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이단이 뭐예요?” “할아버지, 할머니, 이단이 뭐예요?” 자녀가, 때론 손자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의 질문에 늘 곤란함을 느끼는 어른들. 이번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아이가 ‘이단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다. 어떻게 답하겠는가? “네가 알기에는 조금 이른 거 같다. 나중에 말해줄게!”라고 해볼까. 아니면 “그런 거는 몰라도 돼! 너는 지금 예수님만 잘 믿으면 돼”라고 답하면 그만일까? 어린 아이들에게 “‘엄마가 저기 있으니 같이 가자’고 말하는 낯선 사람들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주듯 이단이 뭔지 편하게 답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단대처 사역자들에게 한 문장으로 정리해 달라고 먼저 의견을 물었다(가나다 순).
“정통교회는 성경을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는 반면, 자신이 깨달은 것은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박문수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참 진리에서 벗어나 ‘오류에 빠진 자’.”(이상달 목사, 엔크리스토성경연구원 대표, 세이연 전문위원)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자.”(이인규 대표, 평신도이단대책협회)
“외로움과 권태를 느낀 사람들이 사랑을 갈구하다가 빠지는 ‘거짓된 사랑의 공동체’”(정동섭 목사,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
“사탄이 만들어 놓은 가짜 교회”(진용식 대표회장,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가는 사람들.”(최삼경 목사, 이단문제전문지 교회와신앙 상임이사).
이런 정의에 더하여 사람들은 ‘이단이란 이런 것이다’라며 여러 가지 설명과 단어들을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이 물어볼 것을 대비해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는 내리고 있어야 한다.
이단이란 뭔가?
한국에는 필자가 아는 재림주들만 10여 명 정도 된다. 이중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사람도 있다. 안상홍 증인회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안상홍 그리스도”하면서 세례를 준다. 교주의 이름으로 넣어 ‘주기도문’ 형식으로 만들어서 암송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안상홍님”이라고 한다. 찬송가에도 노골적으로 ‘안상홍 하나님’이라고 돼 있다.
이단단체에 빠진 사람들을 2백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1백만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다. 그들이 인구조사를 할 때 종교란에 ‘이단’이라고 쓰지 않는 다음에야 파악하기 어려운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 한가지가 있다. 처음부터 이단에 빠지고 싶어서 빠진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여신도 성폭행·강제추행 등으로 10년형을 선고받은 JMS가 있다. 이 세상에 누가 그런 교주밑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겠는가? 아무도 없다. 2008년 12월경에는 방송 3사가 여신도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낸다며 폭행을 하다가 사람을 죽인 교회가 있다고 보도했다. 그 교회 신도들은 죽은 신도가 부활한다며 18일간 함께 생활하기까지 했다. 이들이 경찰에 일제히 검거됐다. 정말 이런 단체에 어느 누가 처음부터 다니고 싶어서 다니겠는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에 이단에 빠지고 싶어서 가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그런데 왜 빠지는 걸까? 답은 하나다. 이단이 뭔지 몰라서 빠진다. 이단이 뭔지 정리하며 알아보는 시간은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용어적으로 이단(다를 異 끝 端)은 ‘끝이 다른 것’이다. 이 단어는 이단의 겉모습을 설명할 때 큰 가치가 있다. 이단들의 겉모습은 정통 기독교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같은 성경을 보고, 같은 하나님을 찾는다. 같은 찬양을 하기도 하고 기도를 한다. 우리와 똑같이 사도신경을 외고 구원을 얘기한다. 아니 정통교회에 다니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에 열심이고 성경공부도 열정적으로 한다. 그런데 끝은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다.
이단에 미혹될 뻔한 A집사가 있었다. 그의 직장 상사 때문이었다. 직장상사는 날마다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이었다. 술담배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커피도 거의 마시지 않았고, 인스턴트 식품도 멀리했다. 라면, 콜라, 사이다 등도 절제했다. 회사생활은 너무도 모범적이었다. 그는 종종 A집사에게 말했다. “A집사,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말해. 내가 새벽마다 기도해 줄게. 내 기도가 때로는 하늘문을 뚫고 주님 보좌 앞으로 올라가는 경험을 하기도 하거든.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기고 문제가 해결될 거야.”
