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3-25 15:18 (월)
“목회(牧會)는 인회(忍會)입니다”
상태바
“목회(牧會)는 인회(忍會)입니다”
  • 정윤석
  • 승인 2011.10.24 08: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장 통합 상도교회 최승일 목사


 

▲ 설교 중인 최승일 목사(사진제공: 상도교회)


상도교회 최승일 목사(52)는 호주 1.5세대다. 하얀 피부, 명민한 눈매, 유창한 영어,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고생 모르고 자란 호주 유학파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그건 겉모습뿐이다. 그는 남모르는 고생을 많이 했다.

16세 되던 해, 아버지와 함께 호주로 이민을 갔다. 당시 부모가 이혼하고 나서였다. 부모의 이혼 상처가 고스란히 최 목사의 가슴에 새겨졌다. 그러나 호주 현지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자신과 같은 가정적 어려움을 겪고 마음 아파하는 친구들의 카운슬러 역할을 했다. 이미 학교에서부터 작은 목회를 시작했던 셈이다. 신학은 한국에서 했다. 예장 통합측의 장신대에서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장신대 재학 시절 학자금을 받을 수가 없었다. 밥 먹을 돈이 없어서 굶는 날도 많았다. 1970년대 후반, 배고픈 신학생 시절이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친구 아버지가 서울 강남에서 목회를 하셨다. 전도사로 사역하면 20만원을 준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았다. 이민 1.5세대에 영어가 유창하다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사역지는 이미 내정돼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친구가 ‘경기도 전곡’으로 여행이나 가자고 말했다.

경기도 동두천을 지나 조금 더 북쪽으로 가면 한탄강이고 조금 더 북쪽이 전곡이다. 친구는 전곡 지역에서 사역자를 구한다며 면접을 보러가는 길이었다. 면접을 본 후 같이 여행이나 하자는 것이었다. 친구를 따라 나섰다. 여행 전에 전곡에 있는 한 개척교회를 찾았다. 친구는 면접을 봤다. 최 목사는 옆에 앉아서 친구와 함께 얘기를 들었다. 전곡의 교회 목사님은 전도사 사례비가 3만원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사례가 나오면 다행이란다.

사역을 하면 유년부, 초등부, 청년부를 담당해야 했다. 성가대 지휘, 새벽기도 종 치는 역할 등 할 수 있는 모든 교회의 잔일을 담당하는 게 개척교회 전도사의 사역이었다. 그 목사의 말을 듣고는 친구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못 올 거 같습니다.” 전곡 교회 목회자는 아쉬운 표정도 짓지 않았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너무 어려워서 다들 면접을 보고는 사역하겠다고 말한 신학생이 없어.” 최 목사의 가슴이 아파왔다. 그렇다고 강남의 내정된 자리를 거절하고 친구 대신 전곡에 올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일어서서 최 목사는 친구와 한탄강을 둘러보며 경기도 북쪽 지역을 여행했다. 여행을 마치고 기차에 올라탔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승일아, 네가 가라!” “어디를요?” “전곡교회!” 가슴에 그런 생각이 너무도 강하게 튀어 올라왔다.

“Why me?”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왜요?” 아무리 거절하고 싶어도 그는 거역할 수 없었다. 가슴으로 전달되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강남으로 내정됐던 그의 사역지가 강북도 아닌 깡촌 시골 전곡 교회로 결정됐다.

 

▲ 아동부와 함께 기념촬영을 한 최승일 목사(앞줄 가운데)(사진제공: 상도교회)


개척교회 전도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주말이면 그곳에서 먹고 잤고 방학이면 그곳에서 생활했다. 한 겨울엔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영하 20도는 기본이었다. 난방을 하고도 집안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자야했다. 어느 날은 연탄불이 제대로 지펴지질 않았다. 완전히 냉방이었다. 그곳에서 이불을 두 겹 세 겹 말고 이가 탁탁 부딪히는 가운데 덜덜 떨어야 했다. 하나님이 괜스레 원망스러워졌다. “하나님, 저를 이런 곳에 보내셔서….”

그때 한 여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초등부 여학생이었다. 며칠 전 그 학생의 집으로 심방을 갔었다. 군용 텐트를 거처로 삼아 4식구가 모여 살았다. 텐트 자락을 하나 들치면 부엌이었다. 또 하나를 들치면 방이었다. 곤로 하나를 갖다 놓고 취사와 난방을 해결했다. 난방이 제대로 될 리가 없어서 한겨울이면 이불 속에 4식구가 들어가서 서로의 온기로 추위를 견뎌내며 살고 있었다. 그 밤, 떨고 있을 그 여학생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회개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우리 초등부 학생은 난방도 못하고 4식구가 이불 하나를 덮고 사는데 저는 연탄을 저렇게 쌓아 놓고도 그게 제대로 피워지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눈물 콧물을 짜며 기도했다. 그는 그날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영하 20도의 추위로 냉방이던 그 방이 그날 밤 내내 훈훈했다.

