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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철 장로 <하나님의 하루>의 문제점어설픈 헬라어 사용 자제해야
장운철 목사  |  kofking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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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25  22: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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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철 장로의 <하나님의 하루>(이하 <하루>)를 읽어 보았다. 출간된 지(2017년 12월 11일) 1달이 조금 넘은 신간이다.

손 장로는 꽤 유명한(?) 인물이다. 비록 목사나 신학자가 아닌 ‘장로’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이미 10여 권의 책을 냈고, 또 매주 한 차례 정기적으로 집회를 인도하는 등 교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집회에 참석하는 이도 특정 교단과 상관없이 초교파 평신도들이다. 다수의 목회자까지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쯤 되면 한국교회 내에서 여느 목회자보다도 훨씬 영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SNS 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신앙, 신학의 이런저런 자신의 생각들을 글로 올리고 있다. 이번에 새롭게 출간해 낸 <하루> 역시 그가 2016년부터 평소 SNS에서 꾸준히 발표한 글들을 모은 것이라고 했다.(그의 책, p.8). 평상시 자신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철학 등을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적극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중이다.

필자는 손 장로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그를 만나 본 적도 없고, 그의 집회에 참석해 본 바도 역시 없다. 그의 책을 읽어 볼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그에 대한 소문만은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다. 필자가 손 장로를 인식하는 키워드(key word)는 ‘치유 사역하는 분’이라는 정도다. 그게 전부다.

손 장로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이가 그에 대해서 왈가불가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반대로 여겨주셨으면 고맙겠다. 그에 대한 선입견이 극히 적기 때문에 오히려 객관적으로 그를 대할 수 있다고 말이다. 특히 이번 그의 책, <하루>를 통해서다.

손 장로는 ‘말씀-성령-삶’이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책의 서두에서 강조했다(p.5). 훌륭한 말이다. 우리 모두 소망하는 바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님에 의해서 우리네 삶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기쁜 일이다.

그런데 그의 책 <하루>를 읽다 보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손 장로는 그가 강조한 ‘말씀-성령-삶’이 일치하는 그런 삶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정도의 수준이 상상 이상으로 낮았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언급해 보려고 한다. 신학 서적도 아닌데 굳이 태클을 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두 가지 면 때문에 펜을 들기로 했다. 먼저는 한국교회 내에서 그의 영향력이 적지 않을 것 같다는 것과 그 다음으로는 그가 자신의 주장에 입증하기 위해 어설프게 원어적 접근을 한 것이 한국교회를 다소 혼란스럽게 할 수 있겠다는 점 등 때문이다. 이제 그 구체적인 것을 하나씩 살펴보자.

1. ‘아가페’와 ‘필리아’
먼저 손 장로의 책 43장이다(pp.283-289). 손 장로는 가상의 주제 질문을 던진 후, 그 질문에 답을 다는 형식으로 책을 구성했다. 이번 장에서의 주제 질문은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이다. 이에 대한 손 장로의 답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손 장로는 여기에서 그만 ‘사족’을 달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크고 이상한 사족이다. 손 장로는 아내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άγάπη)라며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다. ‘아가페’는 우리가 많이 들어본 단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아가페’로 그는 이해하고 있다. 반대로 인간적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때 인간적인 사랑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가 ‘필리아’(ϕιλια)라고 했다. 역시 ‘인간적인 사랑=필리아’로 그는 알고 있다. 그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대로 인간적인 사랑(필리아, ϕιλια)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아가페, άγάπη)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 (그의 책, pp. 284-285)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아내를 사랑할 때 ‘인간적인 사랑’인 ‘필리아’로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헬라어로 구분했다. 그리고 인간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각각을 설명했다. 손 장로는 자신의 헬라어 이해가 성경적임을 입증하기 위해 요한복음 21장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 본문을 해설했다.

