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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2천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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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2천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구원론
  • 교회와신앙
  • 승인 1994.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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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교수(장로회신학대학 역사신학)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시작하는 말

431년 에베소 공의회는 펠라기우스의 구원론을 정죄하고 어거스틴의 구원론을 정통 구원론으로 삼았고, 529년 제 2차 오렌지공의회는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구원론의 영향 하에, 그러나 이것에 반대하는 어거스틴적 극단론을 약화시켰으며, 중세교회의 구원론은 오렌지공의회의 그것을 물려받았으나 신인협동론적 성화를 더 강조하였다. 그리고 16세기 루터와 칼빈은 '이신칭의'를 구원으로 보아, 이신청의인 성화를 구별하면서도 불가분리한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로마가톨릭 교회의 구원론이 개신교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아르마니우스주의자들과 경건주의 및 복음주의적 각성운동은 개신교의 주류인 루터와 칼빈의 구원론으로부터 얼마나 빗나갔고, 로마가톨릭 구원론과는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WCC의 신앙과 직제의 구원론은 어떠한가?

로마의 클레멘트(95) 등 속사도 교부들 이래로, 성령의 사역으로 복음을 믿음으로 은혜로써 구원받는 바울의 구원론(롬1:16,17 ; 3:21이하)은 점차 율법주의적 구원론으로 전락하는 경향을 보이다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율법까지도 무시하는 말시온(160년 사망)의 반율법주의적(anti-nomian) 복음축소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로마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영국의 신학자요, 성서주석 가인 펠라기우스(Palagius)는 고대 교회의 구원론들 가운데 가장 인본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구원론으로서 어거스틴의 바울에 가까운 구원론에 의해서 반론되었고, 431년 에베소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정죄되었다. 우선 우리는 펠라기우스의 구원론에 대하여 알아보자.

펠라기우스의 구원론
펠라기우스의 구원론은 자연인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은혜의 선행(先行)없이 스스로 자연법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의 제자, 코일레스티우스(Coelestius)의 주장을 9가지로 요약하였다.

- 아담은 처음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인간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죄를 짓고 안 짓고에 관계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 아담의 죄는 그 자신에게만 손상을 입혔을 뿐이고 전 인류를 결코 손상시키지 않았다. 
- 율법도 복음과 마찬가지로 자연인을 하늘나라로 이끌어 준다.
- 그리스도 이전에도 죄없이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 최근에 태어난 갓난아기는 아담의 타락 이전 상태와 동일하다.
- 전 인류는 아담의 타락과 죽음으로 인해서 죽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부활하지도 않는다.
- 사람(자연인)은 자신의 이성과 의지로써 죄없는 삶을 살 수 있다.
- 세례받지 않은 유아들도 영생을 얻는다.
- 세례를 받은 부자라도 자신들이 소유한 재산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런 공로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

펠라기우스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God-man 二神·人)와 성령을 통한 특수 은혜, 그리고 교회의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매개되는 은혜를 거부하고 '창조의 은혜', '계시의 은혜', '용서의 은혜'를 주장한다. 즉, 자연인의 도덕적 성취를 가능케 하는 이성과 자유의지의 능력은 '창조의 은혜'요, 이 자연인의 도덕적 분별력을 일으키는 것은 '계시의 은혜'로, 이 자연인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올바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용서의 은혜'라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에겐 특수 은총은 없고 보편 은총만이 있다.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 그 자체와 그것의 능력 발휘 그 자체가 은혜라는 말이다.

펠라기우스가 이처럼 특수 은혜를 저버리고 자연인의 이성과 자유의지의 자기성취에 의한 구원론을 주장하게 된 동기는 마니교의 도덕적 결정론에 대한 반론에 있었다.

마니교는 선과 악의 원리가 영원한 원리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악한 본성은 결코 선해질 수 없으며, 반대로 선한 본성도 결코 악해질 수 없다고 보았다. 사실은 어거스틴 역시 마니교로부터 벗어나면서 「자유의지에 관하여」에 이에 대한 글을 쓴 바 있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 나아가서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 반대하여 그의 은총의 신학을 펼쳤다. 그의 「의문과 영에 관하여」,「자연과 은총」,「원죄에 관하여」,「예정론」,「성도들의 견인」등은 '복음'을 통한 은혜와 신앙으로 말미암은 구원론을 그 중심 주제로 삼았다.

어거스틴의 구원론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타락 전의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었고(posse non peccare), 죄를 지을 수도 있었는데(posse peccare), 타락 후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노예의지가 되었고(non posse non peccare), 특수 은혜를 통해서 회복된 인간은 죄를 아니 지을 수도 있다(non posse peccare)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원조는 휴브리스(신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인데, 이것의 결과가 죽음과 무지와 현세욕(concupiscentia)이고, 이 후자가 원죄와 더불어 자범죄의 뿌리라고 본다.

