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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운철 목사의 세상읽기 Ⅱ/ 24. 믿음이런 믿음, 저런 믿음
장운철  |  kofking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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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5.17  22:5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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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그 가치관들에 물들어간다.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려면 크게 두 가지를 구분하고 잘 알아야 한다. 먼저는 세상이다. 구체적으로 세상에 속한 가치관들이다. 그것의 추구, 목적, 논리 등이다. 그것들 속에 담겨져 있는 비성경적인 내용에 유혹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 다음은 기독 가치관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가치관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성경이 그 기준이요, 바탕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타인의 의견을 통해 세워진, 또는 상상이나 교묘히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성경에서 제시해주고 있는 바로 그 가치관 말이다.

오늘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위의 논리에 따라 4단계로 구분해서 접근해 보려고 한다.
‘세상 - 일반 믿음 - 가짜 믿음 - 참된 믿음’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수많은 가치관에 노출된 상태로 살아간다.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형성해 그 가운데 ‘믿음’을 가지고 판단과 행동을 한다. 이런 믿음도 있고 또 저런 믿음도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기독교 믿음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세상에 속한 믿음으로 인해 우리네 믿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가짜 믿음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괴롭히기도 한다. 그것들 속에서 참된 믿음을 구별해 내자. 그리고 그 믿음으로 세상 속에서 담대하게 또 당당하게 살아가보자.

1. 세상

   
 

먼저 세상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여러 모양의 가치관들이 존재한다. 스티브 윌킨스는 그의 책 <은밀한 세계관>(스티브 윌킨스, IVP, 2013)에서 물질주의, 개인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박애주의, 영지주의, 신비주의 등으로 구분했다. 물질주의는 말 그대로 물질만능주의다. ‘돈이 곧 신이다’, ‘돈이면 모든 게 가능하다’는 등의 철학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교회생활에서도 은밀히 등장한다. ‘교회 가서도 돈 있는 사람이 대접 받는다’, ‘목사님도 돈 있는 사람을 좋아 한다’는 등의 사고방식이다. 성도들의 잘못된 신앙관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슬프게도 현실에서 그런 교회와 목회자들도 많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필자의 기준으로 30여 년 전, 국가 민주화나 정의 사회 등을 부르짖는 철학이 우리네 생각과 삶을 지배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요즘은 그 모든 것들이 ‘돈’으로 집중되는 모양새다. 대학가에서 이슈도 ‘등록금’이 전부가 되어버렸다. 또는 취직이다. TV 등 언론의 ‘경제’문제가 언제나 주요 뉴스가 되었다. 갈수록 이 사회의 흐름도 물질중심적으로 더욱 심화되는 모양새다.

개인주의는 언제나 외친다. ‘너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말이다. 하나님 중심의 철저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하고 누가 이러한 철학에 반대를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그 사고가 비일비재하다. ‘너의 문제가 먼저 잘 해결되고 나서, 봉사를 하든, 헌금을 하든 열심을 내야하지 않겠니, 하나님도 그것을 좋아하실 거야’라는 식으로 말이다. “너희는 먼저”(마6:33)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묵상해야 할 일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 ‘결국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모든 것은 하나의 신으로 모아지게 될 것이다’는 등의 주장이다. 합리적이고 사고의 폭이 넓어 보이는 철학이다. ‘절대’라는 개념이 흐려진다. 문제는 세상의 흐름이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을 응원해주고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보자. ‘흑인은 열등하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물론 100여 년 전 미국사회에서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무지해서 투표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도 믿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믿고 따랐던 철학이었다. 이런 주장을 오늘 누군가 한다면 어떨까. 한 마디로 ‘큰일 날 소리’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전기가 +극에서 -극으로 흐른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전자의 발견으로 실제로는 -극에서 +극으로 전기가 흐른다. 일대 개벽이 일어난 셈이다. 결국 전기는 +극에서 -극으로 흐른다고 말하고, 다만 전자의 이동으로 전기가 흐른다는 식으로 타협을 보고 말았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것이나,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었던 것들이 산산조각 났을 때 사람들이 받았던 충격을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 절대라는 게 없구나’라고 생각할 만하지 않은가. 그 예들이 더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라는 단어를 외우고 다녔다. 태양계를 도는 행성의 나열이다. 과학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그 상식도 깨지고 말았다. 마지막 순서의 명왕성이 그 행성의 자리에서 퇴출되고 만 것이다. 물리학의 중력상수도 화학의 주기율표도 수정될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절대’라는 개념이 공격 받는 세상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절대 신’도 없다고 말이다.

