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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은 기독교 역사에 해같이 빛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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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은 기독교 역사에 해같이 빛나는 인물”
  • 정윤석 기자
  • 승인 2021.06.07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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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 70주년 예배 설교 정주채 목사 ‘역대의 연대를 기억하라’
손양원 목사 70주년 기념 감사예배에서 설교하는 정주채 목사
손양원 목사 70주년 기념 감사예배에서 설교하는 정주채 목사

정주채 목사(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이사장)가 2021년 6월 6일 칠원교회(최경진 목사)에서 열린 산돌 손양원 목사 70주년 기념 감사예배에서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정 목사는 “손양원 목사는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그 어떤 사람들과 비교해도 아무런 손색이 없는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사도”라며 “그는 기독교 역사에 해와 같이 빛나는 귀한 인물입니다”라고 칭송했다. 정 목사는 손양원 목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그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고 훌륭한 목사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검속되어 일본 고등계 형사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그때 형사는 “너는 성경에 대하여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여기에 대해 손 목사는 “성경에 기록돼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어서 나에게는 생명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기록입니다. … 성경은 나의 유일신조요 신앙의 목표입니다. 성경 중에 기록된 것은 전부 그대로 굳게 믿고 전부가 실현될 것으로 믿어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기도를 중요시한 손 목사는 “하루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이라 하였고, “일 중의 일이요 생활 중의 생활이 기도”라고 했다. “기독자의 성공과 실패가 기도에 있고 기독교의 흥망이 기도에 있으니 실로 기도여하에 있다.”고 하였으며 “나는 기도로 살다가 기도로 인생을 마치고자 한다.”고 하였다.

둘째, 일본의 신사참배강요에 끝까지 반대하며 맞섰다. 그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지만 동시에 그의 이런 행동에는 애국애족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셋째, 나병환자들의 목회자요 가족이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는 소위 출세할 기회가 많았던 사람이다. 대도시 큰 교회들로부터 몇 번이나 청빙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청빙을 거절하고 애양원교회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섬기는 일을 선택하였다. 심지어 김구 선생이 손 목사를 불러 그가 설립한 학교의 교장으로 와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이것도 사양하였다. 심지어 나환자들의 환처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과연 누가 이런 분의 삶을 흉내라도 낼 수가 있을까? 넷째, 그는 아들을 둘이나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았다.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을 때 좌익에 속한 청년들이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를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총살했다. 이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다가 아들들을 죽인 청년 안재선을 용서할 뿐 아니라 양자로 삼기로 결심한다.

정 목사는 설교를 통해 “앞서간 이런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을 입으로만 칭송하고 추모한다면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아무 다를 것이 없는 위선자가 되고 말 것”이라며 “그분들이 가졌던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그분들이 가신 길을 걸어야하겠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우리 선조들에 대한 진정한 추모입니다”라고 역설했다.

다음은 정주채 목사의 손양원 목사 70주년 기념 감사예배의 설교 일부이다. 

손양원을 추모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추모한다는 것은 단순히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며 그리워한다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추모는 훌륭한 조상들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며 그들을 본받아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함안에서 그리고 바로 이곳 칠원교회에서 배출된 손양원 목사님은 기억하며 추모합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배우고 본받아 살아야 할 참으로 훌륭한 인물입니다. 손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보배요 최고의 자랑입니다.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그 어떤 사람들과 비교해도 아무런 손색이 없는 위대한 성자이며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사도입니다. 그는 기독교역사에 해와 같이 빛나는 귀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이 역사 속에 점점 묻혀가고 있습니다. 일반 역사 속에 묻혀 있는 것은 고사하고,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저는 지금도 생각이 날 때마다 화가 나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기독교회사]에 손양원은 이름 한 번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역사를 무시하고 훼손하는 일입니다.

손 목사님은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수많은 위인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분입니다. 보통 훌륭한 분이라고 하면 한두 가지 공적이나 탁월성이 드러난 분들입니다만, 손 목사님의 경우는 여러 방면에서 그의 훌륭함이 크게 드러나고 있는 분입니다. 이 시간 몇 가지만이라도 다시 기억하며 그를 추모하고자 합니다.

1) 그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독실한 기독교신앙인이었고 훌륭한 목사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자랐고,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아주 강한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그는 성경말씀과 기도에 생명을 걸었다고 할 정도로 독실한 분이셨습니다. 이것도 누누이 설명할 시간이 없으므로, 손 목사님이 설교나 심문조서에 나오는 말씀들을 한두 가지라도 인용해보겠습니다.

