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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환상·예언·직통계시에 대한 고신 63회 총회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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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환상·예언·직통계시에 대한 고신 63회 총회 보고서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8.08.1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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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교회 성장의 둔화, 사회적인 불안의 확산, 세속적인 오락 문화의 확산 등 어려운 목회 환경 때문에 사역자들이 불건전한 신비 운동에 눈을 돌리는 경우가 더러 발생하고 있다. 고신 총회는 예언, 환상, 쓰러짐, 금가루 현상, 입신 등의 행위를 극단적으로 진행하는 집회에 대해 2013년 63회 총회에서 ‘극단적 신비주의’로 규정했다. 고신측은 63회 총회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객관적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말씀에서 어긋나거나 벗어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며 “이적(異蹟)이나 능력(能力)이 행해진다는 사실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다음은 2013년 63회 고신 총회의 꿈, 환상, 예언, 직통 계시에 대한 연구 보고서다.

서 론
신사도 운동은 빈야드 운동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다고 믿는 운동이다. 따라서 이적, 신유, 귀신축출, 죽은 자를 살리는 일 등 초자연적인 것과 초대교회에 번성했던 방언, 예언, 통역 등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고 믿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사도 운동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근거한 소위 ‘교회의 5대 직분 체제’ 즉, ‘사도’, ‘선지자(예언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가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올바로 자리 잡아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신 대로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즉, 신사도 운동가들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예언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들은 특별한 집회를 통해 성령의 은사를 전수(impartation)할 수 있고, 과거와 같이 맹목적인 회개로 인한 죄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 앞에서 통회와 자복으로 본질적인 회개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예언’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계속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꿈이나 환상, 음성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성경 시대의 계시가 계속되는 것처럼 말함으로 많은 사람을 오도하며 교회를 혼란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구약 시대의 예언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 또는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자신의 뜻을 알리셨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직접 말씀하셨으며(창 1:28, 2:16-17, 19). 타락 후에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참 3:8-19, 4:6-15). 하나님은 노아에게 직접 말씀하셨으며(창 6:13-21, 7:1-4, 8:15-17, 9:1-17), 족장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창 12:1-3, 13:14-17, 15:13-21, 17:1-22, 22:1-2 등),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도 하였다(창 15:1, 28:12-16 등). 또 요셉에게는 꿈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도 하셨다(창 37:5-7, 9-11).

모세와는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셨으며(민 12:7-8), 여호수아, 사울, 사무엘, 다윗 등과도 말씀하셨다. 특별히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백성에게 계시하셨다. 심지어 필요한 경우에는 이방인에게도 자기의 뜻을 계시하셨다(창 20:3-7, 40:5-23, 41:1-8 등).

그런데 선지자들 중에는 참 선지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도 있다. 여호와께서 보내지 아니하셨는데 여호와께서 보내셨다고, 또는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거짓으로 예언하는 자들이다(신 18:20).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만일 어떤 선지자가 말했는데 그 말에 ‘증험’(證驗)도 없고 ‘성취(成就)함’도 없으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 18:22) 여기서 “증험도 없고”는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그 말(일)이 있지 아니하면”이고 “성취함도 없고”는 직역하면 “이 말이 오지(일어나지) 않으면”이다. 따라서 이 둘은 하나를 가리키는데, 곧 어떤 선지자라 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 성취되지 않으면 그는 거짓 선지자란 말이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의 판단 여부는 그 예언한 말씀의 성취여부로 판단하게 된다(왕상 22:11-36, 렘 28장 참조).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원리는 그 선지자의 예언의 내용이다. 즉, 어떤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보이고, 그가 말한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자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니 죽이라고 말한다(신 13:1-5). 따라서 이적이나 능력보다도 또는 예언의 성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선지자가 말한 내용이 올바른가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이 다른 신들을 섬기자는 것이라면 그 선지자는 이적이나 기사, 또는 예언의 성취 여부에 관계없이 거짓 선지자이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거짓 선지자에게도 이적과 기사, 또는 예언 성취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시험(試驗)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신 13:3).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라면 어떤 이적이나 성취에 관계없이 거짓 선지자로 판단하여야 함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것을 조금 확대 적용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그 어떤 능력이나 성취가 있더라도 거짓이요 잘못된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초대 교회의 예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구약의 예언을 이루셨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한다(히 1:1-2).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으며, 또 기록해 주었다. 사도들이 기록한 복음서와 서신들은 대부분 남아서 정경(正經)으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안에는 ‘선지자들’이 많이 활동하였다. 에베소서 2:20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는데, 여기서 ‘선지자들’은 에베소서 3:5과 비교해 볼 때 구약의 선지자들이 아니라 신약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천하에 흉년이 들 것을 예언했으며 그대로 되었다(행 11:28, 21:10-11). 전도자 빌립의 딸 넷도 ‘예언하는 자’라고 한다(행 21:9).

