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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수 '666'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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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수 '666'이란 무엇인가?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3.04.01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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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 베리칩은 짐승의 표 아니다

“짐승의 수”이면서 “사람의 수인 666”은 요한계시록 13장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단어이다. 즉 성경 안에 직접적으로 비교 가능한 본문이 없다. 솔로몬의 세입금 중수 “666”(대하 9:13; 왕상 10:14)이라는 구절이 있으나 이것은 “666 금 달란트”라 “인간의 수 666”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이렇게 성경에 단 한번 등장하는 독특한 단어를 하팍스레고메나(Hapaxlegomena)라고 한다. 하팍스레고메나는 비교 가능 구절이 없는 관계로 해석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런 단어의 경우 단어 자체의 본 의미를 따져보고 이 구절과 관련된 앞뒤 문장의 전후 관계를 잘 분석하여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666도 단순히 666만을 따로 떼어 해석하면 위험하고 계시록 13장 전체의 맥락과 틀 안에서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 계시록 13장은 두 짐승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바다에서 나온 첫 번째 짐승(1-10절)
첫 번째 짐승은 바다에서 나왔으며 그 짐승의 얼굴 모습은 뿔이 열이고 머리는 일곱을 가진 짐승이었다. 이들 짐승의 열 뿔에는 10개의 면류관이 있었으며 머리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있었다. 짐승의 전반적 생김새는 표범과 비슷하고 발은 곰의 발을 닮았으며 입은 사자의 입을 닮았다고 했다(1-2절).
이 첫 번째 짐승은 다음과 같은 10 가지 권세가 있었다(3-8절). (1) 짐승은 용으로부터 용의 능력과 왕좌와 큰 권세를 받았다. (2) 짐승은 머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은 듯하다가 살아났다. (3) 온 세상 사람들이 놀라 그 짐승을 따랐으며 사람들은 그에게 권세를 준 용을 경배했다. (4) 온 세상 사람들은 용뿐만 아니라 짐승도 경배하기 시작한다. (5) 온 세상 사람들은 짐승을 경배할 뿐 아니라 찬양했다. (6) 온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짐승과 같은 이가 없고 짐승과 맞서 싸울 존재도 없었다. (7) 짐승은 교만한 말을 서슴지 않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장막과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는 말을 함부로 하였다. (8) 짐승은 42달 활동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9)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허락되었고 온 세상 모든 민족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 (10) 세상이 창조 된 이후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 짐승에게 경배할 것이다. 성경(계 13장)이 아주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관계로 첫 번째 짐승의 권세가 만만치 않음을 독자들은 금 새 알 수 있다. 짐승에 대한 이 같은 우주적 권세와 경배는 어린 양에 대한 우주적 권세와 병행을 이룬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계 2:28; 3:21). 그리스도에 맞서는 이 같은 악령의 대응을 기독론적 패러디(Christological parody)라고 부른다.

집승의 때에 대해 하나님은 몇 가지 경고를 하신다(9-10절). 첫째 짐승의 때에 대해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 둘째 짐승의 때에 잡혀갈 사람은 잡혀가고 칼로 죽임을 당할 자들은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셋째 짐승의 때에 성도들에게는 인내하는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B. 땅에서 나온 두 번째 짐승(11-18절)
두 번째 짐승은 땅에서 올라왔다(11절). 두 번째 짐승은 새끼 양처럼 두 뿔을 가졌고 용처럼 말을 했다. 성경은 두 번째 짐승의 권세(활동)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12-15절). 첫째 첫 번째 짐승이 지녔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처음(첫 번째) 짐승 앞에서 행사할 것이다. 둘째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가 살아 난 첫 번째 짐승을 경배하게 할 것이다. 셋째 큰 기적을 행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할 것이다. 넷째 첫 번 째 짐승이 하던 기적을 그대로 행하고 땅에 사는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다섯째 첫 번째 짐승을 향한 우상 숭배를 노골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능력을 받아 첫 번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을 하게하고 그 짐승의 우상에 경배치 않으면 다 죽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666)를 받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짐승이었다(16-18절). 빈부귀천, 남녀노소, 종이나 자유자나 예외 없이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할 것이고, 표는 강제적 매매의 수단이 될 것이고,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일 것이다. 성경은 이런 때일수록 지혜가 필요하니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짐승의 숫자를 세어보라고 했다. 이 짐승의 수는 사람의 숫자로 “666”이다.