어거스틴은 말씀과 세례를 토하여 성령의 사역으로 원조의 제거를 받고 새로워진 의지로써 말씀과 성만찬을 통하여 성령의 사역으로 계속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본다. 그의 구원론은 은총의 선행을 전제하는 성화의 과정, 그것이다.

어거스틴이 행위보다는 은혜와 신앙을 우위에 둔 것이 사실이나, 그의 구원론에 있어서 공로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아 로마가톨릭 구원론의 기본틀을 이미 마련하였고 종교개혁자들(루터와 칼빈)의 이신칭의론과 입장을 달리하였다. 물론 어거스틴이 은총이란 인간의 공로에 따라 주어진다고 말하지는 않았어도 은총이 구원받을 자 안에서 활동하면 그는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 이 선행이 공로가 되어서 최종적인 구원으로 인도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불가항력 은총과 예정론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선행(先行)은총을 전제로 하는 공로주의는 중세교회의 구원론과 중세 수도주의에 크나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어거스틴 시대에, 그리고 어거스틴 직후 시대에, '반(半)펠라기우스주의자들'(Simi-Pelagians)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구원론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중도를 걸었다. 즉, 이들은 자연인이 그의 이성과 자유의지에 의한 도덕적 성취를 최대한도로 해낼 때, 하나님의 은혜가 협조한다는 신인협동론적 구원론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들 역시 어거스틴처럼 성화의 과정을 구원으로 보았으나 선행(先行)은총과 계속 주어지는 은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최선을 다하는 도덕적 성취가 하나님의 은혜를 초치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529년 제 2차 오렌지공의회는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영향 하에, 그러나 이들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의 철저한(극단적인?) 은총론에 수정을 가했던 것이다. 본 공의회는 어거스틴의 구원론에 있어서 불가항력적 은총과 예정론은 약화시키고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의 역할을 강화시켰다. 다음의 인용문을 우리는 불가항력적 은총과 예정론 없이 읽어야 한다.

『 그 누구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믿고, 의지하며, 갈망하고, 애쓰고, 힘쓰며, 기도하고 주의하며, 연구하고, 찾으며, 문을 두들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고 말하거나, 우리가 성령의 주입과 영감으로 신앙과 선행에의 의지 혹은 힘을 갖는다고 고백하지 않거나, ....  첫 사람의 죄로 인하여 자유의지는 그렇게나 손상을 입었고 약해져서, 그 후로는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가 선행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마땅한 만큼 사랑하거나 믿거나 그를 위해서 선행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의인인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및 사도 바울이 천거하는 모든 옛 성도들의 신앙(히11)이란 타락한 인간 본성이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주님의 초림 이후에도, 은혜의 도움이 인간의 겸손이나 순종에 달렸다고 하거나, 우리가 순종하고 겸손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의 선물 그 자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는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고전 4:7)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말한 사도와 모순된다(제6조).

이 은혜는 세례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빌1:29, 1:6, 엡2:8, 고전7:25, 딤전1:13, 고전 4:7, 약1:17, 요3:27, 본문의 긴 성경구절들을 역자가 그 장절만 기록하였음).

.... 카톨릭 신앙에 의하면 우리는 세례로 은혜를 받은 후 모든 세례받은 신자들을 자신들이 성실하게 성화되기를 원하는 한 구원을 위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한 선행(성화)을 그리스도의 도움과 협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버림받은 사람이 되도록 예정되었다고 믿지 않으며,....(결론)』

위의 인용에서 우리는 '불가항력적 은총'과 '예정'만을 제외하고는 어거스틴적인 선행은총에 의한 신앙(세례)과 성화의 과정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없다.

신인협동론을 강화한 트렌트 구원론
대체로 서양교회사는 600년 이후(교황 그레고리 1세)를 중세기로 보는데, 1500년까지의 중세교회는 위의 오렌지공의회(529)의 구원론을 어느 정도 반펠라기우스주의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 중세교회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와서 중세 구원론의 체계화를 발견하나, 공의회 차원에서 그것을 확정짓지 못하다가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의 반동으로 일어난 트렌트 공의회(1545~1562)에서 로마가톨릭 구원론을 공식화하였다.

따라서 트렌트의 구원론은 개신교(루터와 칼빈)의 구원론에 대한 대응 구원론일 뿐만 아니라 중세 구원론의 정리이기도 하다. 루터와 칼빈의 구원론에 앞서 우리는 트렌트의 구원론에 대하여 먼저 알아보자. 다음의 트렌트의 주장은 오렌지 공의회 구원론보다 좀더 신인협동론적 성화를 강조한다(선행-先行-은총을 전제하지만).

