으로 교회 문제를 드러내놓고 폭로하는 자세는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 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만나교회

만나교회는?

1981년 10월 4일 김병삼 목사의 선친 김우영 목사가 잠실의 천막건물에서 개척하며 1993년에 경기도 분당으로 이사했다. 1998년 IMF가 터지면서 교회를 짓고 나서 탈진한 김우영 목사를 도와 김병삼 목사가 기획 목사로 부임한다. 이때 김 목사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주로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2002년에 한동대 교수로 가기 위해 교회에 사임 의사를 밝혔지만 갑자기 부친이 쓰러졌고 2004년에 별세한다. 이후 담임목사직을 승계한 김병삼 목사는 ‘우리가 꿈꾸는 교회’라는 주제로 12주씩 설교하며 워크숍을 열고 교회 변화의 필요성을 설득해 간다.

지금 만나교회 1층 현관 앞에는 흡연실이 있다. 지역 사회에도 열려 있음을, 어떤 신자들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교회라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장소다. 실제로 이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며 방송 예배를 드리던 유명 개그맨과 가수도 영성훈련까지 마치게 돼 화제가 됐다. 교회 1층 현관을 들어서면 ‘M. KIDZ’라는 어린이 놀이 공간과 카페 ‘파구스’가 보인다. 모두 지역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요즘 김병삼 목사의 관심은 미디어처치에 꽂혀 있다. 작년 10월 교회 설립 기념일에 미디어처치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미디어팀에만 18명의 풀타임 직원을 배치했다. 사람들은 교회에 상처를 받거나 희망을 갖지 못하고 오프라인 공간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가나안 성도’(교회를 안 나가는 성도를 일컫는 신조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을 맴돌고 있는 시대다. 김 목사는 이들을 오프라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우선 미디어처치를 만들고 온라인 상에서 교인으로 등록하도록 했다. 이미 온라인으로 설교 방송으로 접속해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숫자가 실제 예배참석 숫자보다 많다고 한다. 한주에 5만명에 이른다고.

작은교회 세우기도 그의 관심 영역의 하나다. MMP(Manna Mission Plan)를 통해 개척교회들을 20교회씩 선발해서 매달 100만원씩을 후원하고 만나교회의 모든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도록 오픈하며 2년씩 돕는다. 물질 후원뿐 아니라 교인들까지 파송해 돕는다. MMP의 후원을 받은 미자립교회들이 2년이 지나면 70~80%는 자립한다는 것이다.

김 목사에겐 아픔, 그리고 간증거리가 하나 있다. 딸 예진이다. 딸은 태어나면서부터 아팠다. 약을 먹고 나서 생긴 부작용으로 지적장애를 얻었다. 김 목사는 딸 때문에 NGO 사역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가 대표로 있는 월드휴먼브리지는 아프리카 우물파기, 미혼모 돕기 등 사회복지 사업을 하고 있다. 3천만원으로 시작했지만 2014년에 이미 50억원의 후원금을 운용할 정도로 커져가고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