그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검속되어 일본 고등계 형사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그때 형사는 “너는 성경에 대하여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손 목사님은 “성경에 기록돼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어서 나에게는 생명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기록입니다. … 성경은 나의 유일신조요 신앙의 목표입니다. 성경 중에 기록된 것은 전부 그대로 굳게 믿고 전부가 실현될 것으로 믿어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또한 기도에 대한 목사님의 말씀도 아주 많습니다. 손 목사님은 “하루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이라 하였고, “일 중의 일이요 생활 중의 생활이 기도”라고 했습니다. “기독자의 성공과 실패가 기도에 있고 기독교의 흥망이 기도에 있으니 실로 기도여하에 있다.”고 하였으며 “나는 기도로 살다가 기도로 인생을 마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피난을 가야한다는 주위의 권고를 기어이 뿌리치고 자신의 말대로 강대상 앞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인민군에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2) 그는 일본의 신사참배강요에 끝까지 반대하며 맞선 분입니다.

일제는 소위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절대 반대하다가 이 일 때문에 구속되어 5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가 체포된 것은 1940년 9월이었는데 일제의 끈질긴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다가 1945년 8.15 해방이 되면서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습니다만, 동시에 그의 이런 행동에는 애국애족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부친 손종일 장로님은 칠원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일 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분입니다. 그 후에도 그는 만주로 이거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이런 선친의 신앙과 애국정신은 그의 장남인 손양원에게 그대로 전수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그는 나병환자들의 목회자요 가족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는 소위 출세할 기회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실력과 열정을 갖춘 목사여서 대도시 큰 교회들로부터 몇 번이나 청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청빙을 거절하고 애양원교회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섬기는 일을 선택하였습니다.

또 당시에 김구 선생이 손 목사님을 불러서 그가 설립한 학교의 교장으로 와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이것도 사양하였습니다. 6.25 때 그가 사람들의 간곡한 피난권유를 뿌리친 이유도 불쌍한 나환자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손 목사님은 자신도 나병에 걸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증언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나환자들과 같은 처지가 되어 그들의 고통을 체휼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환자들의 환처를 입으로 고름을 빨아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이런 분의 삶을 흉내라도 낼 수가 있을까요?

4) 그는 아들을 둘이나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을 때 좌익에 속한 청년들이 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를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총살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손 목사님은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다가 아들들을 죽인 청년 안재선을 용서할 뿐 아니라 양자로 삼기로 결심합니다.

모든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를 결행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사람을 계엄군사령관에게 보내 살인자인 안재선을 사면해 줄 것을 간곡히 청원하였습니다. 이런 청원을 받은 계엄사령관은 너무나 놀라고 당황스러워했지만 결국 그 청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말 그대로 “사랑의 원자탄”이셨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김구 선생은 ‘공산주의를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하나님께 아홉 가지 내용으로 감사를 드렸는데, 이런 일은 그 언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두 아들이 순교하게 해 주심을 감사하고, 예수 믿다가 누워서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가 총살 순교함이리요. …”

홍정길 목사님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아브라함 이후에 이런 인물이 나온 적이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5) 그는 인민군들에게 잡혀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순교를 영광으로 여겼던 분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두 아들이 순교했을 때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교란 죽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는 순교적인 삶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역사가들은 순교를 ‘백색순교’와 ‘적색순교’라는 말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백색순교란 순교적인 삶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도우기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삶 자체가 바로 백색순교입니다. 진정한 순교는 백색순교에서 적색순교로 이어지는 순교입니다. 손 목사님이야말로 그 삶이 순교였고 최후의 죽음도 순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받은 사명, 곧 나환자들을 위한 섬김에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사라는 이유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잡혀 총살당했습니다.

결언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순교자들의 무덤을 꾸미고 비석을 세우면서도 자신들은 이런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고 있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면서도 그 선지자들과 의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사람들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도 앞서간 이런 훌륭한 조상들을 입으로만 칭송하고 추모한다는 것으로 끝난다면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아무 다를 것이 없는 위선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본받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그분들이 가졌던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그분들이 가신 길을 걸어야하겠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우리 선조들에 대한 진정한 추모입니다.

이 땅에 손양원 목사를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한국교회에서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제2, 제3의 손양원이 계속 배출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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