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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동성애자들이 복음으로 가는 마중물 돼야
하다니엘 목사  |  www.kportal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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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9  14: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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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4일 오후 2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부산성시화운동본부·건전신앙수호연대·선민네트워크가 주최, 홀리라이프가 주관한 탈동성애 인권포럼에서 하다니엘 목사(건전신앙수호연대 대표, 사자교회)가 발제한 글 전문입니다.

탈동성애 공동체 홀리라이프가 주최하는 포럼이 어느덧 9회째가 되었다. 여전히 한국 사회가 동성애 문제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번 포럼이 동성애 문제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대안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번 포럼의 주제는 “coming out again"이다. 즉 한번 동성애자로서 커밍아웃한 사람이 또다시 탈동성애로 커밍아웃 하자는 탈동성애자들의 절절한 외침이자 인권선언이다. 탈동성애는 단순히 꿈같은 이야기나 충동이 아니며 어떤 강요나 선전이 아니라 동성애로 고통받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수많은 탈동성애자의 삶을 통해 증거되는 명백한 진실이다. 동성애자들은 동성애가 자신들의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말하지만 탈동성애를 향한 열망 역시 다른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동성애자들 자신에게서 끌어오르는 진실된 갈망이다. 이것은 종교적이고 심리적인 문제이기 이전에 인간의 본성과 삶의 본질에 대한 문제이다.

금년에도 퀴어축제가 예정된 가운데 한국 교회 곳곳에서 동성애 관련 입법을 막고 자라나는 미래 세대들에게 올바른 가족관과 성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분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지금까지 대다수 한국교회를 지배해온 동성애에 대한 인상은 한마디로 ‘공포’였다. 서울시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퀴어축제와 차별금지법이라는 당혹스러운 현실을 목도하면서 교회가 나타낸 반응은 강력한 저항과 반대였다. 가족과 성에 대한 가치를 뿌리채 흔들고 종교적 신념을 위협하게 될 차별금지법의 폐해와 자라나는 미래 세대가 겪게 될 혼란을 생각하면 이는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쉬운 점은 교회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그들에게 어떤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에 대해서 교회가 우리 사회에 충분한 메시지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수년간 동성애 문제를 연구하고 탈동성애 운동을 해온 사람으로서 동성애 문제로 고통받고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 복음이 진정한 대안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동성애에 관하여 배제와 차단과 공포의 메시지를 넘어 복음의 능력과 사랑과 회복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이 보기드문 사건속에서 현시대를 향한 교훈을 얻어보는 것은 어떨까. 요 4:3-7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당시 예수께서는 유대에서 갈릴리로 향하시는 중이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상황에서 보통 베뢰아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사마리아 지역은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혼혈계가 많아지고 이교적 성향이 강해지면서 전통적 유대인과 뿌리 깊은 갈등을 빚게 되었고 서로에 대한 증오심은 극에 달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멸시하였으며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안에 들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결코 사마리아인을 피하지 않으시고 곧장 사마리아 동네의 우물가로 항하셨고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마주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발걸음이 사마리아를 향한 직선주로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사람들이 불편하게 여겼던 사마리아를 피하거나, 망설이거나, 돌아가지 않았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필자는 교회가 동성애자들 앞에서 복음을 회피하거나 왜곡해서는 안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가감없이 선포해야 하는 당위성을 발견한다.

요 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물을 달라고 요구하는 예수님의 요구에 사마리아 여자가 깜짝 놀랄 정도로, 당시 적대적이고 이질적인 두 사람의 만남은 현재 한국 교회가 동성애를 대하는 낯설고 불편한 시선이 연상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고민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과연 어떻게 동성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하는가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유대인의 적대감과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접근속에는 단절의 벽을 파괴하는 복음의 능력과 사랑이 담겨 있다. '물 좀 달라'는 요구를 통해 그 여인안에 내제된 영혼의 갈증을 드러내시면서 모든 인생이 절절하게 깨닫게 되는 진실. 바로 인생이 목마르기에 진정한 해갈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동성애자들이 아무리 자신이 행복하다고 주장하고 그 행위를 포장해도 거기에 진정한 만족과 안식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인생의 진실이 그러하기에 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이 필요한 것이다.