교리보다는 ‘사랑’이 최고라는 박애주의나, 신에게 다가가려면 특별한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영지주의 그리고 신비스러운 현상들을 추구하려는 신비주의 등이 우리네 주변을 감싸는 세계관들이다. 신비와 신비주의는 다르다. 기독교는 ‘신비’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신비이며, 그를 통해 우리고 구원을 얻은 것도 신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도 물론 신비다. 기독교는 신비 그 자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아니다. 신비주의는 신비스럽게 나타나는 현상만을 쫓아다는 것을 말한다. 입신, 쓰러짐, 금이빨, 금가루, 성수 등을 사모하며 추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수많은 세계관들 속에 살아가면서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 활동 등을 한다. 그러한 활동은 ‘믿음’을 전제로 한다. 즉, 모든 사람은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 지금 기독교 믿음을 언급하는 게 아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2. 일반 믿음
‘일반 믿음’을 생각해보자.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 요즘 건강식품에 대한 정보가 쏟아지고 있다. 이런 음식을 먹으면 건강해 진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것을 이끌어가는 수단은 ‘광고’다. 필자도 며칠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양파’에 대한 내용을 시청한 바 있다. 양파즙이나 양파껍질차를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결론이었다. 왜 그런가. 건강 때문이다. 양파만이 아니다. 마늘, 커피, 생각 등에 대한 프로그램도 있다.

식품 복용만이 아니다. 출근할 때 입은 옷도 그 정도면 된다고 하는 작은 믿음으로 선택한 것이다. 출퇴근 교통편도 시간과 편리함 등을 고려해 자신에게 가장 맞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선택한 것이다. 사람들은 때가 되면 월급이 통장에 들어온다는 믿음으로 회사에 출근하고 일을 한다. 월급이 안 들어온다고 믿는 순간 누가 출근을 하겠는가. 또한 누가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각자 나름대로 신뢰할만한 기준을 갖고 있다. 그래서 믿음을 ‘사회적 습득’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마이클 맥과이어, <믿음의 배신>, 페퍼민트, p.28).

‘태양 아래’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최근 개봉되었다. 비탈리 만스키 러시아 감독이 북한 당국의 허락을 받고 제작한 영화다. 감독은 촬영 중 또 하나의 카메라를 몰래 돌려 북한 사회의 내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북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좀더 가깝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주인공 진미는 8살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이니 진미는 실제 그대로의 소년이다. 소년단 입단을 꿈꾸던 진미가 드디어 소년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마지막 인터뷰 중 진미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감독은 당황하면서도 행복했던 때를 기억해 보라고 통역을 통해 달래본다. 그때 진미는 ‘행복, 그런 것 모릅니다’라고 답을 한다. 진미의 말은 지금의 삶, 즉 태양(북한 통치자를 말한다) 아래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것이라는 의미다. 영화는 현대판 트루먼쇼, 즉 거대한 세트장에 갇혀서 살고 있는 북한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 결국 8살 진미의 행복이라는 믿음은 사회적 습득에 의한 것일 뿐이다.

마이클 맥과이어는 그의 책 <믿음의 배신>(페퍼민트, 2014)에서 사람들이 갖는 믿음에 허구가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노파심에서 다시 언급하지만 지금 말하고 있는 믿음은 기독교인의 믿음에 대한 게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갖는 ‘믿음’이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허구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착각상관’이다. ‘믿는대로 본다’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이미 세상 속에서 갖게 된 선지식이 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식이다. 물질주의 가치관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어느날부터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 ‘선지식’이다. 그는 일상의 모든 사건들의 해석을 ‘돈’ 중심으로 해석하려 할 것이다. 회사에서는 물론 가정에서 아내와 자식들의 불평과 불만을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한다. 심지어 교회 와서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또 해결하려고 한다. 신비주의 성향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지인이 사고를 당했을 때, 기쁜 일이 발생했을 때 언제나 신의 개입으로 해석을 하려고 한다. 매사를 그렇게 하는 게 그는 ‘영적’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독서를 해도, 많은 경험을 해도, 사람들과 대화를 해도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취득한다. 다시 말해 책을 많이 읽을수록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바만 갈수록 ‘강화’되는 식이다. 그리고 그는 많은 경험과 지식이 쌓일수록 세상이 정말로 자신이 생각한 대로 움직인다고 확신을 하게 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기가 힘들다. 이미 그들에게는 착각상관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지식’에서 출발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사고방식이나 또는 선생님, 선배 그리고 신문, 잡지 방송 특히 광고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게 된 것들이다. 그 선지식에 갇히게 된다.

