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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화·한준명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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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화·한준명은 누구인가?
  • 임웅기 소장
  • 승인 2017.12.14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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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웅기 소장(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광주 상담소)의 전남대학교 대학원 윤리학과 석사학위 논문 한국 개신교계 신종교의 윤리성에 대한 비판적 접근- 신천지증거장막성전을 중심으로- 20페이지에서 발췌한 글입니다[편집자주].

1) 원산 예수교회의 탄생
원산에서 백남주가 어떻게 강신녀(降神女) 유명화1)- 편집자주 첨부-를 만나게 되었는지는 두 가지의 주장이 있다. 그 하나는 유명화가 마르다 윌슨 여(女)신학교 학생이던 시기에 백남주가 신학교 교수였다는 것이다2). 또 하나는 유명화와 백남주의 부인 한인자 및 한준명이 먼저 기도모임을 시작하였고, 나중에 백남주가 이 모임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유명화의 강신극은 백남주가 원산에 오기 전 1927년부터 있었고, 그녀는 원산 감리교회 평신도였으며 남편의 이름이 이태길이라는 주장과 박승환 장로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그녀가 전(前) 서울시장 김태선의 형수라는 주장도 있다.3)

유명화의 강신극이 주목을 받게 된 시점은 1932년 2월쯤으로 감리교 출신 백남주가 이용도에게 유명화를 소개시켜 준 것이다. 이용도가 유명화를 만나기 전에 백남주와 한준명이 이미 유명화와 함께 기도모임에 참석하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유명화는 이때 백남주와 한준명 그리고 박승걸의 아들들이 성자(聖者)로 특별한 종교적 사명을 여는 시대가 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또한 백남주와 한준명이 스베덴보리(Swedenberg)의 저서를 읽고 여러 해를 기도하던 중 신(神)이 유명화에게 친히 임(臨)하여 대언하기를 “백남주와 한준명 그리고 박승걸이 1933년에 새 교회를 세울 것을 명(命)하셨다”고 한다.4)

유명화의 예언에 따라 백남주와 한준명이 먼저 나서서 기성교회와는 구별되는 새 교회를 창립하자는 움직임을 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 이호빈, 이용도, 이종현이 합류를 하게 된다. 1932년에는 한준명이 이용도의 소개장을 받아 평양을 방문하였고, 함께 동행 했던 여인 이유신을 집회 가운데 세워 강신행사를 하였다. 평양교계에서는 이 행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어, 결국 1932년 11월 28일에 임시회의를 열어 한준명, 백남주, 황국주를 각각 그 소속 노회에서 조사하기로 하였고, 한준명을 소개시켜 준 이용도 목사도 감리회 경성 지방회에서 조사하기로 결의를 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기성교단 측에서 이단으로 결의되어 제명되었다.5)

그러나 이들은 유명화를 필두로 기도모임을 계속하였고, 1933년 1월 3일 새벽에 모든 신도들에게 흰옷을 입고 백남주 자택으로 모이라는 전갈이 내려졌다. 그 날 새벽 3시쯤에 50-60명의 신도가 흰 옷을 입고 모였으며, 예배가 시작되었다. 백남주의 설교가 끝날 즈음에 유명화에게 주의 성령이 임재하여 영계(靈界)의 심판이 눈에 볼 수 있도록 모든 신도들에게 연출되었다. 그 자리에 흰 옷을 입은 신도들은 오른쪽으로 불려갔고, 그렇지 않은 신도들은 왼편으로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오른편과 왼편으로 분리된 신도들은 희비가 엇갈렸고, 대성통곡하고 있는 왼편에 있는 신도들을, 모두 흰옷으로 갈아입히고 왼쪽으로 합류시킨 후 회개와 구원에 대해 각인을 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교회’의 설립이 공표되었으며, ‘예수교회’라는 글씨는 ‘푸른 바탕에 흰 글씨로 쓸 것’과 가운데 ‘+(십자가) 표시는 붉은 색으로 하라’는 신탁이 있었다.

또한 1933년 1월 3일에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의 이름으로 “새 생명의 길”이란 제목의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새 생명의 길이라는 선언문을 통해,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이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구원의 과정을 ‘삼시대’로 구분하는 것이다. 제1시대는 구약시대, 제2시대는 신약시대, 제3시대는 새 생명의 길이라는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6). 이 삼시대론은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와, 문선명의 원리강론에서 말한 성약시대, 복귀섭리완성시대, 부활완성섭리시대 그리고 정명석의 30개론에 나오는 실체시대와 애인시대, 더불어 이만희의 신천지 증거 장막성전에서 가르치는 실상시대, 말씀시대, 계시록시대에 영향을 준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32년 11월 28일에 평양노회로부터 이단으로 단정된 백남주, 한준명과 이용도는 더 이상 기성교단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용도는 감리교 연회에 목사 사직서를 제출하게 되고, 이즈음에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던 백남주는 장로교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감리교 출신 목사인 이용도에게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리고 1933년 6월 3일에 이용도, 백남주, 이종현의 이름으로 ‘새 교회 창립 선언서’가 발표된다. 6월 6일에서 6월 8일까지 새 교회 창립을 위한 모임이 평양교회에서 있었는데 명칭이 ‘예수교회의 창립공의회’였다. 이 자리에는 116명이 참석했는데 여기서 총회장격인 선도감(宣道監)에 이용도를 선출하고 예수교회 헌장 및 그 세칙의 기초위원으로 이용도, 이호빈, 백남주를 선출하였다7). 백남주는 예수교회의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사흘에 걸친 창립공의회가 끝나고 6월 9일에 평양 시내의 회중교회당에서 낮에는 한준명이 밤에는 박승걸이 각각 결혼식을 이용도 목사의 주례로 거행하였다. 유명화가 신탁하였던 그 결혼식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8월 중순에 전도에 관한 신고서류를 일제 총독부에 제출하였고, 포교소가 하나 둘 씩 생겨난다.

