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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대처와 성경 연구를 함께하는 이단 특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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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대처와 성경 연구를 함께하는 이단 특강[2]
  • 장운철 목사
  • 승인 2017.05.17 0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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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관주 사용하기의 실제··· 말씀 길 찾아가는 내비게이션

두 번째 연재 글입니다. 올바른 성경 연구는 이단을 대처하는 것과 동시에 개인의 성경공부 능력도 역시 높여줍니다. 필자는 그 방법을 4가지로 소개하려 합니다. 관주 사용하기, 다른 번역서 사용하기, 문맥 따라 성경읽기 그리고 참고서 활용하기 등입니다. 10여 회 연재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번 호에는 관주 사용하기 중에서 니고데모 이야기와 가인과 아벨 이야기입니다. 졸저를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필자 주>

목차
1. 관주 사용하기

1-1 모세 이야기
1-2 니고데모 이야기
1-3 가인과 아벨 이야기

2. 다른 번역서 사용하기
3. 문맥 따라 성경읽기
4. 참고서 활용하기


1-2. 니고데모 이야기

요한복음 3장을 읽으면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유대인이며 바리새파 지도자임을 성경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왔다. 그는 왜 왔을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으로 인한 가나 혼인 잔치 기적 사건, 성전 청결 사건 등을 최소한 소문이라도 들었을 것이다. 요한복음 3장 앞의 1~2장의 사건들이다. 이것으로 인해 예수님께 무엇인가 질문하고자 한 게 있었던 모양이다. 밤중에 온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밤중에 찾아온 사람 니고데모, 그는 예수를 믿었을까?(그림 갓피플)

그는 예수님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며 인사말로 먼저 대화를 신청했다(요 3:2). 예수님은 그가 온 이유를 이미 아시고 다음과 같이 화두를 던진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그러자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의미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다시 질문을 한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 ‘거듭난다’는 것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있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네고데모는 더욱 혼돈에 빠진다. 같은 수준의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된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

니고데모의 반복되는 질문과 달리 예수님의 대답은 정점을 향해간다. ‘복음’의 핵심의 메시지를 선포하신다. 바로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요3:16’ 말씀이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발생한다. 복음을 선포한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한 당사자인 니고데모는 구원을 받았을까 하는 점이다. 바로 코 앞에서 그 말씀(요 3:16)을 그가 들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성경에는 그런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

요 3:16절 이후를 읽다보면 예수님과 대화하던 니고데모의 존재가 사라지고 만다. 분명 요 3:16절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메시지인데, 니고데모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요한복음 본문은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과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구원은 받았나?

이때 역시 관주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요3:1절 ‘니고데모’라는 단어에 관주 ‘ㅎ’표시가 있다. 그리고 두 개의 성경구절이 주어졌다. 요7:50, 19:39절이다. 각각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먼저 요7:50-52절까지 살펴보자.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요7:50-52).

무슨 말인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때 니고데모가 등장한다. 요한복음 3장에서 사라졌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요한복음 7장에서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변호한다. 그도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이다. 동료들과 함께 예수님을 비난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동료들이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며 몰아세웠다. 그럼에도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옹호했다. 왜 그랬을까? 그의 앞선 행동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무엇인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요한복음 19장에 한 번 더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살펴보자.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리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

다시 니고데모가 등장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이라는 문구가 같은 인물임을 확인해 준다. 위 구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상황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가 가져다가 무덤에 두었다.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례를 위해 방문했다. 이때 니고데모도 나타난다. 그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찾아왔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다. 니고데모는 어떠한 말을 남기지 않았다. 요한복음의 저자도 더 이상 그에 대해 더 이상 기록을 하지 않았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외에 다른 복음서나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니고데모에 관한 기록은 지금까지 본 게 전부다. 그럼 다시 처음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까?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끝은 여기까지다.

1-3. 가인과 아벨 이야기
어느 날 한 분이 찾아왔다. 수년 전 교회 교육 문제로 다른 교회에서 한두 번 만나 대화했던 이다. 그는 서울 강남 지역에서 영어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이었다. 필자의 연락처를 기억하여 찾아와 준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하며 근황에 대해 대화를 했다. 그러던 중 그분이 의외의 주제를 꺼내들었다.

▲ 아벨을 살인하는 순간을 그린 작품(1542-44 Santa Maria della Salute, Venice)

“요즘 제가 새로 정착할 교회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교회를 개척하여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는 필자의 귀가 쫑긋해지는 말이었다. 그는 마치 계획이라도 한 듯 더욱 구미에 당기는 말을 던졌다.

