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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의 '제네바의 학살자' 칼뱅 혐오에 대한 반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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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의 '제네바의 학살자' 칼뱅 혐오에 대한 반증
  • 정윤석 기자
  • 승인 2021.01.2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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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가 달린 기사 원문을 보실 분들은 첨부 파일을 다운 받아서 보세요. 인터넷 기사의 경우 미주를 첨부하는 게 매우 번잡스런 일이어서 생략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미지 디자인은 최주호 형제님이 도와 주셨습니다. 

Ⅰ. 서론

‘칼뱅 혐오’가 그치지 않고 있다.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칼뱅’이란 단어를 치면 어떤 글이 뜰까? ‘살인자 장 칼뱅’이라는 섬뜩한 제목들이 적잖이 눈에 띈다. 블로그, 카페는 물론 언론사의 글 중에도 유사한 내용들이 등장한다. 전 국민의 90%가 이용한다는 유튜브에서도 발견된다. 칼뱅 관련 최대 조회 수를 기록한 영상은 칼뱅과 관련한 건강한 신앙과 신학을 설명한 영상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알면 까무러칠 영상’(John Calvin Killer)이라는 제목으로 칼뱅이 제네바에서 확인된 사람만 58명의 살인을 집행한 만행을 저지른 악마처럼 그려낸 영상이다. 이 영상은 330만명이 시청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한국사회 최대 이단·사이비 단체인 신천지에 의해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신천지측은 유튜브 공식 채널에서 ‘신천지, 칼빈 장로교의 씨’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칼뱅이 제네바의 살인마라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신천지는 이를 단편 드라마로 제작해서 배포하기까지 했다. ‘예수교와 칼빈교, 그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그들은 칼뱅이 제네바에서 온갖 고문으로 시민들을 학살한 것처럼 비난했다. 칼뱅이 죽인 수가 공식적으로는 58명이고 확인되지 않은 수는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 신천지 신도가 운영하는 ‘천지일보’에는 ‘마녀 사냥꾼 칼빈이 낳은 장로교, 제네바 살인 한국서도 재현’이란 자극적 제목으로 칼뱅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기사를 올려 놓았다.

칼뱅 혐오의 자료와 목소리는 높아지는데, 정작 이에 대한 반증 영상이나 글들은 노출이 적지 않게 되는 실정이다. 과연 칼뱅은 살인자인지, 아니면 출처불명의 자료들로 종교개혁자 칼뱅을 음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 역사적 자료와 다양한 사료를 통해 반박하고자 한다.

칼뱅에 대한 혐오·비난 영상과 글들은 공식 언론사는 물론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사이비단체, 출처·소속 불명의 인물과 단체들에 의해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그 다양한 단체들의 주장을 모두 다루지 못하고 신천지에 한정해서 다룬다. 한국사회 최대 이단사이비 조직인데다 현 시점 가장 활발하게 칼뱅 혐오에 대한 정보를 확대·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로 인터넷 언론사 기사(특히 신천지측 언론인 천지일보), 유튜브 채널 -특히 칼뱅 혐오 영상을 단편 드라마로까지 제작해 올려 놓은 상태이다 - 블로그나 카페 등을 통해 칼뱅 살인자라는 악성 댓글같은 뉴스를 퍼뜨리고 있다. 다만 이들의 흑색선전 자료가 주로 인터넷을 통해 활발하게 퍼져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공식 문건이나 책자보다는 그들이 활용하는 매체를 1차 자료로 삼았다. 또한 신천지는 칼뱅은 제네바의 학살자라는 비판을 넘어 장로교는 칼뱅이 시초이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장로교인들이 만들었다며 장로교와 한기총을 폄하하는 내용으로 발전시켜가는데 장로교나 한기총과 관련한 폄하에 대해서는 별도의 반증을 하지 않고 ‘칼뱅의 제네바의 학살자’라는 비판에 한정해서만 반증하겠다.

신천지의 칼뱅 혐오 관련 뉴스에 대한 반박 자료들은 칼뱅이 제네바에서 어떤 위상을 가졌는지 보여 주는 칼뱅과 관련한 전기, 교회사 관련 자료, 칼뱅과 관련한 학위 논문, 칼뱅 이후 시대 그가 미친 정치·경제·사회적 영향 등과 그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반론을 펼칠 것이다.

“나치의 선전장관이자 역사상 가장 유능했던 선동가로 알려진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945)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에는 사람들은 이미 선동되어 있다.’”

이미 ‘칼뱅 제네바의 학살자’라는 혐오 뉴스는 대중의 마음에 각인됐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기보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게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어떤 반론이 제기돼도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방어막을 치고 진실한 사실보다는 혐오와 반감을 부추기는 정보를 자신의 신념으로까지 구축한 상태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논문을 쓰는 이유는 칼뱅이 살인자라는,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억압했던 ‘민주주의’와 ‘자유’의 대적자이자 독재자라는 선동에 사로잡혀 그의 신학사상을 바탕으로 세운 장로교에 심각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오해가 조금이라도 불식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한 이런 선동에 동요할 수도 있는, 아직 칼뱅에 대해 잘 모르는, 그러나 반드시 알게 될 다음 세대를 위해서 꼭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해서이다. 칼뱅이 제네바의 학살자가 아니라는 이미 역사적으로 합의된 사실에 대해 다시 반증하고 반론을 펼쳐야 하는 수고가 앞으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Ⅱ. 본론

1. 칼뱅 혐오 뉴스 확대 재생산하는 신천지

칼뱅이 제네바의 학살자라는 내용은 신천지측 신문인 천지일보,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의 유튜브 공식 채널, 신천지 관련 채널 HMBC에 지속적으로 올라갔다. 차례로 살펴보겠다.

1-1. 천지일보

신천지 신도가 발행·편집인으로 있는 천지일보 2020년 3월 1일에 기사가 하나 올라갔다. 제목은 [‘마녀 사냥꾼’ 칼빈이 낳은 장로교, 제네바 ‘살인’ 한국서도 재현]이다. 화형당하는 사람의 그림을 기사 가장 상단에 올리고 출처를 위키백과라고 밝힌 사진 설명을 달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절대예정론’을 주장했던 칼빈은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국을 장악, 막강한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가톨릭을 능가하는 잔인한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자행했다. 그는 자신이 정한 교리에 동조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아 사형시켰다.”

“역사적으로 보면 칼빈은 ··· 혹독한 정치와 이단 정죄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20여 년 동안 독재 권력을 휘둘렀던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한 예로 칼빈은 자신의 교리를 믿지 않던 수많은 사람을 ‘마녀’라는 죄목으로 화형 시켜 죽이는 등 잔혹한 고문과 처형을 일삼았다.” “제네바에서 칼빈이 사형시킨 공식 사형 인원만 해도 58명이며 추방한 인원도 76명”, “‘유럽의 마녀사냥’의 저자 브라이언 레벡(Brian P. Levack)에 의하면 ‘칼빈사상이 지배하던 스위스에서는 8800명 이상의 여성이 마녀로 재판을 받고 5000명 이상이 처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기사화했다.

계속해서 이지솔은 “한국교계는 칼뱅을 대단한 신학자라고 평가하지만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예외적 현상이다”, “후대 기독교 역사철학자들은 그를 ‘최악의 기독교인’이라 평가하고 있다. 시대가 흐를수록 후자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썼다.

1-2.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의 공식 유튜브 채널)

‘신천지, 칼빈 장로교의 씨’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칼빈은 제네바에서 권세를 잡은 후 자기의 교리를 믿지 않는 자들을 학살했고 아이들까지 죽였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다. 이것이 강제 개종 살인교이다.”라고 맹비난을 했다.