베리칩이 "666"인가?
베리칩은 좁쌀보다 약간 큰 작은 칩으로 팔이나 신체의 특정 부위에 주입하여 의학적 성과를 얻으려는 칩을 말한다. 근데 이것이 왜 앞에서 설명한 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666이라는 것일까? 요한계시록은 직역을 하면 잘 풀리지 않는 많은 상징이 있는 책이다. 벌콥(L. Berkhof)의 말대로 요한계시록은 결코 사도행전 식으로 해석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해석학의 기본이 필요하다. 계시록 13장도 그 상징의 내용을 잘 해석해야 한다. 베리칩이 “666”인가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짐승의 표가 등장하려면 반드시 먼저 짐승이 등장해야 함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대단히 상징적이기는 하나 분명 대단한 능력과 권세를 가진 바다에서 올라온 처음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이 등장해야 한다. 아직 요한계시록 13장의 구절과 일치하는 구체적 두 짐승은 세상에 나타나거나 등장한 적이 없다. 짐승의 표는 이 짐승이 나타난 후 짐승의 통치수단에 의해 만들어진 강제적 정책의 산물로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베리칩이 666과 일치하려면 이 정책의 주체가 되는 짐승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고 그 표가 강제적 매매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한때 666이 분명하다고 큰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었던 “컴퓨터 바코드 666 소동”은 매매 수단과 관련이라도 있었다. 물론 이 소동은 엉터리로 판명이 났다. 하지만 베리칩은 바코드 소동과 달리 강제적 매매 수단과는 관련이 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베리칩을 666이라 보는 것은 13장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동안 13장의 짐승에 비유되는 유사(類似) 짐승은 참 많았다. 로마 제국, 네로, 칼리굴라, 교황, 니므롯, 솔로몬, 느브갓네살(단 3:6) 등을 666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심지어 반 개신교측에서는 마르틴 루터나 개신교를 666으로 보는 주장까지 있었다. 이런 식으로 666을 보면 짐승 우상에게 경배치 않으면 모두 다 죽였다는 점에서 도미티안 황제, 일제식민지 시대의 강제적 신사참배제도, 김일성 우상화도 모두 666의 후보자들이 될 수 있다. 이들 모두는 두 짐승과 관련하여 해석할 때 유사성을 가지기는 하나 두 짐승의 “그림자” 정도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래서 요한은 666을 푸는 데는 지혜와 총명이 필요하다고 지속적으로 충고하고 있다(18절).

히브리어와 헬라어에는 우리말에는 없는 숫자값(numerical value)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게마트리아”(gematria)라고 한다. 하나님은 37, 예수님은 888(37*3*8), 짐승의 수는 666, 사단의 나라는 276과 관련된다. 이 게마트리아로 666을 푸는 방식이 있다. 게마트리아로 살펴보면 위에서 살펴 본 많은 인물이나 사건들이 666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게마트리아로 666을 풀 때에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13장 전체(전후) 문맥과 조화하고 일치하는 666인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전체 문맥 가운데 살펴보면 대부분의 “666” 후보들은 “666”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게마트리아가 신비한 도구이기는 하나 게마트리아를 절대적 성경 해석 방법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계시록 13장의 “666”이 출현하려면 반드시 이적과 능력을 가진 두 짐승의 등장이 먼저임을 기억해야 한다. “666”은 그 다음 나타나는 온 세상 사람들의 강제적 매매 수단과 관련된 표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13장의 내용과 일치하는 구체적 짐승의 출현도 아직 없었고 매매 수단이 아닌 일부 최첨단 의료용으로 알려진 베리칩이 계시록 13장이 말하는 666이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베리칩을 666이라 주장하는 분들이 베리칩을 받느냐 안 받느냐에 따라 구원 여부가 달려 있다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불안이나 공포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의와 평강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베리칩 공포와 불안"에 떨다가 베리칩이 아닌 정말 666이 나타날 때는 그만 사단에게 속아버리는 참사가 벌어지지 않을 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베리칩을 구원여부의 기준으로 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세대주의적 극단적 종말론이기 때문이다.

요즘 일부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열심 있는 것은 좋으나 좌우 분간을 하지 못하고 신비주의적이고 극단적이고 긴급한 종말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신자들의 열심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것은 신앙을 열심으로 착각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으며 하나님께 열심을 다한다는 착각 속에서 실은 마귀에게 이용당해 버리는 누(累)를 범할 수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한다.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도 아니고 괜히 겁 먹을 존재는 아니나, 모세의 시체에 대해 논쟁했을 때 천사장 미가엘도 마귀를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을 정도로 마귀는 그리 간단한 존재가 아니다. 갑자기 최근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형태의 이상한 신비주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늘 바른 하나님 말씀이 우선되지 않으면 우왕좌왕하기 마련이다. 바르게 깨닫고 열심을 다해야지 분별을 못하고 열심을 내다가는 사단에게 이용 당하는 도구가 되기 십상인데 작금의 한국 교회에 이런 불안을 동반한 신비주의가 만연된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제자 베드로도 '사단'이라고 예수님꼐 꾸짖음 받은 것처럼 사단의 꾀에 속지 말아야 한다(막 8:33).

