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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요한계시록 해석은 개인 상상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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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요한계시록 해석은 개인 상상의 산물
  • 박유신 전문연구위원
  • 승인 2020.09.1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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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신 목사의 유튜브 쟁점 진단/ 서사라 목사편 (5) - 천상에서 깨달았다는 요한계시록

1) 서사라 목사의 주장

이번에 주님은 이 부족한 종을 통하여 그렇게 잘 풀리지 아니하던 계시록의 의문점들을 밝혀 주신 것이다. 이 일들은 천상에서 주로 주님과 요한과 그리고 모세와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주님은 나에게 계시록에 대한 의문점들이 생각나게 하셨고 그리고 그 의문점들에 대하여 생각으로 알게 하시고 깨우치게 하여 주셨다(서사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예수 그리스도 (성경편 제3권-계시록 이해),(남양주시: 하늘빛출판사, 2016), 21)

주님은 여기서 이 흰 말 탄자가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내게 ‘이기고 또 이기려 한다’는 이 말이 성경의 ‘이기는 자’와 연관됨을 알게 하여 주셨다. ···즉 이 이기는 자들은 주님이 공중 재림하실 때에 휴거되는 자들과, 그리고 휴거는 못 되었으나 남아서 대환란을 통과하면서 이마나 손에 표를 받지 않고 짐승의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아니하여 순교당할 자들 그리고 혹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자들인데 이들을 그가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 면류관은 바로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질 면류관인데 그가 미리 쓰고 보여주는 것이다. 아멘. (위의 책, 105-107).

주님과 나는 그 큰 궁 안에서 들어가서 황금테이블에 앉았는데 마리아가 도착했다. 마리아는 머리에 하얀 수건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님께 인사를 했다. “주님 제가 왔어요” 그리고 내 옆 오른편에 남편이 와서 앉았다. 나는 놀랬다. ‘아니 내 남편이 웬일로 여기에 이렇게’ ···그리고서는 모세가 왔다. ···또한 베드로도 오고 싶어 하여 왔다. ···또한 바울도 요한 옆에 앉았다. 그러자 에스더와 삭개오도 나타났다. ···테이블 위에 꼭 포도주 같은 주스가 담긴 작은 잔들이 각자의 앞에 놓여있었고, ···큰 긴 빵, 카스테라 같은 빵이 놓여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손으로 조금씩 뜯어 먹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 둘 즉 나와 내 남편을 두고 말씀하셨다. “내가 저들을 내 제자로 만들리라.” ···그리고 주님은 남편의 손바닥에 ‘베리칩은 666이다’라고 써주셨다. 그리고 이마에도 똑같이 ‘베리칩은 666이다’라고 써주셨다. ···내 남편은 아직 베리칩이 666인 것을 믿지 않는다. 나는 주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내 남편이 곧 베리칩이 666인 것을 믿게 될 것이라는 사인으로 받은 것이다. 할렐루야(위의 책, 276-277).

나의 질문은 그 백보좌 심판 때 흰 보좌가 펼쳐지는데 거기 앉으신 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로라” 즉 주님이 거기 앉으신다는 말이다. 내가 말했다. “주님 그러면 성부 하나님은요?”...그랬더니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그로라.” 나는 천국에서 성부 하나님이 계신 곳이 따로 있어서 나는 그곳을 가보았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그 여호와 하나님이니라’ 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오 마이갓! 그렇다 맞다. 그래서 삼위일체이신 것이다. 그분이 그분이다. 그런데 나는 성부 하나님이 계신 궁 안에서 성부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나 저 앞에 큰 우레와 같은 목소리를 내시고 계시고 그리고 정작 주님은 내 옆에 서 계신 것을 보았는데 지금 주님은 ‘그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따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분은 한분 하나님이신 것이다. ···또한 신약 빌립보서 2장에서 주님을 하나님의 본체라고 표현하고 있다(위의 책, 437-439)

‘천상에서 깨달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서사라 목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내(서사라)가 쓴 요한계시록은 주님이 천상의 테이블에서 나에게 깨우쳐 준 것이다.

* 요한계시록 6:2의 흰말 탄자는 이기는 자에게 주어질 면류관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 주님이 천상에서 남편에게 베리칩이 666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 천상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 분임을 목격했다.

