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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 경험한 에드워즈, 은사중단론 주장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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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 경험한 에드워즈, 은사중단론 주장 왜?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6.05.26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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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진 교수, "성령역사 강조하면서도 교회 혼란 주는 세력 철저 경계"
▲ 2016년 5월 6일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진행한 기독교학술원 영성포럼

2016년 5월 6일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이 ‘성령은사의 지속성’을 주제로 100주년 기념관에서 영성포럼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조현진 교수(한국성서대학, 역사신학)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성령의 은사’라는 제목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에드워즈가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고 역설했다.

조 교수는 이 발표를 통해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부흥운동을 체험한 에드워즈가 왜 성령의 특별은사에 대해서 은사중단론(사도시대에 일어났던 방언, 통역, 신유, 능력 행함 등을 포함한 성령의 은사들이 당시에는 필요에 의해 주어졌지만 현재는 중단되었다는 주장)을 주장하는지를 함께 고찰해보자고 했다. 

조 교수는 에드워즈가 두 번에 걸친 부흥을 경험했고, 그 가운데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이 주시는 여러 은사들을 다양하게 목도했다고 전했다. 더불어 그는 목회자로 부흥운동을 인도한 것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에드워즈가 자서전에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으며 경험한 영적 체험을 기록했고, 이 외에도 여러 번 깊은 영적 체험을 경험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조 교수는 성령의 역사를 그토록 강조하는 에드워즈가 은사중단론을 주장하는 이유로 에드워즈가 처한 당시 역사적 상황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에드워즈는 특별 은사를 절대적으로 보아 교회의 혼란을 가져왔던 극단적 새빛파들의 입장을 경계하면서 성도들이 성령의 역사에 대해 신중히 판단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오해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지 않고자 고민했던 에드워즈의 신중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끝으로 조교수는 에드워즈는 특별 은사에 대한 신중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일반적인 은사와 그 은혜를 강조하는 성령의 신학자였다고 말했다. 또한 이러한 그의 입장이 오늘날 구원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대한 관심보다는 비범한 은사나 신기한 체험이 더 우월한 것처럼 강조하는 일부 한국 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조현진 교수의 발제문 전문이다(각주는 기술적인 문제로 올리지 않습니다. 다만 독자 여러분들이 다운로드받을 수 있도록 링크를 걸어 뒀으니 필요하신 분은 받아서 보시기 바랍니다 다운로드 게시판 바로가기).

 

조나단 에드워즈와 성령의 은사
조현진 교수(한국성서대, 역사신학)

서 론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는 1차대각성운동을 이끈 미국의 부흥운동가이자 개혁신학자이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부흥운동을 이끌면서 이를 기록하여 후대의 여러 부흥운동에 영향을 미친 『놀라운 부흥과 회심이야기』(A Faithful Narrative)를 저술하였다. 부흥운동을 인도하면서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작품도 상당 수 남겼다. 당시 그는 부흥과 성령의 역사를 오해하고 있는 두 대적과 마주해야 했는데 첫 번째 그룹은 이성을 강조하고 영적 체험을 외면하고 조롱하기까지 하는 이성주의자들과 다른 한편은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만 주관적인 영적 경험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며 영적인 혼란을 일으키는 열광주의자들이었다. 이성주의자들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기독교조차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는 결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영역임을 변호하면서도 또 다른 방향인 열광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나 직접계시 등을 주장하는 것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에드워즈가 직접 체험하고 연구한 성령의 역사와 은사에 대한 그의 해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특별은사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은사중단론의 입장에 서 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부흥운동을 체험한 에드워즈가 왜 은사중단론을 주장했는지를 살피면서 그가 던져주는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성령의 은사에 대한 두 견해
은사중단론(Cessationism)은 사도시대에 일어났던 방언, 통역, 신유, 능력 행함 등을 포함한 성령의 은사들이 당시에는 필요에 의해 주어졌지만 현재는 중단되었다는 주장이다. 즉 사도들이 교회를 세워가고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단계에서 은사들이 사용되었지만 이제는 은사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입장이다. 이를 대표하는 학자로는 리차드 개핀(Richard B. Gaffin Jr.)을 들 수 있다. 이런 은사중단론에 반대하여 최근 활발한 성령의 역사로 교회의 부흥과 영적 각성을 이끌고 있는 오순절 운동과 그 은사주의자들은 은사지속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만 할까? 웨인 그루뎀(Wanye A. Grudem)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성령 운동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지적하기를, 은사중단론, 오순절교회와 은사주의 등은 명확히 성령의 은사에 대해 규정된 시각과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이 복음주의 진영 전체를 대표하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현재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특정한 성령의 은사들을 1세기에 국한시키는 은사중단론에 대해서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오순절교회처럼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모습도 역시 다소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에드워즈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판단된다.