“큰 교회보다는 이 교회처럼 작고 아름다운 곳이면 좋겠습니다. 제가 교회를 결정하면, 저와 교제를 나누고 있는 동료 3-4 가정이 함께 옮길 것입니다. 이번에 교회를 옮기면 이제는 평생 교회로 섬기려고 합니다.”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다. 교회를 옮기고 싶으면 그냥 말 없이 행동을 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의 다음 말이 그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었다.

“목사님께 하나 여쭈어 볼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다른 목사님들이 대답을 잘 못하셔서 말이죠.”

목사 테스트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무튼 그가 질문할 게 있다고 하니 들어보기로 했다.

“성경을 읽다보니 궁금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제사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잘 알려진 말씀 아닙니까? 그 내용에서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인가요?”

필자는 그분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의 모습이 두 가지로 보였다. 첫 번째는 정말 성경을 읽다가 궁금한 점을 발견해서 찾아온 경우다. 그렇다면 굳이 필자의 연락처를 뒤져서 찾아오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제법 큰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유명한 목회자와 또는 주석서 등 참고서를 통해서 답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필자를 찾아올 수밖에 없는 1%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위 질문에 정답을 못 찾는 이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가 어느 이단 단체에서 훈련 받아 파송 나온 경우다. 적당한 크기의 교회를 선정해 동료들과 함께 교회에 침투, 결국 그 교회를 이단 단체화시키려는 전략에서 나온 행동이다. 이때 그들이 바라는 바는 자신들의 질문에 목회자가 답을 하지 못해야 한다. 소위 성경에 분별력이 떨어지는 목사와 그 교회를 찾고 있는 셈이다. 그래야 그 교회를 이단화하려는 데 보다 쉽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원장이 위 경우의 수 중 두 번째에 해당된다고 판단을 했다. 어디에선가 특별 교육을 받지 않고는 이 질문을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으로 목회자에게 ‘미끼’(?)를 던지는 곳이 어느 곳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원장에게 질문에 답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해 주기로 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을까? 왜 그리하셨을까? 해당 성경 본문인 창세기 4장 1-5절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자.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1-5)

아담과 하와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각각 그 이름이 가인과 아벨이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흘렀다. 그 아들들이 각자 제사를 드릴 나이가 될 만큼 장성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사들 드리는 날이다. 가인의 직업은 농업이었다. 그는 농사를 지어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반면 아벨의 직업은 목축업이었다. 역시 아벨도 그가 치던 양 중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다. 하나님은 이때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차이를 주었다. 즉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신 것이다. 왜 그리하셨을까?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하나님은 농산물이 아닌 양의 피흘림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피흘림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분의 의도는 무엇인지 알겠지만, 창세기 4장 전후 본문을 모두 읽어보아도 그 명확한 근거를 발견하기가 힘들다. 제사 제도를 설명한 레위기 이후에 나온 사건이라면 이해될 수 있지만, 지금 시점은 창세기 4장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피흘림으로 인한 죄의 전가를 적용시키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과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흘림을 염두에 두고 가인과 아벨의 제물에 차이를 둔 것일까. 정말 그렇다면 적어도 농업이 직업인 가인에게도 제물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정당한 게 아닐까? 또 어떤 분은, 하나님은 많이 드린 것을 좋아한다고 설명한다. 가인은 ‘땅의 소산’ 1개를 드렸지만, 아벨은 ‘첫 새끼와 그 기름’의 2개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하다.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과 같은 줄로 판단한 모양이다.

그러면 무엇일까? 창세기 4장을 여러 번 읽어봐도, 영어 성경 등 다른 번역 성경을 찾아서 읽어봐도, 누워서 읽고 일어서서 읽어봐도 모르겠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

역시 관주가 우리에게 중요한 힌트를 준다. 창 4:4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의 첫 단어 ‘아벨’ 앞에 관주 표시가 있다. 다행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key)를 주고 있다. 그 관주는 히브리서 11장 4절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곳으로 따라가 보자. 다음과 같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아! 그렇다. 정답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는 명확하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바로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농업보다 목축업을 좋아하신다는 것도 아니고 또 1개보다 2개를 더 사랑한다는 것도 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갖고 제물을 드린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믿음 없이 제물을 드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성경이 스스로 성경을 설명해 주는 멋진 장면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발견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궁금했던 가인과 아벨 사건을 믿음의 문제로 설명을 해 주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예배, 찬송, 기도, 성경공부 그리고 각종 모임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권면을 해 주고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어가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벨이 가졌다는 그 믿음, 반대로 가인이 갖지 못했다는 그 믿음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벨은 어떤 믿음을 갖고 제사를 드렸으며, 또 가인은 어떤 믿음을 놓치고 제사에 임했던 것일까? 그들의 믿음이 오늘 우리들의 ‘예수님 믿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접근은 본 책 3장(문맥 따라 성경읽기)에서 접근해 보겠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시기를 바란다.

