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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메시아닉 쥬 아냐··· 유대주의 배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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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메시아닉 쥬 아냐··· 유대주의 배격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3.11.27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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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닉 유대교·이스라엘 회복·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오해

잡초도 이런 잡초가 없습니다. 이미 1992년 시한부 종말론의 사상적 배경으로서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오명을 남기는 데 일조했음에도 이 사상은 여전히 한국교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습니다. 세대주의적 종말론 말입니다. 한국교회 일각에 다시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본지는 이필찬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bibeschatology)에 올린 글 중 세대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비판한 글 몇 가지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저자인 이필찬 교수는 합동신학대학원(M.Div)를 졸업하고 미국 칼빈신학교(Th.M)를 거쳐, 영국 세인트 앤드류스대학(Ph.D)에서 요한계시록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이고 현재는 요한계시록연구소를 설립, 많은 강연과 저술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바른 종말론 세우기에 앞장서고 있습니다<편집자주>

글: 이필찬(전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영국 세인트 앤드류스대학 Ph.D)

바울이 메시아닉 쥬인가?

 

로버트 D. 하이들러(<메시아닉 교회, 언약의 뿌리를 찾아서> 진현우 옮김 WLI Korea, 2008년)는 롬 11:15-24의 '꺽이지 않은 원가지'를 규명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그는 이 원가지를 뿌리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것으로서 새로운 언약의 메시아닉 유대교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과 마태 등을 여기에 포함시키려고 한다(47쪽). 이러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은 바울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바울이 올바른 복음을 세우기 위해 그렇게도 치열하게 공격하면서 했던 대상이 바로 할례와 같은 유대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거짓 교사들이었고 하이들러의 표현대로 하면 바로 메시아닉 유대교도들이었다. 그런데 바울을 이러한 범주에 놓는다는 것은 바울에 대한 완전한 왜곡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이 메시아닉 쥬에 속하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는 2-3세기의 양 극단의 이단적 집단인 말시온(Marcion)파와 에비온파(Ebion)의 바울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말시온파는 반유대적이고 에비온파는 친유대적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말시온파는 바울 서신을 유대적 가치를 상쇄한다 하여 가장 유일한 정경으로서 취급하였고 에비온파는 바울 서신들을 반유대적이라 하여 거부한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해 주고 있는가? 바울은 적어도 하이들러의 주장처럼 메시아닉 쥬에 속한 인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종교 개혁은 이방 교회의 부활일뿐인가?
하이들러는 <회복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섹션에서 중세의 암흑기를 지나 교회의 회복을 유대적 전통의 회복과 동일시하면서 이 회복의 과정은 “일련의 부흥, 또는 영적 각성(spiritual awakenings)을 통해 시작되었으며, 그 시발점은 14세기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9-1384)였다”고 강변한다(102쪽). 위클리프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보통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도에도 힘쓰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교회가 회복되었고 후스, 루터, 윗필드, 웨슬리로 이어지면서 교회가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러한 정황을 서술하면서 하이들러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주입되자 이방 교회의 ‘죽은’ 가지들은 되살아났다. 그러나 모든 것이 회복된 와중에도 교회는 결코 원래의 히브리 뿌리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로마서 11장에 따르면, 이방 교회들이 메시아닉 유대교의 ‘살아 있는 가지’ 사이에 이식되어서 뿌리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수액을 빨아 들일 수 있게 된 것는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한다(103)쪽).

여기에서 하이들러는 분명히 ‘메시아닉 유대교’라고 했고 ‘이방 교회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혈통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메시아닉 쥬들로부터 듣는 이러한 구분은 이제 새롭지 않다. 혈통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메시아닉 쥬들에게 전통적 교회는 이방 교회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 자체가 신약 성경을 왜곡한 결과라는 것은 앞의 글에서 여러반 밝힌 바 있다. 바울이 갈 3:28-29에서 밝힌 것 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한 것에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회의 회복은 이방 교회들의 회복일 뿐, 살아 있는 원가지는 이방 교회의 이교화된 관행들과 문화에 의해 ‘동화’되었다고 한다(103-104쪽). 또한 그가 말하기를 “천 여년 동안, 원래 사도들의 종교였던 메시아닉 유대교는 소멸되었다. 유대교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랍비 유대교의 ‘잘려진’ 가지들뿐이었다”고 한다(104쪽). 여기에서 ‘동화’되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소멸’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두 단어의 의미는 다른 뉘앙스를 나타내 주고 있다. 어째든 여기에서 하이들러의 입장이 잘 드러난다. 그는 초대교회=메시아닉 유대교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고 메시아닉 유대교의 소멸은 초대 교회의 소멸을 의미한다. 위클리프를 위시한 종교 개혁은 메시아닉 유대교가 소멸되거나 혹은 동화된 상태에서 단지 이방 교회의 부활일 뿐이다. 원가지가 소멸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 이러한 상태를 유대교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랍비 유대교의 ‘잘려진’ 가지들 뿐”이고 “이방 교회들이 붙어 있을 살아 있는 가지라고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104쪽).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종교 개혁의 의미는 인정하지만 그것은 이방 교회의 회복일 뿐, 롬 11:17-24에 근거하여 살아 있는 가지가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읽혀진다. 왜냐하면 이방 교회는 ‘살아 있는 원가지’가 없이는 나무에 그 어떤 가지도 접붙임을 받을 수도 없고 뿌리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수액을 빨아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103쪽). 그런데 롬 11:17-24에서는 정작 ‘살아 있는 원가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꺽인 원가지’에 촛점을 맞추어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이들러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살아있는 원가지’는 저자는 관심이 없는데 메시아닉 유대교라는 자신의 개념을 전제로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예수님의 재림은 그의 백성의 역할에 따라 달라지는가?

 

대니얼 저스터·키이스 인터레이터는 그의 책 <마지막 때의 교회와 이스라엘> (2010년)에서,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님의 백성이 역할을 완수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81쪽)고 하여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가 하나님의 백성의 역할에 의해 좌우 된다는 매우 위험한 주장을 앞세운다.

그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재림은 옛 찬송가 가사처럼 ‘며칠 후 며칠 후’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오실 것이다. 우리는 영광 중에 계신 그를 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가만있어도 저절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에서 그의 의도는 더욱 분명하게 된다(82쪽).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는 우리의 역할을 어떻게 감당하느냐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역할과 관계 없이 예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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