2. 에드워즈가 체험한 성령의 역사
미국 제1차대각성운동을 이끌었던 에드워즈가 체험한 여러 성령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드워즈는 두 번에 걸친 부흥을 경험하였는데 첫번째가 1734년부터 1735년까지 일어난 코네티컷 리버 벨리(Connecticut River Valley) 부흥이며, 이어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70)의 신대륙 방문을 시작으로 해서 1740년부터 1742년까지 지속된 1차대각성운동으로 미국 전역에 널리 확산되는 부흥을 경험했다. 두 번의 부흥운동을 주도한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주시는 여러 은사들을 다양하게 목도할 수 있었다. 그는 부흥과 성령의 역사에 대한 여러 기록과 작품들을 남겼는데, 무엇보다 코네티컷 리버 벨리 부흥을 경험하면서 부흥의 현상들을 기록한 『놀라운 부흥과 회심이야기』를 남겨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제 에드워즈가 남긴 성령의 역사에 대한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에드워즈가 체험한 성령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점검하고자 한다.

1) 부흥의 역사
에드워즈는 부흥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일으키시는 성령의 역사로 보았다. 심지어 후천년주의자였던 그는 교회의 부흥을 역사적으로 천년왕국의 시작으로까지 보았다. 그가 경험한 첫 번째 부흥인 1730년대의 부흥은 마을 한 젊은이의 장례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담임하고 있던 노스햄턴(Northampton) 교회에서 장례예식 설교를 통해 에드워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의 한계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게 했다. 이처럼 1734년 몇몇 청년들의 갑작스런 죽음은 신앙과 구원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많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켰다. 이때에 에드워즈는 연속설교인 이신칭의 설교(Justification by Faith Alone)를 통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들임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말씀의 역사를 통해 심령마다 은혜를 사모하며 성령의 역사가 마을 전체로까지 확산되었다. 당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1735년 봄과 여름, 마을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했습니다... 거의 모든 집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놀라운 징조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가족에게 임한 구원으로 인해 기쁨이 넘치는 시기였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거듭남을, 남편은 아내의 거듭남을, 아내는 남편의 거듭남을 기뻐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성전에서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었습니다. 주의 날은 기쁨의 날이 되었고, 주님의 전은 사랑스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예배는 아름다웠습니다. 예배드릴 때 회중은 생기로 넘쳤으며, 모든 사람이 예배에 집중하며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수를 마시는 것처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수시로 모든 회중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슬픔과 고통으로 울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기쁨과 사랑으로 울고 있는 사람도 있었으며, 이웃의 영혼에 대한 염려와 동정심으로 울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후 회심자가 지속적으로 생기면서 마을 전체가 영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영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부흥의 역사는 에드워즈의 희망대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의 이모부이기도 했던 조셉 홀리(Joseph Hawley)의 자살로 부흥이 암흑의 세력으로 인해 약해지는 모습을 에드워즈는 안타깝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에드워즈는 또 다른 부흥을 일으키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중에 영국의 복음설교가인 조지 휫필드가 신대륙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에드워즈는 이를 기회로 삼아 휫필드에게 자신이 시무하는 노스햄턴 교회에도 방문해줄 것을 부탁했다. 에드워즈의 청원을 받아들인 휫필드는 1740년 10월 노스햄턴을 찾았고 그의 설교는 다시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다.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성령의 역사와 체험들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묘사하기를, “설교마다 회중의 마음은 완전히 녹아버렸다. 거의 모든 사람이 설교시간에 눈물을 흘렸다.” 이어 에드워즈는 자신의 회심 설교인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을 통해 많은 영혼을 지속적으로 일깨웠다. 이 설교를 듣던 당시 회중의 반응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설교가 끝나기 전에 큰 통곡소리가 들렸다. 예배당은 사람들이 부르짖는 소리로 가득찼다. ‘구원을 얻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 나는 지옥으로 가고 있구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래서 설교자가 그들을 중지시키려고 했다. 비명과 고함 소리, 놀람이 있었다. 조금 기다린 후에 회중은 계속해서 기도했다... 우리는 강단에서 내려와 사람들에게 말했다. 어떤 사람은 이곳에서 또 다른 사람은 저곳에서 놀라움과 두려움, 능력,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고 많은 영혼이 소망을 얻게 되었고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위로를 받았다.