둘째는 ‘자기기만’이다. 출처조차 알지 못하는 어떠한 사고에 빠져 살아가는 경우다. 필자 어렸을 때의 경험이다. 교회를 가려고 하면 부모님이 반대를 하셨다. 한 집안에 두 신을 모시면 신들끼리 싸워서 누군가 아프게 된다는 게 그 이유다. 부모님은 철저히 그것을 믿고 따랐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생각인가. 우리는 알 수 없는 생각에 이끌려 살기도 한다. 스스로 만든 생각에 노예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두뇌가 스스로 지어낸 생각을 경험케 한다는 연구보고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한 아이가 동물원에 갔다 왔다. 무엇을 보았는지 그림을 보라고 하자 그는 공룡을 그렸다. 정말 동물원에서 공룡을 보았느냐고 묻자, 그 아이는 ‘그렇다’고 확실하게 대답을 했다. 그리곤 다시 공룡을 보러 동물원에 또 가지고 보챘다. 훗날 다시 동물원엘 방문했다. 당연히 공룡은 없다. 그러자 그 아이는 아마도 다른 곳으로 이사 갔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아이는 이전에 이 동물원에서 공룡을 보았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혹, 우리의 믿음, 기독교 믿음이 자신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믿음은 아닌지 되돌아 볼 때다. 자신이 원하고 소망하는 하나님, 물질축복, 건강회복의 하나님 등을 머리에 그려놓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셋째는 ‘주의력 착각’이다. 직접적인 경험, 또는 증거가 있어도 잘못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과학적 증거 등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 믿음이 우리를 배신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농구공 패스 하는 영상을 실험 참가자들에게 보여주었다. 몇 번 패스를 하는지 세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영상 중간에 고릴라 한 마리가 지나가도록 했다. 실험이 끝나고 참가자들에게 고릴라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약 50%만이 보았다고 대답을 했다. 다른 50%는 고릴라를 본 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즉, 우리가 경험하고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한 것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의 기독교 믿음도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 점검해 볼 일이다. 꿈이나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것들 말이다. 성경을 근거로 신앙생활해야 함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아야 할 일이다.

위의 3가지 경우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믿음’조차도 진짜가 아닌 배신당한 것일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의 많은 가치관들과 그것으로 인한 ‘이런 믿음, 저런 믿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속에서 참된 기독교 믿음을 갖게 된다. 참된 믿음을 갖게 될 때, 세상의 가치관과 그 믿음을 버려야 한다. 그것들을 몰라야 한다,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필요에 따라 그것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공부도 해야 한다. 다만, 그러한 가치관과 믿음이 우리네 삶의 중심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버려야 한다.

그러나 버리지 못한 세상의 가치관과 그로 인한 믿음이 은근히 우리 안에 들어오기도 했다. 참된 믿음인 것처럼 흉내는 내는 가짜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3. 가짜 믿음
우리 안에 들어온 가짜 믿음들이 있다. 자존심 믿음, 건강 믿음, 보상 믿음 등이 있다. 현대인으로 살면서 종교생활 하나쯤 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며 교회를 선택한 이들이 있다. 이들은 교회를 통해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거나 자존감이 상승된다고 믿는다. 그들은 주로 대형교회나 유명한 교회를 선택한다. 자신들의 수준에는 이 정도 교회를 다녀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바로 자존심 믿음이다. 신앙생활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교회를 다닌다. 내세에 대한 믿음이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되며, 치매 예방에 효과가 좋다고 확신한다. 건강 믿음이다. 보상 믿음은 강력한 보상 심리의 믿음이다. 극심한 가난이나 질병 등으로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날 수 있다. 신앙생활을 통해 신으로부터 반드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확신이 그들에게서 나타난다.

박태양은 그의 책 <눈먼 기독교>(국제제자훈련원, 2013)에서 가짜 믿음의 몇 가지를 예를 들었다. 그중 3가지만을 살펴보자. 첫째는 ‘세속주의’다. <억만장자가 되는 12가지 비법>이라는 책이 있다. 문제는 저자가 김열방이라는 목사이며, 기독교 신앙생활의 목적을 마치 부자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억만장자 자동 습관을 실천하면 평생 돈 걱정 없이 살게 된다’는 책 소개의 부제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김 목사는 자신의 세미나에 참석한 이들의 간증(?) 또한 책 소개에 활용하고 있다. 무엇인 주된 관심 사항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내용은 이렇다.