1-3. HMBC(신천지측 단막극 드라마 등을 제작해서 송출하는 유튜브 채널)

신천지측은 2017년 1월 23일 HMBC에 30분짜리 단편드라마 ‘예수교와 칼빈교, 그 진실은 무엇인가’를 올렸다. 6분경부터 칼뱅이 저지른 일이라며 끔찍한 영상과 자막을 깔아서 방영했다. 내용은 천지일보의 이지솔의 기사와 유사하다. 하지만 영상과 그림으로 칼뱅의 만행을 그려서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 실제적이다(그림 1 참고). 내용은 “칼빈-스위스 제네바 종교국 장악 통치(4년간) 장로교리와 장로교를 창시한자”, “예정론 반박 꼬챙이로 창자를 찔러 죽임”, “세례주기 거부 여섯아이와 어머니와 그 할머니 죽임”, “서로 다퉜다며 가죽 벗겨 죽임”, “임산부 죽임”, “제네바에서 공식적 58명 죽였고 비공개된 수는 상상할 수 없다”, “제네바의 살인자 칼빈, 그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라 한다”, “장로교는 2천년전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5백년에 불과한 칼빈 사상을 가르치는 칼빈교이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라도 사랑하며 서로 용서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도리어 축복하고 기도하라 말씀해주셨는데도 칼빈은 그 예수님의 가르침을 증거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을 핍박하고 정죄하며 살인까지 하였으니 칼빈의 가르침은 교리적으로 보나 행위로 보나 하나님의 참된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닌 거짓된 가르침(이다)”

천지일보, 신천지 공식 유튜브 채널 등에서 신천지는 종교개혁자 칼뱅에 대해 제네바의 살인자·학살자라는 콘셉트를 갖고 칼뱅 혐오를 부추기는 중이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국을 장악, 막강한 정치권력을 등에 업었다.

둘째, 칼뱅은 혹독한 정치와 이단 정죄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20여 년 동안 독재 권력을 휘두르고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자행해 악명이 높았다.

① 수많은 사람을 ‘마녀’라는 죄목으로 화형시켜 죽였다.

② 잔혹한 고문과 처형을 일삼았다.

③ 제네바에서 칼빈이 사형시킨 공식 사형 인원만 해도 58명이었다

④ 예정론 반박 꼬챙이로 창자를 찔러 죽임

⑤ 세례주기 거부 여섯아이와 어머니와 그 할머니 죽임

⑥ 서로 다퉜다며 가죽 벗겨 죽임

⑦ 임산부 죽임

⑧ ‘유럽의 마녀사냥’의 저자 브라이언 레벡(Brian P. Levack)에 의하면 ‘칼빈사상이 지배하던 스위스에서는 8800명 이상의 여성이 마녀로 재판을 받고 5000명 이상이 처형됐다’

셋째, 한국교계는 칼뱅을 대단한 신학자라고 평가하지만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예외적 현상이다. 후대 기독교 역사철학자들은 그를 ‘최악의 기독교인’이라 평가하고 있다.

신천지의 주장이 만일 사실이라면 칼뱅은 악마의 화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과연 이들의 주장은 사실일까? 반증할 내용이 상당수이긴 하지만 신천지의 주장 중 칼뱅이 제네바에서 활동할 때부터 사망할 시기까지 과연 신천지측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인지를 반증해 보겠다.

2. 칼뱅 혐오 확대·재생산하는 신천지에 대한 반증

칼뱅을 악마시까지하는 신천지측의 혐오 뉴스에 반증하기 전에 가장 먼저 유념해야 할 게 있다. ‘칼뱅 학살자’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관한 팩트 체크를 통해 검증해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적 인물과 그와 관련한 사건의 정확한 사실성 여부, 그것도 다른 문제도 아닌 제네바에서 만행과 폭정을 저지르며 학살과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냐, 아니냐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이는 감정이나 선입견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 여부로 판단해야 한다.

2-1.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국을 장악하고 정치 권력을 등에 업은 독재 권력자였나?

신천지측이 칼뱅과 관련 가장 먼저 주장하는 것이 칼뱅이 20여년 동안 제네바에서 막강한 정치 권력을 등에 업고 종교국을 장악,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는 주장이다. 이 전제를 갖고 시작하는 이유는 살인·학살 등 온갖 만행이 가능하려면 칼뱅이 제네바의 막강한 독재자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내용부터 우선 확인하면 된다. 먼저 제네바에서 칼뱅은 독재자였는지부터 살펴보겠다. 그 다음 종교국을 장악한 것도 사실인지, 막강한 정치 권력을 등에 업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인해보겠다.

2-1-1. 칼뱅은 제네바의 독재자가 아니었다.

1) 칼뱅은 제네바에서 이방인·난민으로 일평생을 살았다.

칼뱅은 프랑스의 누아용에서 1509년 출생했다. 1523년에는 파리에서 철학과 논리학, 라틴어를 수학했고 20대 초반까지 법학을 공부했다. 1533년 그의 모든 것이 변했다. 그는 회심하며 근본적으로 충성의 대상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뀌었다고 강조했다. 칼뱅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제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당신의 길을 따르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일로 삼았나이다.” 평생을 개인 집필을 하며 조용히 살고자 했던 칼뱅은 파렐의 설득 받아 1536년부터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합류하게 된다.

2) 칼뱅은 1536년 파렐과 함께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펼쳤으나 제네바소의회의 반발을 사서 1539년 추방, 스트라스브루로 이주해 2년 동안 지낸다.

3) 1541년 재입성 이후 18년 동안 제네바의 시민권이 없는 소위 ‘난민’으로 살아가다 1559년이 돼서야 비로소 제네바 시민권을 얻는다. 그마저도 공직에는 나설 수 없는, 선거권 없는 2등 시민권이었다. 그리고 불과 5년 후인 1564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일생의 대부분을 제네바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갔던 그에게 제네바의 독재자라는 별칭은 어울릴 수가 없다.

2-1-2. 칼뱅은 막강한 정치 권력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1) “제네바라는 도시는 칼빈 이전에 이미 상당히 독립된 공동체로 발전해 있었다. 이런 데 대한 제네바 시민들의 자부심과 충성심은 종교개혁이라고 해도 전혀 깨뜨릴 수 없었다. 상당히 발전된 사회 체제는 칼빈 이전의 제네바 시민들이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심지어 칼빈의 반대파 지도자들마저도 그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게다가 제네바는 칼뱅 이전부터 독재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의회’를 통해 주요 결정을 하는 도시국가였다.

2) 칼뱅이 제네바에 있기 전부터 제네바는 ‘소의회’를 통해 도시의 주요 사항을 결정했다. 칼뱅이 제네바에 간 것은 1536년이었다. 그 전부터 제네바는 도시 행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를 ‘소의회’라고 불렀다. 제네바 소의회는 20명의 의원, 4명의 행정장관, 200인 의회와 함께 투표를 통해 제네바시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제네바소의회는 종교개혁 이후에는 콩시스투아르(치리회)를 통해 목회자를 고용하고 해고하는 역할에 일부 가담했다. 소의회가 엄연히 존재하는 도시 국가에서 목회자인 칼뱅의 독재적 권력은 불가능했기에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칼빈 당시 제네바의 소의회 의원들은 모두가 제네바 본토박이 사람들로 시민권을 사서 시민이 된 사람들의 자손들이었다고 말하는 게 중요하다. ··· 제네바에서는 이민자들은 모든 관리직을 가질 수 있었고, 또 1559년까지는 그 직책에 선출되었으나, 소의회는 그들에게 닫힌 상태로 두었다. ···제네바의 소의회 의원들은 생활에 깊이 뿌리박고, 열심히 일하였으나,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목사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 없었고, 법률적, 혹은 신학적 정교함에 참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3) 이처럼 칼뱅은 막강한 정치 권력, 즉 소의회의 권력을 등에 업은 사람이 아니었다. 소의회에 속한 주요 위원 중에는 칼뱅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대적자로 살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칼뱅이 1541년 귀환하는 것도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심하게는 로마 교황보다 칼뱅을 더 미워했으며 그를 모욕하고 위협했다. 칼뱅에게 ‘가인’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거리의 개들에게 그의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다. 칼뱅이 강의실에 가는 도중에 모욕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의 침실 앞에 50발의 총알을 쏘기도 했다. 설교단에 있는 그를 위협하고 성찬상에 달려 들어 그의 손에서 성물들을 빼앗으려고도 하였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죽는 날까지 절대권력이나 정치적 안정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이렇게 살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제네바 시민들의 자유분방한 삶과도 관계가 있었다.

