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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칭의론, 방종의 라이선스로 오용”박영돈 교수,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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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07  11: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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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조직신학-)가 2016년 12월 5일~6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이신칭의,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라는 주제로 진행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기조강의 전문입니다. 박 교수 외에 김세윤 교수(미국 풀러신학교), 권영경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가 기조강의자로 나섰습니다. 다음은 박영돈 교수의 발제문입니다[편집자주] 

   
▲ 연동교회에서 열린 미래교회포럼(사진, 뉴스앤넷)

16세기에 면죄부(면벌부)를 타파한 칭의론이 21세기 한국교회에서는 죄의 라이선스를 부여하는 면죄부라는 오명이 붙었다. 중세교회를 개혁했던 칭의론이 한국에서는 교회를 타락케 한 교리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칭의론 때문에 한국교회가 윤리적으로 타락했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최근에는 칭의론이 교회를 넘어 이 사회적 부패의 주요요인이라는 인식까지 비등해지고 있다. 요즘 온 나라를 발칵 뒤집히게 한 최순실 사태와 관련하여 한 윤리학 교수는 나라가 이 지경에까지 오게 한 한국교회의 부역의 책임을 물으면서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가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파괴하는 악마적 주범”이라고 혹평하였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면서부터 이런 지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한국사회의 총체적인 부패를 그대로 드러낸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덩달아 도마 위에 올랐다. 세월호의 실소유주인 유병언이 신봉하는 구원파적인 복음이 한국교회가 전파하는 칭의의 복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진단이 나왔다. 한국일보에 실린 “한국교회는 구원파와 다른가?”라는 기사에서 “한국 교회가 구원파 같은 이단이 독버섯처럼 자라는데 자양분이 되고 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평론하였다. “한국교회는 구원파와 다른가?”, 한국일보, 2014. 5. 25.
김세윤 교수도 구원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한국교회 대다수가 사실상 구원파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세윤, 『칭의와 성화』(서울: 두란노, 2013), 80.

칭의론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이런 문제와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칭의론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통적인 칭의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성경적인 대안을 탐구하려는 신학적인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전통적인 칭의론을 성경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은 모든 전통과 교의는 성경의 빛 가운데 점검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기본원리와 정신(sola scriptura)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최근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향한 성경 신학의 비판과 도전을 전통에 대한 위협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하고 성숙한 개혁신학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런 신학적인 논쟁이 소모전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는 칭의론의 정립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 되며 비록 견해는 서로 다를지라도 한 목적을 향한 신학함의 아름다운 교제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개혁의 칭의론에 대해 제기하는 비판이 정당하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전통적인 칭의론에 대한 비판과 지적이 오해나 피상적인 이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과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칭의론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는 왜곡된 메시지가 얼마나 다른지조차 모른 채 비판하는 경우가 적잖다. 빗나간 진단은 그릇된 처방책을 낳는다. 한국교회에서 종교개혁의 칭의론은 이중적인 타격을 입고 있다. 칭의론이 죄와 방종의 라이선스로 왜곡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근본 원인이 종교개혁의 칭의론 자체에 있다고 잘못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종교개혁의 칭의론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와 잘못된 비판이 무엇인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1. 종교개혁의 칭의론은 성화 없는 구원을 가르치는가?
오늘날 칭의론을 향해 빗발치는 비난, 즉 칭의론이 성화의 중요성을 간과하며 윤리적인 방종과 나태를 조장한다는 비판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 로마 가톨릭이
종교개혁자들을 향해 퍼부었던 가장 큰 정죄와 비난도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이 구원론을 다룸에 있어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점이 칭의론이 그런 식으로 왜곡되고 남용될 수 있는 위험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었다.

마틴 루터는 죄인을 의롭게 하는 믿음은 그를 동시에 새롭게 하여 선행의 열매를 산출한다고 역설하였다. 루터에 따르면, 칭의는 우리 안에 이루어진 실제적인 의로움(성화)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의로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이루어주신 낯선 의로움에 근거한다. 믿음은 ‘우리 밖의 의로움’을 붙잡는 손인 동시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내주케 하는 채널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동시적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내주하며 일하시기에 믿음은 반드시 선행의 열매를 산출한다.

이같이 루터가 믿음의 열매로서 갱신과 선행을 강조했지만 칭의만큼 성화에도 역점을 둔 구원론을 온전히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이런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성화의 신학자” 라고 불릴 정도로 성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Karl Barth, Church Dogmatics: The Doctrine of Reconciliation, IV.2(Edinburgh: T. & T. Clark, 1958), p.510. 칼빈은 비록 칭의가 종교개혁의 주요점이며 핵심교리이지만 그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니라 참된 경건의 바탕이며 출발점으로 보았다. 칼빈의 실제적 관심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이었다. 성결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와 열망이 그의 가르침과 사역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칼빈이 그토록 칭의론을 중요시 여긴 것은 그 교리만이 진정한 경건을 가능케 하는 바탕이고 성화를 촉진하는 원동력의 근원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칼빈의 칭의론에서 성화 없는 구원이라는 사상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칭의론은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수반하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교리라는 점이 누누이 강조되었다.

