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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은 “가장 탁월하고, 가치 있는 신앙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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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은 “가장 탁월하고, 가치 있는 신앙고백”
  • 김민주
  • 승인 2016.08.18 1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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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래 교수, ‘메시아닉 운동과 사도신경 오독에 대한 비판’ 기고

정원래 교수(총신신대원·역사신학)가 지난 2016년 8월 12일, 기독신문에 ‘메시아닉 운동과 사도신경 오독에 대한 비판’이란 제목으로 기고했다.

▲ 정원래 교수의 기고문 일부 (출처 : 기독신문 www.kidok.com)

메시아닉 교회 등 사도행전 반대세력의 주장에 대한 오류
정 교수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유대 전통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적 유산으로 믿는 교회’라고 주장하는 ‘메시아닉 교회’를 비롯해 상당수의 그룹들이 사도신경을 부정하거나 공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도신경을 부정하는 그룹들은 사도신경을 ‘바벨론적’, ‘이교도적 교리’, ‘사탄적’이라고 여기며, 사도신경의 폐기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근본적 오류는 대부분 성경이나 사도신경에 대해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오독하는 것에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천지를 만드신’에서 어떤 이들은 ‘만드셨다’(made)가 아니라 ‘창조하셨다’(created)로 해야 한다며, “사도신경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문의 단어를 살펴보면 라틴어로 ‘creavit’으로 ‘창조하셨다’는 의미다. 정 교수는 “이런 오해 때문에 새번역 사도신경에서는 ‘창조하셨다’로 바꿔 표기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도신경은 성경내용의 요약이다”
‘사도신경은 가톨릭의 전유물인가’란 질문에 대해서 정 교수는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초대교회나 로마가톨릭만의 전통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사도신경은 성경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가장 잘 제시한다고 인정받았기 때문에, 주요 프로테스탄트 신앙 고백서들과 교리문답서들이 사도신경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며,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저서인 <기독교 강요>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정 교수는 “<기독교 강요>가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사도신경의 구조에 따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설명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 사도신경의 중요성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실례가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사도신경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나시고’를 ‘마리아 숭배’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는 예수그리스도가 ‘죄 없음, 참 인성을 지니심’ 등을 고백하는 것”이라며, “사도신경에서의 ‘동정녀 마리아’를 마리아 숭배와 연결해서 읽으려는 것은 로마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사고를 그대로 적용하는 오류에서 나온다”고 반박했다.

“사도신경 내용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의 정수”
정 교수는 “결론적으로 메시아닉 교회와 동조하는 자들의 삼위일체의 교리와 사도신경에 대한 공격은 성경의 주장과 성경 본문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교회의 역사에서 사도신경은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의 핵심 진리의 요약이며, 기독교의 가르침과 이단 분파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고 했다. 또, “사도신경의 고백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자신이 믿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드러내며, 교회의 하나 됨을 드러내는 가장탁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마무리했다.

다음은 기독신문에 올라온 정원래 교수의 기고문 전문이다[해당 기독신문 기사 바로가기].

 

[특별기고] 메시아닉 운동과 사도신경 오독에 대한 비판

정원래 교수(총신신대원·역사신학)


현재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유대 전통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적 유산으로 믿는 교회’라고 주장하는 ‘메시아닉 교회’가 등장해서 여러 물의를 빚고 있다. 이들은 교회의 다양한 전통들이 이교적인 영향을 받았고, 참 교회를 회복하는 길은 유대적 전통과 절기 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메시아닉 교회들은 삼위일체와 사도신경을 부정하거나 공격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이방종교의 산물로, 교회의 각종 전통들을 로마적 산물로 지적하며, 유대적 전통과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대표주자의 하나인 로버트 D. 하이들러(R. D. Heidler) 등은 각종 저술들을 통해 기독교 본래의 정신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시대에 왜곡되기 시작하였다고 지적한다.

이들과 더불어 상당수의 그룹들이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삼위일체와 사도신경을 경쟁적으로 비난하여 많은 신자들을 염려케 한다. 이들은 삼위일체에 관한 비판에서 초대교회 때 교회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되었던 이단들의 주장을 유사하게 반복한다.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에서 그들은 ‘유일신론’(monotheism)과 ‘단일신론’(monachianism)의 구분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특히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경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단일신론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구원론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 참인간’으로, 그리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 온전한 구원론이 성립한다는 점이다.
또한 사도신경을 ‘비성경적’, ‘바벨론적’ 혹은 ‘이교도적 교리’로 지칭하는 것을 넘어, 심지어는 ‘사탄적’이라고까지 적대하며, 사도신경의 폐기를 주장한다. 그러나 저들의 비난은 대부분 성경이나 사도신경에 대한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과 오독에 근거한다. 이에 필자는 사도신경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비판에서 몇 가지 점들의 심각한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1. 사도신경의 형성이 이교적인가?

