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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은퇴해도 사역에 은퇴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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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은퇴해도 사역에 은퇴는 없습니다”
  • 정윤석
  • 승인 2010.03.19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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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


김장환 목사(극동방송 이사장, 77세)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원로목사 중 한분이지만 지금도 사역의 현장을 현역 목회자처럼 누비고 있습니다. 기자는 2010년 3월 18일 극동방송 3층에 위치한 집무실에서 김 목사를 만났습니다. 1시간여 동안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확한 표현과 발음으로 말하며 기자와의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은퇴 후 하나님이 저를 더 크게 사용하십니다.”
 

그는 지금도 청춘과 같은 마음으로 사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김 목사는 올해 새해를 동안교회에서 보냈습니다. 2010년의 첫 부흥집회를 인도한 것입니다. 오는 4월 2일부터 4일은 호주에서 진행하는 부활절 연합예배의 강사로 나섭니다. 10시간 동안 장거리를 가야 하지만 그는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극동방송 이사장으로서 지금도 그는 모금활동을 하며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이티에 지진이 났을 때는 1시간 동안 생방송을 하며 전국 교회의 후원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극동방송은 이번 아이티 지진 사태가 나자 25만 달러의 후원금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2004년 수원중앙침례교회를 은퇴한 김 목사이지만 그의 사역에는 은퇴란 없는 듯합니다.

“미국에서 목회하는 친구들이 ‘하나님이 김 목사를 은퇴한 후에 더 크게 들어 쓸 것이다’고 말하더군요. 실제로 그런 거 같습니다. 농촌교회, 개척교회, 군인교회, 학교 등에 가서 집회 인도를 합니다. 농촌교회에서 집회할 때는 의료팀도 데려가고 마을 주민들을 위해 돼지도 몇 마리 잡습니다. 올해 가장 큰 계획으로는 부시 전 대통령을 모시고 진행하는 ‘6.25 60주년 평화 기도회’입니다. 6월 22일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할 예정인데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해 고통 받는 세계인들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민족부흥의 영적토대를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겁니다.”

김 목사는 종종 ‘3부자 부흥회’라는 독특한 형태의 집회도 진행하곤 합니다. 3부자란 김장환 목사와 첫째 아들 요셉, 둘째 아들 요한 목사가 함께 진행하는 집회를 일컫습니다. 그렇다고 강단에 같이 서는 건 아닙니다만 첫째 날은 김 목사가, 둘째 날은 요셉, 셋째 날은 요한 목사가 강사로 나서기도 하고 3부자의 일정에 따라 집회 순서를 바꾸기도 합니다. 둘째 날 요셉 목사가 설교를 하다가 재밌는 예화를 말했는데 청중들의 반응이 싸늘하다면 틀림없이 첫째 날 김 목사가 이미 말한 예화를 재탕한 경우입니다. 그러다 보니 3부자 부흥회를 하게 되면 3부자는 서로 먼저 설교하려고 한다며 김 목사는 웃음지었습니다. 3부자 부흥회를 하다 보니 생기는 에피소드입니다.

그의 올해 사역은 조금 더 ‘낮은 곳’으로 향할 전망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그는 35년간 맡아왔던 극동방송 사장 자리를 김은기 장로(전 공군참모총장)에게 내주고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후로 그는 집회 초청을 받고도 바쁜 일정상 찾아가지 못했던 교회들, 어려운 교회들을 돌아보며 조금 더 나누고 베푸는데 사역의 초점을 맞출 계획입니다.

“건강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런 끊임없는 사역이 가능한 건 그가 건강해야만 가능한 일일 겁니다. 인생의 마라톤을 계속하고 있는 그의 건강 상태는 어떨까요? 기자들 사이에선 “한국교회 원로 중 가장 건강한 사람이 김장환 목사다”란 말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김 목사도 인정합니다. 자신의 건강함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건강을 위해 신경 쓰고 관심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건강의 비결이라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과음과 과식하지 않기입니다. 그저 성경의 원칙을 따라 사니 하나님이 건강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 제목 중 하나는 건강하게 살다가 건강한 상태로 하나님께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김 목사가 즐기는 건강식을 굳이 말하자면 홍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벽 공복에 아내와 며느리가 홍삼을 달인 물을 냉장고에 둡니다. 그 물을 한 컵씩 마시고 새벽기도를 인도합니다.” 그리고 김 목사는 ‘모든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관심 있는 종목에 많은 차이가 생기고 있긴 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축구, 농구, 야구, 탁구, 배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그는 만능 스포츠맨이었습니다. 그 후 테니스에 관심을 가졌다가 현재는 종종 골프를 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골프는 피치 못할 때, 대기업 회장이나 전·현직 총리 등 정치인들을 만나서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눠야 할 때 접촉점의 하나로서 골프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목회자로서 김 목사만큼 교제의 범위가 넓은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는 전현직 대통령, 기업인, 법조인, 미국의 정치인 등을 대상으로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사회·정치 현안과 함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목회자중 한 사람입니다.

그와 인터뷰하던 중 트루디 사모가 골수암 말기라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트루디 사모는 현재 수술을 한 후 퇴원을 해서 딸의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내의 요양과 건강 회복을 위해 1시간 정도씩 걷고 산책하는 것도 그의 일과 중 하나입니다.