그 사실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구원론을 다룸에서 역역이 드러난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종교개혁 초기 루터란 구원론에 나타나는 패턴을 재구성하였다. 그는 칭의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화를 먼저 다루었다. 기독교 강요 3권 1장부터 중생, 성화, 회개(상호교체적인 개념으로 이해했음)를 논한 후에 3권 11장에 가서야 칭의를 논의했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v.2 ed. John McNeil(Philadelphia: Westminster, 1987),3.3.9.
성화 다음에 칭의가 이어지는 순서는 다른 교의학에서 발견할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이런 패턴에서부터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성화를 무시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비난을 원천에서 봉쇄하려는 칼빈의 숨은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칼 바르트(Karl Barth)는 칼빈이 성화를 칭의보다 전술적으로 앞세웠다고 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근간으로 하여 구원론을 전개하였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신자에게 주어지는 두 혜택은 칭의와 성화이다.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 같은 책, 3.11.1. "duplicem gratiam".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에서 뿐이지 우리의 경험에서는 아니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이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지체 없이 성화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이는 동시에 반드시 거룩해 진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의롭다고 하지 않으신다.” 같은 책, 3.16.1.

그것은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무도 칭의와 성화 둘 중 하나만을 체험할 수 없다.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만을 체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믿음이 회개와 성화를 동반함 없이 칭의의 효력만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 믿음은 행함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John Calvin, Commentary on Psalm, Calvin's Commentaries, 22 vols. r. & ed. John Owen(Grand Rapids: Baker, 1984), 103:3.

믿음이 참되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칭의 뿐 아니라 성화까지 취하게 된다.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되어” Institutes, 3.16.1.있으며 신앙생활 전 과정에 걸쳐 항상 함께한다. 따라서 칼빈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화 없는 칭의’만 경험할 수 없고, ‘성화 없는 칭의’로만 구원받을 수도 없다.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성화(중생)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칼빈은 자주 엡 2:8절과 딛2:11-14절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인 백성이 되게 하심이라고 했다. 같은 책, 3.7.3; 3.15.7. 칭의의 은혜는 이 뜻과 조화를 이루며 그 열매가 순종의 삶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순종의 삶에서 은혜와 율법은 서로 상충되지 않고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 은혜의 목적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다.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율법의 제 삼 용법을 율법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강조하였다. 같은 책, 2.7.12.

칼빈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동시에 거듭나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따르는 단 마음으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의롭다하는 믿음은 순종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순종의 열매를 산출하는 믿음이다. 믿음은 순종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가능케 하는 은혜의 채널이다. 칼빈은 믿기만 하면 순종하지 않아도, 순종의 열매가 없어도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은 순종의 열매뿐 아니라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는 믿음이다. 이 땅에서 신자의 순종은 불완전하고 흠이 많기에 항상 회개가 필요하다. 그는 믿음에 바로 이어 회개를 다루었다. 믿음은 회개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회개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성화의 전 과정을 회개의 삶으로 규정하였다. 칼빈에 따르면, 회개(성화)는 두 부분, 즉 죽임(mortificatio)과 살림(vivificatio)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이중적인 죽음(duplex mortificatio)이다. “자기 부인”이 주님의 죽음을 본받는 내적인 측면이라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 외적인 측면이다. 주님의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마16:24). 신자의 삶은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개혁하고 회개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루터도 일치한다. 95개 반박문 제일 조항에서 루터도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참회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칼빈에 따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바탕 위에서 믿음과 회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연합되어 그리스도인의 삶 전 과정에 병행된다. 따라서 성화 없이 칭의에 근거해서만 구원받지 못하듯이 행함, 즉 순종과 회개의 열매 없이 믿음으로만 구원받지도 못한다. 칼빈의 가르침에 의하면, 행함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행함이 없이 구원받지도 못한다. 그래서 칼빈은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 없이 존재하는 칭의를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Institutes, 3.16.1. 행함은 결코 칭의의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할 칭의의 열매이다. 행함은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해준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검증에서 탈락한 죽은 믿음이다. 행함이 없이 덩그렇게 홀로 남아있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게 하는 믿음이 아니다.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이해하는 것은 큰 착오이다.

여기서 한국교회에 만연한 값싼 구원의 복음이 얼마나 종교개혁자의 구원론과 거리가 먼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믿기만 하면 거룩함의 열매가 전혀 없어도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완전히 곡해한 이단적인 발상이다. 칼빈이 가장 혐오하며 경계했던 오류가 칭의 교리가 교회의 타락을 조장하는 방종의 라이선스로 해괴하게 변질되는 것이었다. 칼빈이 칭의론을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주력했던 점이 이 교리가 그런 식으로 왜곡되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그는 치밀하고 정교한 논리로 그런 오류를 원천에서 봉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결여된 것이 작금에 일어나는 칭의론에 대한 혼란을 야기한 근본원인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를 영적, 윤리적으로 타락케 한 주범이 종교개혁의 칭의론 인양 말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론의 기본 입장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는 분명한 방증이다. 그만큼 한국교회에 종교개혁의 구원론 자체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나와 같은 신학교수들의 책임이 크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왜곡된 구원론은 부실한 신학교육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값싼 구원의 복음을 비판하는 자체는 정당하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구원론이 종교개혁의 칭의론과 얼마나 상이한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정확한 진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오해나 부정확한 진단에 근거한 비판과 대안 제시는 신학적인 발전보다 혼란과 소모적인 논쟁을 불러오게 된다.