4) 칼뱅과 정치적·종교적 갈등 관계를 가진 이들은 자유를 넘어 방종을 즐겼다. 하지만 칼뱅은 그들에게 경건하고 교양있는 삶을 요구했고 이를 큰 짐으로 여긴 그들은 칼뱅을 몹시 적대했다. 칼뱅의 대적자들을 교회사학자 필립샤프는 두 종류로 설명한다. 하나는 애국파 또는 ‘제네바의 아이들’로 불렸는데 이들은 정치적인 근거에서 칼뱅을 반대했다. 이들은 정치적 유력자이자 부르주아들로서 파브리, 페랭, 방델, 베르텔리에르, 아모 등이 속했다. 이들은 개인적인 자유와 오락을 침해하는 모든 조처에 저항했고, 특히 칼뱅이 외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싫어했다. 자신의 사생활과 이혼 앞에 걸림돌을 놓았던 칼뱅을 적대시하며 등을 돌린 아미 페랭이 1549년 행정장관이 되며 제네바시의 유력자가 된다. 칼뱅의 험난한 도시 생활을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다른 부류는 리버틴으로 불리는 자들로서 칼뱅의 엄격한 치리에 극단적으로 반대하며 ‘자유 성령의 형제 자매단’이란 이름을 활동하며 반율법주의 혹은 도덕률 폐기론적인 교리들을 부활시킨 이들이다. 이들은 교회로부터뿐만 아니라 도덕률로부터도 해방되고자 했다. 심지어 리버틴들은 재물과 여성들을 공유하라고 가르쳤고 영적인 결혼을 법적인 결혼보다 더 우위에 놓았다. 이들은 성경을 죽은 문자라고 하면서 거부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망상에 맞추기 위해 엉뚱한 풍유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각각 정치적·종교적 이유에서 이 둘은 칼뱅과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이처럼 칼뱅의 일생은 절대 독재권력자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고 대적자들과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평생을 살다갔다.

2-1-3. 칼뱅은 제네바의 종교국을 장악하지 않았다.

신천지측은 칼뱅이 제네바의 ‘종교국’을 장악하고 정치 권력을 등에 업고 절대적 독재권력을 휘두른 것처럼 주장한다. 그런데 과연 종교국이란 어떤 곳이었을까? 아니 그전에 종교국이라는 곳이 제네바에 있었을까? 우선 제네바에 종교국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카스텔리오나 츠바이크라는 사람의 글을 인용, 종교국의 기능을 마치 제네바 시민들의 모든 생활을 감시하는 나치의 게슈타포와 같은 경찰 조직으로 이해하고 설명함을 볼 수 있다. 종교국을 장악한 칼뱅이 비밀경찰이 돼서 사람들을 감시하고 그 결과로 그들을 투옥하고 각종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사형까지 집행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신천지도 다르지 않다.

1) 카스텔로(이하 카스텔리오)와 츠바이크의 ‘칼뱅 종교국 장악’ 주장은 역사왜곡이다.

‘칼뱅 종교국 장악’ 주장을 한 카스텔리오와 츠바이크에 대해서는 뒤에서 별도로 정리하겠다. 우선 ‘종교국’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진술하겠다. 칼뱅의 제네바에서 게슈타포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다. 이는 정치적으로 입지가 약한 칼뱅으로서 더욱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칼뱅의 제네바에서의 주요 사역은 4가지였다. 첫째, 목회자들의 성경 토론 모임인 제네바 목사회의 사회자였다. 둘째, 목회자·시민 교육기관인 제네바 아카데미 개설이었다. 1559년 이 아카데미가 개설되자 유럽 전역에서 몰려온 학생들을 교육했고 이들은 다시 전 유럽의 지도자로 내보내는 명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셋째, 사회복지기관인 종합구빈원이었다. 이 기관은 피난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칼뱅의 제네바 이주 이전부터 설립된 기구였다. 하지만 칼뱅은 구제와 관련한 성경적 근거를 마련해 구제 사역을 더욱 탄탄하게 세워갔다. 넷째,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시로 만들기 위한, 즉 경건하고 거룩한 시민들이 되도록 질서를 지키도록 감독하고 교육하고 다스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제네바 치리회를 만들었다. 이 치리회의 구성은 12명의 평신도와 12명의 목회자로 이뤄졌다. 평신도들은 소의회에서 2명, 60인 의회에서 4명, 200인 의회에서 6명을 선출했다. 의장은 제네바의 행정장관이 맡았다. 물론 칼뱅의 지성과 판단력이 이 소의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그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정치적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2) 칼뱅이 세운 제네바치리회는 사법권이 없었다.

칼뱅 학살자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종교국으로 설명한 기관이 제네바에 존재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제네바치리회를 두고 한 설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치리회는 제네바시민들이 만일 부도덕한 행위를 할 경우 최고 ‘수찬정지’를 할 수 있는 역할만을 할 수 있었다. 이곳은 오로지 영적인 의미의 처벌만 할 수 있었고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처벌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런 것들은 전적으로 시의회에 속한 권한이었다. 치리회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처벌은 출교였다.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제네바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신정국가, 종교와 국가가 일치하는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권력이 분리된 통치체제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몬터는 “제네바는 참으로 신권 정치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는 제네바가 성직자에 의해 통치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제네바가 이론적으로는 영속권력과 세속권력의 균형을 통해 말하자면 서로 화합하여 활동하고 있는 성직자와 시당국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리한다.

이처럼 제네바치리회는 기소하고 재판하는 검찰이나 법원과 같은 역할을 한 곳이 아니었다. 그 역할은 제네바 소의회가 담당했다. 제네바소의회가 한 일은 외교·재판(사형선고와 집행·민사사건)·조폐국 운영 등 국가 주권의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행정과 공공활동을 관장하고 감시했다. 일상 통치에서 치리회가 부담한 몫은 흔히 생각되었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

지금까지 칼뱅이 제네바의 학살자라는 주장 중 칼뱅이 종교국 장악과 정치 권력을 등에 업은 독재자 설이 역사적으로 근거를 찾기가 어려운 허위·과장이라는 점을 진술했다. 그렇다면 이제 ‘칼뱅 제네바 학살자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신천지측이 무엇을 주장했는지, 다음으로 실제로 그런 주장을 하는 일이 제네바에서 일어났는지, 마지막으로 주장의 근거는 어디서 왔는지를 차례로 확인해겠다.

2-2. 신천지측이 언급하는 제네바에서의 학살은 실제로 일어났으며 그것은 모두 칼뱅의 책임인가?

신천지측이 ‘칼뱅 학살자’설의 근거로 제시하는 항목들은 사실 도저히 인간이라면 하기 어려운 일로 보인다. 그러나 신천지측은 단순명료하게 ‘칼뱅은 제네바의 살인마였다’는 식으로 그런 일들이 모두 칼뱅의 주도하에 발생한 일인 것처럼 폭로한다. 이에 대해 반증하기 전에 먼저 전제해야 할 게 있다. ‘칼뱅은 제네바의 학살자였다!’라는 말 한마디로 칼뱅을 매도하는 선동에 그리스도인들이 부화뇌동해선 안 된다. 학살자가 뭔지, 살인마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칼뱅을 역사 속 중대 범죄자인 히틀러나 현대판 연쇄 살인범들에게나 쓸 수 있는 동일한 단어를 갖다 붙인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면에 숨은 악한 의도를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칼뱅이라는 인물이 갖는 시대적·역사적·신학적 의미와 중요함을 딱 한 문장으로 파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칼뱅은 제네바의 살인마였다’는 말일 것이다. 그 문장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선동하는 이들이 얻어내려는 반대급부가 무엇인지도 우리는 간파해 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시대의 자녀들’이다. 역사가 필립 샤프는 “우리는 그를 그 자신의 시대 기준에 따라 판단해야지, 우리 시대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종교개혁 시대의 잔혹한 법률들은 마술, 이단, 그리고 신성모독과 관련한 것으로서 중세에서 유전돼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불문하고 17세기 말까지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서 계속해서 강제력을 지녔다. 종교적 관용은 현대적인 덕목일 뿐이다”고 설명한다.

그 시대의 한계속에서, 또 그 시대의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할 일마저도 현대적 시각에서 가장 추악한 범죄처럼 매도하는 것은 아주 나쁜 역사해석 방식이다. 칼뱅도 16세기 제네바라는 인간적·정치적·역사적 한계 속에서 살았던 인물임을 상기하고 이 문제를 풀어가는 게 역사에 접근하는 정직한 길이라는 것을 제언한다. 이 전제를 갖고 이제 신천지측에서 주장하는 끔찍한 만행들이 과연 제네바에서 일어났는지 팩트체크부터 해보자.

2-2-1. 신천지측에서 언급하는 끔찍한 만행들이 과연 제네바에서 일어났는가?

신천지측 언론과 유튜브 채널에서 제네바에서 칼뱅이 공식 사형시킨 인원만 해도 58명이었다고 폭로하고 58명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6가지로 나눠서 설명한다.