요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는 잘 알려진 본문이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베드로에게 했다. 동일한 내용의 질문이 3번 반복되었다. 손 장로는 이때 예수님께서 3번 모두 ‘아가페’로 질문했다고 했다. 이에 손 장로는 베드로가 3번 역시 ‘필리아’로 대답을 했다고 언급했다. 베드로가 아가페로 답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베드로가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상태’라고까지 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 우리는 이런 사실을 요한복음 21장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베드로를 만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아가페오- 아가페의 오자로 보임. 필자 주)”라고 물었을 때에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두 번씩이나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필리아’의 사랑으로 대답했고, 세 번째 예수님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었을 때도 역시 ‘필리아’의 사랑으로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때까지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 (p.285)

손 장로의 성경 이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참으로 해괴망측한 성경 본문 해설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왠지 필자가 부끄러웠다. 이런 글을 쓰는 이가 그 유명하다는 손기철 장로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3번의 질문을 모두 ‘아가페’사용했다고 말했다. 손 장로는 성경을 읽어보기라도 했는가? 헬라어를 언급했으니 헬라어 성경을 한 번쯤은 읽어 보았을 것이라 믿고 싶다. 읽어보기는 했는가?
또한 그는 ‘아가페=하나님의 사랑’, ‘필리아=인간적인 사랑’이라고 했다. 도대체 어디서 전해들은 이야기인가? 자신이 연구해 낸 것인가?
이런 한심한 성경 지식으로 그 동안 10여 권의 책을 출간했고 매주 집회를 인도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손 장로에게 도움을 주고자 요한복음 21장,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장면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을 해 보겠다.

요한복음 21:15-17절은 설교나 강의에 자주 등장하는 본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실의에 빠진 베드로를 만나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신다. 메시지는 동일한 내용이 3번 반복된다.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주님 그러하나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주님 그러하나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당연히 ‘네’라고 답을 한다. 3번 모두 동일하다. 자, 문제가 되고 있는 위 본문의 ‘사랑’에 대한 헬라어 단어를 찾아보자. 헬라어 성경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인용하면 좋겠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필자는 동사 형태인 ‘아가파오’와 ‘필레오’라는 단어로 사용해 보겠다. 

   
 

일단 예수님께서 3번의 질문에 모두 ‘아가페’를 사용했다는 손 장로의 해설은 틀렸다. 완전히 빗나갔다. 예수님은 3번째 질문에서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질문을 던졌다. 이것을 발견하는 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읽기만 하면 된다. 읽을 수 있다면 말이다. 손 장로는 지금이라도 성경 본문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기를 바란다. 물론 헬라어 성경을 펼쳐야 한다.

그 다음 ‘사랑’이라는 헬라어 단어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의미상 구분이 될까? 즉, ‘아가파오=하나님의 사랑’, ‘필레오=인간적인 사랑’이라고 한 것이 옳은가? ‘그렇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도 성경 본문을 사용하여 입증하려고 했다. 성경에 그렇게 사용한 예가 있다면서 마태복음 26:48-49절을 들었다. 유다가 예수님께 입맞춤을 하는 장면이다. 아래와 같다.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φιλέω)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κατεφιλησεν)”(마26:48-49)

예수님을 돈 받고 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기 위해 왔다. 유다가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알려주기 위해 그 신호로 예수님께 입 맞추겠다고 했다. 위 성구에서 ‘입 맞추다’라는 단어가 2번 나타난다. 이때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바로 ‘필레오’다. 단어 사용의 문법적 설명은 차치하겠다. 이때 사용된 ‘필레오’를 영어성경은 ‘키스하다’(kiss)로 번역해 놓았다. ‘아가파오-필레오’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위와 같은 성경 본문에서 결코 ‘아가파오’가 사용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과연 그럴까? 성경의 다른 구절을 좀 더 찾아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가파오-필레오’가 의미상 잘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는가를 계속해서 확인해 보자. 아래의 경우를 살펴보자.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였음을 언급하는 장면이다. 디모데후서 4:9-10절이다.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후4:10)

데마가 사랑한 대상은 ‘이 세상’이다.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아가파오-필레오’를 구분하려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때 ‘사랑’에는 ‘필레오’가 사용되는 게 옳을 것이다. 위 성경 본문은 과연 그렇게 표현했을까? 그렇지가 않다. ‘필레오가 아니라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어찌된 일인가. 위 성경 본문만 예외가 될까?

이제 구약 성경의 예를 들어보자. 다윗의 아들 암논이 그의 이복 누이 다말을 사랑하는 장면이다. 사랑하는 욕심이 지나쳐 강제로 강간하는 내용까지 나온다. 사무엘하 13:1-15절까지다. 아래와 같다.