그 상사는 A집사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A집사는 생각했다. ‘어떻게 같은 직장 생활을 하는 데 저토록 신앙생활에 열정을 보일 수 있을까.’ 자신이 부끄러웠다. 상사가 아침마다 보내주는 큐티 나눔 성경은 꿀맛 같았다. 그리고 그와 성경공부를 하게 됐다.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교제도 나눴다. 두달, 세달이 지나면서 점점 상사의 입에서 ‘총재’, ‘대전 본부’, ‘기독교복음선교회’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상사는 JMS 추종자였다.
아내가 먼저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A집사는 상사와의 교류를 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았던 이단자에 대한 선입견은 다 깨지고 신령한 상사만이 눈에 보였다. 목사님들과 상담을 했지만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결국 이단 상담을 하고 나서야 그는 상사와의 교류를 끊고 다시 정상적 신앙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필자에게 고백했다. “우리 회사에 그만큼 신앙적으로 모범적인 사람도 없을거예요.”
필자는 이단단체 신도들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 대단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 모두 ‘정신병자’일거라 생각했다. 그 선입견은 취재 몇 번을 하면서 여지 없이 깨졌다. 서울 신당동에 이단단체의 건물이 있어서 취재차 방문했었다. 그 곳에는 그 단체의 홍보요원이 있었다. 참 매력적이고 예쁜 여성이었다. 또다른 단체를 방문했을 때다. 해맑고 너무도 순수한 대학생 한명이 나를 맞았다. 나는 그가 이단단체에서 생활하는 게 안타까워 물었다. “언제부터 다녔나?” 그가 말했다. “모태신앙이다.” 여기서 모태신앙은 뱃속에서부터 교주를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이단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하이레시스(hairesis)다. 원래 '고집(固執)' 또는 '선택(選擇)'을 의미하나 이것이 나중에 ‘당파(黨派)’, ‘종파(宗派)’의 뜻으로 발전하였다. 그 의미는 성경에서 당파(행5:17), ~파(행15:5, 28:22), 편당(고전11:19)으로 나타난다. 이 용어의 의하면 거짓된 교리를 기초로 해서 당파를 짓는 것을 이단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기독교백과사전, 제 12권, 1984, 1110페이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이단이란 본질적으로 교리적인 문제로서, 성경과 역사적 정통교회가 믿는 교리를 변질시키고 바꾼 ‘다른 복음’을 말한다”고 정의했다. 이외에도 이론상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CCC의 국제 강연가 조쉬 맥도웰은 “이단 종파란 성경에 입각한 기독교 신앙을 임의로 변형 왜곡시키고 역사적 근거를 가진 교회의 교훈을 배척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죠쉬 맥도웰·돈 스튜어트, 이단종파, 1989년, 기독지혜사, 11페이지)라고 정의한다.
복음주의 변증가 월터 마틴은 다음과 같이 이단 종파의 정의를 내렸다고 한다.
“이단 종파란 어느 한 특정인의 비정상적 성경해석을 중심으로 한 극단주의자들의 모임이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 골자에 있어서 한결같이 정통 기독교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상통하고 있다. 특히 이단 종파들이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다.(The rise of the Cults. 12.p).”(죠쉬 맥도웰·돈 스튜어트, 이단종파, 1989년, 기독지혜사, 14페이지 재인용).