- 수많은 사람을 ‘마녀’라는 죄목으로 화형시켜 죽였다.

- 잔혹한 고문과 처형을 일삼았다.

- 예정론에 반박하는 자를 꼬챙이로 창자를 찔러 죽였다.

- 세례주기를 거부하자 여섯 아이의 어머니와 그 할머니를 죽였다.

- 서로 다퉜다며 가죽 벗겨 죽였다.

- 임산부를 죽였다.

신천지측 매체들은 브라이언 르박(혹은 브라이언 레박)의 글을 인용, 칼뱅 사상이 지배하던 스위스에서 8800명 이상의 여성이 마녀로 재판을 받고 5000명 이상이 처형됐다.고 주장한다.

전술했던 것처럼 칼뱅이 종교국을 장악한, 정치 권력을 등에 업은 독재자라는 전제는 완전히 잘못됐다는 점을 밝혔다. 그렇다면 그 잘못된 전제를 갖고 언급한 6가지 항목에 대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역사적 사실성에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한 도시 공화국의 학살자냐, 아니냐라는, 사자의 명예가 걸린 매우 중대한 문제다.

첫째, 이 폭로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 신천지측은 이 내용을 언급하며 출처를 정확히 표기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이 좋아하는(신천지는 성경을 육하원칙으로 밝혀준다고 늘 강조해왔다), 아니 기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육하원칙이 기사에는 빠져 있다. 칼뱅이 도대체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58명을 공식적으로 사형시켰다는 것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시점은 그냥 ‘칼뱅 당시’라는 말로 두루뭉수리 썼다. 그 이유도 ‘자신이 정한 교리에 동조하지 않으면’이라는 단서 한가지만 달았다. 따라서 신천지의 이 선동을 반증하기 위해서는 58명이 사형당했다는 원 출처를 직접 찾고 그들이 죽은 이유가 과연 ‘이단’ 문제였는지 역사적 사료를 살피며 구체적 반론까지 해야 하는 이중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신천지는 나치의 선동가 괴벨스의 기법을 아주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둘째, 칼뱅이 58명을 처형했다는 주장은 가짜 뉴스다. 신천지측의 주장의 원천을 찾다보면 처형당했다는 58명이라는 숫자는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발간된 갈리페(J.B.G. Galiffe)의 책 ‘Nouvells Pages d'histoire’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그는 칼뱅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던 기간 가운데 가장 평화로웠던 4, 5년 사이(1542년-1546년)에 58명이 사형당한 것을 세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시기에 남자가 30명, 여자가 28명 처형당했고, 13명이 교수형, 10명이 참수형, 5명은 시장에서 능지처참, 35명은 오른손이 절단된 후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다고 주장한다. 숫자도 맞지 않는데 잘못 표기한 게 아니라 그의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신천지측은 “칼빈이 사형시킨 공식 사형 인원만 해도 58명이며 추방한 인원도 76명이다”라고 기사화했는데 1542년부터 1546년은 칼뱅이 아닌 칼뱅의 반대파가 항상 정치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때다. 게다가 칼뱅은 제네바의 난민이었고 시민권은 1559년에야 비로소 받았다. 그는 제네바 시민이나 거주자를 처형할 수 있는 사법적 권한이 전혀 없었다. 사법권은 제네바시의회에 있었다. 이곳의 의장은 칼뱅도 아니었다. 따라서 칼뱅이 종교국을 장악하고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독재를 일삼았다는 전제를 갖고 58명을 처형했다는 진술은 전제 자체가 잘못됐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도 아니다.

셋째, 필립샤프의 교회사에서도 칼뱅을 ‘제네바의 학살자’라고 명명하지 않는다. 샤프는 ‘제네바에서의 치리 시행’ 항목에 “치리법원과 시의회는 그(칼뱅)에게 고무를 받아 부도덕을 바로잡으려는 청교도적인 열정을 경쟁적으로 표출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은 때때로 지혜와 중용을 벗어나기도 하였다.”고 쓰며 제네바에서 일어난 치리시행에 대해 서술한다. 물론 질책, 벌금형, 감옥형이 ‘때때로’, 가혹하게 실행됐음을 언급하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공평하게 실행이 되는지 총사령관의 아내이든, 칼뱅의 친구이든 엄격한 법적용을 받았다고 썼다. 그 법적용을 통해 사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샤프는 기록한다. 부모를 때린 한 소녀가 참수당했다. 한 은행가는 계속적인 간음으로 처형됐다. 마법을 부린다는 이유로 20여 명의 남녀가 화형당했다. 그루에(Gruet)는 반역과 무신론의 혐의로 참수 당했다.

비교적 구체적으로 제네바에서 사형당한 일부 사람들에 대해 서술한 샤프이지만 신천지의 선동처럼 58명의 사형 항목으로 △수많은 사람을 ‘마녀’라는 죄목으로 화형시켜 죽였다 △잔혹한 고문과 처형을 일삼았다 △예정론에 반박하는 자를 꼬챙이로 창자를 찔러 죽였다 △세례주기를 거부하자 여섯 아이의 어머니와 그 할머니를 죽였다 △서로 다퉜다며 가죽 벗겨 죽였다 △임산부를 죽였다는 내용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제네바에서 일어났다는 어떠한 암시조차 샤프의 글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나마 샤프의 기록마저도 진실성 여부에 의문이 제기된다. 샤프는 사형집행 기록을 Registers for April 27. 1546년이라고 남겼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요한은 제네바 치리회는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목요일에 모였는데 샤프가 기록한 날짜인 1546년 4월27일은 화요일이며 22일과 29일의 기록은 등장하지만 샤프가 쓴 해당 날짜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반박한다. 게다가 22일과 29일의 기록에도 한소녀의 참수와 간음으로 처형됐다는 은행가와 관련한 기록은 치리회에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치리회가 처형을 결정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넷째, 제네바에서 칼뱅은 사법권이 없었고 사형은 종교법이 아닌, ‘카롤리나 형법’에 의해 이뤄졌다. 중세 마녀 사냥 등을 중심주제로 연구한 윌리엄 몬터 또한 제네바 시의 58명 사형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다른 도시에 비해 제네바가 과도한 법집행을 한 것이 아니었으며 칼뱅의 시대, 제네바에서 사형선고를 당한 모든 범죄는 칼뱅에 의해서가 아니라 샤르르 5세 치하의 1532년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공포된 유명한 ‘카롤리나 형법’에 기초해서 사형을 당한 것이라고 진술한다. 그 법전에 기초, 사형에 처해도 좋다고 기술돼 있는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할 사람을 처형했다는 견해다.

다섯째, 칼뱅 시대 제네바에서 종교문제로 처형을 당한 사람은 ‘세르베투스’ 한 사람이라는 데는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한다(세르베투스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따라서 이단 문제로 마치 58명이 다른 사람도 아닌 칼뱅이라는 절대권력자에 의해 사형을 당한 것처럼 쓰고 그 사형의 여섯가지 항목을 적시해 마치 칼뱅의 전적인 책임인 것처럼 기록한 신천지측의 주장은 나치의 선동과도 같은 가짜뉴스일 뿐이다.

필자는 이제 신천지측이 ‘칼뱅의 제네바 학살자설’을 언급하며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고 지적했는데 그나마 신천지측의 주장에 인용된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2-2-2. ‘유럽의 마녀사냥’의 저자 브라이언 레벡(Brian P. Levack)은 신천지측의 주장처럼 “칼빈사상이 지배하던 스위스에서는 8800명 이상의 여성이 마녀로 재판을 받고 5000명 이상이 처형됐다”고 쓴 적이 있을까?

신천지측은 기사를 쓰면서 출처와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않았음은 이미 지적했다. 그나마 근거 자료로 제시한 서적이나 저자의 이름이 몇 명 등장한다. ‘유럽의 마녀사냥’의 저자 브라이언 레벡(이하 브라이언 르박)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나마 제시한 근거 자료도 왜곡해서 인용한 게 천지일보였다. 기사를 직접 인용해 보겠다.

“‘유럽의 마녀사냥’의 저자 브라이언 레벡에 의하면 ‘칼빈사상이 지배하던 스위스에서는 8800명 이상의 여성이 마녀로 재판을 받고 5000명 이상이 처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칼빈 추종자들이 저지른 ‘마녀사냥’까지 포함하면 피해자는 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다음과 같이 반증한다.