베리칩이 "666"이 아니라는 성경적 증거
베리칩이 666이 아님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666이전에 반드시 등장해야 할 계시록 13장에 나타난 두 짐승에 해당할만한 인물이나 사건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짐승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상징성을 가지는 지에 대해서는 지혜로운 검토와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베리칩이 666이라는 생뚱한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둘째, 두 짐승이 나타난 후 두 번째 짐승이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666)를 받게 하는 데(16-18절) 베리칩을 666이라 할 경우 두 번째 짐승에 해당하는 실체가 불분명할 뿐더러 베리칩 소동은 13장이 묘사하고 있는 두 번째 짐승과 정황상 내용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셋째, 계시록 13장은 빈부귀천, 남녀노소, 종이나 자유자나 예외 없이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고 하였으나 그 비싼 베리칩을 식량도 부족한 북한이나 아프리카 같은 빈국의 노인이나 어린이들에게 무엇 때문에 어떻게 신체에 강제로 투여 한다는 것인지 베리칩은 이 구절과 전혀 맞지 않는다. 더구나 말기 암에 걸려 흙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는 환자에게 베리칩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같은 일은 권의주의적 세계 종교 통일이나 정치 통일이 가능해진 다음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세계 종교나 정치가 통일 된다는 것은 작금의 정황상 요원한 일일뿐이다.

넷째, 표는 강제적 매매의 수단이 된다고 하였으나 화폐가 있고 카드가 넘쳐나는 시대에 베리칩이 어떻게 모든 남녀노소, 모든 빈부귀천, 종교인들의 강제적 매매 수단과 관련 된다는 것인지 허황된 주장일 뿐이다.

다섯째,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라고 하였으나 베리칩은 짐승의 이름도 아니고 짐승의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가 아니다. 단지 바코드 소동과 유사할 뿐이다.

여섯 째, 짐승이 출현하였을 때 지혜가 필요하니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짐승의 숫자를 세어보라고 하였는데, 먼저 이 짐승은 (1)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가 살아 난 첫 번째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짐승이요 (2) 큰 기적을 행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하는 짐승이요 (3) 첫 번 째 짐승이 하던 기적을 그대로 행하고 땅에 사는 사람들을 속이는 짐승이요 (4) 첫 번째 짐승을 향한 우상 숭배를 노골화하는 짐승이요 (5) 능력을 받아 첫 번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을 하게하고 그 짐승의 우상에 경배치 않으면 다 죽이는 권세를 가진 짐승이다. 그런데 이런 두 번째 짐승은 커녕 첫 번째 짐승에 해당하는 짐승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짐승 이후에나 나타나는 666을 베리칩으로 상정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이다.

일곱 째, 짐승의 수는 사람의 숫자로 “666”이라 하였는 데 베리칩이 사람의 숫자 "666"이라는 의미와 연관성이 없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은혜는 그리스도 믿음 안에서 주시는 영원한 구원과 참 평강이다. "베리칩"을 가지고 구원 상실과 신앙적 불안감과 긴박한 세대주의적 시한부종말론으로 사람들을 겁 주고 인위적 열심을 이끌어내려는 것은 아주 비성경적이다.

나가면서
결국 베리칩이 666이라는 주장은 아마 과거 “바코드” 소동을 벌이던 자들이 다시 “베리칩” 소동을 만들어 시한부 종말론을 재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세대주의적 긴박한 종말관에서 나온 것으로 분별에 조심해야 한다.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케 하려고 불안에 떨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목자를 따르는 양들이 평안한 것처럼 그런 참 평안을 주신다. '바코드' 소동은 그나마 매매와 관련이라도 있었으나 베리칩은 매매와도 별 상관이 없다. 바코드 소동은 이미 잠잠해졌다. 바코드가 구원과 관련이 없듯이 결국 베리칩 부착 여부도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베리칩 소동은 계시록 13장과는 무관하다고 보아야 한다. 베리칩은 의학적, 치유적, 경제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구원은 베리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에서 끊을 수 있는가? 베리칩이 어떻게 성도의 구원을 변개할 수 있단 말인가?

"베리칩"의 권세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권세를 꺽을 만한 위대한(?) "666"으로 격상 시킨 그 신성모독의 불경한 허물을 어떻게 하려고 그런 미숙하고 비성경적인 주장을 함부로 한단 말인가! 성경에 없는 내용을 첨삭하여 베리칩을 가지고 공포 분위기를 만들고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은 성경 계시록 13장에 대한 그릇된 해석일 뿐이다. 도적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공포감을 제공하나 그리스도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으며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을 주시는 분임을 성도들은 졀대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세상의 베리칩 공포와 소동을 푸는 마지막 결정적 열쇠이다.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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