2. 개혁주의 칭의론은 칭의와 성화를 2단계로 분리하는가?
김세윤 교수는 한국교회 강단에서 전파되는 구원파적인 메시지가 전통적인 칭의론 자체가 안고 있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김 교수는 칭의와 성화를 구조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교리는 결국 성화의 열매 없이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구원파적인 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이 대다수 한국 목사들이 가르치는 왜곡된 칭의론, 성화와 분리된 칭의론, 의로운 삶을 낳기는커녕 도리어 방해하는 칭의론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신학의 구원의 서정의 틀의 한계입니다.” 『칭의와 성화』, 81.

한국교회에 만연한 값싼 은혜의 복음이 구원파적인 메시지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점에서 그의 지적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런 잘못된 칭의론이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심각하게 왜곡된 것이라고 진단하기보다는 오히려 전통적인 칭의론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같은 책, 79-81.

『칭의와 성화』 라는 책에서 김 교수가 계속 지적하는 전통적인 칭의론의 문제는 칭의와 성화가 2단계 식으로 분리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런 가르침에 따르면, 결국 성화의 열매가 없이도 칭의로만 구원받는다는 구원파와 유사한 논리적인 귀결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것이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교리가 안고 있는 한계라고 지적했다. “‘칭의’를 믿는 자 된 순간부터 현재를 거쳐 최후의 심판 때까지의 구원의 전 과정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으로 이해해야지,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론에 의거하여 믿는 자 된 순간에만 적용하고, 그 후에 성화가 있는 것으로 논하면, 칭의의 현재적인 과정(전통적인 신학이 말하는 ‘성화’의 과정)이 등한시됩니다. 그러면 윤리(의로운 삶)가 없는 칭의론이 되고 맙니다.” 같은 책, 190.

김 교수가 지적한 대로 많은 이들이 구원의 서정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교회에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여 구원은 칭의에만 근거하여 받고, 성화의 의미와 가치는 기껏해야 죽은 후 천국에서 받을 상급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필자도 그런 설교를 들으며 교회생활을 했다. 그런 가르침에 의하면, 칭의론이 성화의 열매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이 보장되는 방종의 라이선스로 오용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교리를 피상적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지 결단코 그 교리가 가르치는 바는 아니다.
구원의 서정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를 따른 것이다. 구원의 다양한 측면을 논리적으로 구별한 것이며, 이 모든 국면은 성령 안에서 하나로 엮어져 있으며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전통교리의 기본 전제이다. 이 교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령사역의 다각적인 면을 신학적으로 조명함으로써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부요한지를 드러내기 위한 논리적인 틀을 제공한 것이다. 구원의 서정을 가르치는 개혁신학자들은 칼빈과 함께 모두 칭의와 성화가 그리스도 안에서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구원 서정의 교리 자체가 칭의와 성화를 이원론적으로 분리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이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한국교회에서 구원의 서정이 자주 이런 식으로 곡해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교리 자체가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3. 칭의와 성화는 연합되었으면서도 구별된다.
김 교수는 전통적인 칭의론에 대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경적인 대안을 찾는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선후 관계로 설정함으로 구원파적인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대응책으로 칭의와 성화를 다시 하나로 묶는 해석학적인 틀을 제시하였다. 곧 칭의와 성화는 동일한 특성과 의미를 띠며 이미(already)와 아직도(not-yet)의 종말론적인 구조 속에서 같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성화는 칭의의 현재적인 단계이며, 칭의의 완성은 성화의 열매에 따라 심판 받는 종말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같은 책, 78-80.

“바울은 이와 같이 칭의의 언어와 성화의 언어를 동의어로 쓰며 구원의 세 단계(과거, 현재, 미래)의 전 과정에 공히 적용됩니다. 칭의 다음에 성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둘은 같은 실재를 말하는 다른 그림언어들(metaphors)입니다.” 같은 책, 180.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김 교수의 이런 주장은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종교개혁의 구원론과 어떤 면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구조에서도 칼빈이 강조했듯이 칭의와 성화는 한순간도 분리되지 않고 긴밀하게 연합되어 신자의 삶 전 과정에 병행된다. 칼빈의 가르침에 의하면, 처음 그리스도와 연합했을 때(구원의 과거) 신자는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동시에 받으며, 계속 칭의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성화(회개)의 열매를 맺으며(구원의 현재), 마지막에 칭의의 바탕 위에서만 심판대 앞에 서며 그의 부실한 성화의 열매도 칭의에 근거해서만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구원의 미래).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는 구원의 전 과정(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함께 진행된다. 이런 면에서 김 교수의 견해와 개혁 구원론의 입장은 일치한다.

그럼에도 두 입장이 갈라서는 지점은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하는가 아니면 구별하는가의 문제이다. 김 교수는 “바울의 ‘성화’ 언어의 사용법들은 칭의의 사용법과 일치하며”, 둘 다 신약 구원론의 세 측면, 즉 이미 구원받았음, 구원받고 있음, 마지막 구원받을 것의 삼층 구조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책, 180

곧 “성화의 과거는 칭의의 과거, 즉 ‘믿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기/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 되기’와 같고, 성화의 현재는 칭의의 현재, 즉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며 살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칭의의 현재를 의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규정하듯이(갈5:22-23, 빌1:1), 마찬가지로 성화의 현재도 의의 열매 맺는 삶으로 규정합니다(롬6:19, 22); 살전3:12-13<사랑의 증가>; 4:3-8). 앞서 인용한 최후의 심판 때 완성되는 성화에 관한 데살로니가전서 3:13의 말씀은 여러 곳에서 바울이 최후의 심판 때 완성되는 칭의를 말할 때 쓰는 문장 형식과 근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롬 5:8-10; 8:32-34; 고전 1:6-9, 빌 1:10, 11; 2:15).” 같은 책, 180.