이처럼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신음하였으며 그 소리가 꽤 멀리까지 들렸다. 이처럼 성도들은 말씀의 역사를 통해 성령의 임재하심과 이를 통한 육체적 반응, 그리고 깊은 영혼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에드워즈는 신유의 은사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부흥이 일어나는 동안 마을의 병자들이 줄어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예배 시간에 자기 가족이나 지인의 병명을 적은 기도제목을 통해 기도부탁을 하곤 했는데 부흥기간 중에는 병자들 자체가 거의 없었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이처럼 에드워즈는 교회와 성도들의 부흥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었다.

2) 에드워즈의 성령체험
에드워즈는 목회자로서 부흥운동을 인도한 것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기도 하였다. 그는 먼저 18세인 1721년 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회심을 체험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대해 내적이고 달콤한 기쁨을 맛보았던 첫 번째 경험은 디모데전서 1장 17절을 읽을 때였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새로운 감각이 내 영혼에 생겼다. 이어 내 영혼 전체에 퍼져나갔다... 나는 속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지를 생각했다. 또한 만일 내가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천국에서 그 분에게 푹 빠지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지 생각했다.

예일대에서 석사과정 중에 회심을 체험하면서 에드워즈는 여러 번 깊은 영적 체험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설명하기를,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세상적인 욕심과 야망의 포기, 성경에 대한 사랑, 진리의 영,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 등과 같은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자신 이외에도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모범적인 예로 자신의 아내인 사라 에드워즈(Sarah Edwards)를 제시한다.

특별히 오늘날 깊고 특별한 황홀경을 체험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상당히 오랜 동안,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의 영광을 보면서 영혼은 완전히 압도당했다. 빛과 사랑과 달콤한 위로, 영혼의 안식과 기쁨을 누렸는데 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체험이었으며 대여섯 시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 체험은 비몽사몽은 아니었으며 육체의 감각을 잃지 않은 상태였다... 신적인 것들을 보는 특이한 체험과 신앙 감정은 대부분 몸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데... 몸의 기운이 빠졌기에 서 있거나 말할 힘도 없었다.

사라는 일반적으로 목회자의 사모로 가지는 부담감과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전 기도모임에서 갑자기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과 황홀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런 영적 체험은 그녀에게 약 2주간 지속되었다. 당시 조나단 에드워즈가 다른 곳에 설교하기 위해 외출 중이었기에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야 했는데, 이전에는 다른 목사님이 에드워즈보다 설교를 더 잘한다고 생각되면 질투심도 들었지만 영적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는 오히려 선포되는 그 말씀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예배 후에 자기 몸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어서 3시간이나 교회당에 머물면서 영적인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심지어 사라는 자신이 이제는 가족의 불행이나 사람들의 비평을 이겨낼 수 있고 심지어 순교까지도 가능하리라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당시 이런 영적 체험에 대해 정신분열이나 착란 증세라고 성령의 역사를 비하하고 조롱하던 사람들을 향해 에드워즈는 주장하기를 “만약 이것이 정신착란이라면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이처럼 인자하고 온유하고 자애롭고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정신착란에 빠지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고도 하였다.

