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림’으로 대표되는 시한부 종말 사기 사건이 발생한지 30주년이다. 30년전, 그러니까 이장림은 1992년 10월 28일 자정,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공중재림을 맞이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하늘로 쑤욱 쑥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소위 휴거다. 이게 어떤 개념이냐 하면 공부하다가 옷과 가방과 신발은 남고 육체는 신령한 몸으로 바뀌어서 하늘로 가는 방식이다. 기차의 기관사도, 비행기 조종사도, 자동차 운전자도, 승객도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하늘로 올라간다고 했다. 그러니 이 땅에 남은 비그리스도인들은 7년 대환란이라는 전무후무한 재난에 직면할 거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장림은 이미 검찰의 압수수색으로 34억원을 헌금명목으로 받은 뒤 관리 해온 점, 만기가 93년 5월 22일인 3억원짜리 환매채 - 만기가 되면 돈을 더 받는 채권을 사들인 점, 미화 2만6천달러 등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져 논란을 일으켰다. 휴거를 믿고 있었다면 이런 거액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의 시한부 종말론은 사기라는 지적을 받게 됐다. 일설에 따르면 ‘휴거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왜 돈을 모아 놓았느냐고 묻자 ‘나는 휴거되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을 돕는 사명을 가졌고 그 때를 위해 돈을 마련했다’고 답했다고 한다. 비겁한 그의 변명이 있은 지 30년, 한국교회의 종말론은 이장림이 주장했을 때보다 나아졌을까? 안타깝게도 유튜브에서 히트 치는 종말론 채널을 보면 대다수가 이장림식 시한부 종말론과 유사한 곳들이다. 30년전에 비해 종말론은 단 한치 앞으로 내딛지 못한 모양새다. 우리는 30주년을 맞아, 시한부 종말론 사건이 사기였고, 그것을 주장하면 이단이라는 공감 외에 무엇을 반성해야 하고 종말론의 무엇을 바꿔가야 할까?
먼저 이장림식 시한부 종말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장림식 시한부 종말론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재림 직전 성도들의 집단적 휴거가 있고 이 땅에 7년 대환란이 펼쳐지고 그 뒤에 문자적 천년왕국이 진행된다는 이론이다. 그의 성경해석에 따르면 마태복음 24장 32~34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에서 무화과는 이스라엘의 독립, 즉 1948년을 의미했다.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다 이루리라는 말씀을 근거로 한 세대를 30년, 40년, 50년으로 계산하기에 따라 종말의 시점을 예측하는 것이었다.
이장림의 시한부 종말의 뿌리가 이런 성경해석에서 시작됐는데도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들, 종말론을 조금더 드라마틱하게 구성하고 싶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 종말론을 고수중이다. 결국 시한부 종말론은 이단으로 규정됐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교리는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종말론을 벗어나지 못하면 시한부 종말론은 언제고 다시 나오고 그곳에 미혹된 사람들은 종말 사기에 또 속게 돼 있다.
다음으로 직통계시의 유행을 경계해야 한다. 시한부 종말론이 히트를 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소위 말해 기도한다는 사람들, 신령하다는 사람들, 천국·지옥을 오가며 환상과 계시라는 것을 받는다는 사람들의 잘못된 목격담 때문이었다. 초등학생·중학생 등 어린 청소년들이 천국에서 보고 받았다는 환상과 계시가 그랬다. “환상 중에 천국에 갔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뒤편에 플래카드처럼 펼쳐진 문장이 있었는데 ‘1992년 10월 28일 내가 가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간증이 난무했다. 한두명도 아니고 밤샘 철야를 하며 기도하면서 신령한 단계에 이른 사람들이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고 와서 한다는 얘기라고 하니, 한국교회 신도 10만 여명이 성경적 근거가 없는 시한부 종말론에 미혹되는 계기가 됐다. 이런 환상과 계시를 직통계시에 거짓 예언이라며 문제 삼으면 그들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기도하며 깨어 있는 수많은 종들에게 주신 예언”이라며 “구약시대와 사도시대에 계시를 주신 하나님께서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이 때에 사랑하는 신부들에게 깨어 준비하도록 계시해 주시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단 말입니까?”라고 반박했다. 지금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 ‘하나님이 이렇게 내게 말씀하셨다’는 식의 워딩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그 어느때보다 시한부 종말을 비롯한 비성경적 주장과 흐름이 대유행을 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됐다는 의미이다. 이를 심상찮게 받아들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의 미래적 관점과 재림 중심의 해석의 균형을 조금 바꿔야 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당장 재림을 부정하는 것이냐는 질문이 나올 것 같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관점과 해석의 무게추를 조금만 옮기자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미래의 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시한부 종말 등 한국교회에 물의를 일으킨 종말론의 문제가 모두 요한계시록을 미래적 관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만 초점을 맞춰서 불거진 만큼 조금이라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미래적 접근보다는 과거적, 상징적, 초월적 접근으로, 재림 중심이 아니라 교회론, 구원론 중심으로 해석의 폭을 열어놓을 것을 제안한다.
요한계시록의 결론을 딱 한 문장으로 적어보자. 필자는 일곱 머리 열뿔 달린 용·짐승·사탄의 세력을 만왕의 왕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이기고 승리한다. 이것이 가장 핵심 주제라 생각한다. 요한계시록의 1장부터 22장까지를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재림보다 더 강조되고 있는 것, 더 많이 등장하는 주제는 곧 참된 왕이신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승리이다. 짐승의 표가 무엇인지, 대환란이 언제 일어나고 언제 끝나는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언제 재림하시는 지는 사실 요한계시록의 핵심에서 벗어난 주제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 성도들은 무엇보다 강조해야 할 그리스도와 성도의 승리, 곧 교회의 승리와 그리스도의 영광됨보다 유독 마귀·사탄·음녀·짐승의 표 등에 집착하는 문제를 보여 왔다. 그 관점을 벗어나지 않는한 유사 시한부 종말론은 끊임없이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장림은 사기 사건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이름과 간판을 바꿔 달은 종말 사기꾼들에게 지속적으로 성도들이 미혹되는 이유를 우리는 치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문제와 시련 앞에 맞닥 뜨리게 된다. 시한부 종말의 실패 후 그것을 가능하게 한 해석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치열한 반성을 하지 않는한 인터넷망이 어느 나라보다 발달한 대한민국 사회에는 또다른 유형의 시한부 종말론자들과 그에 경도된 신도들의 종말 포비아가 판을 치게 될 게 뻔하다. 그래서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한다거나 7년 대환란을 피해야 한다며 남미 아르헨티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피지 등으로 도피를 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20년에 불어닥친 코로나, 경제적 위기의 한파와 러시아VS우크라이나 전쟁의 공포가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다. 시한부 종말론 30주년을 맞아 그 어느때보다 제 2차, 제 3차 시한부 종말론이 유행하려하는 때, 이에 대한 통렬한 반성으로 유사 시한부 종말론, 직통계시, 요한계시록의 미래적 해석과 재림에 대한 관점의 채널을 조정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