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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비판글 (3)- 아담과 하와가 지옥갔을까? 에 대한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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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비판글 (3)- 아담과 하와가 지옥갔을까? 에 대한 반박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21.01.20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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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상열교수, 서요한 교수

본 사이트 기독교포털뉴스는 서사라 목사의 천국·지옥 체험기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며 상대가 반론을 해올 경우 긍정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습니다. 이에 서 목사측에서 2021년 1월 20일(수) 본사의 메일을 통해 반론을 보내왔습니다. 이를 반론 차원에서 올립니다. 독자들께서 박유신 목사와 정윤석 대표기자의 글은 물론 그들의 반론을 보시고 성숙한 판단을 내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경 원어가 인터넷에서는 깨지는 현상이 발생하였으나 전체적 문맥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사려돼 그대로 올리는 점 또한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편집자주].

아담과 하와를 지옥에서 보았다는 개인 체험 간증의 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무엇인가?

조상열(sang2493@hanmail.net)

창세기 본문이 아담과 하와의 회개나 그들의 구원 문제를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스토리의 결말이 어떠한지를 논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 결말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구절들이 있다. 만약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해피엔딩을 기대한다면,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 낙원에서 추방된 후에 아담은 회개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의 답은 먼저 유대교 전승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제2 성전시대의 유대교 문헌들이나 1세기 유대교 문헌에서는 아담의 원죄론을 다루고 있으며 아담을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온 자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오 아담이여,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죄를 지은 사람은 당신이지만, 멸망은 당신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자손들인 우리의 것이기도 합니다.

– 4 Ezra 7:118 –

유대교 전승을 계승하여 발전한 신약 역시 둘째 아담(그리스도)에 반하여 첫째 아담을 실패자로 규정하고 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고전 15:21-22 -

유대교 전승과 신약성경이 아담만 실패자로 언급하고 있다고 해서 그의 원죄론에서 하와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거나 배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담은 첫 인류이자 첫 부부의 대표자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원죄 이후에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섬겼을 것이라는 상상도 유대교 문헌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아담이 병들어 치료 목적으로 기름을 가져오기 위해 셋과 하와가 다시 낙원으로 진입한다는 이야기(Life of Adam and Eve)와 그들이 낙원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며 후회하였다는 해설이 외경에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설화적 기술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아벨에 대한 신약의 평가

또한 신약 전승도 구약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의 첫 인물로 아벨을 제시하고 있다(히 11:4). 제사를 통한 구원의 믿음을 아벨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락 이후부터 인간의 믿음과 회개는 속죄의 제사를 통해 평가되고 있으나 가인의 살인사건 이전이든 이후이든 아담과 하와가 제사에 참여하였다는 단서는 찾기 어렵다. 신약 전승은 아벨의 제사만을 언급하고(마 23:35; 히 11:4) 아담이나 하와의 제사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오히려 실패자로 아담을 소개하고 있다(롬 5:14; 고전 15:22; 딤전 2:14). 아담의 실패는 하와의 실패로 이어진다.

사실 창세기에 아벨의 제사 장면이나 가인의 제사 장면 어디에도 아담과 하와가 참여하였다는 기록은 없다(창 4:3-4). 아담도 땀을 흘려 밭을 갈아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는 징계를 당하여(창 3:17-19) 농부로서 가인과 함께 일하였을 것이기 때문에(창 3:23), 그가 제사를 드렸다면 그 역시 가인처럼 곡물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제사에 대한 평가가 없는 사실은 아담과 가인이 함께 그들의 소산으로 곡물 제사를 드렸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다.

제사 문제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적극적인 관여자로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그들이 제사에 관심이 없었거나 참여하지 않아 제사 자리에 아예 없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제사 불참은 하나님의 심판 이후에 그들이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이후의 인생을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만약 그들이 아벨의 죽음 이후에 깨달음을 얻어 제사를 속행하며 살았다면 그런 드라마틱한 전환과 결론을 빼먹고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의 기술이 실로 아쉽기만 하다. 반면 그들과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한 아벨의 선택은 신약에서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이후 그리스도의 예표로 연결되고 있다.

이렇듯 제사 참여는 아담 가족을 양편으로 나누게 되는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제사만이 인류의 회개를 표현할 방법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제사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부재하다는 것은 하와뿐 아니라 아담도 구원의 길로 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2. 아담과 하와는 여자의 후손 예언을 믿어서 구원받지 않았을까?