첫째, 천지일보는 브라이언 르박을 부정직하게 인용했다.

르박은 ‘유럽의 마녀사냥’에서 천지일보에서 인용한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의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천지일보측 기자가 출처를 제대로 표기하지 않아서 직접 르박의 저술과 기사에서 인용했을 만한 출처를 직접 찾았는데 원문에는 기사와는 다른 내용이 기록됐다.

“8,800명 이상의 마녀가 재판을 받고 5,000명 이상이 처형된 스위스에서는 상황이 더욱 복잡하다. 왜냐하면 스위스 연방은 종교적·문화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다양했기 때문이다. 각 주는 법적으로 자치를 누렸으며, 이는 마녀 사냥의 유형을 다양화시켰을 뿐 아니라, 통제 불능의 상태로 만들 수도 있었다.” - 원문에는 마녀사냥과 관련, ‘칼뱅’과 관련해서 언급한 내용이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스위스 연방은 ‘종교적···으로 다양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천지일보는 “칼빈사상이 지배하던” 스위스라고 기사화한 것이다.

둘째, 전술했듯이 르박의 원문 책자 그 어디에도 ‘칼빈 사상이 지배하던 스위스’라는 표현은 없다. 르박은 원문에서 오히려 “제네바는 역병으로 큰 소동을 겪기도 했지만 마녀사냥은 심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칼뱅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에 있던 제네바가 오히려 마녀사냥이 심하지 않았다는 게 원문인데, 천지일보측은 고의적인지, 아니면 원문을 확인도 하지 않았던 것인지 이 내용은 누락했다. 또한 르박은 “스코틀랜드에 널리 퍼진 칼뱅 사상은 마녀 사냥을 조장하지 않았으나 스코틀랜드의 성직자는 잉글랜드의 성직자보다 일반인의 신앙생활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썼다. 오히려 칼뱅의 사상이 마녀사냥을 조장하지 않았다며 선을 긋고 있는 게 르박인데 천지일보측은 전혀 반대의 소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셋째, 신천지측은 스위스를 칼뱅 사상이 지배했다고 썼는데 16세기 스위스는 칼뱅 사상만이 아니라 가톨릭을 따르는 도시들로 양분돼 있었다. 르박도 “스위스 연방은 종교적·문화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다양했(다)”고 서술한다. 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과 준회원국들인 비엘, 뮐루즈, 뇌샤텔, 제네바, 장크트갈렌 시는 개신교 그 외 스위스 연방 회원국들과 발레, 아펜첼(Appenzell), 이너로덴(inner Rhodes) 등은 가톨릭으로 남았다. 글라루스(Glarus)도 두 가지 종교가 있었다. 따라서 ‘칼뱅 사상이 지배하는 스위스’라고 통칭해서 칼뱅 사상의 영향으로 마치 마녀 사냥이 자행됐다고 쓴 천지일보는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넷째, 르박은 천지일보 기사와 달리 마녀사냥은 스위스에 한정한 문제가 아니라 유럽 전체적인 문제였고, 당시 유럽의 세계관을 지배했던 시대적 현상이었음을 제시한다. 선동적으로 칼뱅에게 그 책임을 몰아가는 관점은 르박에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가 밝힌 유럽의 마녀 재판은 다음과 같다.

덴마크의 경우 1547년-1576년 이후 2천건의 마녀 재판이 있었고 1,000여 명이 처형됐다. 1668년-1676년 스웨덴 북부지방의 마녀 사냥에서 200명 이상이 처형됐다. 폴란드(소수의 프로테스탄트와 다수의 가톨릭이 공존)의 경우 1676년-1725년 사이 바라노프스키에 의하면 합법적으로 10,000명이 처형됐다. 과장된 수치이나 반만 생각해도 적지 않은 숫자다. 16말~18세기 중엽 사이 헝가리·트란실바니아·몰다비아·왈라키아의 마녀 사냥은 약 900건의 개별적인 마녀재판과 이 가운데 400여 명이 처형(대부분 화형)되었다. 스페인 특별 재판소 1580-1650년 사이에 각종 형태의 마술과 마녀술 혐의로 3,500명 이상의 사람을 재판했다. 독일 남서부 엘반겐 1611년-1618년 7년동안에만 400명을 처형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오스트리아가 처형한 수는 1,500명, 보헤미아는 1,000여명이었다. 프랑스의 로레인 지방에서는 니콜라스 레미가 1586-1595년 사이에만 800명 이상의 마녀를 처형했다. 그는 재직기간 동안 총 2,000여 명의 마녀를 처형했다. 룩셈부르크에서는 1606~1650년 사이에 355명이 처형되었으며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다른 지역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이처럼 마녀사냥은 다양한 국가, 종교, 문화, 역사의 배경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르박은 근대 초기까지 약 11만건의 재판에 6만건의 처형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산한다. 마녀관련 재판 건수는 독일 내에서 5만건, 폴란드에서 대략 1만5천건, 스위스에서 대략 9천건, 신성로마제국안의 여러 제후국과 프랑스 왕국에서 1만건, 영국에서 대략 5천건, 스칸디나비아 왕국에서 5천건, 헝가리·트란실바니아·몰다비아·왈라키아·러시아에서 4천건, 스페인과 지중해 연안 국 약 1만건이다.

다섯째, 유럽의 대규모 마녀사냥에 대해 역사학자 르박은 신천지처럼 ‘칼뱅은 제네바의 살인마다’라는 나치 선동식의 해석법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16세기 말에 대규모 마녀사냥이 일어난 결정적 요인에 대해 이 시기는 유럽 역사상 100년 동안 지속된 경제적 정치적 불안정 시대의 시발점이었다고 소개한다. 1550년-1650년 유럽은 계속적인 인플레이션, 상업적·농업으로의 전환, 일련의 기근(가장 심했던 시기는 1590년대였음), 교역의 쇠퇴, 그리고 생산성의 위기를 겪었다. 정치적 혼란은 반란, 내전, 종교전쟁, 심지어 혁명의 형태로도 나타났다. 게다가 16세기 초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이 퍼져 상상할 수 없는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현상은 가끔 마녀 고발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개인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처럼 역사학자 르박은 마녀사냥의 책임을 전혀 칼뱅에게 전가하지 않고 있다. 신천지측이 마녀사냥 전문학자 르박의 객관적인 연구결과를 왜곡해서라도 모든 책임을 칼뱅에서 쏟아붓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신천지측이 ‘칼뱅은 제네바의 학살자·살인마’라는 근거로 제시하는 인물들의 신뢰도를 알아본 뒤 다루기로 하겠다.

2-2-3. ‘칼뱅 제네바 학살자’ 주장의 원 출처들은 믿을만한가?

천지일보는 “개신교 내에서 반발이 큰 카스텔로의 글과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이라며 “칼빈은 자신을 비난한 사람을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혀를 잘렸고, 자녀에게 유아 세례 주기를 거부한 80세 노인과 그의 딸을 처형하기도 했다. 에스파냐의 의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세르베투스도 삼위일체론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다가 화형을 당했다. 주일예배에 불참하거나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면 가차 없이 투옥됐다. 감옥에서는 심한 고문이 이뤄졌고, 투옥되는 주민들은 고문을 두려워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빈번했다”고 썼다.

이 만행을 저질렀다는 주장이 카스텔리오와 츠바이크에 의해 제기됐다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신뢰도는 어느 정도일지를 정리해보겠다.

1)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1515-1563)

카스텔리오는 칼뱅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칼뱅의 평판을 터무니없이 깎아 내리고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지도록 나쁜 이미지와 헛소문에 휩싸이게 만든 사람이다. 그는 칼뱅의 예정론, 엄격한 치리, 사도신경에서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와 관련한 해석에 반기를 들었고 아가서의 정경성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칼뱅과의 관계가 틀어져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아마 칼뱅이 신천지측의 주장대로 제네바의 학살자였다면 카스텔리오는 추방이 아니라 화형을 당했을 사람이다. 아무튼 제네바에서 추방된 카스텔리오는 바젤로 갔으나 극심한 가난 속에서 유니테리언주의와 일부다처제를 찬성하는 견해를 내포하는 오키노의 ‘대화’를 번역한 일로 바젤시의회의 의혹을 자초했으며 1563년 두 명의 아내에게서 낳은 각기 네 아들과 네 딸을 남기고 48세의 나이로 극도의 가난 속에서 죽었다. 그가 죽자 부드럽기로 소문난 불링거는 ‘오키노의 위험한 책을 번역한 자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만족을 표할 정도였다고 한다.