2) 성경적 해석

서사라 목사는 자신의 저서 「성경편 제3권-계시록 이해」는 자기와 사도 요한과 모세가 참석한 천상의 회의에서 예수님이 깨닫게 해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힌다. 이 책은 예수님이 자기 마음에 요한계시록에 대한 의문점을 갖게 하고 그리고 그것을 마음으로 깨닫게 해 준 것이 주된 내용이라고 한다. 주님이 “계시록에 대한 의문점들이 생각나게 하셨고 그리고 그 의문점들에 대하여 생각으로 알게 하시고 깨우치게 하여 주셨다”라는 말은 매우 모호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사람들 중에는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어떤 계획이나 아이디어를 하나님이 준 것으로 확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필자는 그의 요한계시록 해석 가운데 성경을 벗어난 몇 가지 사례를 다루어보려고 한다.

서사라 목사는 요한계시록 6:2에서 흰 말 탄 자가 면류관을 쓰고 나타난 것은 장차 세상에서 ‘이기는 자’들이 받을 면류관을 미리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해설한다. 그는 ‘이기는 자’를 휴거에 참여한 자 혹은 휴거되지는 못했지만, 지상에 남아서 짐승에게 굴복당하지 않고 죽임을 당한 자로 규정한다. 이 흰 말 탄자를 이기는 자로 규정한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것은 흰말 탄자가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라는 문장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6장은 앞으로 전개될 일곱 인 재앙, 일곱 나팔 재앙, 일곱 대접 재앙이 시작하는 첫 장이다. 이 일련의 재앙들은 모두 종말적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첫 스타트를 요한계시록 6:1-2에서 끊는다. 그러므로 어린 양이 첫째 인을 떼자마자 나타난 흰 말 탄 궁사는 당연히 재앙과 관련이 된다. 그의 손에 활이 있다. 활에 해당되는 톡손(τόξον)은 전쟁 시에 군인들이 사용하는 공격무기이다. 또한 이 궁사는 면류관을 받으면서 계속 이기고 또 이기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이 흰말 탄자가 전쟁에서 계속해서 승전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런 점에서 이 흰 말 탄 자는 호전적인 정복자로 해석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이 장면을 통해서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상에 대한 종말적 심판이 이러한 정복자들의 발현에서부터 시작될 것을 보여준다. 둘째 인을 뗐을 때 나타난 붉은 말을 탄 기사는 내란과 혁명을 보여준다(6:3-4). 셋째 인을 뗄 때 나타난 검은 말을 탄 기사는 기근을 유발시키며, 빈부의 편중 형상이 더 심화될 것을 알려준다(6:5-6), 넷째 인을 뗄 때 나타난 창백한 말을 탄 기사는 앞의 세 재앙을 모두 소유한 가장 강력한 재난들이 있을 것을 알려준다(6:7-8).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재난들을 통해 종말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하지만 서사라 목사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할 첫째 인 장면을 정 반대로 소망과 격려의 메시지, 즉 이긴 자가 받을 상급에 초점을 둔다. 이는 저자의 의도뿐 아니라 문맥과도 매우 동떨어진 해석이다. 과연 서사라 목사의 마음에 찾아온 깨달음이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다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서사라 목사는 2014년 12월 29일에 체험했던 특별한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이날에 자기가 천국에 먼저 올라가 있었는데 갑자기 자기 남편이 “주님 제가 왔어요”라고 하며 자기 옆에 앉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와 남편, 마리아, 모세, 베드로, 바울, 에스더, 삭개오와 함께 테이블 위에 놓인 크고 긴 빵과 카스테라 같은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을 때, 주님이 특별히 자기와 남편에게 메시지 하나를 주었는데 그것은 남편과 자기를 제자로 삼겠다는 약속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특별히 남편에게는 표징을 하나 주었는데 그것은 남편의 손바닥과 이마에 새겨준 ‘베리칩은 666이다’라는 글씨였다고 한다. 서사라 목사는 자기 자신도 ‘666이 베리칩이다’라는 천상의 목소리를 여러 번 들었는데 주님께서 남편에게도 그 사실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정말 요한계시록 13:18에 등장하는 666이 베리칩 일까? 이 구절은 어떤 짐승이 사람의 오른 손과 이마에 표를 받게 하는데, 이 표 즉 666은 이 짐승을 나타내는 숫자라고만 소개할 뿐 666과 베리칩이 동일시 될 수 있는 그 어떤 단서나 암시도 발견할 수 없다.