‘이 책대로 실천하여 1년에 140억을 벌었습니다.’
‘교회의 매주 재정이 두 배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카드빚과 모든 대출금을 금방 다 갚았어요.’
‘수만 평의 땅과 여러 채 빌딩을 사게 되었어요.’

그 책의 방향성은 뚜렷하다. 바로 ‘돈’이다. 혹시 우리의 신앙생활의 방향성은 어떠한지 심각하게 반성해 볼 일이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저자는 조엘 오스틴이라는 목사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훌륭한 철학이다. 기독교 밖에서 본다면 말이다. 누가 나무라고 하겠는가. 다만 그것이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처럼 설명한다는 점에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조엘 오스틴 목사는 방송 인터뷰에서 이단들을 향하여 ‘죄인’이라고 부르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신은 ‘죄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했다. 긍정적인 내용만 말하겠다는 것이다. 어이없어하는 기자의 다음 질문에도 같은 식으로 반응을 했다. 예수님께서도 과연 긍정의 힘으로 사역을 하셨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것을 향해 크게 화를 내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사탄아 물러가라’는 등의 듣기 거북한 말씀도 하셨다. ‘악’을 향해 결코 ‘긍정의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시크릿>이라는 책도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저자는 론다 번이다. 읽다가 집어던진 책이 필자에게 이것이 유일하다. 필자는 이단 서적들도 꽤 많이 읽었다. 물론 신문사 소속 분석 기사를 쓰기 위해서다. 이단 서적을 읽으면서 웃기도 하고 어이없어 하기도 하며 때론 화도 났지만 던진 적은 없었다. 이번을 제외하고 말이다. 론다 번은 ‘끌어당김의 법칙’을 소개했다. 우리들이 원하는 행복, 건강, 금전 등을 상상하며 하늘에서 그것들을 끌어당기라는 식이다. 죄책감을 품을 필요가 없고 오직 긍정적인 생각으로 그 법칙을 적용하라고 한다.
오늘 교회에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이와 같은 방식을 따르도록 유도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둘째는 ‘뉴에이지’다.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며, 곧 ‘신’이라는 철학이다. ‘네 뜻대로 살아라’가 삶의 방식이다. 이러한 가치관으로 어떻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셋째는 ‘신비주의’다.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토마스 주남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게 번역자의 이름이다. ‘조용기’라고 책 겉표지에 쓰여져 있다. 맞다. 여의도순복음교회, 바로 그 목사다. 책 내용이 정말로 황당하다. 이런 책이 번역되어 나온다는 게 정말로 씁쓸할 뿐이다.

저자는 천국을 7년 동안 17번 방문했다고 한다. 주님은 물론 천사들과도 포옹을 했다고 한다. 거의 매일 자신의 잠자리에 주님이 방문한다고 하는데 그 증거로 자신의 몸에 5-10분 정도 진동이 온다고 했다. 하루에 49번이나 몸이 들려 올렸다 내렸다 한 적이 있다며 신비체험을 장황하게 표현했다. 저자는 하나님과 수시로 대화한다며 많은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너는 말세의 여선지자다. 내가 너에게 성직을 주노라.”라는 직통계시성 내용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미국의 조지부시 대통령(43대 대통령, 2001-2008)이 이 시대의 마지막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시한부종말론성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필자는 너무도 어이없는 주장들이 많아 번역본이 아닌 영어 원본을 구입 대조해 보기도 했다. 결과는 동일했다.

4. 참된 믿음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자. 세상의 이런 믿음, 저런 믿음 속에서 참된 믿음은 과연 어떤 것인가? 우리가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추구하는 올바른 믿음은 과연 무엇인가? 한 마디로 ‘예수님’에 의한 믿음이다. 예수님으로 인한 믿음, 바로 그것이 참된 믿음의 핵심이다. 나에게서 출발한 것도 아니며, 우리의 문화나 철학에서 발생한 것도 아니다. 바로 위로부터 임한 그 믿음이다. 그것이 예수님에 의한 믿음이다. 두 가지로 살펴보자.