문제는 이 카스텔리오를 옹호하며 칼뱅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오스트리아의 전기작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폭력에 대항한 양심: 칼빈에 맞선 카스텔리오’라는 책을 쓰면서 더욱 확산된다.

2) 스테판 츠바이크(1881~1942)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1881년 출생했다. 특히 영국의 L.스트레이치, 프랑스의 A.모루아와 함께 20세기의 3대 전기작가로 일컬어진다. 그는 ‘폭력에 대항한 양심: 칼빈에 맞선 카스텔리오’라는 책을 1936년, 칼뱅 사후 372년이 지나서 출판한다. 이 책에서 츠바이크는 쇠로 된 채찍을 휘두르면서 비정의 도시를 다스린 제네바의 독재자로 칼뱅을 묘사했다. 츠바이크는 칼뱅을 직접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임에도 그를 광기에 휩싸여 있던 모질고 혹독한 살인마요, 도무지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없는 금욕주의자로 채색했다. 그러나 이 책은 전기소설로서, 프랑스어로 1946년에 출판되자 Roland de Pury는 “칼빈을 공정하게 다루지 않고 있는 이 책은 지금까지 출판된 역사서 가운데서 그 어떤 책보다도 철저히 왜곡된 문서”라고 혹평하였다.

“츠바이크는 히틀러 통치하에서 가장 극심하게 저항하던 나라 오스트리아 출신이었으므로 외국인에게 독한 체형을 가했다는 칼빈의 생애에 대해 남달리 증오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짓밟고 자유와 평화를 빼앗아 가버린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에게서 발견되는 모든 부정적인 모습을 칼빈에 대입시킨 것이며, 근거없는 황당한 상상을 적어 놓은 것이다. 그는 실제로 우울증과 망명생활로 전전하는 동안 이 책과 비슷하게 루터에게 맞선 에라스무스를 높이는 책을 쓴 바 있고, 1942년 부인과 함께 자살하고 말았다.”

칼뱅에 대한 왜곡된 선입견은 아무런 역사적 고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츠바이크가 죽은 후 장 쇼레에 의해 발췌, 또다시 ‘독재자 칼빈’이라는 무시무시한 헛소문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그러나 칼뱅은 이미 설명했듯이 시민권도 없는 난민으로 거의 일평생을 제네바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츠바이크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 츠바이크가 참고했을 만한 갈리페(J.B.G. Galiffe)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음으로 생략하겠다.

역사적 고증이 부족한 내용들은 한국에서 ‘기독교죄악사’(조찬선. 평단문화사. 2000), ‘문화사’(이혜령 외 4명 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2004) 등의 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신천지측 신도들에 의해 네이버, 다음, 유튜브에 자극적인 제목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데 그 원전은 갈리페나 츠바이크에서 비롯된 것이다.

3) 제롬 볼섹(1520-1584): 파리 출신으로서 카르멜회의 수도사였으나 1545년경에 로마교회를 떠나 개신교로 개종했으며 1550년부터 제네바에 정착했다. 칼뱅의 예정론을 비판하며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위선자이자 거짓말쟁이이고, 범죄자들의 후원자이며, 사탄보다 더 악한 자라고 비난했다. 결국 볼섹은 파리로 추방당한다.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은 만일 칼뱅이 제네바의 살인마였다면 그에게 정면으로 대항한 볼섹이 과연 살아서 파리로 갈 수 있었을까라는 점이다. 칼뱅을 향한 개인적 적개심에 평생 사로잡혀 지내던 그는 1577년에 전체 26개 장을 중상모략하는 내용으로 가득채운 비방일색의 칼뱅의 전기 ‘제네바의 목사 장 칼뱅의 생애, 도덕, 인내, 그리고 죽음의 역사’를 발행한다. 이 책은 리용의 대주교에게 헌정했다.

4) 미카엘 세르베투스(1511~1553년)와 관련한 이야기들

칼뱅 시대 제네바에서 종교문제로 처형을 당한 사람은 ‘세르베투스’ 한 사람이라는 데는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한다. 이제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됐다. 세르베투스는 칼뱅의 냉혹함과 독재권력을 입증하는 사례로 가장 많이 제시되는 인물이다. 사람들은 이 책임을 칼뱅에게 돌린다. 그러나 전술했다시피 볼섹, 카스텔리오는 칼뱅에 대항했고 감정적으로 거의 원수가 된 인물임에도 추방을 당했지 사형을 당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칼뱅이 제네바의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세르베투스 화형은 무슨 연유에서 비롯됐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첫째, 교리적으로 세르베투스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를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고 정죄한 사람이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머리 셋 달린 케르베투스’, ‘악마의 삼신론’, ‘세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표현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인 오이콜람파디우스에게 끈질기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 종교개혁가는 세르베투스를 ‘삼위일체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오이콜람파디우스는 세르베투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시며 함께 영원하심을 고백하라’고 권고하면서 ‘그 고백을 하지 않으면 기독교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도 말하지만 죽는 날까지 세르베투스는 이를 거부한다. 세르베투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분은 아니고 인간 예수 안에 하나님이 특별하게 내재했으며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을 때에 신격화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존의 정통에 대해서 그것이 모두 잘못이라 주장하며 오직 자신만이 진정한 기독교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세르베투스는 점성술을 연구하다 파리 의회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둘째, 당시 주요 종교개혁가들은 모두 세르베투스에 대해 분노했다. 츠빙글리와 오이콜람파디우스는 미리부터 그를 비판했고 루터는 세르베투스의 책을 놓고 ‘끔찍하게 잘못된 책’, 스트라스부르의 부처는 ‘가장 유해한 책’이라며 심지어는 강단과 강의실에서 세르베투스가 능지처참을 당해야 마땅하다고까지 주장했다. 멜란히톤은 “그는 실로 명석하고 예리하지만 깊이가 없다. 뒤죽박죽된 상상들에 사로잡혀 있고 자신이 논의하고 있는 주제들에 대해서도 무르익지 않았다”(샤프 614)고 썼다. 칼뱅도 종교개혁자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오면 살려두지 않겠다’고 했다. 세르베투스도 칼뱅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당신이 가진 삼신론적인 관념은 머리가 셋달린 용의 환영이다. 용의 영, 짐승의 영, 거짓선지자들의 영, 이 세영들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당신의 신앙은 거짓이다. 당신은 세례를 통한 중생을 거부하고 사람들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막고 있다. 당신들에게 저주, 저주, 저주가 있기를.”

셋째,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서도 세르베투스에게 화형을 선고했다. 프랑스에서 한때 의사로 지냈던 세르베투스의 삼위일체론의 문제를 삼아 가톨릭당국은 세르베투스를 수사하고 1553년 4월 4일 체포한다. 이때 세르베투스가 탈옥했음에도 가톨릭은 재판을 계속해 ‘이단 교리를 퍼뜨리고 왕이 칙령을 어기고 왕의 감옥에서 탈출했다’는 죄목으로 화형 판결을 내린다. 탈옥 후 세르베투스는 제네바로 간다. 지금도 그가 왜 제네바로 갔는지는 미스테리로 남는다.

넷째, 세르베투스는 제네바 시의회에 의해 체포됐지만 칼뱅 반대파 시의회 의원들의 측면 지원을 받았다. 그는 생피에르 감옥에 갇혔지만 자기 돈으로 책을 사보기도 했고 종이와 잉크를 구입해서 글을 쓸 수도 있었다. 칼뱅은 그에게 교부들의 책을 빌려 주기도 했다. 제네바 시의회 의원들 중에는 그의 변호인을 자처했고 칼뱅 학살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아는바와는 다르게 고문도 당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553년은 칼뱅의 반대파에 섰던 사람들이 시의회를 장악해 칼뱅과의 대립은 극에 달했던 시절이다. 칼뱅 반대파들은 주로 세르베투스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일설에 따르면 시의회가 세르베투스의 칼뱅 공격을 측면지원하며 칼뱅을 다시 축출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미 1539년 칼뱅을 추방한 경험을 가진 시의회이기에 이는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칼뱅은 중요한 죄목을 포함 38개의 항목의 세르베투스 고소장을 작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세르베투스는 편지를 주고 받을 때 칼뱅을 저주했던 것처럼 8월31일~9월 3일 사이에 열린 재판에서도 능욕한다. 칼뱅을 향해 ‘범죄자, 살인자, 비열한 놈, 거짓말 쟁이, 어리석은 난쟁이, 마술사 시몬, 범죄적인 고발자’라고 한다. 9월 22일에는 세르베투스도 칼뱅을 고소하는 내용으로 시의회에 편지를 보낸다. 잘못된 신학을 가르쳐서 개신교 신앙과 제네바 당국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는 명목이었다. 당시 최고 권력가는 뻬렝. 세르베투스와 칼뱅의 갈등을 그대로 놓칠리 만무했다. 뻬렝은 세르베투스와 칼뱅의 갈등을 이용, 칼뱅을 정치적으로 무력화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싶어했다.

