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5 10:52 (목)
물거품 인기, 이젠 전도자로 기억되길
상태바
물거품 인기, 이젠 전도자로 기억되길
  • 정윤석
  • 승인 2005.11.1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도사 되어 사랑 전하는 80년대 말 인기가수 김종찬 씨


 

▲ <사랑이 저만치 가네>로 유명세를 탔던 김종찬 씨가 전도사가 돼 강단에 섰다.
<사랑이 저만치 가네>, <토요일은 밤이 좋아>, <당신도 울고 있네요> 등의 히트곡을 연달아 발표하며 1980년대 말 유명세를 탔던 인기가수 김종찬 씨(46)가 지금은 전도사가 돼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고 있다. 김 전도사는 11월 14일 새안산교회(김학중 목사) 생명축제 두 번째 날 강사로 나서 “지금도 나를 가수 김종찬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며 “이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 전도사는 <사랑이 저만치 가네>를 발표하며 소위 잘나가던 시절에는 모든 빛이 자신을 비추길 바랐으나 이제는 다른 사람을 비추는 삶을 살고 싶다고 고백했다.

김 전도사가 신학을 전공하고 전도사로 활동하며 강단에 서기까지 그는 말 못할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했다.

“인기가 있을 때 그것이 천년만년 갈 줄 알았어요. 제가 발표한 노래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을 때는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가수가 없었죠. 앨범판매량, TV방송률에서도 다른 가수들을 압도하며 그야말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거예요. 오래갈 줄 알았던 인기는 1990년대를 지나며 사그라졌어요. 내 이름이 올라가야 할 자리에는 어느덧 신승훈 씨, 서태지 씨 등 후배들의 이름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 김종찬 전도사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 전도사에게 위기감이 엄습했다. 사그라진 인기를 만회할만한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노래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생겼다. 김 전도사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전직 코미디언인 주병진 씨가 사업에 성공한 것도 그에게 용기를 줬다. 1년 동안 사업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구상을 할 수 있었느냐’며 놀랐다.

그러나 잘 될 것 같았던 사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1년이 되는 해에는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 들어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IMF가 터졌다.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기는커녕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김 전도사는 사업실패로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된다. 결국 그로 인해 김 전도사는 감옥에 가서 실형을 살게 됐다.

“감옥에서 이 세상에 어떤 추위보다 강한 추위와 어떤 더위보다도 강한 더위를 피부로 느끼며 생활했어요. 그런 환경에서 유죄다, 무죄다, 합의한다, 안한다라는 지리한 공방을 하며 저의 영혼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습니다. 감방안에 있는 10명의 재소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재소자 중에 3명은 남들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어요.”

그들 3명은 일정한 시간을 정해 감방 안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찬송가를 불렀다. 그 찬송가들이 김 전도사의 기억 속에 묻혀있던 향수를 끄집어냈다. 어렸을 때 눈깔사탕 먹으러 다녔던 교회에서 불렀던 찬송가였다. 찬송하는 자리에 자신도 껴 달라고 해서 같이 찬송을 했다. 이 모습을 마침 지나가던 교도관이 목격했다.

어느날 교도관이 김 전도사를 지목해서 불렀다. “당신 찬송가를 부르던데 크리스천인가요?”

김 전도사는 “뭘요, 옛날 생각나서 그냥 같이 부른 거지 크리스천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교도관은 “그러면 내가 이곳에 3일에 한 번씩 오는데 그 때마다 당신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찬송가도 가르쳐 주고 싶소”라고 말했다. 김 전도사는 그 제의를 마다할 수가 없었다. 성경읽기와 찬송가는 둘째 문제고 교도관을 만나면 난방도 안 되는 감방을 잠깐이라도 벗어나 불을 쬘 수 있는 다른 특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교도관을 만나기 시작했다. 만날 때마다 교도관은 성경을 읽어줬고 찬송가도 가르쳐줬다. 신앙서적도 건네주며 읽고 나서 함께 얘기해 보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이렇게 12일째 되는 날이었다. 교도관은 평소와 다름없이 김 전도사에게 로마서를 읽어줬다. 성경본문이 로마서 10장 17절에 이르렀을 때였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는 구절을 들었을 때 머릿속이 하얗게 바뀌는 거 같았다. 마음에서는 뭔가 뜨거운 감동이 치밀고 올라왔다. 감격이 복받쳐 올라와 눈을 감았는데 지난 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기 시작했다.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추악한 죄들이었다. 낱낱이 죄를 자백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교도관이 찬송가 209장을 불러줬다.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자신이 지었던 모든 죄를 하나님께서 사해주셨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찬송이었다. 그 날 이후로 김 전도사는 성경을 읽었다. 감방안에서 시련의 세월을 보내는 그에게 말씀은 무척이나 달았다. 이 때 김 전도사는 38년간 해왔던 잘못된 생활을 청산하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한다. 이후로 그는 교도소 안에서 성가대 지휘로 봉사하며 변화된 삶을 살았다.

만기가 돼서 출소했을 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미사리 카페’, ‘나이트 클럽’, ‘중년들을 위한 콘서트’ 등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에 나서면 어렵지 않게 돈을 긁어 모아 다시 한번 재기할 수 있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그런 것들은 김 전도사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감방에 들어오기 전에 벤츠, 캐딜락을 몰며 100평이 넘는 빌라에서 살 때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 많은 돈이 있었음에도 남을 위해서라면 단 돈 10원도 쓴 적이 없던 이기적인 자신이었다. 그러나 신학을 하며 적은 돈을 벌더라도 암환자를 돕고, 교회와 교도소를 방문해서 찬송가를 부르며 주님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가치있는 삶이었다.

▲ 김종찬 전도사의 찬송에 어깨를 맞대고 함께 찬양하는 새안산교회 성도들.
김 전도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비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만족이다”며 “성령님의 인도로 부족한 가운데도 자족하는 삶을 살며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김 전도사는 출소 후 '학대받은 아동을 위한 사랑의 음악회' 등 각종 건전한 음악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단 한 사람의 학대받은 아동'를 위해서도 찬양하겠다는 마음이다. 김 전도사는 작년 연말에 결성한 연예인선교단 ‘사랑으로’를 통해 찬양사역을 활발하게 펼칠 계획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