3. 에드워즈의 은사중단론
깊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에드워즈이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성령의 특별은사에 대해서는 은사중단론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은사중단론을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는 모습으로 보아서는 안 되리라 본다. 이제 그의 은사중단론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그는 초대교회에 부어졌던 특별은사에 대해, “사랑과 그 열매”(Charity and its Fruits)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성령의 특별은사들은 예언과 기적, 그리고 성경에서 사도들이 언급하는 여러 다른 것들로 이는 기적적인 은사들을 말합니다. 특별은사로 불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일반적인 과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특별은사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기독교회를 세우고 건설시기 위해 초대교회(the primitive church)에 주신 은사입니다. 하지만 정경(the canon of the Scripture)이 완성되고, 기독교회가 견고히 세워지면서 이 특별은사들은 중단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에드워즈는 은사중단론의 입장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은 특별한 시기에 맞게 특별은사들을 허락하셨지만 이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었기에 성경이 완성되고 교회가 확립되면서 그 은사를 시대에 맞게 거두셨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에드워즈가 성령의 역사를 그토록 강조하고 심지어 변호하기까지 하면서도 은사중단론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처한 당시 역사적 상황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에드워즈는 당시 성령의 역사를 조롱하는 이성주의자들보다 성령의 역사를 주장하면서도 이를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해석해서 성경과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열광주의자들이었던 극단적 새빛파(the Radical New Lights)를 우려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직접 계시를 받으며 심지어 자신들이 가진 영적 투시능력으로 참된 성도와 거짓 성도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시 영적 혼란을 일으키면서 심지어 부흥운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극단적 새빛파의 은사론에 반대하면서 에드워즈는 은사중단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자신의 은사중단론을 변호하기 위해 에드워즈는 먼저 특별은사의 한계와 그 문제를 지적한다. 에드워즈는 특별은사가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는 구원하시는 은혜와는 달리 특별은사는 사람이 지닌 본성의 변화와 관련이 없다고 보았다. 특별은사를 통해 여러 기적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의 본성을 변하게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키지만 특별은사는 이런 구원의 은혜를 동반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이에 대한 모범을 제공하는데, 아름다운 야회복이나 보석이 사람을 화려하게 장식은 해주기는 하지만 그 장식을 하고 있는 사람 자체가 변화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특별은사의 여러 기적들은 이와 같이 사람의 본성적 변화와는 기본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 문제는 특별은사의 유무가 아닌 구원하시는 은혜로 인한 것임을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특별은사의 목적에 대해 에베소서 4장 11-13절을 근거로, “성령의 일반적이고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야말로 모든 특별은사의 목적”임을 밝히면서 이 목적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유익을 도모하지 못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에드워즈는 성령의 특별은사는 일반 은사를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둘째, 에드워즈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에 기반하여 사랑의 은혜가 모든 특별은사들 보다 더욱 귀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랑이 없으면 어떤 은사도 소용이 없음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특별은사들이 위대한 특권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로 마음속에서 열매 맺는 사랑의 은혜만은 못합니다. 사랑의 은혜는 예언이나 이적이나 심지어 산을 옮기는 기적적인 은사보다 더 큰 복락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다윗 열두 사도들이 받았던 그 모든 기적적인 은사들보다 더 큰 축복은 마음속에 일반적인 성령의 감동으로 일어나는 사랑의 은혜인 것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사랑의 마음은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은혜에 기인한 것이기에 사랑에 기인하지 않은 어떤 은사들도 무가치하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에드워즈가 비록 은사중단론을 주장하지만 당시에 성령의 은사를 주장했던 열광주의자들의 잘못된 입장으로 인해 성령의 역사를 오해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지 않고자 고민했던 부흥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에드워즈의 신중한 입장을 확인할 수가 있다. 특별히 에드워즈는 특별은사를 통한 영적 교만의 문제를 경계하였다. 