아마도 세르베투스가 감옥에 있지만 그가 살아나가는 것은 어쩌면 칼뱅의 인생을 걸고 막아야 할 정치적 이유도 필요했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세르베투스가 방면돼 그를 지지하는 시의회를 등에 업고 칼뱅을 압박할 경우 그는 다시 추방당할 가능성도 없지 않은 때였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뿌리를 내리고 다음 세대까지 성공적으로 안착하느냐 아니면 수포로 돌아가느냐의 어쩌면 역사를 건 절체절명의 결단과도 무관치 않다.

다섯째, 세르베투스와 관련 제네바는 다른 도시공화국의 의견을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변은 ‘제거해 달라’는 동일한 요청이었다. 베른, 취리히, 샤프하우젠, 바젤의 시의회와 목사들의 회신은 한마디로 ‘이 해악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세르베투스가 만일 베른에서 잡혔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화형을 당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여섯째, 1553년 제네바의 근거 법률에 따르면 세르베투스의 사형은 당연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헌법을 따라 법집행을 하는 게 당연하듯 당시 스위스에서 사용하고 있었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라고 규정하고 있었다(유스티니아누스법전 1권1.1, 1권5). 또한 스위스 도시 국가들에 통용되었던 카를 5세의 법률 106조에서도 신성 모독자의 신체, 생명 혹은 그 일부를 엄하게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지금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16세기의 일반적 관점에서는 삼위일체를 ‘지옥의 문지기 개’라고까지 매도한 세르베투스의 사형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10월 26일 진행한 소의회 재판에서 세르베투스의 화형이 가결된다. 잔혹한 화형 대신 참형을 해 달라는 칼뱅의 건의는 묵살당한다.

세르베투스의 화형에서의 칼뱅의 역할과 책임은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주장과 의견을 낸다. 그 판단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르베투스 재판에서 칼뱅의 역할을 자문과 조언이었다는 점, 극형을 면해주자는 칼뱅의 건의를 묵살하고 화형을 언도하고 집행한 것은 시의회였다는 점, 그리고 이단자의 화형이 지금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대에는 법적으로도 사회 통념상으로도 문제가 없는 결정이었다는 점이다.”

종교개혁 역사와 신학 분야 연구의 세계적 석학 빌렘판 엇 스페이커르는 “세르베투스가 화형대에서 죽은 것은 칼빈의 권위 탓으로 돌릴 수 없다. 그것은 기독교신앙의 근본과 기독교사회 자체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 시정부가 지녔던 생각의 결과였다”고 평한다.

2-3. 신천지측의 “한국교계는 칼뱅을 대단한 신학자라고 평가하지만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예외적 현상이다. 후대 기독교 역사철학자들은 그를 ‘최악의 기독교인’이라 평가하고 있다”는 건 사실인가?

지금까지 ‘칼뱅의 제네바 학살자설’에 근거한다면 얼마든지 칼뱅은 최악의 기독교인을 너머 히틀러 같은 전체주의의 독재자와 같은 사람으로도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신천지의 평가는 완전히 잘못됐다. 칼뱅은 칼뱅의 시대뿐 아니라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칼뱅의 신학과 저작뿐 아니라 그의 올곧은 삶과 경건에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1) 테오도르 베자(1519-1605)

칼뱅의 제자이자 동료이자 후계자이다. 그는 칼뱅이 죽자 ‘파렌탈리아’(아버지의 장례식에 드리는 글)을 바쳤다.

“존경하는 칼빈이 먼지로 돌아가나니 그에게서 덕을 배울지라. 퇴락하는 로마가 가장 두려워 할 그가 이제 선인들의 통곡 속에 숨졌도다. 비열한 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인 그가 너무나도 초라하고 조그만 무덤 속에 누워 있구나. 이름도 씌어지지 않은 채로, 겸손이 항상 칼빈과 함께 있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와 동행하였고, 그가 죽은 지금도 그와 함께 묻혔구나. 이처럼 은혜로운 자가 묻힌 무덤이여, 행복하여라. 그 유해 위를 덮고 있는 대리석이 부럽도다!”

“지난해 우리는 그를 잃었습니다. 그의 수고를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입은 손실이 어느 정도인지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회의와 강의와 저작에 있어서 어느 누가 그와 견줄 수 있겠습니까? 진정 어느 누가 그보다 더 간결하면서도 확고하게 가르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기꺼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였고, 부드럽게 위로하였으며 정당하게 잘못을 논박하였던 것입니다. ··· 칼뱅에게 특별히 감사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판단도 함부로 내리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2)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

개인 저술을 하며 살고 싶어 했던 칼뱅을 설득해 제네바에서 개혁을 시작하도록 자극한 인물.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는 칼뱅과 관련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러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고 그의 뜻과는 달리 그를 제네바에 붙잡아 둘 수 있도록 나에게 넘치도록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네. 그는 제네바에서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역을 받을면서 성과를 거두었다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는 자신의 의지를 희생하여 우리가 그에게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이루었다네.”

3) 교황 비오 4세(1559-1565).

루터보다 칼빈을 더 위험한 인물로 보며 이단시했던 가톨릭의 교황조차 헌사를 바쳤다.

“이 이단자의 장점은 물욕이 전혀 없는 사람이란 것이다. 만약 나에게도 그와 같은 봉사자가 있었다면 나의 지배력이 바다에서 바다 끝까지 미칠 것이다.”

대적자들조차 칼뱅에 대해 ‘물욕이 전혀 없다’고 평가했는데, 그가 남긴 재산은 다음과 같았다.

“1564년 5월 27일 저녁 8시와 9시 사이에, 그는 평화롭게 잠들었다. 칼빈이 노년기에 거의 아들처럼 생각했던 베자는 ‘그날 해질 무렵, 하나님의 교회를 지도하기 위해 세상에 있었던 가장 밝은 빛이 하늘로 돌아갔다’고 기록했다. 그의 유언장에 언급된 전체 유산은 그의 귀중한 책을 다 포함해 이백 에꾸스가 채 안되는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은 재산이지만, 미국 달러로 약 2천불 정도로 추정되는 유산은 동생 앙뚜완과 그의 자녀들에게 물려 주었다. 그러나 학교와 가난한 외부에서 온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그의 요청에 따라서 다음 날 오후 2시, 거창한 장례식도 없이, 비석을 세우거나 화려한 치장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시민들 전부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지금도 칼뱅의 무덤은 찾을 수가 없다.

4) 존 녹스(1514~1572).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이자 역사가 존 녹스는 칼뱅의 제네바와 관련 다음과 같이 평했다.

“제가 아무런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없이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곳이 ‘사도시대 이후에 이 땅에 존재했던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가 참되게 전파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활방식과 종교가 이처럼 진지하게 개혁된 예를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5) 발렌티누스 안드레아에(1586-1654)

루터파교회 소속인 안드레아에는 칼뱅 사후 50년이 지난 1610년 제네바를 방문한 후 이렇게 글을 남겼다.

“제네바에 있을 때 나는 살아 있는 한 기억하고 갈망할 어떤 위대한 것을 목격하였다. 그곳에는 완전한 공화국의 제도만이 아닌 보다 특별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도덕적인 치리였다. ···일체의 저주나 맹세, 도박, 사치, 분쟁, 증오, 사기 등이 금지 되었는데 이보다 더 큰 죄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만약 신앙의 차이만 없었다면 이들의 도덕에 동감하여 이곳에 영원히 눌러 앉았을 것이다. ···내가 머물렀던 집 주인인 스카론 씨가 지키고 있었던 가정 내에서의 규율들이었다. 그는 매일 묵상의 시간을 가졌고, 성경을 읽었고, 그 말과 행동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충만했으며,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 절제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서도 이처럼 대단한 도덕적인 순결함을 찾아보지 못하였다.”