김 교수는 구원의 과거적 단계는 칭의이고 구원의 현재적인 단계는 성화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구원론은 바울의 관점과 언어 사용법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지적이다. 김 교수의 주장은 칭의와 성화를 2단계로 분리하는 통상적인 오류가 교정되어야 함을 일깨워준다. 구원의 과거는 칭의이며 그 현재적인 면은 성화라는 도식은 바울의 가르침뿐 아니라 칼빈의 관점과도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가 연합하여 신앙생활의 전 과정에 병행된다는 칼빈의 입장에서도 구원의 과거는 칭의 뿐만이 아니라 성화도 포함한다. 칼빈은 바울의 논리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또한 성화는 현재 진행형이며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 성화의 전 과정에 칭의가 병행되기에 구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칭의와 성화로 구성되어있다.

김 교수의 그런 지적이 타당함에도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칭의와 성화를 일방적으로 동일시한 나머지 그 둘을 구별해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신학적으로 규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김 교수도 칭의와 성화의 개념적인 차이를 인정했다. 칭의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가 제거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법정적인 뉘앙스를 더 강하게 나타내는 반면”, 성화는 죄의 오염과 지배에서 자유하여 하나님께 성별되는 “제의적 뉘앙스가 더 강하게 나타내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같은 책, 181.

그래서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는 유대주의자들에 맛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는 칭의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였다고 했다. 그에 반해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서는 헬라인들의 우상숭배와 음행 등의 더러운 행위에 대응하여 구원을 죄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 하나님께 성별되는 성화의 언어를 자주 사용하여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의 언어가 많이 사용된 데살로니가전서와 고린도전서에도 칭의가 다분히 암시되어있으며, 칭의의 범주가 주로 등장하는 로마서에서도 성화의 언어가 틈틈이 삽입되었다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그는 롬6:19-22절에는 칭의의 언어(불법, 의의 열매)와 성화의 언어(부정, 거룩함의 열매)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두 언어가 죄의 “불법성에 초점을 맞추는가, 아니면 그것의 부정성에 초점을 맞추는가에만 차이를 갖는 동의어들이라”고 하였다. 같은 책, 186.

김 교수는 칭의와 성화가 특성상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계속 인정하면서도 그 구별성을 논하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칼빈처럼 칭의와 성화의 연합된 구조 뿐 아니라 구별된 특성도 조화롭게 이해하는 것이 구원은혜의 다양한 측면을 더 부요하고 풍성하게 드러내는 성경적인 관점을 더 잘 포착한 것이라고 본다. 성경은 구원을 구속, 새 창조, 중생, 연합, 칭의, 성화 등 다양한 개념과 범주로 묘사한다. 그 중에서 칭의와 성화는 구원의 법정적인 면과 갱신적인 측면의 절묘한 짝을 이루는 이란성 쌍둥이 개념으로 등장한다. 김 교수가 지적했듯이 성경에서 칭의와 성화의 언어가 긴밀하게 연결되고 병행되어 사용되며(롬5:1-5, 8:1-2, 29-30, 고전1:30, 6:11, 딛3:5), 의로움이라는 단어가 항상 법정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의로움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예도 존재한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칭의를 논함에 있어 의롭다는 용어를 법정적인 개념으로 사용한 예가 지배적이다(롬 3:20,24,26,28; 4:2, 5; 5:1,9,18; 6:7; 8:30,33; 고전 6:11; 갈 2:16,17; 3:8,11,24; 딛 3:7). 바울이 로마서에서 사용한 의와 의롭다 하심을 뜻하는 디크 계열의 헬라어(δικαιοω, δικαιοσ, δικαιοσυνη, δικαιωμα)는 강한 법정적인 뉘앙스를 띠었다. 구약에서도 의롭게 하다(히츠디크)는 동사가 히필형(또는 피엘형)으로 사용되어 재판에서 의롭다고 판결한다는 뜻을 전달한다(출 23:7, 신 25:1, 왕상8:32, 역하6:23, 욥 27:5, 잠 17:25, 사5:23, 렘3:11). 비슷한 맥락에서 바울도 의롭게 하다(δικαιοω)는 단어를 의롭다고 인정하다 혹은 간주하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대다수의 성경학자들도 그 동사를 법적인 선언을 뜻한다고 본다. 인간의 불의함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하나님의 의의 출현을 서술한 로마서 1:16-3:26의 문맥에서 이 단어의 사법적이고 법정적인 의미가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자신 안에 의가 전혀 없는 자들을 값없이 의롭다고 한다(롬3:22-25). 여기서 의롭다는 단어는 의롭다고 인정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로마서 4장에 ‘여기다(λογιʹζομαι)’라는 동사가 의(δικαιοσυνη)와 함께 자주 사용되어(4:3, 5, 6, 9, 11, 22) 이런 법정적인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부각한다. 따라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등장하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씀은 불의한 자를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언이다.

