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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가야 땅밟기와 무례한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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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가야 땅밟기와 무례한 기독교
  • 덕림교회 김현수
  • 승인 2014.07.11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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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현수(예장합동 덕림교회 중고등부 교사)
필자는 예장합동측 덕림교회 중고등부 교사로서 한남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목회자 후보생입니다. 그는 네이버 블로그 '생각하는 그리스도인'(blog.naver.com/calvianus)의 운영자이자 평신도이단대책협회의 스태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규명하며 기독교 신앙은 초이성적이지만 반이성적이지는 않다고 하였다. 이 말은 우리의 신앙이 상식(常識)을 초월하지만 비상식적인 가치나 행동양식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신앙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비이성적이거나 비상식적인 신비주의적 가치나 일부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과격하고 맹목적인 행동들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결코 무례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아야 한다.

▲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불교의 성지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통성기도를 하는 사람들

필자는 최근 부다가야 마하보디 사원 단지(Mahabodhi Temple Complex at Bodh Gaya)에서 일어난 소식을 접했다. 부다가야 마하보디 사원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인도의 불교의 성지 중 하나인데, 이곳에 열성적인 기독교인들이 찾아가서 찬송을 부르며 소위 '땅 밟기' 기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원 법당 입구에서 '그 사랑 얼마나'라는 찬송을 부르고 통성기도를 하였다. 이것을 말리기 위해 해당 사원에서 수행을 하던 한국인 비구니(여성 승려)가 묵언수행마저 포기하였다고 하니 사태의 정도가 지나침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그 비구니는 묵언수행만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도 포기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러한 일이 처음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타 종교의 건물에 진입하여 포교 활동을 하거나 행사를 방해하는 일들은 여러 차례 있어왔다. 2010년에는 찬양인도자학교 소속의 기독교인들이 봉은사奉恩寺에 들어가 땅 밟기 선교를 하였으며, 2012년에는 봉은사 앞에서 불교 CD로 가장한 목사의 간증 CD를 배포한 일도 있었다. 이 외에도 불상에 소변을 누거나 단군상의 머리를 자르는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언론을 통해서 여러 차례 보도된 바가 있다. 이 같은 사건들은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비상식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얼마나 무례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렇다면 땅 밟기란 대체 무엇인가? 땅 밟기를 하는 자들의 모습은 마치 성전(holy war)에 임하는 십자군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자의적으로 설정한 '사탄의 터'를 찾아가서 대적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권능을 선포한다. 개인이나 단체에 따라서는 땅에 십자가를 파묻거나 소금을 뿌리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성수(holy water)를 뿌려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같이 미신적인 신앙이 점차 범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땅 밟기 이면에 있는 신사도운동의 문제점, 이단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땅 밟기 기도, 땅 밟기 선교 운동은 '영적도해'라는 신사도운동의 사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신사도운동이란 좁은 의미로는 피터 와그너와 그의 연맹을 뜻하며, 넓은 의미로는 마이클 비클의 IHOP과 빈야드, 늦은비 운동(윌리엄 브랜넘, 폴 케인) 등의 다양한 유사운동을 뜻한다(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이인규 권사는 그의 글 '신사도운동의 개략적인 교리와 사상'에서 신사도운동의 범주를 이와같이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신부운동, 다윗의 장막, 요엘의 군대, 지저스 아미, 예언적 중보기도, 개방신학, 임파테이션, 트랜스포메이션, 킹넘나우, 백 투 예루살렘, 일곱산 등의 용어와 사상을 가르치며, 사도와 선지자의 현대적 부활과 함께 직통계시와 예언의 지속성을 주장한다. 기적과 표적(입신, 쓰러짐, 금이빨, 금가루 등) 중심의 무분별한 은사주의적 행태의 집회를 강조하고, 극단적 세대주의 종말론에 입각하여 신부 운동, 요엘의 군대, 늦은비와 이른비 운동 등을 전개한다. 이 외에도 은사의 능력 전이(impartation)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등 신사도운동의 교리적인 오류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영적도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종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지역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은 이 지역을 사탄이 장악한 영역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주의 신실한 성도들은 A라는 지역에 가서 땅 밟기 기도를 통해 사탄의 사역을 방해하고 대적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 같은 내용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으로는 신사도운동의 밥 베켓이 있으며, 피터 와그너 또한 <지역사회에서 마귀의 진을 헐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그 같은 주장을 하였다. 예수전도단의 존 도우슨 또한 이 같은 내용의 책을 발간하였다.

​앞서 거론한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영적도해라는 개념은 '지역귀신론'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지역 귀신론이란 각 지역마다 해당 지역을 지배하는 귀신이 존재한다는 사상으로, 이 귀신들을 쫓아내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개념으로서, 이는 세상을 종교, 경제, 교육, 문화 등의 칠대권역으로 나누어 신사도운동의 교회가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통치해야 한다는 통치신학, Transfomation의 킹덤나우, 그리고 극단적 세대주의 종말론의 시나리오와 일맥상통한다.​​

▲ 타 종교 경내나 문 앞에서 소위 땅밟기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신사도운동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땅 밟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들은 땅 밟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확장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타 종교에 대한 과격한 포교 활동 또한 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비상식적인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신(GOD)을 돕는 자이며, 선자자이자 사도로서 사탄을 대적하여 칠대권역에서 승리해야 임무를 지니며, 예루살렘의 회복(백 투 예루살렘)을 앞당겨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낼 자라고 여긴다. 현재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연맹에는 12명의 사도가 있으며, 그중 신디 제이콥스는 자신이 순간이동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이다. 한국에도 신사도운동 단체가 다수 존재한다.

신비주의, 극단적 세대주의 종말론, 무분별한 은사남용주의가 자칭 사도들로 인하여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다. 그들은 직통계시를 남용하고 스스로를 사도적 권위자로 세운다. 교인들을 밀치며 "성령을 받으라!"고 외친다. 그들이 말하는 성령의 사역은 고작 얼굴을 V라인으로 만들거나 쌍꺼풀이 생기는 것, 손이나 얼굴에서 금가루가 나오는 것, 자칭 거룩한 웃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고작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교인들의 그들의 사역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신사도운동의 시스템들을 도입하고 있는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사도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란 결코 신선한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정통한 가르침에서 떠난 '다른' 가르침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다른' 가르침이 비성경적인 기독교, 비상식적인 기독교, 무례한 기독교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 기독교 신앙은 결코 무례하지도, 비상식적이지도 않다. 우리의 신앙은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겸손하고 지혜로운 분이다. 지역 귀신을 대적하기 이전에 자칭 사도들을 대적해야 한다. 자칭 사도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는 사탄과 힘겹게 대립하는 하나님이 아닌, 특정 지역을 수복해야 하는 하나님이 아닌, 사탄의 세력을 발 아래 놓으신 권능의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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