서사라 목사는 자기 책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예수 그리스도(성경편 제3권 - 계시록 이해)」 811-816에서 666과 베리칩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서사라 목사는 요한계시록 13:17의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라는 문장을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그는 이 문장에서 ‘매매’라는 단어 하나를 떼 낸다. 그리고 이것을 매매의 기능을 가진 베리칩과 연결한다. 그리고 666과 베리칩은 동일한 것이라고 선포한다. 편리한 해석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논증이 아니다, 논증은 객관적인 증거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3:17 자체에는 666이 베리칩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줄 수 있는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서사라 목사는 베리칩이 몸 안에서 터지면 암을 유발하는데 요한계시록 16:1-2이 이 사실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6:2의 ‘표’ 즉 666은 베리칩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계 16:2)에서 독종은 암이 아니라 피부에 생기는 종기이며, ‘표’는 베리칩과 무관한 당시 황제 숭배에 참가한 자들에게 주어졌던 참가확인서를 배경으로 한다(박수암, 182).

서사라 목사는 이 ‘베리칩’에서 ‘암’ 즉 질병이라는 소재를 끌어내어 요한계시록 16:2의 피부병과 오버랩(overlap) 시킨 뒤, 마침내 요한계시록 16:2의 ‘표’를 베리칩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는 매우 저급한 해석의 한 유형이다. 어떤 사건이나 사물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나 그 단어의 속성을 어떤 특정 구절과 연결한 후, 그 특정 구절 전체가 그 사건과 사물을 나타내고 있다고 다시 환원하는 방식이다. 단어 중심적인 해석의 전형이다. 이 방식은 신천지나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데 서사라 목사도 이를 따르고 있다.

서사라 목사는 666이 베리칩이라는 사실이 예수님과 토마스 주남과 루시퍼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확인되었다고 한다(위의 책. 814-816). 하지만 객관적 증거가 첨부되어야 할 논증에서 논증하는 주체의 개인적 경험은 증거 자료로 채택되지 못한다. 교회 역사 속에서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증명하려 했던 자들은 부지기수였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것 혹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 이상의 결론을 자기 체험을 통해 이끌어 내려는 시도가 서사라 목사에게는 매우 잦다. 서사라 목사는 성경이 실제로 확증하고 있지 않는 것을 자기의 신비 체험을 끌어들여,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역으로 성경에 부여한다. 체험에 의존하는 이러한 성경 해석은 정당하지 않다.

필자가 안산제일교회에서 20년가량 시무할 때 받았던 많은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이 666에 관한 것이었다. 초창기에는 “666이 바코드 입니까?” 세월이 조금 흐른 뒤에는 “666이 RFID입니까?” 최근에는 “666이 베리칩 입니까?”로 질문이 바뀌어 간다. 이는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의 전유물인 666에 대한 해석이 현대 과학 기술의 변화에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음에는 666이 어떤 첨단 장비와 동일시될지 주목된다.

요한계시록은 1세기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이며, 이 편지의 수신자도 당연히 이 교회들이다(계 1:11). 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청자와 독자의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2천 년 전, 로마 제국의 협박과 폭정 앞에 섰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2천 년 후에 나타날 생체 이식 칩을 알아야 이유가 있었을까?

1세기 당시에는 특정인의 이름을 숫자로 표기하는 게마트리아라는 관습이 있었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 관습을 살려서 18절을 번역했다. “그 짐승의 숫자를 세어 보십시오. 그 숫자는 사람의 이름이며···”(18절). 이름이 곧 숫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숫자화 했기 때문에 이 숫자를 잘 환산하면 이름이 파악된다. 네로 황제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음역하여 수로 환산하면 666이라는 숫자가 산출된다. 이 산출과정은 다음과 같다. Nun(50) + Resh(200) + Waw(6)와 Nun(50) + Qof(100) + Samech(60) + Resh(200) = 666.(M. 유진 보링,『요한계시록』, 소기천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1), 236-238). 요한계시록 13:18의 666은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정말 서사라 목사에게 ‘666이 베리칩이’라고 일러주셨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서사라 목사의 오독 사례는 이 뿐 아니다. 그는 삼위일체 해석에 있어서도 성경을 심각하게 이탈해 있다. 그는 2015년 4월 27일 주님에게 요한계시록 20:11의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가 누구인지 물었을 때 주님이 “나로라”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질문하기를 “주님 그러면 성부 하나님은요?”하고 했더니 주님이 “내가 그로라.” 로 대답했다고 한다. 서사라 목사는 성부 하나님이 계신 궁 안에서 큰 우레 소리만 들리고 정작 있어야 할 성부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는데, 그 성부 하나님이 자기와 대화하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서사라 목사는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따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한 하나님’이 경우에 따라, 수시로 성부 하나님으로, 성자 하나님으로, 성령 하나님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 사설로 확정되었던 양태론적 단일신론과 흡사하며, 일신론을 주장하는 유대교 신관의 결론과 같고 오늘날의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의 가르침과 맥이 같다.