이런 성경적인 증거에 근거하여 개혁신학에서는 칭의는 죄책과 그에 대한 정죄와 진노가 제거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법적인 선언인 동시에 신분적인 변화로 정의한다. 반면에 성화는 죄의 오염과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성별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칼빈과 개혁주의 입장은 칭의와 성화가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의 전 과정에서 긴밀하게 연합하여 병행된다는 점에서 구조적인 동일성과 함께 그 초점과 특성에 있어 차이가 있다는 의미적인 구별성을 강조한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으로서 우리의 체험에서는 비록 동시적이며 구별되지 않지만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는 연결성을 – 는 구별성을 뜻한다.
구원의 과거적 측면: 칭의 ± 성화(결정적 성화)
구원의 현재적 측면: 칭의 ± 성화(점진적 성화)
구원의 미래적 측면: 칭의 ± 성화(최종적 성화)

4. 칭의는 성화에 근거하지 않는다.
칼빈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칭의론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가 바로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통합해버린 것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하여 혼동하므로 불러온 문제는 구원을 교회의 예식에 종속시킨 제도적인 구원론, 연옥설, 면죄부뿐만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심각하게 위태롭게 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가 실제로 의롭게 된 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받아드려지고 인정받는다면 누가 과연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설 수가 있겠는가.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큼 의롭게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이 땅위에서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의롭고 거룩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무서운 자기기만에 빠지게 될 뿐이다. 우리가 더 거룩해질수록, 하나님의 빛에 가까이 나아갈수록 우리 자신의 부패함을 더 깊이 인식하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의식이다.

따라서 칼빈이 강조한 오직 믿음(sola fide)은 믿기 전 우리의 의로움 뿐 아니라 믿은 후 우리의 의로움까지 배제한다. 이 칭의의 선물은 믿은 후 우리가 은혜로 이룬 성화의 열매에 조금도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 안의 모든 의로움(성화를 포함한)을 배제하고 오직 우리 밖의 의로움에 초점을 맞춘다. 믿음은 오직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의로움만 붙잡는 손이다. 칭의의 선물이 타자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영 단번(once and for all)에 주어진 순전한 선물이기에 우리의 의로움(성화)에 따라 변개되거나 회수되지 않는다. 우리가 거룩하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덜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칭의가 하나님의 법적인 판결이며 관계회복이라는 의미라면, 우리가 제대로 의롭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한 번 내리신 의롭다는 판결을 취소하거나, 양자로 받아들인 우리를 내치고, 신부로 맞은 우리를 버리시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신학적인 귀결이다.

김 교수가 잘 지적했듯이 칭의는 법정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관계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김 교수가 전통적인 칭의론이 근래까지 칭의의 관계적인 의미를 무시해왔다고 했는데, 칼빈은 칭의론을 다루는 서두에서부터 칭의를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됨으로써 하나님이 재판관이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Institutes, 3.11.1.

칭의 복음의 요점은 바로 화목하게 하는 것이며 “화목하게 한다는 단어는 의심의 여지없이 바로 ‘의롭게 한다’라는 의미인 것이다”고 했다. 같은 책, 3.11.4.
개혁신학자들이 칭의론을 다룸에 있어 주안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이다. 많은 개혁신학자들은 칭의의 적극적인 면으로 양자됨과 영생의 권리까지 포함시켰다. 참고: 안토니 후크마, 류호준 역, 『개혁주의 구원론』(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303.

칭의가 의미하는 관계적인 변화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던 죄인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기쁨의 대상인 의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변한 것이다. 하나님께 지극히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이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탕자처럼 하늘 아버지의 거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에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대히 나아갈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로움으로 획득한 권리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얻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칭의의 선물은 하나님이 자신을 내어주심, 즉 자기증여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선물로 내어주셨다. 아들과 함께 성령을 선물로 보내셨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다.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져 삼위하나님과 교제와 화평을 누리게 하셨다. 비록 신자가 연약하여 죄에 빠지고 영적으로 침체했을 때도 이 선물은 변함없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럴 때일수록 신자에게 이 선물, 즉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는 은혜가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신자는 연약하여 자주 쓰러진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루라도 회개가 필요 없는 날을 맞이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성화는 사실 실패를 통한 성숙의 과정이다.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조금씩 변화된다. 칼빈처럼 칭의를 성화에 의해 변개될 수 없는 선물로 이해할 때 칭의는 성화 과정에서 자주 넘어지는 연약한 신자들이 계속 재기할 수 있는 영적 회복의 견고한 바탕을 제공한다. 값없이 주어진 칭의의 선물을 누림에서 감사와 확신과 자유와 담대함을 갖게 되며 이것이 참된 경건의 원동력이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하여 혼합하면 칭의뿐 아니라 성화도 위태로워진다는 점을 우려하였다. 그렇게 되면 칭의가 우리 밖의 의로움에 근거해서 영 단번에 주어진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이라는 특성이 흐려지며 이 선물을 누림에서 오는 감사와 확신, 자유와 담대함이 사라지게 된다. 대신에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만큼 자신이 실제 의롭게 되고 거룩해졌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서 오는 불안감과 칭의의 은혜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얻어내려는 헛된 수고와 칭의의 은혜와 자신의 경건을 교환하려고 율법주의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경건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을 부각시킴으로 확신과 감사와 자유를 앗아가는 불안한 성화의 기반을 허물고 진정한 성화가 진행될 수 있는 견고한 은혜의 반석을 새로 깐 것이다.