가인과 아벨 사건에 대해 필자의 설명을 들은 그 원장이 조금 당황해 하는 듯했다. ‘설명을 잘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또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등의 적극적인 반응이 나오는 게 맞을 상황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무덤덤했다. “더 질문 있나요?”라는 필자의 물음에 “아닙니다”라며 자신이 시작한 대화를 정리하려 했다.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원장은 이내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그것도 잠시일 뿐, 그는 ‘교회 분위기가 좋다’, ‘종종 연락드리겠다’는 등의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다음 헤어졌다. 이후 수년째 그에게서 연락이 온 바는 없다.

만약 필자가 그 원장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원했던 상황일 것이다. 그때의 극단적 상상을 해 보았다. 아마도 그 원장은 이런 저런 말꼬리를 돌리며 필자를 오히려 훌륭한 목사라고 치켜세웠을 것이다. 이 교회가 바로 자신이 찾던 교회라며 미소를 머금었으리라 본다. 그리고 근시일 안에 그가 말했던 지인 가족들과 함께 교인으로 등록했을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순간 새로운 활기가 돌게 된다. 갑자기 크게 부흥이라도 된 듯 교회는 잔뜩 고무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필자의 교회는 당시 개척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작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 원장과 지인들은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예배 참석은 물론 각종 모임에도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교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다.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집사, 안수 집사 그리고 교회 운영을 할 수 있는 장로가 되는 것이다. 빠르면 3-4년 정도면 가능할 수도 있다.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 다음 그들은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 것이다. 성경공부를 하자는 데 누가 반대를 할 것인가. 처음에는 목회자의 지도를 받겠지만, 점차 자체적인 성경공부와 또는 외부 강사를 초빙해 모임을 가지려고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서서히 이단 사상을 주입시키게 된다.

장로 등의 직분자로 교회 행정을 장악한 후에는 목사를 불신하도록 사건을 만든다. 일을 크게 만들고 결국 목사를 사임하게 만든다. 여기까지 오면 필자가 쫓겨나게 되는 꼴이다. 비록 상상이지만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 그들은 원래 자신들의 소속 목사(?)를 새로운 담임목사로 청빙하게 된다. 그들 원래 소속은 이단 단체를 말한다. 이렇게 하여 정통교회 하나가 통째로 이단 단체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소위 ‘교회 통째로 먹기’라는 그들의 전략이다. 이것은 단지 상상만의 일은 아니다. 이러한 이단들의 전략으로 이미 교회가 이단으로 넘어간 경우가 한국교회 적지 않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소름이 돋는 일이다.

장운철 목사는 월간<현대종교>, 월간<교회와신앙>, 주간<교회와신앙>, 인터넷신문<교회와신앙>에서 이단사이비 문제 전문 취재기자로 20여 년 간 사역을 해 왔다. 신천지, 구원파, 하나님의 교회 등 이단 사이비 문제의 현장을 직접 잠입 취재, 보도했다. 또한 이단 사이비의 핵심 교리들을 분석, 비판하는 다수의 글도 발표했다. 신학교 강의는 물론 각 지역 교회와 연합 기관의 수련회와 집회에서 특강을 해 오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B.A.)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TH.M)를 졸업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아주사 퍼시픽 대학교(Azusa Pacific Uni., M.A.R)에서 공부를 했다. 두 편의 논문, <요한계시록을 오용해 나타난 최근 이단사상 비판>과 <An Evangelical Christian Perspective on Money>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신천지 포교 전략과 이만희 신격화 교리>(장운철, 진용식, 정윤석 공저, 한국교회문화사, 2007), <그리스도인들이여! 세상을 읽자>(장운철, 솔로몬, 2012), <이단들이 잘못 사용하고 있는 33가지 성경 이야기>(장운철, 부흥과개혁사, 2013) 등이 있다. 지난 2007년 서울에 만나교회를 개척해 지금까지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이단특강을 원하는 경우 이메일로 연락하면 된다(kofking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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