옥스퍼드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이단에 대한 개념과 관련 ‘트로이의 목마’론과 ‘씨앗론’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단은 우발적이든, 고의든 주인의 집안에 대안적 신념 체계를 세우는 수단, 즉 일종의 트로이 목마 같은 것이다(Dietrich von Hildebrand, Trojan Horse in the City of God:. 이단은 겉으로는 기독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파괴적 씨앗을 심는 신앙의 원수이다(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2a2ae q. 11 a. 1(이단은 기독교신앙을 고백하지만 그 도그마를 오염시키는 불신의 종이다). 그래서 숙주 속에 자리잡고 숙주의 복제 시스템을 이용하여 지배력을 장악하려는 바이러스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이단의 기원이 무엇이든, 위협거리는 본디 신앙 공동체 내부에서 나오기 마련이다.”(알리스터 맥그라스/ 홍병룡 역,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포이에마, 2011년, 60페이지).
필자는 이단을 ‘불량식품’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보기에 맛있어 보이고, 먹음직해 보인다. 실제로 먹는다고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다. 달달하니 참 맛있어서 또 찾는 게 불량식품이다. 그런데 포함돼선 안되는 성분이 다량으로 들어가 있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먹으면 반드시 탈이 나고 몸이 망가진다. 때로 죽음에 이르게도 한다. 이단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이단이란 무엇인가? 이단이란 계획적이기보다는 우발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뒤집고 동요시키고 심지어는 파괴하게 된, 기독교 신앙의 한 유형이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신앙을 동요시키는 과정과 그 위협을 파악하는 일은 상당히 긴 기간에 걸쳐 이뤄질 수도 있다.”(위의 책, 25페이지).
교주의 신부였던 그녀, 왜 그곳에 빠졌을까?
간단한 실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이단에 대한 이론적 내용은 아니다. 실예를 통해 이단의 특성은 무엇이고, 이단에 빠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재확인하는 기회를 갖고 싶어서다. 2009년 여름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 내게 한통의 메일이 왔다. 내용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 편의 하드코어 포르노를 방불했으니까. 메일을 보낸 당사자가 교주와 수백차례의 성관계를 했다는 얘기였다. 아무리 이단사이비 교주에 대한 제보라지만 그녀의 표현대로 과연 그런 일이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드는 생각은 ‘그런 곳에서 수십 년을 지낸 여자였다면 그녀 자신에게도 상당히 문제 있는 거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만나기가 꺼려졌지만, 워낙 심상찮은 제보였다.
만나던 날 그녀는 뿔테 안경을 쓰고 나타났다. 그냥 매우 정상적인 사람이 나온 것을 보고 필자는 놀랐다. 대화 중간중간 지혜로움도 번뜩였다. 정신도 온전했다. 자기 주장도 선명했다. 문제가 있었다면 그녀는 교주를 하나님으로 믿는 단체에서 소위 ‘모태신앙’으로 태어났다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불행은 교주를 선택할 권한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부모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 한 이단단체를 말세의 피난처로 선택해서 들어갔다. 말세에 구세주가 인간을 구원하러 오는데 그 교주가 바로 말세의 재림주라고 부모는 믿었다. 그녀의 부모뿐 아니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말을 믿었고 신도들은 자신의 가산을 헌납하며 그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다. 교주는 “세상이 곧 끝난다”, “북한의 침입으로 한국이 망한다”는 말로 위기감을 조성했다. 성경 요한계시록을 인용, 14만 4천에 들어가야 구원이 된다며 신도들의 공동체 입소를 독려했다. 그녀의 부모도 모든 재산을 바치고 이곳에 들어갔다. 그 후 그녀가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외부의 문화적, 사회적 모든 부분을 차단당한 상태로 자랐다. 외부의 문화와 사회를 접하는 것은 죄로 여겨졌다. 학업도 ‘세상 일’이라며 의무교육마저 받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성교육은 있을 수조차 없었다. 교주는 이곳에서 하나님이었고 신도들은 하나님의 신부들이라고 세뇌를 받았다. 북한의 어린이들이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자연스레 신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이단 단체의 엄격한 율법에 순종하며 순결을 간직했던 그녀가 16살이 됐을 때였다. 