“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2 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 3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4 그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당신은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냐 내게 말해 주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함이니라 하니라 ... 15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삼하13:1-15)

위 본문에 ‘사랑’의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한다. 어떤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었을까? 구약 성경은 헬라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LXX)이 있다. 당시 헬라어 문화의 사람들이 어떤 단어를 사용하여 구약을 이해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아가파오-필레오’를 의미상 구분하려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위 구약 본문의 사랑은 모두 ‘필레오’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의미를 위 본문에서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성경 본문도 모두 ‘아가파오’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다.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이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복음서를 보아야 한다고 다시 강짜를 부리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의 다른 성경에서는 ‘아가파오-필레오’의 의미가 잘 살아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래서 복음서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다음 두 개의 성구를 비교해보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복음 3:35절과 5:20절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요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요5:20)

두 구절 모두 의미상 내용이 동일하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다. 참으로 거룩한 내용이다. 그럼 ‘아가파오’와 ‘필레오’ 중에 어떤 단어가 사용되어야 할까? 당연히 ‘아가파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럼 위 본문의 헬라어 성경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놀랍게도 하나는 ‘아가파오’로 또 다른 하나는 ‘필레오’로 기록됐다. 즉, 앞의 요3:35절은 ‘아가파오’로, 뒤의 요5:20절은 ‘필레오’로 각각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아가파오’와 ‘필레오’는 의미상 구분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위의 성경의 예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아가파오’가 사용될 수도 있고 또 ‘필레오’가 사용될 수도 있다. 인간의 사랑을 언급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즉, 아가파오와 필레오는 의미상 구분이 되지 않는다.

2. ‘조에’와 ‘프쉬케’
그 다음 손 장로의 책 18장이다(pp.130-135). 이번 장에서 주제 질문은 ‘새로운 삶이란 무엇입니까?’이다. 주제 질문 아래에 ‘어떻게 하면 나는 매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도 있다. 역시 훌륭한 질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질문하고 답을 해야 하는 중요한 내용 중 하나라 여긴다.

위 질문에 대한 손 장로의 답을 요약하면 ‘날마다 나 자신의 생명은 죽고, 하나님에 의한 새생명으로 살아야 한다’로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고, 또 암송까지 하고 있는 갈라디아서2:20절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매일 같이 묵상하며 살아야 할 귀한 말씀이다.

손 장로는 여기에서 또 사족을 붙였다. 역시 헬라어 단어로 말이다.

그는 ‘날마다 나 자신의 생명은 죽고, 하나님에 의한 새생명으로 살아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두 개의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다. ‘조에’(ζωή)와 ‘프쉬케’(ψυχή)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그 단어들을 갑자기 왜 사용해야 했는지 참으로 엉뚱하다.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자신의 주장이 설명되기 어려운 글의 흐름도 아니었다. 헬라어 성경 본문을 설명하면서 필요에 따라 헬라어 단어를 언급하려는 상황도 아니었다.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는 굳이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다.

손 장로는 날마다 버려야 할(또는 포기해야 할) 자신의 생명을 ‘프쉬케’(ψυχή)라고 했다. 그 반대로 취해야 할 생명, 즉 하나님에 의한 새생명에 해당되는 ‘생명’의 헬라어 단어는 ‘조에’(ζωή)라고 했다. 더욱이 그 ‘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부가 설명을 친절하게 직접 덧붙이기도 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우리가 버려야 할 생명은 ‘프쉬케’이고, 반대로 취해야 할 하나님의 생명은 ‘조에’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까지 했다. 이런 손 장로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 지금 이 시간 하던 일을 멈추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그 ‘새생명(ζωή, 조에,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봅시다. 또한 ’내 생명‘(ψυχή, 프쉬케, 혼 또는 마음)은 날마다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하나님나라의 비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프쉬케)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12:24,25 ](그의 책, p.132)

혹자는 한 단락만 읽어보면 안 되고 문맥을 보아야 한다고 할지 모른다. 옳은 말이다. 손 장로의 이 번 책은 짧은 글들의 모음이기 때문에 문맥의 흐름이 그리 길지 않다. 위 단락의 앞뒤 문단을 읽어보아도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은 죽고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나야 한다는 게 그의 책 18장 전체 흐름이요, 핵심이다. 다만 그가 자신의 주장을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날마다 ‘프쉬케’를 포기하고, ‘조에’를 주장하며 살아야 한다’는 이런 손 장로의 주장은 옳은 것일까? 또한 ‘프쉬케’와 ‘조에’라는 단어에는 과연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일까? 손 장로는 한 번 쯤 위 단어에 대한 조사를 해 보았어야 했다. 우리는 한국말을 사용하다가도 잘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 등을 찾아보곤 하지 않는가. 요즘엔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발달로 앉은 자리에서도 어느 정도 검색이 가능하기도 하다.