로마서 12:6에 보면 교회에 주신 은사들 가운데 ‘예언’(propheteia)이 나온다. 이 ‘예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은 쉽지 않다. ‘예언’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모든 활동을 다 포괄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특별한 의미에서의 예언 곧 하나님의 특별 은사 중의 하나로서 ‘새로운 것들을 알리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고전 12:10 참조). 헤르만 리덜보스는 이에 대해, 이것은 어떤 발언들을 하도록 강제되는 것을 말하는데 고전 14:3에 의하면 교회를 세우고 권면하며 격려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래의 일들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리덜보스의 견해는 대체로 맞다고 보지만, 그러나 미래의 일에 대한 것이 꼭 제외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초대교회에서는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적지 않게 있었다. 따라서 차라리 박윤선 박사처럼 ‘예언 사역은, 사도의 사역처럼 계시 시대(시도 시대)에만 있었던 단회적(單回的)인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된다.

고린도전서 14:3에 보면 ‘방언’(方言)에 비해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의 현재 상태나 미래의 일에 대해 말하고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같은 장 24-25절에 보면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 한다. 여기에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난다’는 말을 보면, 이 에언이 꼭 권면과 위로의 말로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고 특별한 은사로서의 예언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예언 은사의 중단
이러한 특별한 ‘예언’의 은사는 성경이 완성됨과 동시에 중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의 구원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과 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계시는 신구약 성경 66권으로 완성되었으며, 또 다시 새로운 계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시록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 22:18-19).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66권의 성경 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적용함으로써 우리의 구원과 생활에 필요한 지침을 다 얻을 수 있으며, 이에서 벗어나 새로운 계시를 바라고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2세기의 몬타누스주의자들은 그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새 예언’(nova prophetia)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계시가 자기들에게 와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이들의 주장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지만, 나중에 이들이 이단으로 빠지는 것이 분명해지자 기성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한정 확장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정경(正經)은 사도들의 시대로서 종결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교회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이단으로 빠지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과격한 천년주의자들,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등).

따라서 신구약 66권으로써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규범이 되는 정경은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은 잘못이며 큰 재앙을 불러온다(계 22:18-19).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초대 교회에 역사했던 예언도 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경의 완성이라는 계시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4. 성령의 특별한 인도와 간섭
요즘 한국교회에 자칭 예언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직통계시라도 받는 듯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상투적으로 사용한다.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온갖 허튼 소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범람하여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주님(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말씀을 전할 때에 한해서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 말씀과 다른 말을 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과 진배없다. 자칭 예언자들은 그들의 예언이 성경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교인들이 성경 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을 더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니 성경보다 그들의 예언이 훨씬 더 실질적인 권위를 가진 셈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나 메시지가 주어졌다고 생각될 때에도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마음에는 성령뿐 아니라 육신적인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에 의해 자극된 온갖 잡다한 생각과 메시지가 복잡하게 교차되기 때문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물론 오늘날에도 우리 개개인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특별한 인도와 간섭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에도 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풀어 주고 적용해 주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지만,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직접 그 뜻을 나타내 주시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특별한 경우에 가끔 하나님께서 믿음의 성도들에게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으로 보여 주시거나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음을 듣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박관준 장로나 안이숙 여사, 그리고 옥중 성도들의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히 간섭하시고 인도하신 경우를 듣고 있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 우리는 이것을 ‘예언’이나 ‘계시’라고 부르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 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객관적 계시로서의 예언은 사도시대로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례와 같이 매우 예외적이고 긴급한 특수 상황에서 하나님이 특별하게 인도하시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꿈이나 환상, 육성은 더 이상 계시적인 방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자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보편적인 방편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환상이나 꿈을 해석하여 신적 메시지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인간적인 꿈일 수도 있고, 허상을 본 것일 수도 있으며, 또는 단순히 심리적인 작용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사탄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신비 체험을 주어서 성도들을 교란시키는 경유이다(고후 11:13-15, 살후 2:11-12).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특별한 체험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것인지 아닌지를 검증해야 한다(고전 14:29,32, 살전 5:21, 요일 4:1). 그래서 기록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을 때에는 아무리 그 체험이 그럴듯하고 확실해 보인다 할지라도 잘못된 것으로 배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을 때에라도, 우리는 그 체험을 의지하지 말고 그와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붙들도록 해야 한다.

