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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가 지옥에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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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가 지옥에 갔을까?
  • 박유신 전문연구위원
  • 승인 2020.09.01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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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신 목사의 유튜브 쟁점 진단/ 서사라 목사편 (3) - 바울서신은 참고서라 하신 주님

3.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

1) 서사라 목사 주장

그리고 불연못 쪽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쇠창살 안에는 두 영혼이 같이 들어 있었는데 그 두 영혼들은 뼈만 남아 있었고 눈도 없이 구멍만 뚫려 있었다. 나는 즉시 그들이 아담과 하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오랫동안 저 불 못에서 고생하고 타다가 이 쇠창살 안에 넣어졌다는 것이 그냥 알아졌다···. 아담을 보고 ‘왜 여기 와 있냐?’물었다. 아담이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뱀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서사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예수 그리스도(성경편 1-창세기)」, (남양주시: 하늘빛 출판사, 2015), 66).

주여!··· 나는 어떤 자들이 이렇게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에 나에게 그 답이 그냥 마음으로 알아졌다. ‘아하~이 자들은 세상에서 살 때에 거짓말을 하고 산자들이구나.’ ···들어 우리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하면 예를 들면 뷔페 집에 가서 실컷 먹다가 도저히 못 먹고 그렇다고는 버리기에는 아까운 음식들이 남을 때 집에 있는 애완용 강아지에게 주려고 먹다 남은 음식 부스러기 한 두 개 정도 냅킨에 싸서 가져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라면 우리는 정말 어느 누구도 이러한 거짓말에 걸려들지 아니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오늘 이 광경을 통하여 그리고 그 연두색의 큰 뱀 머리가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를 생각하여 볼 때에 나는 이제 다시는 내 삶에 조그만 거짓말이라도 없애야 할 것이고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입장이 곤란하다고 할지라도 거짓말을 말하지 할 것이며 또한 절대로 뷔페 집에 가서 음식이 조금이라도 남았더라면 주인 모르게 냅킨에 싸가지고 와서 강아지에게 주는 것도 삼가야 하겠다고 다시 마음먹은 것이다···

〔계 14:3-계 14:5〕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서사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예수 그리스도(지옥편)」, 221-224).

이 할머니는 자기 돈을 떼어 먹은 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이 할머니는 여기 와서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주여!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돈을 떼어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이 지옥의 광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설사 어떤 사람이 많은 돈을 빌려가서 떼어 먹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사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예수 그리스도(지옥편)」, 293).

나는 ‘주님, 00이 왜 저기에 있어요?’하고 물었다. 주님이 대답하신다··· “그는 내 말보다 사도바울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믿었지···”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한 말을 진짜로 믿고 다른 사람들의 말은 참고로 하라”하신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과 다른 사도들의 말을 같은 비중으로 보는 그것이 문제라 하신다. 주여!(서사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예수 그리스도(성경편 1-창세기)」,193 ).

‘지옥에 가있는 사람들’에 대한 서사라 목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아담과 하와는 지옥에 가 있다.

* 사소한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지옥에 간다.

* 자기 돈을 떼먹은 자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도 지옥에 간다.

*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말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사람도 지옥에 간다.

2) 성경적 해석

서사라 목사는 어느 날 네 명의 무장한 천사들의 인도로 불 연못 쇠창살 안에 갇혀있는 아담과 하와를 목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뱀의 말을 들었기에 이곳에 와있다는 아담의 말까지 전한다. 과연 아담은 회개를 하지 않았을까? 과연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이후에도 여전히 뱀에 순종하며 살았을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 에덴 이후의 아담의 삶을 추적해볼 수 있고, 또한 나름의 추정도 해 볼 수 있다.

아담 범죄 후, 하나님은 뱀에게 장차 여자의 후손이 뱀(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창 3:15). 소위 원복음에 대한 고지이다. 이어서 아담은 단순하게 여자로 불리던 아내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부여한다(창 3:20). 하와(חוה)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여자의 후손이 장차 사망의 아비 사탄의 권세를 부숴버릴 것이라는 그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한 다음, 바로 자신의 아내가 영원한 생명을 이을, 그 여자의 후손을 낳을 자임을 선포한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창 3:20)에서 “부르다”는 혼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공개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 이후 이 아담을 기록하고 있는 이 첫 장면은 음울한 분위기에서 눈부신 희망의 빛으로 전환된다.