먼저 사도신경의 형성이 로마가톨릭의 우상숭배적 음모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는 역사에 대한 이해와 사도신경에 대한 이해가 모두 결여된 주장이다. 먼저 초대교회에서 사도신경의 모태가 되는 것으로 ‘사도적 전승’ 혹은 ‘신앙의 표준’(regula fidei)으로 불리는 것들이 존재했다. 이것들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요약하여 세례예비자들을 교육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각 교회마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각기 작성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다 2세기에 이르러 영지주의 이단들과 대적하던 교부들은 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이레네우스(Irenaeus),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us), 오리게누스(Origenus) 등 교부들이 ‘신앙의 표준’ 혹은 ‘교회의 표준’으로 정리하였다. 비록 이들이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정리하였으나, 근본적인 내용에서는 일치하였다. 이러한 표준들은 동방교회에서는 ‘니케아신조’로 수렴하고, 서방에서는 ‘로마신조’, 소위 ‘사도신경(Apostle’s Creed)으로 통합되었다. 이어 현재와 같은 ‘나는 믿습니다’(credo)의 형태는 니케아 공의회(325년)를 거치며 4세기 후반에야 등장한다.

서방교회에서 최초로 라틴어 사도신경의 본문을 작성하고 이를 주석한 인물이 4세기 말경의 루피누스(Rufinus)이다(약 390년경). 이 본문에 점차, ‘음부에 내려가사’, ‘공회’, ‘성도의 교제’ 그리고 ‘영생’ 등이 첨가되었다. 6세기 혹은 7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형태로 형성되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초대교회 때부터 세례예비자들에게 신앙을 교육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시작하였다. 후대에 첨가된 부분도 있지만, 그 근간은 이미 2세기 때 이루어졌다. 또한 사도신경의 각 단락들은 상당한 신학적 논쟁과 질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초기 형태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사오며’에서, 얼마 후 ‘천지를 창조하신’이 더하여졌다. 이는 전능자 하나님과 창조주 하나님을 분리시키려는 당시의 영지주의 운동에 대한 반대였다. 이처럼 사도신경 본문은 각 단락이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를 담고 있다.
따라서 사도신경이 예수님의 12제자와 직접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권위가 없다고 말하거나, 4세기 때에 와서 로마교회의 영향 하에 현재의 형태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거나, 혹은 일부 본문들이 들어가거나 빠진 부분으로 사도신경을 부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기독교는 사도신경의 내용이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의 정수에 해당한다고 고백해 왔다. 교회의 역사에서 사도신경은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의 핵심 진리의 요약이며, 기독교의 가르침과 이단 분파들을 평가하는 기준이며, 신자의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믿음의 고백이며, 서로 다른 지역과 교회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고백되어 왔다.

2. 사도신경은 가톨릭의 전유물인가?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초대교회나 로마가톨릭만의 전통이 아니다. 사도신경은 성경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가장 잘 제시한다고 인정받았기 때문에, 주요 프로테스탄트 신앙 고백서들과 교리문답서들이 사도신경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 사도신경의 중요성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실례가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저서인 <기독교 강요>이다. 칼빈은 이 저서에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사도신경의 구조에 따라 설명했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 개혁주의 중요한 신앙고백들, <하이델베르크 교리교육서>(The Heidelberg Catechismus), <벨기에 신앙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 그리고 <도르트 신경>(The Cannons of the Synod of Dort)은 공통적으로 기독교의 기본진리의 하나로 사도신경을 고백한다.
따라서 사도신경이 프로테스탄트와 무관한 로마가톨릭적, 이교도적, 혹은 바벨론적 교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와 교회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주장이다.

3. 사도신경에 대한 그릇된 오해들
사도신경을 사탄적, 마귀적, 바벨론적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근본적인 오류는 교회의 역사에 대한 무지와 사도신경의 본문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과 오독에 근거한다.

첫째로 많은 자들이 사도신경 본문에 대한 오독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천지를 만드신’에서 ‘만드셨다’(made)가 아니라 ‘창조하셨다’(created)로 해야 한다고 사도신경이 틀렸다고 말한다. 원문의 단어는 ‘creavit’(라틴어, 창조하셨다)이다. 이런 오해들 때문에, 새번역 사도신경에서는 ‘창조하셨다’로 옮겼다. 또한 ‘그 외아들을’(헬라어: τὸν υἱὸν αὐτοῦ τὸν μονογενῆ, 라틴어: Filium ejus unicum)이라고 번역한 것은 원문에 가장 합당한 문자적 번역이다. 일부에서 외아들을 ‘독생자’(unigenitus)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독생자 역시 ‘유일한 자’와 ‘낳아진 자(수동태)’의 결합이다(unus+genitus). 오히려 독생자라는 표현보다, ‘외아들(하나님의 낳은 유일한 아들)’이라는 의미가 더 생생하다. 우리말 번역의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 마치 신학적, 성경적 오류인 것처럼 공박하는 것은 지독한 문자적 오독에 근거하여 사도신경을 공격하는 것이다.