(2)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 설립과 백남주의 천국 결혼잔치
예수교회가 설립 된 후 1933년 9월 9일을 전후로 해서 백남주를 책임자로 하는 부설 수도원인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이 세워졌다. 그것은 60-70평정도 되는 한 동의 단층건물이었으며 지붕은 양철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1933년 10월 2일에 이용도가 지병으로 사망하였고 10월 5일에 임시공의회가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 강당에서 열려 후임 선도감으로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하고 예수교회로 들어온 이호빈이 선출된다. 그리고 1933년 11월 1일에는 중앙선도원(中央宣道院)이 평양에 세워졌으며, 오후 8시에 ‘예수교회 설립 선포식’을 거행한다. 백남주는 1934년 1월에 창간되는 기관지 『예수』의 편집책임을 맡게 된다. 신학산에서 생활하는 수도생들은 남자 5명, 여자 6명 정도였고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 교수진은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이었으며 신학산의 목적은 예수교회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호칭은 기성교회의 ‘전도사(傳道師)’와 ‘목사(牧師)’ 대신에 목회자가 평신도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한다는 의미로 ‘복음사(福音使)’와 ‘목사(牧使)’로 각각 불렸다.8)

1934년에 백남주는 매일 아침 2~3시가 되면 새벽기도를 한다는 명목 하에 여(女) 신학생 방에 들어가서 날이 밝도록 나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1934년 겨울에 백남주는 처녀와 새벽 3시에 눈길을 걸으며 천국결혼을 미리 연습하였다. 이런 일이 지나고 3~4개월 정도 될 즈음에 처녀는 임신을 하였다. 처녀 이름에 대해 혼선이 있는데 김인서는 처녀조필(處女助筆) ‘이필녀’9)라 하고, 민경배는 ‘김정일’10)이라고 하며 변종호는 성첩(聖妾) 김O숙(김정숙)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결혼 잔치를 미리 흉내 낸 것은 백남주가 첩살림을 정당화하려고 연극을 미리 한 것으로 추정된다.11)

1933년에는 유명화가 ‘삼성자(三聖者)’를 예언했지만 모두 빗나갔다. 한준명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지만, 딸을 출산하였고 백남주는 사생아를 낳았다. 이 천국결혼 잔치 사건으로 인해 백남주를 경계하는 세력들이 신학산에 생겨났다.12)어느 날 백남주는 가족기도회를 마친 후 부인 한인자에게 주님이 ‘부인을 괴로운 세상에서 불러내어 주님 곁으로 데리고 가서 영광의 생활을 해 주겠다’라고 하면서 ‘40일 금식기도를 부인에게 주님께서 지시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한인자는 극구 부인했으나 남편이 받은 주님의 말씀이므로 순종하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40일 금식기도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인 1934년 7월경에 죽게 된다. 그 뒤 2개월이 지난 9월경에 백남주는 처녀조필과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청첩장을 돌렸고 11월경에 딸이 태어났다.13)

이 사건을 지켜본 예수교회 교직자들은 천국결혼잔치 사건의 장본인인 백남주와 처녀조필을 치리하기로 결정하였다. 백남주는 『예수』지의 편집장과 원산(元山) 신학산(神學山)의 수도감(修道感) 자리를 사임하고 원산을 떠나게 된다. 이 때 따라나선 이가 있으니 초원 김백문이다. 당시 나이가 17세로 신앙의 어머니격인 김남조 여사의 소개로 신학산을 찾아와 백남주의 가르침을 받았다. 백남주가 떠난 후 한준명은 강신행사를 하지 않고, 예수교회에 있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다. 그리고 귀국한 후 1950년대 까지 원산 예수교회를 책임지고 있다가 중앙신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한 다음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강신녀(降神女) 유명화는 1935년 6월 이전에 장로교회로 귀의하게 되고, 6.25 전쟁 뒤에 서울에 이주하여 살다가 1970년대에 사망하였다는 주장이 있다.14)
----------- 미주 -----------
1) 유명화는 감리교회 평신도였고 신앙동지들과 가정 기도회에서 예수 강신 현상으로 보여지는 증세를 1927년무렵부터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즉 유명화 자신에게 예수가 지피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상당수의 신앙동지들이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현상에 대해 무의식 상태에 들어감, 입신 상태 중에 모든 말씀이 모두 주께서 친히 나타나심이라 함(최중현,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p. 62)
2) 정동섭 외, 『한국의 종교단체 실태조사연구』, p. 18.
3) 민경배, 『韓國民族敎會形成史論』(서울 :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4), p. 148에서 각주 130번 참조.
4) 최중현,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pp. 63-65.
5) 상게서, p. 66.
6) 최중현,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pp. 67-71. 변종호 편,『이용도 목사 연구 40년: 이용도 목사 전집 제4권』, p. 165에서 『새 생명의 길』이 백남주의 저서이며 성간(聖姦)을 통해서만 새 생명의 길을 얻는다고 밝히고 있다.
7) 최중현,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pp. 72-75.
8) 최중현,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pp. 75-81.
9) 상게서, p. 83 재인용.
10) 민경배, 『韓國民族敎會形成史論』(서울 :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4), p. 154.
11) 변종호 편, 『이용도 목사 연구 40년: 이용도 목사 전집 제4권』, pp. 163-165.
12) 최중현,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pp. 83-85.
13) 변종호 편, 『이용도 목사 연구 40년: 이용도 목사 전집 제4권』, p. 163-164.
14) 최중현,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pp. 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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