창세기 4:1에서 아담은 가인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신앙 고백한다. “여호와로 말미암아”로 번역되는 ‘에트 예흐와’(את־חוה)에 대한 해석들이 역사적으로 분분했다. 하지만 대부분 주석가들은 ‘에트 예흐와’를 아담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들을 얻었음을 고백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 고백 안에는 이 아들이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바라는 부모로서의 소망이 반영되어있다(고든 웬함. 『창세기 1-15』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1”. 박영호 역.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1). 235.) 이러한 장면들은 아담이 비록 추방당한 몸이었지만 아직도 하나님은 자신을 기억하고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몸부림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창 4:3-4)라는 문장은 이러한 확신에 신빙성을 더할 수 있다. 3절의 “제물”(מנחה)은 감사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제물을 가리킨다. 이는 가인은 자기의 농사에서 열매들을 얻자 이 소산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음을 보여준다. 반면 아벨은 동물의 초태생을 하나님께 바쳤다(고든 웬함, 236-237).

아담의 두 자녀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삶을 살고 있었다. 가인과 아벨의 이러한 삶은 그들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들은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듣고 따라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식을 잃고 실의에 빠진 아담에게 “셋”이라는 아들을 선물로 주었고(창 4:25). 그리고 이 셋의 아들 ‘에노스’ 때부터는 하나님께 공식적으로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다(창 4:26). 물론 이전에도 아담의 가족이 제사를 드렸지만, 에노스 때부터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예배 양식이 도입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담은 930세까지 사는 동안 많은 후손의 후손을 보았고, 이 후손의 족장으로 지냈다. 이 최고의 족장은 당연히 자기 후손들의 삶에 관여한다.

물론 아담은 자신에게 부가된 반역자라는 허울을 완전히 벗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부단한 몸부림의 흔적들은 창세기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 때 하나님과 대화하며 동산을 거닐었던 추억뿐 아니라 인류의 비극을 초래했던 그 원흉이라는 오명까지 세포 깊이 새기고 살았을 그가 지속적으로, 대범하게 하나님과 등지며, 뱀에게 순종하며 930세를 향유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창세기가 증언하는 타락 이후의 아담의 삶의 정황과 불 연못 쇠창살에 갇혀 있다는 현재의 아담의 모습이 쉽게 조화되지 않는다. 필자는 개인의 신비 체험보다 성경에 기반을 둔 합리적 추정에 해석의 무게 중심을 둔다. 성경은 아담이 재기를 위해 노력한 흔적들을 보여준다. 아담이 지옥 쇠창살에 갇혀 있다는 보고는 받아들일 수 없다.

서사라 목사가 지옥에서 보았다는 사람들 중에 또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류가 있다. 그 부류는 사소한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을 행하며 산 신앙인, 돈을 떼이고도 원통함을 풀지 않은 신앙인들이다. 서사라 목사는 사소한 거짓말에 해당되는 예를 집에 있는 강아지를 먹이기 위해 식당에서 음식을 몰래 싸가지고 오는 경우로 든다. 뷔페 음식은 앉은 자리에서 먹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은 거짓에 해당되며, 그러한 죄를 지은 자는 지옥에 가며,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실제로 지옥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짓’을 요한계시록 14:5에 등장하는 “거짓말”과 연결한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14장은 천국을 묘사하지도, 십사만 사천을 천국에 있는 성도로도 말하지도 않는다.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3절)은 천국에 있는 영혼이 아닌 교회공동체를 상징한다.(M. 유진 보링,『요한계시록』, 소기천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1),244). 요한계시록 13장은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짐승’의 압도적인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승리한 교회를 묘사한다. ‘순결’, ‘거짓말’ ‘흠’은 모두 승리한 교회의 본질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요한계시록 14:3-5은 선의의 거짓말조차도 안하는 자라야 천국 시민의 자격될 수 있다는 서사라 목사의 진술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사소한 거짓말 혹은 선의의 거짓말이란 과도한 칭찬, 아첨하는 말, 마음에 없는 말, 자기 이익을 위해 꾸미는 말 등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말을 하는 자는 예수를 믿어도 지옥에 간다면 과연 이 세상에 구원 얻을 성도가 있을지 의문이다. 아무리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본성상 평생 모은 자기 재산을 도둑질한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서사라 목사의 주장은 기독교적 인간 이해가 전적으로 결여되어있다. 신앙인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임과 동시에 여전히 성령의 견인하는 은혜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해도 죄를 모두 쳐부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고 죄의 힘에 영향을 받는다. 신앙인은 성령의 인도아래 있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흔적도 남아있다.