“극동방송의 사명은 ‘복음전파’입니다.”
어딜 가나 크리스천들이 있는 곳에서는 극동방송을 듣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사적인 얘기를 하자면 저의 어머니도, 장모님도, 극동방송의 애청자입니다. 애청 정도가 아니라 하루 종일 극동방송을 끼고 살고 계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다보니 저 또한 알게 모르게 극동방송의 애청자가 돼 가곤 합니다. 성도들 곁에서 함께 호흡하는, 오늘의 극동방송으로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김 목사는 간단히 말합니다. 극동방송의 사명을 ‘복음전파’라는 영역에 집중시킨 결과라는 겁니다. 많은 방송사들이 언론의 사명으로서 일반적인 영역에까지 관심을 갖고 매체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할 때 극동방송만큼은 그 부분과 관련해서 명백하게 선을 그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기자들은 물론 일반 사회에선 이런 방침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분명한 선을 긋고 복음전파라는 명확한 색깔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극동방송이 존재한다는 것이 김 목사의 견해입니다. 극동방송의 정관에도 복음전파라는 부분이 명기돼 있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 김 목사는 광고조차도 선뜻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서울의 경우 타 종교 방송사와의 형평의 문제를 고려해서 광고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울을 제외한 지방방송에는 광고가 전혀 나오지 않다는 것입니다.

김 목사는 “이러한 노력이 적중했다”며 “극동방송이 종교 라디오방송 중 청취율 1위라는 점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앞으로도 극동방송은 복음방송이라는 사명을 새기고 나아가겠다고 다짐합니다.

“대통령들도 예수 믿어야 합니다.”
김 목사의 교제의 폭은 무척이나 넓습니다. 지금도 극동방송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을 맡아서 사람 만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한국 방송계에서 유일한 70대 방송 진행자일 겁니다. 그가 만나서 대화하는 모습은 한마디로 격의가 없습니다. 때론 친구를 만나서 대화하듯, 때론 후배를 대하듯, 마음 편하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치인, 법조인, 체육인, 예술인, 연예인들이 교제의 대상이 되는대요, 이들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끌어내고 싶다는 게 김 목사의 바람입니다. 그중에서도 김 목사는 수많은 정치인·경제인들과 많은 교제를 쌓은 목회자 중 한사람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계에 입문하거나 관심을 갖고 있느냐, 결단코 ‘NO!’입니다. 김 목사는 그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전직대통령들과 정치인들을 수없이 만나왔지만 늘 강조하는 것은 ‘예수 믿으세요’입니다. 크리스천이 대통령이 되는 경우 그는 1등 장로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노 전대통령이 봉하마을로 내려갔을 당시 김 목사는 신실한 크리스천 정치인들과 함께 노 전대통령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가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면 큰 힘이 될 겁니다”라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김장환 목사를 찾는 정치인들이 늘어납니다. 정확히 말하면 선거철이 되면 한 표라도 도움이 될까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김 목사가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한다는 겁니다. 부담스럽고 껄끄럽지 않을까요? 김 목사는 오히려 날마다 선거철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들 모두가 복음전파의 대상자들인데 제 발로 걸어서 자신을 찾아오니 너무나 고맙다는 의미입니다. 때로 김 목사를 멘토로 삼는 정치인이 더러 생기기도 합니다.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종교계에 한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침례교세계연맹총회장이 됐을 당시에는 쿠바에서 카스트로를 만나 스페인어 성경책을 주며 그를 전도했고,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과는 절친한 사이로 지미 카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때도 김 목사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게 부탁하여 박정희대통령을 전도하기도 했습니다.

“내 묘비명에는···.”
복음전도자인 김 목사는 자신의 묘비명에 어떤 글을 새기길 원할까요? 그는 주저하지 않고 빌립보서 1장 21절 말씀을 언급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김 목사는 자신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조금 더 성경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인터넷 공간에서 기독교는 ‘개독교’로 여겨지며 대사회적 이미지가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목사들의 책임이 크다’고 말합니다. 최근 천주교와 불교계의 거목 두 분이 별세했을 때 일반 언론이 보인 반응과 한국교회 원로가 소천했을 때 보인 반응에서 그는 한국교회의 위상을 피부로 느낀 듯했습니다. 비교가 되더라는 겁니다.

“기독교의 세력은 커졌는데 시민들은 우리들에게 많은 기대를 하는데 그걸 채워주지 못했던 것이죠.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러니 종교계의 ‘인물’들이 돌아가셨을 때 국민들의 반응이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김 목사는 그래도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의 사회사업의 80%를 책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이기주의적으로 비치는 것은 개교회주의 때문이라는 지적입니다. 이를 위해 김 목사는 개교회주의의 약점을 극복하고 하나로 집약된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아이티 재난을 돕기 위해 정부보다 기독교계가 더 많은 돈을 후원했습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로 힘을 합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정말 타종교계가 넘볼 수 없는, 사회적으로 큰 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김장환 목사는 1934년 가난한 소작농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 유년기를 보냈고 미군 하우스 보이 생활을 하며 알게 된 칼 파워즈 상사의 도움을 받아 17세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했습니다. 밥존스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이곳에서 만난 트루디 사모와 4년간의 교제 끝에 결혼합니다. 슬하에 2남 1녀(요셉, 요한, 애설)를 두고 있고, 큰 아들 김요셉 목사는 원천침례교회, 작은 아들 김요한 목사는 대전 함께하는교회, 애설은 올해 바이올라대학에서 다문화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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