6) 필립샤프(1819-1813).

교회사가인 필립샤프는 자신의 글 교회사전집 ‘스위스 종교개혁’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역사의 평가는 점차적으로 그의 편이 되고 있다. 그는 알면 알수록 더 인정을 받는 사람이다.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를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의 사역들이 맺은 열매는 풍성하고, 특별히 영어권에서 그러하며, 이것이 그의 가장 고상한 업적이 되고 있다. 칼빈을 중상하는 볼섹의 비난은 비록 오댕(Audin)에 의해 좀 더 약하게 되풀이되었으나 더 이상 사실로 믿어지지 않는다. 모든 객관적인 저술가들은 그가 비록 성자는 아니었지만, 순수하고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소유욕과 악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었다고 쓰고 있다. 저명한 프랑스의 한 회의적인 역사가조차도 그를 ‘가장 기독교적인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능한 심판관들에게 이와 같은 찬양과 존경을 받은 이는 그동안 하나님의 교회에 나타난 위대한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드물다.”

7) 막스베버(1864-1920).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 Weber)는 칼뱅주의 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에 공헌했음을 주장했고, 루터가 모든 직업을 소명으로 봄으로서 세속적 의무의 수행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사명이라 보았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루터는 이 새로운 직업 관념에 숨은 경제적 가능성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기존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경제적 전통주의로 복귀했으나, 칼뱅은 이를 탈피하여 근대적 직업 관념을 발전시키고, 자기직업에 충실한 것이 하나님께 충실한 것이라는 소명론을 발전 시켰다. 칼뱅주의의 직업관과 예정론이 근면하고 검소하고 절약하는 인간형을 형성했고 그런 사람들에 의해 자본이 축적되고 자본주의가 발달했다고 주장했다.

8) 알리스터 맥그라스(1953~)

북아일랜드의 성공회 사제이자 기독교의 신학자이다. “칼뱅은 행동파라기보다는 사상가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사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되짚어 볼 것이 많은 사상의 보고로 남아 있다.”

칼뱅은 제네바의 학살자나 살인마라는 나치 선동적인 문장 하나로 평가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인정하든 안하든 세계사에 중요한 발전과 변화를 가져왔으며, 칼뱅의 사상은 당시대에 중요한 변화와 개혁을 일으켰으며 오늘도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가 살던 16세기와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초한 그의 사랑과 정의와 공평의 원리와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칼뱅의 사상은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연구되어왔고 특히 네덜란드의 수상이자 목회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등에 의해 주도되는 신칼뱅주의(Neocalvinism)로 영역을 확장해오고 있다. 특히 카이퍼의 영역주권(領域主權, Sphere Sovereignty)사상으로 발전하여 신학분야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시민사회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는 사상적 토대를 제시했다. 칼뱅이 당시대뿐 아니라 시대를 뛰어 넘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는 언급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따라서 한국의 장로교에서나 뛰어난 신학자로 여겨지고 세계적 역사가들에게서는 ‘최악의 기독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신천지측의 주장은 가짜 선동일 뿐이다.

Ⅲ. 결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보의 홍수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홍수에 마실 물 없다는 말처럼 검색 단어 하나로 수백 수천가지의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는 시대에는 오히려 유익하고 건강한 정보를 찾는 것 또한 쉽지 않고 게다가 그 중에 옥석을 가리는 것 쉽지 않다. 문제는 여기서 온다. 너무 많은 정보를 일순간에 얻을 수 있다는 문제점 때문에 인터넷 정보들, 특히 유튜브 영상들은 갈수록 자극적이 되고 있다.

‘칼뱅 제네바 학살자설’도 그와 같다. 수백 수천의 칼뱅 관련 자료와 정보가 인터넷에 떠도 저 문장처럼 자극적이고 눈길을 끄는 문장을 찾을 수 있을까? 없다. 이는 ‘선동은 한 문장으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에는 사람들은 이미 선동되어 있다.’는 말처럼 사람들을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칼뱅을 제네바의 히틀러같은 살인마’로 만들기 안성맞춤인 나치적 선동이다. 지금 많은 이들이 이런 선동에 휘둘리고 있다. 그리고 그 선동에 신천지측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미디어와 유튜브 채널을 동원해 확대 재생산에 나서고 있다. 거기에 20만여 명의 신도들이 댓글로 선동의 불에 기름을 붓고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처럼, 수십가지 자료로 반박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천지측의 밀어붙이기식 ‘칼뱅이 제네바의 살인마였다’더라는 ‘카더라’ 통신을 더욱 핵심적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이를 정보 시장에 유통하는 걸 더욱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신천지측의 칼뱅과 관련한 흑색선전에 대해 꾸준히 반박하고 모순과 가짜 뉴스를 지적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된다. 그 이면에 악한 의도 또한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 신천지측이 퍼뜨리는 ‘칼뱅 제네바 학살자설’은 칼뱅 비난에만 목적이 있지 않다. 사실 그 목적은 칼뱅신학을 기초로 세워진 개신교 전체에 대한 불신과 악마성을 시민사회에 심어 기독교 자체에 대한 혐어와 반감으로 이어지게 하려는 악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관해서 논쟁하려면 몇가지 바른 전제를 갖고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전제는 우리는 모두 ‘시대의 자녀들’로서 이 시대의 관점이 아니라 ‘그 시대의 관점’으로 칼뱅을 보고 평가해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가 필립 샤프가 “우리는 그를 그 자신의 시대 기준에 따라 판단해야지, 우리 시대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전제를 갖고 칼뱅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면 신천지측의 ‘칼뱅 학살자설’은 힘을 잃고 말 것이다. 더불어 특정 사안에 대해 다양한 1차 자료와 객관적이고 신뢰도 높은 자료를 통해 종합적 사고로 판단해야 한다. 르박의 예에서 봤듯이 신천지측이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이거나 결과적으로 원문을 ‘칼뱅’ 저격의 목적으로 왜곡해서 사용한 것을 보면, 나치적 선동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또한 목격했다. 그러려면 그 시대의 관점과 더불어 1차 자료에 대한 면밀하고 정직한 검토가 필수적이다.

지금까지 필자의 비천한 작업이라도 신천지측을 비롯한 칼뱅 혐오 세력들이 구축해 놓은 선입견과 오해들이 풀렸으면 좋겠다. 이와 더불어 한 시대를 살며 그가 목숨을 걸고 바쳐온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앙적 보화와 보물들과 생수를 들이키며 지금의 시대로 소화·적용해갔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칼뱅이 그를 추방하려고 했던 반대파들이 1547년 12월 16일 결집한 시의회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채로 무장한 군중들 가운데서 있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그의 가슴에 시퍼런 도검들이 꽂힐 수 있는 절체 절명의 상황이었다.

“200인 의회가 소집되었다. 이보다 더 소란스러운 회의는 일찍이 없었다. 말로 하는데 지친 각 당파들은 이젠 무력으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수행원도 없이 칼뱅이 나타났는데 그가 회의장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들을 그를 죽이라고 소리쳤다. 그는 팔짱을 끼고 선동자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무도 감히 그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가슴을 열어 젖힌채 군중들 사이를 뚫고 나아가서 ‘당신들이 피를 원한다면 여기 몇 방울의 피가 있으니 먼저 쳐라’고 말하였다. 누구도 팔을 치켜드는 자가 없었다. 칼뱅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서 200인 의회장으로 갔다. 회의장은 피로 물들 찰나에 있었고 칼이 번쩍이고 있었다. 개혁자의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은 무기를 내려 놓았고 몇 마디 말로도 소동을 잠재우기에 충분하였다. 칼뱅은 의원 한 사람의 팔을 붙잡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면서 사람들에게 할할 것이 있다고 소리쳤다. 그가 열정과 감동에 차서 말을 하자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얼싸 안았고, 조용히 물러갔다.”

샤프는 이것은 격정에 대한 이성의 장대한 승리이자, 물리적인 폭력에 대한 도덕적인 힘의 승리였다고 평했다. 16세기 광풍의 시대 칼뱅이 이토록 뜨겁게 산 이유는 “주님께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라는 심정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칼뱅에 대한 혐오가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무리 그에 대한 폄훼를 중단하지 않는다 해도 칼뱅에 대한 존경과 찬사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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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BC. 예수교와 칼빈교, 그 진실은 무엇인가? 2012. 08.06. https://www.youtube.com/watch?v=0kOaFq0DG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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