바울은 로마서 7:21-25에서 자신 안에 두 종류의 법 즉 양심의 법, 죄의 법이 있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는 이 양심의 법을 따라 살기 원한다고 한다. 하지만 매번 이 죄의 법이 자기를 포로로 삼아 악을 행하게 만든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양심의 법과 동일하게 공존하는 죄의 법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그것에 계속 제압당하는 모순된 자기를 보고 절망한다. 이미 새롭게 되어 새 생명 안에 있게 된 바울이지만 매번 죄의 노예가 되어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모든 성도의 심정을 대표하는 것이기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바울에게 어떠한 개인적인 비밀이 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타락한 도덕적 상태를 표현하는 이 고백은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실제를 말한다. 매번 굴복 당했던 그 죄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바울의 통곡을 감안해 본다면 그것은 ‘사소한 거짓말’ 정도의 수준은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도 당연히 지옥에 처해 있어야 한다. 숱한 믿음의 전투에서 승리했던 백전노장이 이 정도라면 우리는 어떠할까?

선한 의도라 할지라도 거짓말을 하는 신앙인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되며, 지옥에 처해진다는 서사라 목사의 진술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론’에 상당히 탈선되어 있다. 로마서 4:5은 서사라 목사와 다른 주장을 제시한다.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문장은 하나님께서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불러 주시는 이유를 설명한다. 즉 경건하지 않는 그가 경건하지 않는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때문에 그가 경건한 자로 칭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말의 실수가 많은 성도라도 ‘믿음 안에 있으면’ 결코 의인의 신분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을 떼이고 원통함을 쉬 풀지 못하는 성도라도 ‘은혜 아래에 있으면’ 여전히 그 은혜가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를 갈라디아서 3:27에서는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음으로 표현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성도는 모두 그리스도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말한다. 검정 옷을 입은 사람이라도 그 위에 흰옷을 덧입으면 흰옷 입은 사람이 되듯이, 죄를 옷 입고 있는 죄인이라도 그 위에 그리스도라는 옷을 덮어 입은 사람은 의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가 실제로 죄인이라 할지라도 의의 옷을 입혀서, 의인으로 칭해주겠다는 것이다. 돈을 떼이고 원통함을 풀지 못해도, 선의의 거짓말을 해도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이 재결정을 내리면 그는 여전히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다. 서사라 목사의 체험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칭의’의 효력은 발생되지 않는다.

서사라 목사의 지옥 체험기에는 ‘은혜’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믿음’(πίστις)이라는 단어가 영적인 차원, 심리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이라는 단어는 복음을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단어이다. 은혜와 믿음을 말하지 않고서 복음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서사라 목사의 지옥 체험기에는 ‘얼음장 같은 심판과 저주’만 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복음의 기본적 의미가 선명치 않다. 성경적 기독론에서 이탈한 이러한 개인의 주관적 체험은 성경을 훼손하는 근간이 된다.

서사라 목사는 지옥에 가 있다는 유명한 신학자 한 사람을 집중 보도한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예수 그리스도(성경편 1-창세기)에서 세 번에 걸쳐 지옥에 처한 이 신학자 이야기를 다룬다. 세 번 언급한 것으로 봐서 유명한 신학자인 것 같다. 서사라 목사는 왜 이 사람이 지옥에 와 있냐고 물었더니 주님이 ‘그는 내 말보다 사도바울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믿었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신학자가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참고만 해야 할 ‘바울 서신서’를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둔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서사라 목사의 이 목격담이 사실일까? 과연 예수님께서도 바울 서신서를 참고서적으로 정도로만 여기고 계시는 걸까? 예수님은 정말 성경에 차등과 우열이 있다고 믿고 계시는 것일까? 성경에도 등급이 있다는 서사라 목사의 진술을 매우 큰 당혹감을 안겨준다.