안상홍의 후계자 김주철은 하나님은 한분인데, 구약 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신약 시대에는 성자 하나님으로, 지금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김주철,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 (안양: 멜기세덱출판사, 1990), 141-142). 즉 한 하나님이 경우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모습을 번갈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이 한 존재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 6:9)께 기도하라 하셨을 때 이것이 하늘에 있는 자기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었을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음성이 들렸다. 그렇다면 이 때 비둘기의 형체로 임한 성령은 누구이며, 세례 받고 물에서 올라오는 예수는 누구이며, 하늘에서 들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과연 이 세 분이 동일한 한 존재일까? 사도행전 7:55에서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다. 이 때 스데반을 충만케 한 성령은 누구이며, 또 스데반이 본 하나님은 누구이며, 또 스데반이 본 하나님 옆에 있는 예수님 누구인가? 이 세 분이 동일한 한 분이라면 이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로마서 8:34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우편에 있는 예수님 누구이며, 또 그 예수님 왼편에 있는 하나님은 또 누구인가? 과연 이 두 분이 동일한 분인가? 빌립보서 2:6-9은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다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순종한 예수님은 누구이며, 또 순종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신 하나님은 또 누구인가? 과연 이 두 분이 동일한 분인가?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삼위로 계시는, 각각 독립하여 계시는 하나님으로 서술한다. 서사라 목사의 삼위일체에 관한 설명은 삼위일체가 아니라 일위삼체에 해당된다.

필자는 그동안 네 편의 서사라 목사의 천국 지옥 여행기를 다루면서 그의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계속 언급해 왔다. 왜냐하면 그의 대부분의 체험이 성경을 이탈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다섯 번째 그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와 같은 확신은 확고히 굳어졌다. 이유는 그가 경험한 2014년 12월 29일의 일화가 결정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사라 목사는 그 날에 자기 남편도 천국을 방문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었고, 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이마와 손에 표식까지 받아왔다고 전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남편의 손에 써준 글씨가 “666이 베리칩이다.”라는 사실까지 증언한다. 그런데 서사라 목사는 공교롭게도 자기 남편이 666이 베리칩이라는 사실을 현재까지 믿지 못하고 있다고 밝힌다. 직접 천국까지 가서, 아내 옆에 앉아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천상의 식사를 나누었고, 더 나아가 그 예수님으로부터 약속의 말씀까지 받고, 더 나아가 그 예수님이 직접 새겨주신 글씨까지 이마와 손에 받아들고 내려온 자기 남편이 지금까지 666이 베리칩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다고 걱정한다. 매우 충격적인 증언이다. 이 증언에 대해 두 가지 유추가 가능하다.

하나는 남편이 그 누구의 말도 믿지 못하는, 자기 소신 매우 강한 고집불통이든지, 아니면 남편이 천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실이 없든지 둘 중 하나이다. 전자일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못자국 난 주님의 손바닥을 보고서야 마침내 자기 고집을 내려놓았던 의심 많은 회의론자 도마도 그 정도 고집불통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실지로 대면하고서도 예수님을 거역할 담력을 가진 사람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2014년 12월 29일 자기와 나란히 천상의 테이블에 앉았다는 자기 남편은 누구였을까? 그 날 천국에서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천상의 식사를 나누었다는 자기 남편은 누구였을까? 실제 남편이었을까? 상상 속 남편이었을까? 그 날 자기 남편을 제자로 삼겠다고 약속한 예수가 누구였을까? 실제 예수였을까? 상상 속 예수였을까? 남편 손에 새겨진 “666이 베리칩이다.”라는 글자가 실제 글자였을까? 상상 속 글자였을까? 이 문제는 결국 서사라 목사가 천사들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넘나들었다는 천국과 지옥이 실제 장소였는지, 상상 속의 세계였는지에 대한 이슈와도 맞 닿아있다. 이 해답의 힌트는 이미 서사라 목사의 남편 이야기 속에 있다. 필자는 서사라 목사의 이 체험기가 정직한 팩트에 근거를 두지 않은, 그녀 자신의 신념이 들어가 있는 상상의 산물이라고 확신한다.[서사라 편 끝]

기독교포털뉴스 이단문제 전문 연구위원 박유신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과 대학원(M.A)을 졸업한 후 계명대학교 신학과에서 조직신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안산공과대학 교양강좌부 초빙 교수와 계명대학교 교양강좌부 초빙 교수를 역임했고 안산 제일교회 협동 목사로 있다.