『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고전5:15)을 위해서 죽으셨으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이 십자가의 공로가 전달되어지는 사람들만이 그의 죽음의 은혜를 입는다. .....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의로워질 수 없다. 이 중생을 통하여 이들은 십자가의 공로로 자신들을 의롭게 만드는 은혜를 받는다(골1:12~14).(제3항)

이 같은 성향 혹은 준비 다음에 칭의 그 자체가 오는데, 이는 단순한 사죄가 아니라 내적 인간의 성화요, 갱신이다. 이 성화는 은총을 의지적으로 받아들여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원수로부터 하나님의 벗으로 될 때 일어나는 것이다(제 7항)

이처럼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친구 혹은 권속이 된 후 이들은 날마다(고후4:16) 덕목을 쌓아(시83:8) 갱신되고, 자신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골3:5) 그 지체들을 성화로 위한 의의 병기로 드림으로써 갱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과 교회의 계명들은 지키고 선행으로 협력하는 신앙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받은 의를 증가시키고 계속해서 의롭다고 인정받아야 한다(약2:24, 외경中 Eccles. 18:22, Apoc. 22:11). .... (제 10항) 』

우리는 이상의 세 인용문들 가운데, 첫 번째 인용문(제3항)에서 중생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바, 실제로 수세시에 의롭게 되는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사실이 일어나며, 이 선행은총의 도움으로 계속해서 성화의 과정으로 나갈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두 번째 인용문과 세 번째 인용문은 성화의 과정에 대하여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트렌트의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트렌트 공의회 문서중 구원론 부분의 제목)는 결국 신앙과 순종, 나아가서 성화의 과정이다(fidesformataCaritate=갈5:6=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그러면 루터와 칼빈, 하이델벨크요리문답(1562)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8)은 구원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나?

루터의 신앙고백

루터는 어거스틴의 죄론과 은총론을 더 철저히 밀고 나갔다. 루터는 이중적인 하나님의 말씀에(율법과 복음) 비추어, 거룩하시고 심판주되시는 하나님 존전에서 인간의 죄성을 철저히 들여다보는 동시에 복음을 통한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신칭의를 주장한다. 루터는 그의 「두 종류의 의」(1519)에서 율법과 십자가에 노출되어 죄인으로 드러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복음)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의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이 구원론적인 의에 의하여 실제적으로 의로워진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밖으로부터 온 의(alien righteousness)요, 후자는 믿는 자(칭의 받는 자) 자신의 실제적인 의이다. 루터에게 있어서는 로마가톨릭 구원론과는 달리 믿음과 순종, 나아가서 성화의 과정이 구원이 아니라, 복음을 성령의 사역으로 은혜와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제로 의롭지 않으나 '이신칭의' 얻는 것이 구원이다. 「두 종류의 의」에서처럼 구원론적인 이신칭의와 성화 차원의 실제적 의는 구별이 되어야하고 동시에 전자는 후자를 낳는다.

루터는 좋은 나무(이신칭의)에서 좋은 열매가 열린다고 본다.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1530)은 다음과 같이 '이신칭의'를 제 4항에서, 은총의 수단인 '교역의 직무'를 제 5항에서, 그리고 성화에 해당하는 '새로운 순종'을 제 6항에서 다루고 있다.

『 이신칭의 :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들, 선행들, 만족케 하는 일들에 의해서 하나님 존전에서 죄의 용서와 의(義)를 얻을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 그리스도 까닭에 우리에게 사죄함과 의와 영생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은혜로 하나님 존전에서 사죄함을 받고 의인(義認)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앙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다(롬3:21-26, 4:5).(제4항)

교역의 직무: 하나님께서는 복음 설교와 성례전(세례와 성만찬: 역자 주)을 통한 교역의 직무를 세우시사,우리에게이(구원의=이신칭의= 역자 주) 신앙을 베풀어주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은총의 수단들을 통하여 복음을 듣는 사람들 안에 그가 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신앙을 일으키는 성령을 주신다.....(제5항)

새로운 순종: 그와 같은 이신칭의의 신앙은 좋은 열매들과 선행들을 산출해야 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같은 선행들을 행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선행들로써 하나님 존전에서 호의를 따낼 수 있듯이 이 선행들을 신뢰해서는 안되고, 다만 하나님을 위하여 그런 선행들을 행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만 사죄와 칭의를 얻기 때문이다(눅17:10)....(제6항)』