신약 성경이 형성되기 전 모세오경, 시편, 선지서만 존재했을 당시 예수님의 성경관은 어떠했을까?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은 모두 자기를 가리키는 글(눅 24:44)로 말씀하시며 구약의 예언이 자기에게서 모두 성취되었음을 선언하셨다. 모세오경, 시편, 선지서. 그 어떤 성경에도 차등을 두지 않고, 모두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이 없어지는 그날까지도 유일하게 세상에 존속해 있을 단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율법’(성경)이라 선언하셨다(마 5:18). 보존될 그 범위는 ‘일점’과 ‘일획’ 즉 글자 한 자 한 자까지이다. 예수님은 영감된 일점과 일획도 패하여지지 않는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결코 성경에 우열을 두지 않는다. 모든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 말씀으로 마지막까지 보존될 것을 주장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바울 서신서를 ‘참고서’ 정도로만 여긴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디모데후서 3:16의 “모든 성경”은 바울서신을 포함한 66권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 66권의 성경에 하나님의 거룩한 입술 기운을 부으셨다. 바울서신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교훈과 바울의 가르침은 동일한 하나님 말씀이며, 동등한 권위와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바울 서신서를 참고서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는 서사라 목사의 주장은 궤변에 가깝다. 이는 예수님께서 바울 서신서의 정경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서사라 목사의 천국 지옥 체험기가 펙트가 아니라고 분명히 확신한다. 바울 서신을 복음서보다 더 중시했기에 지옥에 보내졌다는 어떤 신학자에 대한 스토리도 허구라 확신한다. 서사라 목사의 이 모든 이야기는 그의 내면의 심리에서 표출된 상상이 아닐까?

이처럼 성경이 서술하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하고 있는 서사라 목사의 간증은 성경의 권위를 심각하게 약화시킨다. 어떤 한 개인의 체험에 따라 성경의 내용이 추가되거나 보충된다면 성경은 더 이상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사라 목사는 자신의 책 서론에 자기가 지옥편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 글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옥편을 쓰게 하신 것은 지옥에 가는 인생들이 불쌍하여 한명이라도 지옥가지 않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나를 지옥 구경을 시키셔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로 나를 쓰신 것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사라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보다 확실히 알려주기 위해서 자기에게 이 특별한 체험을 먼저 하게 하고 알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의도라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존재를 알려주는 또 다른 환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환상이 정말 그러한 목적을 가진다면 주제별로 환상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바울은 왜 자신이 세 째 하늘을 본 후, 자신의 본 것을 기록하여 성경에 남기지 않았을까?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천국 장면에 대한 묘사는 사람의 언어로는 담아내기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금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가히”(고후 12:4)라는 부사어를 첨가하여 그러한 시도는 합법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음을 밝혔다. 하나님께서 천국 장면을 바울에게 공식적으로 그리지 못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천국 지옥 체험기에 열광하는 성도들은 고린도후서 12:1-6을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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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포털뉴스 이단문제 전문 연구위원 박유신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과 대학원(M.A)을 졸업한 후 계명대학교 신학과에서 조직신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안산공과대학 교양강좌부 초빙 교수와 계명대학교 교양강좌부 초빙 교수를 역임했고 안산 제일교회 협동 목사로 있다.

저서로는 「미국 장로교 신학사: 축자영감교리 형성사」(한국학술정보사), 「한국장로교성서관 칼빈적인가」(한들출판사), 「사복음서 단락별 설교핸드북」(베드로서원), 「바울서신」(베드로서원), 「신약성서 속의 편지들」(베드로서원), 「신천지 대해부」(기독교포털뉴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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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비판글 (3)- 아담과 하와가 지옥갔을까? 에 대한 반박
 

글 - 조상열교수, 서요한 교수

본 사이트 기독교포털뉴스는 서사라 목사의 천국·지옥 체험기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며 상대가 반론을 해올 경우 긍정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습니다. 이에 서 목사측에서 2021년 1월 20일(수) 본사의 메일을 통해 반론을 보내왔습니다. 이를 반론 차원에서 올립니다. 독자들께서 박유신 목사와 정윤석 대표기자의 글은 물론 그들의 반론을 보시고 성숙한 판단을 내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경 원어가 인터넷에서는 깨지는 현상이 발생하였으나 전체적 문맥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사려돼 그대로 올리는 점 또한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편집자주].