영적 교만은 은밀한 죄로서 영적 교만 자체가 자만심을 일으키고 인간 자신을 드러내게 한다고 지적하였는데 참된 성도와 거짓 성도를 구별할 수 있다는 열광주의자들의 주장은 그로 하여금 그들의 영적 교만을 심각하게 보도록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드워즈는 특별은사의 실패하는 모습들을 경험했기에 다음과 같이 주의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특별은사들에 매우 주의하고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이 은사들이 실패하는 모습을 아주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도들, 심지어 뛰어난 성도들의 마음에 어떤 인상들이 큰 능력으로 인해 새겨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은혜의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과 달콤한 교제를 한 이후나 그 중에 성경 본문이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하늘에서 계시하신 확실한 사인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특별은사에 대해 사실 거부하기 보다는 매우 신중한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에드워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특별은사를 절대적으로 보아 교회의 혼란을 가져왔던 극단적 새빛파들의 입장을 경계하면서 성도들이 성령의 역사에 대해 신중히 판단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미래에 교회의 영광스러운 시대나 천국에서도 사랑의 완전한 통치로 인해 예언이나 방언, 이적과 같은 특별은사들이 다시 회복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적한다. 에드워즈는 특별은사를 지닌 초대교회 모습을 어린 아이의 모습에 비교하고 있다. 특별은사는 기독교 초기에 주어진 어린 아이의 일이기에 교회가 점차 장성하고 성숙하게 되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심지어 에드워즈는 그 은사들이 그 시대의 영광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영광을 감소시킬 수도 있다고 한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교회가 완전한 상태가 될 때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현재의 특별은사들의 모습들보다는 성령께서 더욱 탁월하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일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4. 성령의 진정한 역사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를 구별하는 표지들을 자신의 작품인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성령의 참된 역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아래에서 설명하는 현상이나 표지들이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먼저 성령은 예수의 이름을 높이며 복음이 선포하는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의 구주라는 사실이 진리임을 사람들의 마음에 더 확신시킨다.
둘째로, 성령은 죄를 격려하고 인간의 세상의 정욕을 따르게 하는 사탄의 왕국의 이익에 반대하는 역사를 일으킨다.
셋째로, 성령은 사람들이 성경을 크게 존중하게 하고 성경의 진리와 신성을 더 확신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넷째로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역사한다.
다섯째로 성령은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특별은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성령의 역사가 지닌 다양성을 인정하여 매우 폭넓게 그 역사를 이해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주장하기를, “우리는 경험을 통해 최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난 성령이 역사하는 방법과 회심 과정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헤아릴 수 없고, 추적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하나님의 성령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일정한 틀에 매인 방법으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움직이지 않으신다.”

이처럼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변호하면서도 그 역사를 인간의 표현이나 어떤 형식이나 틀에 매이게 하는 어떤 방식도 거부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에드워즈가 비록 성령의 특별은사를 일반은사와 구별하고 구원하시는 은혜에 비교해 부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역시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 방식을 어떤 신학으로도 쉽게 정리할 수 없기에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 론
에드워즈는 놀라운 부흥운동이 하나님의 역사이며 성령이 일하시는 모습임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에드워즈는 참된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자신의 영적 체험과 목격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성령의 특별은사에 대해서 은사중단론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 이유로는 부흥운동 가운데 일어나 영적인 혼란을 일으키고 교회를 분열시켰던 열광주의자들인 극단적 새빛파들 때문이었다. 이처럼 특별은사에 대한 신중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성령의 일반적인 은사와 그 은혜를 강조하는 성령의 신학자였다. 이상웅이 지적하듯이, 오늘날 평상적 은사 혹은 구원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대한 관심보다는 비범한 은사나 신기한 체험이 더 우월한 것처럼 강조하는 일부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에드워즈의 신중한 입장은 경종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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