요약하면, 칼빈의 공헌은 칭의의 선물적인 특성을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고 칭의를 성화에 근거시키지 않으면서도 성화를 구원의 구성요소로 체계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 따르면, 성화 없는 구원은 없다. 그러나 성화는 칭의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한다. 성화는 칭의의 공로적인 조건이나 근거가 아니지만 칭의의 필연적인 열매이다. 성화가 칭의를 확립하지는 못하지만 칭의가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는 기능을 한다.

5. 성화와 분리된 칭의는 방종을 조장하나 성화와 구별된 칭의는 참된 경건의 바탕이 된다.
김 교수가 지적했듯이 칭의와 성화를 2단계로 분리하는 것은 윤리적인 방종을 초래하지만, 둘의 구별성을 적절하게 강조하는 것은 성화의 견고한 바탕을 제공한다. 김 교수가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을 신학적으로 규명하지 않고 둘을 동일시해버리는 쪽으로 치우친 것은 칭의와 성화를 선후관계로 보는 통상적인 오류를 극복하려는 의도가 상당부분 작용한 것 같다. 김 교수의 깊은 우려는 칭의와 성화의 구분은 결국 구원파적인 복음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 “성화를 칭의와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칭의 뒤에 오는 구원의 한 단계로 이해하면, 우리가 이미 칭의를 받았으니 설령 성화가 부족하여 장차 하늘에서 상급을 못 받아도 최소한 구원은 이미 확보되었으므로 그것으로 되었다고 자만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에서 의의 열매를 맺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할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칭의와 성화』, 192.

김 박사가 지적했듯이 칭의와 성화를 이단계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이런 문제를 야기한다면 역으로 칭의와 성화를 일방적으로 동일시할 때 발생하는 혼란 또한 그에 못지않게 심각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칭의와 성화가 신자의 삶에 어떤 역학관계 속에 서로 연합되면서 구별되게 작용하는지를 세밀하게 신학적으로 반성하지 않고 둘을 뭉뚱그려 혼합해버리면, 많은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먼저 칭의도 성화와 같이 점진적인 성장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어가는 것인지 의문이 제기된다. 김 교수도 칭의의 성장과 성화의 성장을 동일시하는 듯하다. “성령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구원의 현재 단계를 의인됨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고, 성화에 있어서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책, 189.

그렇다면 칭의가 우리의 부실한 성화에 의해 완성되어가며 성화의 부진함으로 인해 불안해질 수도 있다는 뜻인가. 이런 의혹은 김 박사가 칭의가 종말론적으로 유보되며 같은 책, 78-79.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함으로 더욱 증폭된다. “칭의의 현재(‘구원의 서정’의 언어로 말하자면 ‘성화’) 단계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성령의 도움으로 순종하려는 기본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은 설사 그가 예정에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칭의/구원을 받았다 한들(롬 10:9-10), 종말의 칭의/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탈락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같은 책, 264.

김 교수가 신자에게 성화의 열매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의도와 논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칼빈과 개혁주의 입장에서도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칼빈은 성화의 필연성을 김 교수와는 다른 해석의 틀에서 강조하였다. 칭의를 부실한 우리의 의로움, 즉 성화가 아니라 우리 밖의 완전한 의로움에 근거시킴으로 칭의의 취소나 구원의 탈락의 가능성을 배제하면서도 성화의 열매가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은 부각시킨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전 과정에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과 구별성을 조화롭게, 그리고 균형 있게 이해한 논리의 틀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로인해 칭의론이 방종과 나태를 조장할 수 있는 여지를 제거하고 참된 경건을 촉진하는 확신과 감사와 겸손과 자유를 부여하는 교리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김 교수처럼 칭의의 복음을 남용하는 것을 막으려고 칭의가 취소될 수 있고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강조하면 정작 그 피해를 입는 이들은 참된 신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칭의의 복음을 방종의 기회로 삼을 정도로 부패한 사람은 칭의의 유보와 탈락에 대한 염려나 두려움조차 심각하게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참된 경건으로 돌이킬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오늘날 교회에 그런 교인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런 사람은 진정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라고 볼 수 없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새 언약이 그 안에 성취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새 마음과 영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이는 동시적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칭의를 이해할 때 칭의의 취소나 구원의 탈락을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신학적인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김 교수가 주장했듯이 칭의가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부여되어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누리게 된 것이라면, 이 칭의의 취소는 아들의 신분이 말소되며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서 끊어지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깨진다는 신학적인 함의를 담고 있다. 신학자들이 어떤 주장을 할 때 거기에 따르는 신학적인 모순과 혼선을 충분히 감안하여 신중한 논리를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약성경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그 신분이 영구히 박탈당한다거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결합한 그의 신부가 버림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서 아주 끊어진다는 말씀이 등장하는가.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말씀으로 가득하다. 바울의 전체적인 가르침은 우리 구원의 확실한 보증이신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구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끈으로 단단히 엮어져있다. 우리 안에 구원을 시작하신 이가 구원을 이루시며 완성하실 것이다(롬 5:9, 8:11,30, 빌1:6, 2:13). 하늘과 땅의 어떤 세력도, 현재와 미래의 어떤 일도, 환난과 핍박과 죽음도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없다(롬8:31-39).