아담과 하와를 지옥에서 보았다는 개인 체험 간증의 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무엇인가?

조상열(sang2493@hanmail.net)

창세기 본문이 아담과 하와의 회개나 그들의 구원 문제를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스토리의 결말이 어떠한지를 논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 결말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구절들이 있다. 만약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해피엔딩을 기대한다면,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 낙원에서 추방된 후에 아담은 회개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의 답은 먼저 유대교 전승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제2 성전시대의 유대교 문헌들이나 1세기 유대교 문헌에서는 아담의 원죄론을 다루고 있으며 아담을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온 자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오 아담이여,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죄를 지은 사람은 당신이지만, 멸망은 당신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자손들인 우리의 것이기도 합니다.

– 4 Ezra 7:118 –

유대교 전승을 계승하여 발전한 신약 역시 둘째 아담(그리스도)에 반하여 첫째 아담을 실패자로 규정하고 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고전 15:21-22 -

유대교 전승과 신약성경이 아담만 실패자로 언급하고 있다고 해서 그의 원죄론에서 하와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거나 배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담은 첫 인류이자 첫 부부의 대표자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원죄 이후에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섬겼을 것이라는 상상도 유대교 문헌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아담이 병들어 치료 목적으로 기름을 가져오기 위해 셋과 하와가 다시 낙원으로 진입한다는 이야기(Life of Adam and Eve)와 그들이 낙원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며 후회하였다는 해설이 외경에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설화적 기술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아벨에 대한 신약의 평가

또한 신약 전승도 구약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의 첫 인물로 아벨을 제시하고 있다(히 11:4). 제사를 통한 구원의 믿음을 아벨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락 이후부터 인간의 믿음과 회개는 속죄의 제사를 통해 평가되고 있으나 가인의 살인사건 이전이든 이후이든 아담과 하와가 제사에 참여하였다는 단서는 찾기 어렵다. 신약 전승은 아벨의 제사만을 언급하고(마 23:35; 히 11:4) 아담이나 하와의 제사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오히려 실패자로 아담을 소개하고 있다(롬 5:14; 고전 15:22; 딤전 2:14). 아담의 실패는 하와의 실패로 이어진다.

사실 창세기에 아벨의 제사 장면이나 가인의 제사 장면 어디에도 아담과 하와가 참여하였다는 기록은 없다(창 4:3-4). 아담도 땀을 흘려 밭을 갈아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징계를 당하여(창 3:17-19) 농부로서 가인과 함께 일하였을 것이기 때문에(창 3:23), 그가 제사를 드렸다면 그 역시 가인처럼 곡물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제사에 대한 평가가 없는 사실은 아담과 가인이 함께 그들의 소산으로 곡물 제사를 드렸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다.

제사 문제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적극적인 관여자로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그들이 제사에 관심이 없었거나 참여하지 않아 제사 자리에 아예 없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제사 불참은 하나님의 심판 이후에 그들이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이후의 인생을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만약 그들이 아벨의 죽음 이후에 깨달음을 얻어 제사를 속행하며 살았다면 그런 드라마틱한 전환과 결론을 빼먹고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의 기술이 실로 아쉽기만 하다. 반면 그들과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한 아벨의 선택은 신약에서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이후 그리스도의 예표로 연결되고 있다.

이렇듯 제사 참여는 아담 가족을 양편으로 나누게 되는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제사만이 인류의 회개를 표현할 방법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제사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부재하다는 것은 하와뿐 아니라 아담도 구원의 길로 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2. 아담과 하와는 여자의 후손 예언을 믿어서 구원받지 않았을까?

두 번째 질문은 아담과 하와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구원자) 예언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을 받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구원자를 잉태할 여자에게 ‘생명’을 뜻하는 ‘하와’라는 이름을 부여하며 공포하였고(창 3:20), 하와가 가인을 낳은 후에 ‘내가 여호와를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했다는 식이다.