요 4: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묻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특별히 동성애라는 이질적이고 공격적이고 불편한 질문에 대해서 교회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그 대답은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동성애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늘날 수많은 탈동성애자들이 동성애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고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요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기서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물과 예수님이 주고자 하는 영생수를 구분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육체의 요구를 따르는 자는 목마른 물을 구하지만 영혼의 요구를 따르는 자는 영생수를 구하게 되어있다. 수많은 탈동성애자들이 육체적 쾌락의 끝에서 마주한 허망한 진실과 그들이 증거한 진솔한 고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만족과 구원되심을 확증한다. 퀴어축제가 벌어지고 동성애자들이 거리로 나오는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적대와 단절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과 진실을 담아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사실에 다시한번 주목해야 한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는 모두 죄 가운데 있으며 주님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누구도 타인을 정죄하거나 심판할 권리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셨다. 주님은 동성애자들 역시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너무 사랑하시기에 그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 두기를 원치 않으신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갈망하는 자에게 주님은 진정한 자유를 주실 것이다. 교회는 동성애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아가는 다리가 되고 마중물이 되어야한다. 복음을 왜곡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회복의 길로 이끌 수 있는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동성애에서 벗어나기까지 수많은 어려움과 부딪힘을 경험했던 탈동성애자들의 말에 귀기울여야 한다.

탈동성애자이자 유명한 찬양사역자 데니스 저니건은 “사랑안에서 함께”라는 그의 저서에서 ‘어떻게 하면 판단과 정죄를 하지 않고 사랑을 나타낼 수 있나요?’라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예를 들어 당신의 심장에 문제가 있다고 합시다. 심장의 동맥이 약간 막히는 문제가 있다고 합시다. 심장은 펌프질을 계속하고 모든 게 정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막히는 문제가 다른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즉, 막힘이 더 심해지고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만약 당신이 심장의 문제를 발견했는데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그냥 살아나가고, 더욱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그들의 심장 문제를 무시하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순간 당신의 이러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심장이 괜찮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게 될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혈관의 막힘 문제가 죄처럼 궁극적으로 파멸을 가져옵니다. 더욱이 당신의 파멸적 선택이 결과적으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좋든 싫든 간에, 우리의 선택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결과적으로 좋든 싫든 간에, 우리의 선택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에 대해 판단하게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내 동성애적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됩니까?’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단지 우리의 행동이나 자세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안된다는 이유로 정말 그것이 해가 없는 걸까요? 하나님은 동성애를 죄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죄를 옹호하는 사람은 해를 끼칩니다. 그게 어떤 죄이든 말입니다.

성경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신앙 있는 군중들이 예수님께 데려온 사건을 아시죠? 그들은 예수님께 다음 질문에 대답하기를 요구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너희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먼저 치라” (요한복음 8: 5-7). 우리 중에 죄 없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다른 사람들의 죄를 보고 그들을 정죄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판단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고려하지 않고 그 사람을 매일같이 판단합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해 항상 판단합니다. 조 달라스라는 제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옳고 그른 걸 판단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12:57). 즉,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내 삶을 살고, 아이들을 키우고, 진리를 분별하고, 사람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모든 도덕적 평가에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이 부분은 뉴인터내셔널판 대신 킹제임스판으로 대치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행동을 판단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총을 들이대면서 해치겠다고 위협하면서 다가온다면, 나는 그가 나에게 해를 끼칠 걸로 간주하고 판단을 내립니다. 그 판단을 통해서 나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말에 대해 판단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해치려고 계획하는 것을 우리가 우연히 듣는다면, 우리가 판단없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나요? 우리는 원칙에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사람들을 혼란케 하는 걸 듣는데, 우리가 그 상황을 판단하지 않을 수 있나요?