바울서신에서 칭의에 기초한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바울의 일관된 주장과 논지와 대립될 정도로 분명하게 칭의의 유보와 탈락을 말하는 구절은 없다. 그런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은 대개 육신을 따르는 삶의 위험성과 불의한 자의 말로를 일깨워줌으로 신자를 경성케 하여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는 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경고하는 일종의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그것을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궁극적인 확실성과 대비되는 칭의의 유보와 탈락의 가능성으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지나친 논리적인 비약이며 바울의 가르침을 무리하게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칭의의 바탕 위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는 것은 바울의 가르침을 인위적으로 조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의도한 성경의 고유의 의미와 그 논리적인 함축을 읽어내는 당연한 해석학적이며 신학적인 작업이다.

우리의 칭의가 성화의 열매에 따라 심판받는 종말에까지 유보된다면 누가 주의 심판 앞에 떳떳이 설수 있겠는가. 우리의 칭의가 우리의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성화에 조금이라도 근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을 만큼 충분히 거룩하고 의롭게 행했는지를 항상 염려하고 불안하게 될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실제 칭의론을 죄의 면죄부로 남용하는 이들에게는 별 효력이 없는 반면에 참으로 거듭나 거룩하게 살기를 갈망하나 자신의 연약함으로 신음하는 참된 신자들에게 확신과 위로와 경건의 원동력을 앗아가며 번민과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형벌을 부과할 것이다. 칭의론의 남용을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은 그다지 지혜롭지 못하다. 진리를 악용하는 자들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실 칭의의 복음이 망하는 자들에게나 방종의 라이선스로 남용되지,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오히려 위로와 안식의 유일한 근원이며 경건의 바탕으로 작용한다. 칭의론은 참된 신자를 위한 교리이다. 칭의론의 남용을 잘못 막으려다가 오히려 참된 신자의 위로와 성화의 원동력까지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6. 신자의 삶에 확신과 두려움이 공존케 하는 칭의론
칼빈은 신자에게는 확신과 두려움이 공존한다고 했다. Institutes, 3.2.22-27.
우리의 확신에 경건한 두려움이 깃들여 있어야 우리를 죄와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보존하여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칭의의 탈락이라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사랑과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에서부터 오는 두려움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지극히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참으로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그 은혜와 사랑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까 우려하는 두려움이 있다.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종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사랑받는 자녀들 안에 있는 복음적인 두려움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위로와 확신을 주는 말씀과 두려움과 경종을 불러일으키는 말씀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믿음 안에서 살아있게 해야 한다. 이런 두려운 말씀이 부패성을 안고 있는 신자가 방종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아주는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게 한다.

오래 교회생활을 했음에도 성화의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의 진정성은 반드시 점검되어야 한다. 자신이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심각하게 돌아보고 성찰해야 할 사람들에게 억지로 구원의 확신을 주입시키려는 인위적인 시도는 사람들을 거짓구원의 확신으로 세뇌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사탄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확신을 공격하며 흔든다. 반면에 위선자 안에 거짓 구원의 확신을 더욱 강화한다. Jonathan Edwards, Religious Affection, 167-181. 여기서 에드워드는 거짓 구원의 확신과 사탄의 미혹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거룩함의 열매가 없이 죄 속에 살면서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으로 충만하여 자신의 구원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확실히 망하게 한다. 한국교회에 구원파적인 복음, 성화와 단절된 칭의로만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은 교인들을 진리의 영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 주는 거짓 확신에 빠지게 한다. 성령 안에서 성화가 진행되는 증거와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것은 교인들을 무서운 자기기만과 방종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위험에 대응하여 복음 전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하나로 연합되어있으며 칭의가 참되다면 반드시 성화를 수반한다는 점을 강조해야한다. 어떻게 사느냐와 상관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은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안일하고 태평하게 사는 이들에게 성화의 열매로 칭의의 진정성을 증명해야한다고 강력하게 도전해야한다. 참된 칭의의 증거와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교인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보게 해야 한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조언은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이런 의심이 참된 확신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

7. 성령 안에서 현재적 칭의와 종말의 칭의는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칭의론을 성령론의 맥락에서 재조명하여 칭의와 성령사역의 긴밀한 연합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칭의 교리의 남용과 왜곡을 막는 길이다. 칭의론은 기독론 뿐 아니라 성령론적인 관점, 즉 교회론, 종말론,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다루어야한다. 칭의론이 면죄부로 왜곡된 근본책임은 교회 강단에 있다. 칭의의 교리가 신자의 거룩한 삶을 증진시키기보다 오히려 방해하는 역기능을 하게 된 것은 칭의의 복음이 성령의 조명 가운데 제대로 전파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조명이 함께 하기 힘들 정도로 성경이 증거하는 칭의 복음의 진수가 빠진 구원론이 한국교회에 범람한다.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삼위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 그 은혜의 영광과 풍성함을 구속사적 맥락에서 온전히 드러냄이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메시지의 단조로운 반복이 거짓 확신과 윤리적인 혼란을 가중시킨다.