가. 절대 믿음
예수님에 의한 믿음은 ‘절대 믿음’이다. ‘절대’라는 개념이 약화되어가는 포스트모던니즘 시대에 우리의 믿음은 ‘절대’에 해당된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참된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질문을 하셨다. 이 말을 들은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라고 고백했다. 이제 우리가 고백할 차례다. 어떻게 하겠는가?

예수님은 또한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그러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말씀들에 의해서 우리의 고백이 따라와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구원자임을 믿습니다”라고 말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관과 그로 인한 믿음들이 있다. 앞서 언급한 바다. 그 속에서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게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안에 가짜도 있다. 아직 세상의 가치관과 그로 인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으로 신앙생활하려는 진짜를 흉내 내려는 것들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오직 예수님만으로 규정하는 ‘참된 믿음’은 우리에게 담대함을 준다. 또한 삶에서 당당함을 허락한다. 그로 인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와 힘과 용기를 제공한다. 비록 가난과 질병 등으로 인한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참된 믿음이다.

필자의 지인인 한 목사님이 얼마 전 소천하셨다. 육신의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이생을 마치신 것이다. 그분은 ‘생전 장례식’을 치르셨다.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분은 제발 슬퍼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 곁으로 먼저 간다며 미안하다고까지 했다. 인간적인 정으로 슬퍼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분은 철저했다. 마지막으로 성도들과 악수와 포옹을 하며 인사를 했다. 가족과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죽으면 시신도 가능한 그 당일에 화장으로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부고 소식을 듣고 필자는 지인 목사님과 전화 통화를 하며 어찌해야 할지 주저했다. 그러다 고인의 유훈에 따르기도 했다. 훗날 납골당에 찾아가 다하지 못한 인간의 정을 달래기로 했다. 고인 목사님의 사모도 곧바로 시신을 화장하기로 했다고 연락해 왔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믿는 ‘믿음’에 따라 판단을 하며 행동을 한다. 참된 믿음은 우리의 참된 삶을 규정한다. 예수님으로 인한 절재 믿음이 우리는 절대 신앙의 삶으로 인도하리라 믿는다.

나. 말씀 믿음
다음은 말씀 믿음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성경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더욱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참된 믿음인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첫 번째 숙제가 바로 여리고성과의 전투였다(수 6-7장). 피해갈 수도 없다. 그 길을 통과해 가야만 했다. 여리고 성은 작은 성이 아니다. 큰 성이다. 전투를 위해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하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무기도 점검하고 제작도 해야 한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하루에 한 바퀴씩 여리고성을 6일 동안 돌고, 7일째는 일곱 바퀴를 돌고 나팔을 불며 소리를 지르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어찌할까. 믿기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까, 아니면 자신들의 지혜와 방법으로 전투를 준비할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랐다. 결과는 승리였다. 여리고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한 가지 말씀하신 게 있었다. 전리품, 즉 무너진 여리고 성의 물품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하셨다(수 6:18).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왜 그 말씀에 따라야 합니까’ 등의 질문이 들 수도 있지만, 때론 우리의 작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기도하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느냐는 것이다. 여리고성 다음 싸움 대상은 ‘아이 성’이다. 아이 성은 크지 않은 성이다. 많은 군사가 갈 필요가 없는 정도다. 사람들의 이해와 지혜로 군사 3천명만 보내기로 했다. 그 숫자만으로도 ‘충분히’ 승리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찌된 영문일까?

아간의 범죄 때문이다. 아간은 여리고성 전투로 온 백성이 승리에 취해 있을 때, 전리품 하나를 ‘슬쩍’했다. 어떤 물건이었을까? 바로 ‘외투’ 한 벌이다. 그리고 몇 푼의 돈이다. 아간은 ‘여리고성 물품에 손대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겼다. ‘이 정도쯤이야’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 와중에 평소 자신이 정말로 꿈꾸며 갖고 싶었던 외투 한 벌이 마침 그의 눈에 띈 것이다. 그는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판단과 또 자신만의 기술을 동원해 그것을 감추고 말았다. 그로 인해 아이 성 전투에게 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아간은 하나님의 군사로 활동하면서 버리지 못한 세계관이 있었다. 실제의 삶은 그 세계관에 따라 살았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교훈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아서 거룩하게 활동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들의 더럽고 죄악된 생각들을 도려낸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매일 같이 묵상하고 그 말씀의 의도대로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살아가도록 힘을 써야 한다. 왜! 말씀을 따르는 믿음이 바로 참된 믿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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