5. 성령의 인도와 인간의 죄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초대 교회와 똑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소위 그들의 ‘계시’ 또는 ‘예언’을 성경의 권위와 같은 차원에 두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요 16:13)은 우리가 항상 진리 안에 거하며 실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순절 날에 보혜사 성령 곧 진리의 영을 받은 베드로드 안디옥에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였으며(갈 2:11-14),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의 문제로 서로 다투어 헤어졌다(행 15:36-41). 또한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하였으며(벧후 3:16), 바울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하였다(고후 11:30). 따라서 진리의 영이 오시면 사도들이 전혀 죄도 없고 실수도 없고 연약함도 없는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이유는 사도들을 포함해서 우리에게는 중생 후에도 죄와 연약함이 남아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의 남아 있는 죄로 인하여 성령의 인도가 방해받고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비록 행함이나 생활에 있어서 연약함이나 실수가 있었을지라도, 복음을 전하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오류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벧후 1:21). 이것은 그들이 전한 복음의 권위와 직접 관련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갈 1:8). 또한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게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다(11-12절). 베드로는 또한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벧후 1:21). 특히 성경을 기록할 때에 특별한 성령의 감동으로 조금의 오류가 없도록 인도하셨다고 보아야 한다(딤후 3:16).

이처럼 사도들의 가르침과 기록에는 성령의 특별한 인도가 있었으며,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인도와 구별되는 것이다. 전자를 성령의 ‘계시’(啓示, revelatio) 또는 ‘영감’(靈感, inspiratio)이라고 부르며, 후자를 성령의 ‘조명’(照明, illuminatio)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사라졌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일체의 오류가 없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사도 이후 시대에도 계속 이어진다고 본다. 그래서 소위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교황이 ‘강단에서’(ex cathedra) 말하는 것은 무오(無誤)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교황 무오설을 지지하기 위해 그들은 성령의 특별 사역을 끌어들인다(마 16:18, 28:29, 요 14:16이하, 15:26, 16:12이하). 물론 그들은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구별을 하기는 한다. 사도들에 대한 성령의 활동은 ‘계시’(revelatio)와 ‘영감’(inspiratio)에 있었지만, 교황에 대한 활동은 ‘조력’(assistentia)에 있다고 한다. ‘영감’에 있어서 성령의 활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초자연적이었지만, ‘조력’에 있어서 그것은 대개 교회를 오류로부터 보호하는 ‘섭리’(providentia)의 돌봄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교황’의 권위를 ‘성경’과 같은 차원에 두는 것이며, 실제로는 성경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왜냐하면 교황이 신앙과 생활의 문제에 있어서 무오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자료와 그 해석에 있어서, 곧 무엇이 성경과 전통인지를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무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곧 그들은 진리의 영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가지고 ‘교회’는 무오하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이는 결국 ‘교황’의 무오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교회’를 절대화하는 것으로서 역사적 사실에도 맞지 않다. 교회는 부패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부패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난 교회는 아무리 숫자가 많고 만장일치의 결정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가 교회의 무오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지만, 이것은 우리가 항상 무오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하여 항상 성령의 충만한 인도하심을 온전하게 받지 못하며, 우리의 부패성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방해받곤 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도리와 기본적인 삶의 원리에 대해서는 분명하고도 충분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외의 어려운 주제들이나 성경 해석들에 있어서는 다 알지 못하며 때로 실수할 수도 있다. 이것은 노회나 총회의 결정도 마찬가지며 국제회의의 결정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압도적인 다수로 총회에서 ‘동성연애’가 합법적이며 죄가 아니라고 결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종교간의 대화를 주장하면서 무당의 굿판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참된 성령의 역사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의 죄와 불순종을 가리기 위해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6. 자신의 특별한 체험을 객관화하여 다른 이들에게 강압하는 위험
이처럼 오늘날 성도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지만(요 14:26, 16:13, 롬 8:14, 갈 5:18), 그렇다고 우리를 무오한 상태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최선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우리에게는 죄성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하다. 따라서 자신이 특별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것을 보편화하여 다른 교인들도 꼭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라고 생각할지라도 과연 그러한지 아닌지를 증명할만한 ‘객관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꿈이나 환성이나 음성으로 나타나는 특별한 체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도 잘못되고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결코 객관적인 교리나 윤리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체험을 해야 한다고 종용할 수 없다. 비록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진실하다고 생각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객관적 계시인 성경 말씀밖에 없다.

결 론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객관적인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말씀에서 어긋나거나 벗어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비록 아무리 큰 능력과 신기한 이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탄도 그런 이적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는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는” 이적을 행한다고 한다(계 13:13).

따라서 이적(異蹟)이나 능력(能力)이 행해진다는 사실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온다고 하였으며 (마 7:15), 사탄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하였다(고후 11:14).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허용하시는 목적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살후 2:12).

말세가 되면 이런 미혹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더욱 놀랍고 신기한 일들로 사람들을 미혹하고자 할 것이다. 이적을 행하며 능력이 나타나며 소위 예언이 성취되는 일 등이 일어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다(신 13: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며(요 14:21),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말세가 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으로 삼고 따르는 것은 참 성도와 아닌 것을 구별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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