둘째로 사도신경을 공격하는 자들이 내세우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나시고’이다. 여기서 이들은 ‘마리아 숭배’라고 외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2권 13장 4절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의 어머니가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나셨다는 것뿐이 아니라, 그가 성령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어 아담의 타락이 있기 전에 있었던 생산과 같이 순결하고 오염이 없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를 고백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가 ‘죄 없음, 참 인성을 지니심’ 등을 고백하고자 함이다. 이레네우스의 『이단논박서』, 테르툴리아누스의 『프락세아스 논박』 등은 마리아 숭배가 시작되기 이전의 2세기에 그리스도의 참 인간이심을 부인하는 이단들을 공격할 때 ‘동정녀 마리아’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1563년 <하이델베르크 교리교육서>의 제 35문을 이렇게 질문한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답: ‘…성신의 사역(使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인성(人性)을 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또한 다윗의 참된 자손이 되고 모든 일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이 사도신경의 고백을 통해 교회는 예수그리스도가 마리아로부터 참된 인성을 취하셨고, 죄가 없음을 고백해 왔다. 사도신경에서의 ‘동정녀 마리아’를 마리아 숭배와 연결해서 읽으려는 시도는 로마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사고를 그대로 사도신경에 적용하려는 오류에서 나온다.

셋째로 많은 자들이 비난하고 있는 부분이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다. ‘거룩한 공회’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sanctam ecclesiam catholicam)를 의미한다. 여기서 비판자들은 ‘로마가톨릭’에 대한 고백이며, 옹호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강요> 4권, 1,1에서 칼빈은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공회(ecclesiam)를 믿는다’는 것에서, ‘공회’란 ‘가견적 교회뿐만 아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적고 있다.
이어서 칼빈은 ‘교회를 보편적(catholic)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누어지지 않는 한 교회도 둘이나 셋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으므로 한 머리를 의존하며 서로가 한 몸이 되고, 한 몸에 달린 지체들 같이 서로 단단히 결합된다. 그들이 참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또 같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함께 살기 때문이다’(Insti. IV, 1.1)로 표현한다.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의 의미는 아시아의 교회, 유럽의 교회, 아메리카의 교회가 각기 다른 교회가 아니라, 모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이며, 한 하나님과 한 그리스도에 참여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동일한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은 한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고백이다. 따라서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서 사도신경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communionem sanctorum)는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내재한다. 왜냐하면 로마가톨릭이 성도의 교제에서 마치 ‘공덕을 서로 나눔’(通功)의 의미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소위 죽은 ‘성인들’(Saints)과의 교제를 말하는 것처럼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교제’(communio)는 ‘성찬을 함께 나눔’의 의미였다. 즉 초대교회에서 참된 신자들이란 ‘성찬에 함께 참여하여 교제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성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성찬을 함께 한다는 것은 깨어진 관계들이 회복되었음을 증명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중세에서 로마 가톨릭적인 성도의 교제란 결국 모든 성례(7성례)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선과 유익과 덕들을 서로 나눈다고 이해함으로 성도의 교제의 범위를 죽은 자들에게까지 확대했다.
이런 점에서 7성례를 인정하지 않는 프로테스탄트와 분명한 차이가 발생한다. 프로테스탄트에서 신자는 성례(세례와 성찬)를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눈다. 세례와 특히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경험함을 고백하는 것이 성도의 교제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성도의 교제란, 신자들이 각각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주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분의 풍성한 은사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각자가 받은 은사를 다른 지체의 유익과 복을 위해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할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메시아닉 교회와 동조하는 자들의 삼위일체의 교리와 사도신경에 대한 공격은 성경의 주장과 성경 본문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메시아닉 교회들은 구약과 안식일과 유대절기의 회복을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성경에 내포하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살피고, 영적인 유익을 얻는다고 하면 동의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마치 구약적이고 유대적인 것이 참교회인 것처럼 주장한다면 인정할 수 없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참 교회’의 모습을 지니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지니며, 교회의 본질이 살아나고, 참된 신앙이 회복되고, 나아가 온전한 진리가 선포되기를 간절히 열망한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신앙의 진리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전적인 신뢰로 구성되며, 참된 믿음에서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도신경의 고백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자신들이 믿는 믿음의 내용들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며, 교회의 통일성을 드러내는 가장 탁월하고, 가치 있는 신앙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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