이 부분은 지난 세미나를 통해 발표한 논문에서 이미 논증한 바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치사 에트(꜄eṯ)에 대한 오역을 바로 잡으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wattahar wattēleḏ ꜄eṯ¯qayin wattō꜄mer qānîṯî ꜄îš ꜄eṯ-yhwh

그가 임신하여 가인을(꜄eṯ¯qayin) 낳았고

그가 이르되 내가 남자(꜄îš)를, 주를(꜄eṯ yhwh) 창조하였다 하니라

창세기 4:1 (MT와 사역)

1절의 ‘여호와로 말미암아’(꜄eṯ¯yhwh)에서 에트(꜄eṯ/ta,)는 ‘~와 함께’라는 의미의 전치사 혹은 목적격 조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것을 ‘여호와와 함께’(with yhwh) 혹은 ‘여호와/주(yhwh)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전치사 에트(꜄eṯ)가 ‘~의 도움으로’(~을 통해, ~으로 말미암아)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은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이다. 또한 ‘~와 함께’로 번역해도 이는 하와가 여호와와 함께(with), 부모로서 가인을 낳은 것으로 해석이 된다. 이상 두 가지 해석은 모두 에트(꜄eṯ)를 with(함께)로 해석한 경우인데, 전치사 에트(꜄eṯ)의 이러한 적용 용례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렵거나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도출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주목할 것은 전치사 에트(꜄eṯ)가 가인의 이름 앞에서 목적격 용법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문맥 내에서 에트(꜄eṯ)를 두 번 사용하는 것은 에트(꜄eṯ)를 뒤따르는 단어가 다른 뜻으로 오용되지 않고 목적격의 의미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창세기 기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에트(꜄eṯ)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용법 모두 목적격 조사로 보아, 이는 하와가 가인을(꜄eṯ1) 낳고, 여호와(주)를(꜄eṯ2) 낳았다는 기술이며 이는 전체적으로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평행법적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문장은 가인‘을’(꜄eṯ) 낳고 주‘를’(꜄eṯ) 낳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며 남자(꜄îš)와 여호와의 전후 문법적 관계 역시 동일한 의미가 반복되고 있는 평행어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궁켈(H. Gunkel)은 가인과 yhwh를 동일시하고 있고 이러한 문법적 분석을 바탕으로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와 프로반(Ian Provan), 와이엇(N. Wyatt)이 각자의 해석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어떻게 하와가 하나님(yhwh)을 낳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보이스는 하와 시대에는 ‘여호와’(yhwh)의 의미가 후기 역사에서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학적 정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cf. 출 6:3) 하와가 여호와(yhwh)라는 용어를 ‘태어나게 하는 자’나 ‘생명을 주는 자’ 혹은 ‘구원자’라는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는 yhwh를 ‘구원자’(the deliverer)로 번역하면서 ‘내가 남자를, 실로 구원자를 낳았다 하니라’로 의역한다.

보이스는 첫 아들에 대한 하와의 찬양에는 구원자가 여자의 후손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창 3:15)에 대한 하와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즉 그는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으로 예언된 구원자에 대한 희망이 있었고 그 결실을 가인에게서 찾게 된 것으로 해석한다.

하와의 모자(母子) 신격화

위의 보이스의 해석은 원문에 가장 충실한 번역이면서 아마도 하와에 대한 가장 우호적인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몇 가지 정황은 이러한 하와의 독백에 다른 이면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와의 독백에서 가인(qayin)의 이름과 (남자를, 주를) ‘내가 낳았다’(qānîṯî)는 표현을 통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만들다, 창조하다’의 어감을 가진 카나(qānāh) 동사는 하와의 창조성을 강조하고 있다. 카나(qānāh) 동사와 카니티(qānîṯî/*qnh) 동사는 두운체 양식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 둘은 의미론적으로도 연결된다. 즉, 본문 기자는 의도적으로 ‘창조하다’의 의미를 가진 용어를 연이어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 어근의 배열은 가인(qayin)의 이름이 ‘만드는 자’ 혹은 ‘창조자’의 어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정리하면, 창세기 4장 1절의 구문론적 평행 구조에서 언급되고 있는 세 명칭, 가인(qayin), 남자(꜄îš), 주(yhwh)는 동일한 존재를 가리키는 용어이며 이는 모두 하와의 첫 아들을 칭하는 호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세 명칭, 가인(qayin), 남자(꜄îš), 주(yhwh)를 모두 동사(wattēleḏ 낳았다, qānîṯî 창조하였다)의 직접 목적어로 볼 수 있으며, 하와가 ‘내가 가인(qayin=창조자)을 낳았고, 남자(꜄îš)를, (즉) 주(yhwh)를 창조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하와가 원죄에 대한 처벌 이후에도 여전히 신성에 대한 아쉬움과 열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와의 이러한 표현은 하와가 자신이 낳은 아들을 남자(꜄îš), 즉 구원자로 인식하고 극대화된 기대를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신에게 저주를 내린 원 ‘창조주’ 하나님에게 그의 은근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자’를 낳은 하와