두 번째 질문은 아담과 하와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구원자) 예언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을 받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구원자를 잉태할 여자에게 ‘생명’을 뜻하는 ‘하와’라는 이름을 부여하며 공포하였고(창 3:20), 하와가 가인을 낳은 후에 ‘내가 여호와를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했다는 식이다.

이 부분은 지난 세미나를 통해 발표한 논문에서 이미 논증한 바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치사 에트(꜄eṯ)에 대한 오역을 바로 잡으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wattahar wattēleḏ ꜄eṯ¯qayin wattō꜄mer qānîṯî ꜄îš ꜄eṯ-yhwh

그가 임신하여 가인을(꜄eṯ¯qayin) 낳았고

그가 이르되 내가 남자(꜄îš)를, 주를(꜄eṯ yhwh) 창조하였다 하니라

창세기 4:1 (MT와 사역)

1절의 ‘여호와로 말미암아’(꜄eṯ¯yhwh)에서 에트(꜄eṯ/ta,)는 ‘~와 함께’라는 의미의 전치사 혹은 목적격 조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것을 ‘여호와와 함께’(with yhwh) 혹은 ‘여호와/주(yhwh)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전치사 에트(꜄eṯ)가 ‘~의 도움으로’(~을 통해, ~으로 말미암아)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은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이다. 또한 ‘~와 함께’로 번역해도 이는 하와가 여호와와 함께(with), 부모로서 가인을 낳은 것으로 해석이 된다. 이상 두 가지 해석은 모두 에트(꜄eṯ)를 with(함께)로 해석한 경우인데, 전치사 에트(꜄eṯ)의 이러한 적용 용례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렵거나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도출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주목할 것은 전치사 에트(꜄eṯ)가 가인의 이름 앞에서 목적격 용법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문맥 내에서 에트(꜄eṯ)를 두 번 사용하는 것은 에트(꜄eṯ)를 뒤따르는 단어가 다른 뜻으로 오용되지 않고 목적격의 의미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창세기 기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에트(꜄eṯ)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용법 모두 목적격 조사로 보아, 이는 하와가 가인을(꜄eṯ1) 낳고, 여호와(주)를(꜄eṯ2) 낳았다는 기술이며 이는 전체적으로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평행법적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문장은 가인‘을’(꜄eṯ) 낳고 주‘를’(꜄eṯ) 낳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며 남자(꜄îš)와 여호와의 전후 문법적 관계 역시 동일한 의미가 반복되고 있는 평행어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궁켈(H. Gunkel)은 가인과 yhwh를 동일시하고 있고 이러한 문법적 분석을 바탕으로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와 프로반(Ian Provan), 와이엇(N. Wyatt)이 각자의 해석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어떻게 하와가 하나님(yhwh)을 낳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보이스는 하와 시대에는 ‘여호와’(yhwh)의 의미가 후기 역사에서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학적 정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cf. 출 6:3) 하와가 여호와(yhwh)라는 용어를 ‘태어나게 하는 자’나 ‘생명을 주는 자’ 혹은 ‘구원자’라는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는 yhwh를 ‘구원자’(the deliverer)로 번역하면서 ‘내가 남자를, 실로 구원자를 낳았다 하니라’로 의역한다.

보이스는 첫 아들에 대한 하와의 찬양에는 구원자가 여자의 후손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창 3:15)에 대한 하와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즉 그는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으로 예언된 구원자에 대한 희망이 있었고 그 결실을 가인에게서 찾게 된 것으로 해석한다.

하와의 모자(母子) 신격화

위의 보이스의 해석은 원문에 가장 충실한 번역이면서 아마도 하와에 대한 가장 우호적인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몇 가지 정황은 이러한 하와의 독백에 다른 이면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와의 독백에서 가인(qayin)의 이름과 (남자를, 주를) ‘내가 낳았다’(qānîṯî)는 표현을 통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만들다, 창조하다’의 어감을 가진 카나(qānāh) 동사는 하와의 창조성을 강조하고 있다. 카나(qānāh) 동사와 카니티(qānîṯî/*qnh) 동사는 두운체 양식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 둘은 의미론적으로도 연결된다. 즉, 본문 기자는 의도적으로 ‘창조하다’의 의미를 가진 용어를 연이어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 어근의 배열은 가인(qayin)의 이름이 ‘만드는 자’ 혹은 ‘창조자’의 어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정리하면, 창세기 4장 1절의 구문론적 평행 구조에서 언급되고 있는 세 명칭, 가인(qayin), 남자(꜄îš), 주(yhwh)는 동일한 존재를 가리키는 용어이며 이는 모두 하와의 첫 아들을 칭하는 호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세 명칭, 가인(qayin), 남자(꜄îš), 주(yhwh)를 모두 동사(wattēleḏ 낳았다, qānîṯî 창조하였다)의 직접 목적어로 볼 수 있으며, 하와가 ‘내가 가인(qayin=창조자)을 낳았고, 남자(꜄îš)를, (즉) 주(yhwh)를 창조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하와가 원죄에 대한 처벌 이후에도 여전히 신성에 대한 아쉬움과 열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와의 이러한 표현은 하와가 자신이 낳은 아들을 남자(꜄îš), 즉 구원자로 인식하고 극대화된 기대를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신에게 저주를 내린 원 ‘창조주’ 하나님에게 그의 은근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자’를 낳은 하와