그렇지만, 다른 이의 마음과 생각을 알지 못하면서 그의 영원한 운명을 판단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다른 이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생각을 알지 못하면서, 그의 생각을 판단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다른 이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서, 그의 동기를 판단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예수님이 아니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할 모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천국에 절대 못갑니다” 라든지 “당신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는 식으로 말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사람들이 판단과 자주 혼동하는 것은 정죄입니다. 우리가 다른 인간의 가치를 짓밟을 때, 해악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목적이 다른 이로 하여금 인간적 열등감을 유발한다거나, 우리가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길 바랄 때, 우리는 정죄합니다. 진실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나타납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 때문에 징벌을 받지 않았습니까? 정죄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그는 다른 사람들 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며 말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그러한 정죄를 느끼고 싶지 않죠.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느낌을 받게 하고 싶습니까? 선천적 동성애자라고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강요는 그의 근원적 정체성에 대한 모욕일 듯 합니다. 우리의 근원적 정체성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주어진다는 진리를 합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는 성에 대한 하나님의 설계를 우리의 삶을 통해 관계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늘 그렇듯이, 결과에 신경쓰지 말고 사랑합시다. 우리는 다른 이의 삶의 결과에 책임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주님으로 하여금 구세주가 되게 합시다. 그 분으로 하여금 나의 구세주가 되게 합시다. 정죄의 판단을 하지 말고 단순히 주님의 사랑을 담는 그릇이 됩시다. 지금 계신 곳에 서세요. 그렇지만 다른 이의 가치를 무시하지 말고 진리 위에 서세요.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소한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내가 동성애 커플과 커피를 마시면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또는, 우리 교회에서 친교시간에 동성애자를 환영한다면 사람들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중요한가요?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누군가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기 위한 희망을 갖고 있다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 인생의 풍요함을 아는 소망을 갖고 있다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경험한다면, 또는 진정한 자유가 어떤 건지 안다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아는 것은 단순히 영생을 허락받는 것 이상입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가 믿는 대로 우리의 삶을 살도록 합시다. 사람들을 따뜻함으로 예수님께 인도합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시도록 합시다.

데니스 저니건은 마지막으로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조언한다.
저는 하나, 둘, 셋을 세는 것처럼 문화를 다루는 간단한 공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상상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공식이 있는 겁니다. 그 공식은 사랑이고 그것의 이름은 예수님입니다. 무슨 행동을 할까 무슨 말을 할까 의심이 생길 때에는 예수를 바라보세요. 여러분이 상처받은 영혼에게 할 말을 모를 때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키세요. 여러분이 어려운 문화적 상황이나 환경에 봉착할 때, 예수님과 그 시련을 겪어보세요. 다른 이들이 여러분을 싫다고 할 때, 진실과 타협하지 말고 여러분의 삶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사랑하세요.

그들이 동성애적 관계에 있든지 성전환자라고 고백하든지, 있는 그대로 사람들을 만나주세요.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이끄는 것처럼 그들과 함께 예수님께로 기꺼이 걸어가세요. 그분들이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가 되어주세요. 그들의 고통을 듣고 공감하는 귀가 되어주세요. 그들이 넘어질 때마다 가서 일으켜 주는 손이 되어주세요. 그들의 치유를 위해 필요한 소금이 되어주세요. 그들이 진리를 볼수 있도록 빛이 되어 주세요. 우리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누구가 되어주세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구원자가 되게 하세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구세주가 되게 하세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결과에 대해서 걱정하게 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자세 때문에 법적 문제가 생기거나 감옥에 가는 상황이 벌어질 때, 하나님의 자비가 여러분께 흐르길 기대하세요. 여러분이 어떠한 불 같은 시험을 겪게 되더라도 그분의 향기로운 임재와 함께 그분께서 여러분과 동행하는 걸 기대하세요. 다니엘을 사자굴로부터 구해내신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여러분과 함께 하는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베드로, 요한, 바울, 실라가 감옥에 던져졌을 때 그들과 함께 있었던 성령님께서 우리를 결박에서 풀어주실 것입니다.

제가 성도들께 권면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넘어설 수 없는 산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그걸 쉽게 넘어갈 하찮은 둔덕으로 봅니다. 우리는 무섭고 격심한 폭풍우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환란 가운데에서도 피난처와 평화의 기회를 봅니다. 우리는 어둠과 거친 물결이 길에 몰아치는 걸 봅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이겨낼 기회를 봅니다.

교회여, 우리는 전에도 여기 있었습니다. 문화는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합니다. 세상나라는 떠오르기도 하고 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동일하십니다! 용기를 잃지 마시고,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우리가 왜 이 땅에 있는지 기억합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2:1-3)

과연 현재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자들을 복음 가운데로 이끌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가? 또한 그들에게 올바른 진리를 전하기 원하는가? 예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신다. 이제 한국교회는 탈동성애자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고 동성애자들이 복음을 접하고 그 능력을 경험케 할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동성애는 결코 복음이 넘지 못할 산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확신한다면 그 어떤 죄와 욕망도 반드시 극복 가능함을 믿고 새로운 선교적 비전을 준비하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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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문헌
Dennis Jernigan 'stand in love' 데니스 저니건 ‘사랑안에서 함께’
Joe Dallas 'speaking of homosexuality' 조달라스 ‘동성애에 관한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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