일반적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그리고 그가 내가 아들을 낳았다 하니라’(wattō꜄mer qānîṯî bēn)로 표현하지만, 하와는 ‘아들’(bēn)이 아니라 ‘남자’(꜄îš)를 낳았다고 말하며 가인에 대한 그의 기대를 뿜어내고 있다. 하와가 언급한 ‘남자’(꜄îš)는 여자의 후손을 말한다.

그 여자에게 그가 말하되 내가 너의 고통과 너의 임신을 크게 증가시킬 것이니 네가 고통으로 자식들을 낳을 것이니라 그리고 너의 남자(꜄îš)를 향한 너의 갈망이 있겠고 그(hû꜄)는 너를 통치할 것이니라

창세기 3:16 (사역)

창세기 3:16절에서 하와가 자신의 남자(꜄îš)를 갈망하고 그가 하와를 통치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은 하와에 대한 저주가 아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쉬(꜄îš)와 후(hû꜄)를 ‘남편’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여기서 하와가 갈망할 남자(꜄îš)는 그의 옆에 있던 아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 15절에서 언급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을 말한다. 이 여자의 후손, 즉 남자(꜄îš)는 산고의 고통처럼 오랜 인고의 시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소산임을 말하고 있다.

메시아 예언 속의 남자

여성의 임신과 해산하는 고통은 구원자 예언을 되새기도록 몸에 심겨진 표와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신의 고통은 심판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구원자는 인류의 역사에 시간차를 두고 나타날 사건이며 16절의 그(hû꜄)가 하와(즉, 하와의 후손, cf. 창 3:20)를 다스리겠다는 것은 앞으로 올 구원자가 사람이자 남자이며 다스리는 왕권을 가진 자로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으로 해석해야 한다. 또한 그가 하와(의 후손)를 통치할 것이라는 것은 구원자가 인류를 어떻게 구원으로 이끄실 지를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창세기 3장 15절과 16절은 모두 메시아 예언으로 해석해야 할 구절들이다.

하와는 여자의 후손인 이 남자(꜄îš)를 왕권을 가진 자이며 동시에 신적인 구원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와는 그를 다스릴 것이라는 그 남자(꜄îš)가 자신이 임신하여 낳은 가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와가 가인을 낳고 아들(bēn)이 아니라 남자(꜄îš)를 낳았다고 말하거나 그의 남자(꜄îš)에게 ‘창조자’를 뜻하는 가인(qayin)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그에 합당한 ‘주’(yhwh)라는 칭호(yhwh)를 준 것이다.

그래서 하와에게 가인은 신적인 존재이자 왕권을 가진 자였고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구원자’로 기대하고 그 존재의 가치를 높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그의 기대는 그의 이름(qayin/ 창조자)과 칭호(yhwh/ 주)를 통해 드러나듯이 그를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는 창조자로 생각했을 수 있다.

하와의 아들, 가인

이것이 원죄 이후에 하와가 범한 두 번째 죄이다. 그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 구원자 상을 자신의 아들에 적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로 하와는 가인에 대해 높은 기대 심리를 가지고 있었고, 가인에 대한 편애에 가까운 하와의 의식이 가인이 성장하면서 교만해져 아벨을 무시하고 폭력적인 인성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하와가 이전에 세상의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짓던 아담(창 2:19, 23; 3:20)의 권위를 무시하고 대신 직접 가인의 이름을 지은 것은 그가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창조자로, 그의 아들을 자신이 ‘창조한’ 사람으로 여기는 하와의 의식이 반영된 행동으로 보인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이 바로 영생과 전지(omniscience)의 신성을 탐했던 그의 욕심 때문이었던 것을(창 3:4-5) 감안한다면 이러한 해석이 무리한 추론은 아니다. 또 아담이 그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주고 그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단언은(창 3:20) 하와의 자의식이 이후 어떠하게 변해갔을지 가름할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유혹될 만큼, 신성에 대한 관심과 욕심이 있었다. 뱀의 유혹을 받아들인 것은 하와가 자신을 신격화하는 열망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아들을 구원자로 신격화하면 그를 낳은 어미의 위상과 가치도 함께 신격화 된다. 이러한 사실은 하와의 독백에서 왜 하와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어감의 카나(qānāh)를 어근으로 하는 카니티(qānîṯî) 동사를 활용해 가인의 출생을 알린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3. 가죽옷과 여자의 후손 예언도 받았으니 아담과 하와는 구원이 보장된 것이 아닐까?