일반적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그리고 그가 내가 아들을 낳았다 하니라’(wattō꜄mer qānîṯî bēn)로 표현하지만, 하와는 ‘아들’(bēn)이 아니라 ‘남자’(꜄îš)를 낳았다고 말하며 가인에 대한 그의 기대를 뿜어내고 있다. 하와가 언급한 ‘남자’(꜄îš)는 여자의 후손을 말한다.

그 여자에게 그가 말하되 내가 너의 고통과 너의 임신을 크게 증가시킬 것이니 네가 고통으로 자식들을 낳을 것이니라 그리고 너의 남자(꜄îš)를 향한 너의 갈망이 있겠고 그(hû꜄)는 너를 통치할 것이니라

창세기 3:16 (사역)

창세기 3:16절에서 하와가 자신의 남자(꜄îš)를 갈망하고 그가 하와를 통치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은 하와에 대한 저주가 아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쉬(꜄îš)와 후(hû꜄)를 ‘남편’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여기서 하와가 갈망할 남자(꜄îš)는 그의 옆에 있던 아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 15절에서 언급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을 말한다. 이 여자의 후손, 즉 남자(꜄îš)는 산고의 고통처럼 오랜 인고의 시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소산임을 말하고 있다.

메시아 예언 속의 남자

여성의 임신과 해산하는 고통은 구원자 예언을 되새기도록 몸에 심겨진 표와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신의 고통은 심판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구원자는 인류의 역사에 시간차를 두고 나타날 사건이며 16절의 그(hû꜄)가 하와(즉, 하와의 후손, cf. 창 3:20)를 다스리겠다는 것은 앞으로 올 구원자가 사람이자 남자이며 다스리는 왕권을 가진 자로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으로 해석해야 한다. 또한 그가 하와(의 후손)를 통치할 것이라는 것은 구원자가 인류를 어떻게 구원으로 이끄실 지를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창세기 3장 15절과 16절은 모두 메시아 예언으로 해석해야 할 구절들이다.

하와는 여자의 후손인 이 남자(꜄îš)를 왕권을 가진 자이며 동시에 신적인 구원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와는 그를 다스릴 것이라는 그 남자(꜄îš)가 자신이 임신하여 낳은 가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와가 가인을 낳고 아들(bēn)이 아니라 남자(꜄îš)를 낳았다고 말하거나 그의 남자(꜄îš)에게 ‘창조자’를 뜻하는 가인(qayin)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그에 합당한 ‘주’(yhwh)라는 칭호(yhwh)를 준 것이다.

그래서 하와에게 가인은 신적인 존재이자 왕권을 가진 자였고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구원자’로 기대하고 그 존재의 가치를 높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그의 기대는 그의 이름(qayin/ 창조자)과 칭호(yhwh/ 주)를 통해 드러나듯이 그를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는 창조자로 생각했을 수 있다.

하와의 아들, 가인

이것이 원죄 이후에 하와가 범한 두 번째 죄이다. 그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 구원자 상을 자신의 아들에 적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로 하와는 가인에 대해 높은 기대 심리를 가지고 있었고, 가인에 대한 편애에 가까운 하와의 의식이 가인이 성장하면서 교만해져 아벨을 무시하고 폭력적인 인성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하와가 이전에 세상의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짓던 아담(창 2:19, 23; 3:20)의 권위를 무시하고 대신 직접 가인의 이름을 지은 것은 그가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창조자로, 그의 아들을 자신이 ‘창조한’ 사람으로 여기는 하와의 의식이 반영된 행동으로 보인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이 바로 영생과 전지(omniscience)의 신성을 탐했던 그의 욕심 때문이었던 것을(창 3:4-5) 감안한다면 이러한 해석이 무리한 추론은 아니다. 또 아담이 그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주고 그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단언은(창 3:20) 하와의 자의식이 이후 어떠하게 변해갔을지 가름할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유혹될 만큼, 신성에 대한 관심과 욕심이 있었다. 뱀의 유혹을 받아들인 것은 하와가 자신을 신격화하는 열망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아들을 구원자로 신격화하면 그를 낳은 어미의 위상과 가치도 함께 신격화 된다. 이러한 사실은 하와의 독백에서 왜 하와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어감의 카나(qānāh)를 어근으로 하는 카니티(qānîṯî) 동사를 활용해 가인의 출생을 알린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3. 가죽옷과 여자의 후손 예언도 받았으니 아담과 하와는 구원이 보장된 것이 아닐까?