칭의와 성화
칼빈의 구원론 역시 루터의 그것과 동일하나, 율법의 제 3 사용(성화)과 하나님의 주권을 루터보다 더 강조하고 있고, 하이델벨크 요리문답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이델벨크 요리문답은 그 내용 구조가 세 부분으로 '첫째 인간의 고뇌에 대하여(Von des Menschen Elend), 둘째 인간의 구속에 대하여(Von des Menschen Erlosung), 셋째 감사에 관하여(Von der Dankbarkeit)'로 되어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율법 말씀 앞에서 심히 죄인인데(첫째), 복음을 통하여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둘째),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따라 살아야 한다(셋째)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칭의와 성화가 분명히 구별되면서, 곧바로 이어져 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개신교 주류의 구원론에 있어서 이신칭의와 성화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이 서로 혼동되거나(without confusion),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하거나(without change), 다른 두 개의 분리된 범주로 갈라지거나(without separation), 양성의 영역 혹은 기능에 있어서 제각기 활동하지 않으며(without division), 서로 구별은 되지만 서로 혼동되거나 떨어져서는 안 된다.

맺는 말

우리는 이상에서 펠라기우스의 구원론이 AD 431년 에베소공의회에서 정죄되었고, 어거스틴의 구원론이 500년 이전 고대교회의 정통 구원론으로 확립되었으며,  이것이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구원론에 대응하여 529년 오렌지공의회의 구원론으로 변모하였고, 이것이 중세기를 지나면서 약간 반펠라기우스주의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이것이 트렌트공의회에서 로마가톨릭 구원론으로 확정되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루터, 칼빈, 하이델벨크 요리문답 및 웨스트민스터로 대표되는 개신교 주류의 구원론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 2 바티칸공의회(1962~1965) 이후에도 변화가 없는 로마가톨릭 구원론에 대해서 평가해야 한다. 분명히 펠라기우스는 정죄되었고, 반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오렌지공의회의 구원론이 나왔는데, 로마가톨릭 교회는 오렌지공의회의 구원론으로부터 약간 이탈하였다고 보여진다.

물론 1540년대에 루터교와 로마가톨릭교회는 주로 이 구원론 문제로 애석하게도 나뉘어진 서방교회가 되었지만(동방 정통교회의 구원론은 로마가톨릭 구원론과 대동소이하지만), 개신교와 로마가톨릭교회가 모두 복음과 사도신경 및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믿고, 말씀 설교와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을 공유하고있으며,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는 바, 우리 개신교는 로마가톨릭 구원론을 이단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개신교 내에서도, 알미니안주의적 구원론과 경건주의 및 복음주의적 부흥운동 계통의 구원론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저 로마가톨릭적 구원론에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끝으로 우리는 구원론에 대한 에큐메니칼 표준으로서 WCC의 신앙과 직제가 제시한 은총, 이신칭의와 성화에 대하여 인용하려고 한다. 아래의 내용은 1937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제2차 세계대회의 공식문서에서 온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은혜의 의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가 행하시는 모든 것은 그의 의로운 목적들을 사랑하고 성취하시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진실로 인식할 수 있다. 그의 은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보존하시고 축복하시는 일과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응한 우리의 구속과 거룩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파송 및 사귐과 말씀, 성례의 선물을 통해서 나타난다.

칭의와 성화
값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칭의하시고 성화시키신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이 믿음 자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칭의와 성화는 죄인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동의 불가분리의 두 측면이다.

하나님의 주관과 인간의 반응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와의 관계에 관하여 우리 모두는 성경과 기독교적 경험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주권이 최고라고 하는 사실에 동의한다. 우리가 의미하는 주권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인(all-controlling and all-embracing) 의지와 목적이다. 그리고 이 영원하신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거룩한 본성의 표출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우리의 전(全) 구원을 하나님의 은헤로우신 의지에 빚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 자신의 의지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고 인간은 이 같은 수용의 결단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와 은혜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모든 믿는 사람들의 축복된 사람이요, 땅에 있건 하늘에 있건 성도들의 교제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 교회란 창조와 구속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들의 실현이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성령을 통해서 계속 매개시키는 기관인데, 이 성령이란 교회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신 생명이시오, 끈임없이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교회의 기능은 자신의 삶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성령의 사귐과 생명 안에서 세워나가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 설교와 성례전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그의 지체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성령의 항존 안에서 은혜를 베푸신다.
 
은혜, 말씀 설교와 성례전
우리는 말씀 설교와 성례전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주어지는데, 신앙에 의해서 수용된다.  이 은혜는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은혜이다.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어떤 교회들은 'Sola Gratia'를 강조하고 어떤 교회들은 그것을 피한다. 이 구절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의 은혜의 열매라고 하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다. 그것은 인간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가운데 죄인에게 베푸시는 사죄와 성화에 달린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무시하지 않는다. 신앙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때 우리의 참 자유가 성취되는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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