손 장로가 빠뜨린 일을 필자가 대신 해보겠다. 위 헬라어 단어들을 사전에서 찾아보겠다.
먼저 ‘조에’다. 흔히 ‘월터 바우어(Walter Bauer's) 사전’으로 알려진 헬라어 사전(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을 활용해 보겠다. 손 장로는 특별히 이 단어의 의미를 18장 본문에서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언급했다. 18장 서두에 한 번 더 나온다. ‘새로운 삶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곧바로 ‘하나님의 생명(조에)로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p.130). ‘조에=하나님의 생명’으로 이해한 것은 그의 실수가 아니라는 뜻이다. ‘조에’가 정말 ‘하나님의 생명’일까?

월터 바우어 사전은 ‘조에’에 대해 크게 2가지로 설명을 해 놓았다. 아래와 같다.

[ ①. of life the physical sense.
②. of the supernatural life belonging to God and Christ, which the believers will receive in the future, but which they also enjoy here and now. ]

‘조에’는 ‘life’(생명)으로 번역되는 여성명사다. 위 사전은 그 ‘life’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위의 ①번은 일반적인 의미로써의 ‘생명’을 말한다. ‘죽음’이라는 단어인 ‘싸나토스’(θάατος)와 반대 개념으로 쓰일 때 사용된다.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예다.

‘life’에 대한 또 하나의 설명이 있다. ②번이다. 이 설명은 예수 믿는 자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초자연적인 삶(또는 생명)’(supernatural life)이다. 믿는 사람이 지금 누리고 있고 또 오는 세상에서 받게 될 바로 그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위 두 설명에 공통점이 있다. ‘조에’라는 단어는 ‘사람의 생명’의 어떠함을 말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다. 손 장로가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그 다음 ‘프쉬케’다. 손 장로는 ‘프쉬케’를 날마다 우리가 포기해야 할 ‘내 생명’이라고 했다. 손 장로는 이를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요12:24-25절의 성경 구절까지 언급했다. 그 성경 본문 중 ‘자기의 생명’이라는 부분에 괄호를 열고 ‘프쉬케’라고 직접 삽입해 놓기도 했다. 여기까지 보면 정말 ‘프쉬케’는 날마다 버려야 할 그 어떤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런 것일까?

손 장로가 성경 구절을 언급했으니, 몇 개의 성경 구절을 더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하다. 이를 통해 ‘프쉬케’가 성경 본문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발견해 보자.

먼저 마태복음 20:28절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프쉬케)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위 구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한다는 내용과 함께 주어진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섬기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주시겠다고 하셨다. 여기에서 우리가 찾고자 한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목숨’이다. 이때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놀랍게도 ‘프쉬케’다. 손 장로의 논리를 따른다면 위 성경구절에서 ‘목숨’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로 ‘조에’가 등장해야 했다. 예수님 자신의 목숨을 어떻게 ‘프쉬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아니다. ‘조에’가 아니다. ‘프쉬케’가 사용되었다.

위 성경구절 딱 한 곳에서만 예외적으로 ‘프쉬케’가 사용되었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한 구절을 더 인용해 보겠다. 바로 요10:11절 말씀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프쉬케)을 버리거니와”(요10:11)

역시 예수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다.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셨다. 이때의 ‘목숨’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역시 ‘프쉬케’다. ‘조에’가 아니다.

이를 통해 손 장로의 ‘조에-프쉬케’ 개념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하루>에서 보여준 손 장로의 가장 큰 단점은 그가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지 않기 때문에 문제다. 매우 심각한 문제다. 손 장로는 차라리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이번 원고에서 그의 ‘아가페-필리아’, ‘조에-프쉬케’ 사용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 외에 몇 가지가 더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필요할 경우,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자 한다.

저자 장운철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B.A),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Th.M.)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AZUSA PACIFIC UNI.(아주사퍼시픽 대학교, M.A.R)를 졸업했다. 두편의 논문을 작성했다. ‘요한계시록을 오용해 나타난 최근 이단사상 비판’과 ‘An Evangelical Christian Perspective on Money’(언론에 나타난 세상, ‘돈’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등이다. 서울 상도동에서 만나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천지 포교전략과 이만희 신격화 교리>(장운철, 진용식, 정윤석 공저, 한국교회문화사, 2007), <그리스도인들이여! 세상을 읽자>(장운철, 솔로몬, 2012), <이단들에 의해 잘못 사용되고 있는 핵심 성경구절 33가지>(장운철, 부흥과개혁사, 201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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