교주가 그녀를 호출했다. 저녁 8시였다. 첫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녀에게 60대의 교주가 나직이 말했다. “옷을 벗어라.”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이 신으로 추앙하는 인물이다. 교주의 말을 따라 그대로 실행했다. 그녀의 나신을 한참을 쳐다보던 교주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지! 하지만 진짜로는 받지 않았잖아. 너도 마찬가지다. 이제 시험에 합격했다.” 교주는 시험에 합격한 것을 축하해 주며 그녀를 무척이나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그렇게 돌려 보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 달 뒤 교주는 그녀를 다시 불렀다. 예전처럼 옷을 벗으라고 지시했다. 이미 했던 일인지라 두 번째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교주는 그녀의 처녀성을 앗아갔다. 그렇게 첫 관계가 시작된 후 10여 년 정도에 걸쳐 수백차례의 관계가 이뤄졌다. 몸을 짓밟혔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이 짓밟히는 것인지도, 상처를 받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갖고 단지 하나님이니까, 이 시대의 구원자니까. 그렇게 몸을 바쳐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귀에 바람을 불며 속삭이던 교주의 목소리. “OO아, 내가 너를 너무너무 사랑한다. 나는 지금 꿈 속을 거니는 것 같아. 우리 둘이 꿈나라에 그대로 있으면 아무도 못 찾겠지?” 이렇게 말하는 교주의 입에선 마늘 냄새가 진동했다. 정력에 좋다고 마늘을 상용했던 교주였다. 그러나 당시 교주의 어떤 행동, 어떤 말도 신부를 향한, 신의 특별한 은총이자 사랑인 것으로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교주의 성 행각에 대한 소문은 교단 내에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했다. ‘교주가 집회가 있을 때마다 어떤 처녀의 전신 마사지를 받고 있더라’, ‘장례가 있는 집안의 모 교인과 성적 문제가 있었다’, ‘남편이 잘 때 어떤 부인을 건드렸다’, ‘교역자 모임이 있을 때 여신도와 몰래 빠져나가 모텔에 갔다’ 등등. 캐내면 캐낼수록 수도 없는, 교주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성행각이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교주가 자신을 신부로서 사랑했던 게 아니라 그저 성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많은 여신도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어느날 그녀는 용기를 냈다. 먼저 친족들에게 10년 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눈물을 흘리며 털어놨다. 성관계가 도대체 뭔지조차 모르는 십대부터 시작해서 십여년 동안 교주에게 자신의 성이 무참히 짓밟혀 왔다고. 교주를 신이라 생각하고 참아 왔지만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죄의식 때문에 항상 너무 힘들었다고. 사람들에게 숨겨야했고, 긴장하고 불안에 떨고 있는 지금 자신에겐 더 이상 희망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더 충격이었다. “OO아! 그것은 하나님이 널 사랑하셔서 한 것인데 왜 그렇게 죄의식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냐?”, “너 그렇게 선생님을 인정하지 못하겠거든 가족과의 인연을 끊자!” 김 씨는 친족들의 말을 듣고 도저히 그 단체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신도들에게는 엄격한 율법을 강조하며 순결과 성결을 강조했지만 교주 자신은 수많은 여신도들의 성을 유린하는 이중인격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친족 모두 눈이 멀어 있었다. 그 부도덕함을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교단을 탈퇴하고 필자에게 제보 메일을 보냈던 그녀였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더 흐른 뒤에 그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많은 방황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참 하나님이 계시니 가짜가 설치는 거예요. 자매님, 이제 방황 그만하고 참 하나님을 믿으셔야 해요.” 그녀가 필자에게 말했다. “기자님, 하나님이란 말만 들어도 머리가 복잡해져요.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색마 같은 교주 밑에서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도대체 뭐하고 계셨을까라는 원망이 생기거든요. 그리고 더 심각한 건 뭔지 아세요?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영의 하나님이 떠오르지 않아요. ‘하나님’ 하면 아직도 입에서 마늘 냄새를 풀풀 풍기며 제 몸을 짓밟고 유린하던 교주가 머릿속에서 떠올라요.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어요.”