아담과 하와가 구원 받았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의 또 다른 근거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었기 때문일 것이다(창 3:21). 하나님이 그들에게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예언도 해주고(창 3:15)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었지만(창 3:21),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과 은혜가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도 그 사건을 통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인도 하나님께 살인자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표를 받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지만 구약뿐 아니라 신약 전승에서도 그가 구원받은 자들의 조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히 11:4; 요일 3:12). 따라서 가죽옷과 표는 하나님이 앞으로 죄인들에게 행하실 구원 방법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보호의 도구가 일시적으로 그들을 위험이나 부끄러움에서 가려줄 수는 있어도 그들의 궁극적인 영혼의 구원과 직결되지는 않기에 보호의 도구를 받았다고 아담과 하와가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4. 노아의 방주

아담과 하와 부부가 노아의 방주를 짓는데 동참하였다든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암시받았다든지 하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방주를 짓기 시작하여 마칠 때까지 00년 동안 이들은 구원의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5. 결론

서사라 목사의 아담과 하와 지옥 주장은 그의 체험담에서 비롯된 논제이지만 지금까지 분석해 본 바와 같이 아담과 하와와 관련한 성경의 본문은 서사라 목사의 논제를 지지해주고 있다.

조상열 교수 약력:

-평택대학교 신학과 졸업

-미국 고든 콘웰신학대학 (M.Div., Th.M)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Ph.D.)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구약학 부교수 역임

-건신대학원대학교 구약학 전임강사 역임

-가인의 표 (The Mark of Cain)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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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신 목사의 서사라 목사비판글 (3)- 아담과 하와가 지옥갔을까? 에 대한 반박글: 서요한 교수

(1) 사소한 거짓말 한 자와 선의의 거짓말한 자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씀에 의하면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 죄의 삯은 사망이다. 여기에는 죄의 크고 작음, 즉 경중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한 모든 허물과 죄를 가리킨다. 따라서 범죄한 사람은 그 손을 짜르고 찍어내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다.

막9: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그 행위를 돌이키지 아니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간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마 5:22-2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여기 두 가지 욕 중에 “라가”는 “텅빈, 무가치한, 우둔한, 멍청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욕 “미련한 놈”은 ‘라카’와 히브리어의 ‘모레’를 연상시킨다. 이 말은 도덕적인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이다. ‘라가’는 ‘어리석은 놈’으로 지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저급하다는 말이며, ‘미련한 놈’(모레)은 ‘추악한 녀석’이라는 말로 인격적으로 천박한 상태를 말한다. 이 두 가지 욕은 상대방에게 극심한 상처를 끼친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버리신 바대로 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져 불못에 들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계 21:8,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함께...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불에 던져지리라 이는 둘째 사망이라”.

(2) 한편 자신의 돈을 떼먹은 자를 용서하지 못한 자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이들은 사람을 미워하여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주님은 살인죄로 간주하셨다. 다시 말하면 원한으로, 용서하지 못한 것은 곧 십계명의 6계명,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성인신, 십자가의 사건, 그리고 부활승천과 재림, 소위 구속사의 정점에 그리스도의 사랑, 아가페가 자리하는 바, 형제에 대한 사랑의 용서가 제일 중요함을 가리킨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이런 자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져서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결국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살인자가 되어 불못에 들어가는 것이다. 즉 받았던 구원도 회개치 않고 계속 양심에 화인맞을 정도로 죄를 지으면 하나님도 그를 버려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서요한 교수 약력:

-총신대 신학과, 합동신학원 졸업

-영국 애버딘 대학교 신학석사 (Th.M., 역사신학)

-영국 남 웨일스 글라모르간대학교 (Ph.D., 역사신학)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Post-Doctoral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교수 역임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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