최 목사는 “전곡에서의 2년 6개월 전도사 생활이 제 목회의 출발점이자 기초석입니다”라며 “목회를 하다가 힘들 때면 항상 그 때 일을 생각하며 이겨가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만큼 힘들었던 시기였다. 최 목사는 요즘 신학생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고생 좀 하고, 조금 더 어려운 곳을 찾아가고, 남들이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신학 수업을 마친 그는 다시 호주로 갔다. 현재 52살의 그이지만 이미 목회 경력은 25년이 된다. 호주로 가서 28살의 어린 나이에 담임목회를 시작했다. 이때도 역시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호주 현지의 유서 깊은 교회에서 청빙이 왔었다. 고민하던 기간에 20여 명이 모이는 호주 한인교회가 최 목사를 청빙할 뜻을 비쳤다. 그 때도 최 목사는 호주 현지 교회보다 한인교회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네 길은 이거다”라며 현지의 유서 깊은 교회를 포기하게 하셨다.

한인 목회를 시작하면서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주님, 상처받은 사람들, 내게 맡겨진 교인들을 위로하는 목회를 하겠습니다. 싸움하지 않는 교회를 만들겠습니다. 교회에서 싸움 나는 그 순간 저는 떠나겠습니다.”

수많은 목회 비전 가운데 하필이면 ‘싸움 하지 않는 교회’일까? 그에게는 교회 분쟁에 대한 뼈아픈 기억들이 많았다. 그가 청소년 시절 출석하던 호주 한인교회 하나가 20개로 쪼개지는 현실을 목도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교회 안에서 극단적 대립이 있었다. 3년 동안 단 한주도 빠지지 않고 싸움이 계속됐었다. 경찰이 2인 1조가 뜨면 그 어떤 상황도 평정되는 게 당시 호주 사회였다. 그러나 한국인은 달랐다. 한국인은 싸우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경찰 20명이 출동해도 해결이 안됐다.


그에게는 교회의 분쟁이 너무도 아팠다. 자신이 담임하는 호주 시드니 온누리교회는 그런 최 목사의 비전으로 정말 18년 동안 싸움 없는 평화의 목회가 유지됐다. 목회하는 동안 100여 명이 모이는 또 다른 한인 교회와 통합한 적도 있었다. 그 때 친구들은 “저 교회 교인들은 완전 싸움꾼들이다. 합쳐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 목사는 교회를 통합한 후에도 역시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싸움이 안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통합한 이후 최 목사의 교회는 더욱 부흥해 호주 한인 교회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교회가 된다. 그런 그가 2006년 갑작스레 상도교회로 부임하게 된다(<교회와신앙> 2008년 9월 5일자 “‘주방장’ 자처하는 상도교회 최승일 목사” 기사 참고).

지금 최 목사는 한국에 부임한지 5년이 돼 간다. 그는 한마디로 목회(牧會)는 인회(忍會)라고 정의한다.

“목회는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참다보면 아무리 싸우던 대상도 결국은 내 사람이 됩니다. 싸움을 아무리 잘하는 사람도 교회에 싸우러 오지는 않아요. 그 사람을 싸우게 하는 요인, 그를 힘들게 하는 요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싸움꾼이 되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고 서로 받아주면 모두 순한 양이 됩니다.”

 

▲ 성탄절 행사에서 기도하는 최승일 목사(사진제공: 상도교회)

얼마 전 최승일 목사는 설교하는 중에 눈물을 흘렸다. 한국교회의 아픔이 고스란히 가슴으로 전달돼 와서였다. 최 목사는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눈물과 감동이 없이 메말라 가는 데 있다고 말한다.

“제가 어릴 때 봤던 한국교회는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이었어요. 어디를 가나 통회·자복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교인들의 눈은 수도꼭지 같았어요.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가 너무 메말라 가고 있어요. 말씀은 너무 좋은 데 듣는 사람들에게서 가슴을 찢는 눈물은 나오지 않고 있어요.”

최 목사는 상도교회에서 성령이 주시는 감동을 전하는 목회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눈물이 있는 목회, 영성을 깨우고 눈물의 감동이 있는 목회다. 한국교회가 아무리 지탄을 받더라도 최 목사는 한국교회 전체를 깨우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 아니라고 말한다. 목회자 한명 한명이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고 내 교인, 내 교회를 바로 세우고 깨우면 한국교회는 변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 교인들의 마음이 옥토가 되도록 눈물로 씨를 뿌리자는 것이다. 그러면 대리석 같은 마음도 녹아버릴 것이라는 게 최 목사의 변함없는 주장이다.

사실 최 목사를 만나는 날, 최 목사의 얼굴에는 약간의 수심이 엿보였다. 인터뷰 도중 기자는 그의 표정이 무거워 보이는 이유를 알게 됐다. 호주에 사는 여동생이 오랜 만에 한국에 왔다가 돌아갔다. 출국하면서 남긴 말이 있었다.

“오빠답지 않은 모습이 나오더라. 권위적인 모습이 보이더라.” 최 목사는 여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전해 듣는 순간 “아, 그렇구나, 내가 변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최 목사의 마음이 무거워 보였던 이유였다. 한국에서의 5년, 자신도 모르게 이민목회를 할 때의 순수한 열정보다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장로교회 목사의 권위적 모습이 가족들에게 보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기자는 최 목사의 말을 듣고는 윤동주의 ‘청동거울’이란 시가 떠올랐다. 시인 윤동주는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나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라며 자기성찰적 고백을 한 바 있다. 중년의 목회자 최 목사에게서 기자는 그런 자아성찰적인 자세를 보았다. 그런 순수함이 지금의 최 목사를 지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