아담과 하와가 구원 받았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의 또 다른 근거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었기 때문일 것이다(창 3:21). 하나님이 그들에게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예언도 해주고(창 3:15)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었지만(창 3:21),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과 은혜가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도 그 사건을 통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인도 하나님께 살인자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표를 받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지만 구약뿐 아니라 신약 전승에서도 그가 구원받은 자들의 조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히 11:4; 요일 3:12). 따라서 가죽옷과 표는 하나님이 앞으로 죄인들에게 행하실 구원 방법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보호의 도구가 일시적으로 그들을 위험이나 부끄러움에서 가려줄 수는 있어도 그들의 궁극적인 영혼의 구원과 직결되지는 않기에 보호의 도구를 받았다고 아담과 하와가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4. 노아의 방주

아담과 하와 부부가 노아의 방주를 짓는데 동참하였다든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암시받았다든지 하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방주를 짓기 시작하여 마칠 때까지 00년 동안 이들은 구원의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5. 결론

서사라 목사의 아담과 하와 지옥 주장은 그의 체험담에서 비롯된 논제이지만 지금까지 분석해 본 바와 같이 아담과 하와와 관련한 성경의 본문은 서사라 목사의 논제를 지지해주고 있다.

조상열 교수 약력:

-평택대학교 신학과 졸업

-미국 고든 콘웰신학대학 (M.Div., Th.M)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Ph.D.)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구약학 부교수 역임

-건신대학원대학교 구약학 전임강사 역임

-가인의 표 (The Mark of Cain)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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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비판 글 (3)- 아담과 하와가 지옥갔을까? 에 대한 반박글: 서요한 교수

(1) 사소한 거짓말 한 자와 선의의 거짓말한 자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씀에 의하면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 죄의 삯은 사망이다. 여기에는 죄의 크고 작음, 즉 경중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한 모든 허물과 죄를 가리킨다. 따라서 범죄한 사람은 그 손을 짜르고 찍어내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다.

막9: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그 행위를 돌이키지 아니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간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마 5:22-2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여기 두 가지 욕 중에 “라가”는 “텅빈, 무가치한, 우둔한, 멍청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욕 “미련한 놈”은 ‘라카’와 히브리어의 ‘모레’를 연상시킨다. 이 말은 도덕적인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이다. ‘라가’는 ‘어리석은 놈’으로 지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저급하다는 말이며, ‘미련한 놈’(모레)은 ‘추악한 녀석’이라는 말로 인격적으로 천박한 상태를 말한다. 이 두 가지 욕은 상대방에게 극심한 상처를 끼친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버리신 바대로 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져 불못에 들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계 21:8,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함께...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불에 던져지리라 이는 둘째 사망이라”.

(2) 한편 자신의 돈을 떼먹은 자를 용서하지 못한 자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이들은 사람을 미워하여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주님은 살인죄로 간주하셨다. 다시 말하면 원한으로, 용서하지 못한 것은 곧 십계명의 6계명,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성인신, 십자가의 사건, 그리고 부활승천과 재림, 소위 구속사의 정점에 그리스도의 사랑, 아가페가 자리하는 바, 형제에 대한 사랑의 용서가 제일 중요함을 가리킨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이런 자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져서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결국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살인자가 되어 불못에 들어가는 것이다. 즉 받았던 구원도 회개치 않고 계속 양심에 화인맞을 정도로 죄를 지으면 하나님도 그를 버려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서요한 교수 약력:

-총신대 신학과, 합동신학원 졸업

-영국 애버딘 대학교 신학석사 (Th.M., 역사신학)

-영국 남 웨일스 글라모르간대학교 (Ph.D., 역사신학)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Post-Doctoral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교수 역임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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