저서로는 「미국 장로교 신학사: 축자영감교리 형성사」(한국학술정보사), 「한국장로교성서관 칼빈적인가」(한들출판사), 「사복음서 단락별 설교핸드북」(베드로서원), 「바울서신」(베드로서원), 「신약성서 속의 편지들」(베드로서원), 「신천지 대해부」(기독교포털뉴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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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신목사의 서사라 목사에 대한 비판 글 (5),‘서사라 목사의 계시록 이해는 상상의 산물인가?’에 대한 반박

글 - 권호덕 교수

본 사이트 기독교포털뉴스는 서사라 목사의 천국·지옥 체험기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며 상대가 반론을 해올 경우 긍정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습니다. 이에 서 목사측에서 2021년 1월 20일(수) 본사의 메일을 통해 반론을 보내왔습니다. 이를 반론 차원에서 올립니다. 독자들께서 박유신 목사와 정윤석 대표기자의 글은 물론 그들의 반론을 보시고 성숙한 판단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편집자주].

만일 박유신이 이런 영적인 체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사라 목사가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그는 한편으로는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천상의 주님과 성경의 저자들을 만나 해석하기 힘든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서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제는 그의 해석이 성경 전체를 꿰뚫어 거기에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해석은 전천년기설적이고 문자적 7년 환난에 근거하여 해석한다. 형식적으로는 세대주의적 전천년기설에 유사하나 그 내용은 달리 독특한 점을 지니고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더 많은 전문가들과 논의해야 할 것이다.

서목사는 성경 본문에 충실하면서 영적인 체험을 통해 이 책 을 저술한 것이지 자기 이성(理性)으로 고안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서목사가 체험한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간증을 하나의 조작으로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서목사는 분명히 하나의 전도자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천국과 지옥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음을 언급했다. 그런 체험을 책으로 저술했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여 간증하여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확신이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쉬운 것도 없는데 이단으로 낙인찍히며 조롱을 받을 일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와 연관하여 박유신은 서목사의 삼위일체론과 666이 베리칩이라는 주장을 비판한다.

-여기서 박유신은 서목사가 설명하는 삼위일체론을 문제 삼는다. 그는 서목사가 양태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비판한다. 그런데 서목사는 보좌에서 큰 소리를 내시는 분과 어린 양을 구분한다. 서목사의 표현 중에 “그가 곧 내니라”는 것은 사역 기능 측면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승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너무나 밀착되어서 승귀 이후에는 한 분 같이 일하시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예수께서 지금도 땅에서 일하시는데 자기와 밀착되어 계신 성령으로 일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요한복음의 설명처럼 성부와 성자가 너무나 밀착되어서 성부와 성자가 늘 함께 일하심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단지 보좌 앞 일곱 영에 대한 서목사의 해석은 신학자들의 의구심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기존 신학자들은 보좌 앞 일곱 영(靈)으로 성령으로 보나 서목사는 일곱 천사로 본다.

-666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그 동안 많이 논의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히 6이 7에 비해 모자라기 때문에 사단이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보다 한수 처진다는 식으로 대충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러는 단순히 목장주가 자기 소 등에 쇠로 된 인(印)을 찍는 표시 정도로 보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구원 사건과 연관하여 이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이치에 더 맞을 것 같다. 구원이란 한 마디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육신의 정욕에 빠져 그 마음이 세상을 향하고 마귀를 위하는 쪽으로 살았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으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중생(重生)과 회심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ㄲ레로 향하는 사건이다.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무죄선언을 받는 것인데 이 선고(宣告)와 동시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멸망으로 가는 것은 이 방향을 다시 마귀와 세상으로 향하게 하는 일이다. 그 동안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베리칩은 독재자의 마음대로 인간의 감정을 조종하여 하나님을 떠나 마귀에게 향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 같다. 즉 구원 사건의 반대현상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이 칩이 인간의 몸속에 들어가 유전자와 결합한다면 적그리스도적 독재자의 조종을 받아 그의 종 또는 마귀의 종으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놀랍게도 베리칩의 이런 기능을 설명하는 영화(킹스맨)가 나와서 이해를 돕는 것 같다. 따라서 베리칩을 666으로 보는 것은 그렇게 무리가 아닌 해석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동안 신학자들이 이런 주제를 연구해서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기피한 점이다.

권호덕교수 약력: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총신대학교 신대원(M div. eq.)

-독일 뭔스터대학교 신학석사(Mag. theol.)

-독일 하이델베르그 신학박사

-백석대 조직신학 교수역임 (은퇴)

-한국개혁신학회 회장역임

-현재 콜부르게학파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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