그렇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대로 이단은 겉으로는 기독교처럼 보이지만, 또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파괴적 씨앗을 심는 신앙의 원수이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에 참 하나님에 깊은 불신을 심어주고,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무서운 조직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 사회는 만만치 않다. 이단에 대한 심각성을 일러줘도 또다른 이미지가 마음 가운데 자리한 경우도 적지 않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이런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종교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이단을 영적 자유를 주장하는 대담하고 용감한 소리로 간주하고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이들에게 이단은 정통성 확보를 놓고 벌인 과거의 싸움에서 잔인한 기존 종교 권력에 패배한 용감한 패자들이다.”(알리스터 맥그라스/ 홍병룡 역,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포이에마, 2011년, 10페이지).
“역사가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소위 ‘정통파’라는 건 어쩌다 싸움에서 이긴 하나의 이단, 그래서 재빨리 경쟁자들을 누르고 그들의 목소리를 묵살해 버린 하나의 이단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독일 신학자 발터 바우어가 전개한 논지이다”(위의 책, 12페이지).
이단에 대해 현대인들이 뭔가 베일에 감춰진 신비를 간직한, 새롭고 창의적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대 사회에서 이단의 문제점을 알려 주고 바른 신앙의 소중함을 알려 주는 것은 크리스천들에게 매우 중요한 숙제다. 필자가 이단과 관련한 강연을 한 후 몇 몇 성도들에게 물었다. 자녀들이 '이단이란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느냐고. 다음은 그에 대한 답변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사다리 없는 달콤한 구덩이다”(달콤해서 빠져가지만 나오기는 어렵다), “추수할 밭이다. 언젠가는 돌아올 사람들이다.”(그들도 구원해야 할 백성들이다), “눈에 가시다.”(우리의 시야를 방해하고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반드시 빼내야 한다), “사탄의 조정을 받는 사람들”(개인의 이성적 판단보다 교주의 말에 좌우되는 사람들),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사기 집단”(교리의 일부를 왜곡해서 속여서 사기를 치는 집단이다), “라면 같다.”(먹음직스럽고 빨리 먹을 수 있어서 좋지만, 그리고 몇 번 먹는다고 사람이 이상해지는 건 아니지만 서서히 몸을 망가뜨린다. 그러나 끊을 수 없다),
“누구나 이단이 될 가능성이 있다”, “외로운 사람들이 가는, 담배 같은 곳”(가정/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곳, 부모와 친구들이 채워주지 못한 사랑을 대신 채워 놓는 곳. 그리고 연기를 뿜어내면 근심이 사라지는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듯, 잠시잠깐의 만족은 주는 곳, 그러나 근본적 해결은 줄 수 없는 곳), “이단은 무서운 곳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는 곳이다.”, “정신병자들이다.”(도둑은 도둑이라 하지 않는다.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환자들이다) - 실제로 이단, 특히 교주 신격화 단체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정신병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환자, 가족들이 아픈 사람을 사랑으로 간호해주듯 그런 접근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이단과 정통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누구나 빠질 수 있다. 이단보다 성경을 더 잘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첨언하고 싶은 게 있다. 진용식 목사(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 대표회장)의 이단에 대한 정의다. 그는 이단의 개념과 관련, 성경 말씀을 통해 매우 쉽게 설명한다. 진 목사는 이단이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말하지 않고 그 외의 것을 진리라고 전달하는 사람들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는 다음 성경 구절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8).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은혜의 복음, 바른 복음,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있는가 하면 우리를 저주에 빠뜨릴 ‘다른 복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단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란 뭘까? 진 목사는 고전 15:3을 제시한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
사도 바울이 전한 이 복음을 바르게 믿고 가르치는 게 참이고, 그 외의 것을 진리인양 가르치는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이단이라는 게 진 목사의 깔끔한 정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