구원의 확신은 인위적으로 창출해내는 종교적인 감정이 아니다. 진정한 구원의 확신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비추어주심으로 생성되는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마음의 확증이다. 성령은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셨다는 칭의 복음을 통해 십자가의 정점에서 찬란하게 계시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그리스도의 얼굴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신다. 따라서 이런 성령의 조명이 없이 참된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Institutes, 3.2.33-35. 여기서 칼빈은 성령의 역사 없이 믿음은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칭의는 성령체험을 동반한다.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롬5:1-2). 성령은 우리 안에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확신뿐 아니라 미래에 궁극적인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까지 갖게 하신다. 이런 확신의 강력한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사역이다(롬 5:5). 의롭게 된 이가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다. 의롭게 된 이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과 영적으로 먹고 마시는 천국잔치에 참여한다.

성령은 궁극적인 구원과 영생의 보증이며 첫 열매이다. 신자는 성령 안에서 이미 종말론적인 은혜, 하늘에 속한 복을 그 첫 열매로 맛본다. 신자는 이미 심판대를 지나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이다. 그는 이미 하늘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다. 하늘의 처소에 들어가 아버지 집에 거하며 천상의 신령한 복을 누린다(엡1:3, 2:6). 성령 안에서 누리는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와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는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이는 결코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역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사는 이는 반드시 완성될 천국에 들어간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로움이 우리가 죄로 인해 상실한 하나님 나라에 지금 들어가게 할 뿐 아니라 미래의 천국입성까지 확실히 보장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이미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였다. 영적으로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었고(롬6:1-5, 엡2:1-5, 골3:1),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다(엡1:19-20).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현재적인 면과 마지막 육체가 소생하는 미래적인 부활은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된 한 짝이다. 신자 안에 내주하는 부활의 영인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린 것처럼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릴 것이다(롬8:11).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이미 부활의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이 마지막 육체의 부활과 영생을 확실히 보장해준다. 따라서 영적인 부활 뿐 아니라 육적인 부활까지 칭의의 열매인 동시에 칭의의 확증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그가 의로우심을 입증하셨듯이 마지막에 우리를 다시 살리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확증하신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요일3:3). 이 소망이 참된 경건의 비밀이다.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소망하는 믿음이다.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이미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선 자로 산다. 심판대 앞에 선 것처럼 산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한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참된 신앙의 증거인 종말론적인 지향성을 상실한 것이다. 하늘의 영광이 아니라 이 땅의 영광과 권력과 번영을 추구하는 현세지향적인 신앙으로 전락하였다. 이것이 한국교회 세속화의 근본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종말의 영인 성령을 거스르고 대적하며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칭의의 복음은 성령을 거스르고 사는 위선자들을 위한 면죄부가 아니다.

칭의론을 방종의 라이선스로 남용하는 자들은 아무리 믿노라고 할지라도 그 행한 대로 심판받을 것이다(롬14:10-12, 고후 5:10).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믿노라고 고백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했다고 그들의 대단한 믿음과 업적을 과시할 것이다. 그들이 고백하는 믿음의 진위를 가리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다. 따라서 심판은 우선적으로 주님이 자주 말씀하신 알곡과 쭉정이, 위선자와 참 신자를 가려내 영구히 분리시키는 방편이다. 믿노라고 하면서 성령을 계속 거스르고 거짓되게 행한 위선자는 불신자와 똑같이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다. 그들의 행함 없는 믿음이 그들을 의롭다 하기보다 오히려 더 혹독한 심판을 자초할 것이다. 그 때에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하실 것이다.

주님이 위선자는 정죄하시나 참 신자는 사탄의 고소 앞에서 강력하게 변호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줄기차게 강조하는 바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 따라서 참 신자에게 정죄와 영벌에 이르는 심판은 더 이상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죽을 몸을 다시 살리시는 자체가 만천하에 우리가 의롭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행위인 셈이다. 최후의 심판에서 신자에게는 이미 부활로 인해 가시화된 칭의에 대한 공적인 확증과 선포가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가 범한 죄악에 대한 사죄와 함께 그가 행한 선에 대한 인정과 상이 결정될 것이다. 악행에 대한 사죄의 근거도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데 있으며 선행에 대한 인정과 상급의 근거도 칭의이다. 우리의 선행과 의로움이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미미하기 짝이 없고 흠투성이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의롭게 여기시고 그에 대한 상급까지 약속하셨다. 칭의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신자의 전인, 즉 그의 존재 뿐 아니라 그의 행함도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행함은 칭의의 조건은 아니지만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필수적인 열매이다. 이 열매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를 통과한다는 보장은 없다.

김 교수는 현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성령의 도움으로 순종하려는 기본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은 설사 그가 예전에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칭의/구원을 받았다 한들(롬 10:9-10), 종말의 칭의/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탈락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 같은 책, 264. 이라고 했다. 필자도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의 주권에 기본적으로 순종하려는 기본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은 종말의 칭의를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김 교수의 기본논지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런 신자를 진정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받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성경적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믿음은 동시에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며 성령이 내주케 하는 믿음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령 안에서 칭의를 통해 임한 종말론적인 실체인 하나님 나라와 새 창조의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현재 성령 안에서 거듭난 새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부분적으로라도 누리지 못하는 이는 진정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 교인은 참으로 회개하지 않는 한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것처럼 하나님의 존전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며 사느냐가 우리가 참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며 마지막에 구원받을 사람인지를 충실히 말해준다.

보스(Geerhardus Vos)는 바울 칭의론의 출발점은 종말이라고 했다. Geerhardus Vos, Pauline Eschatology(Grand Rapids: Eerdmans, 1994), 1-61.
바울은 칭의를 과거-현재-미래로 올라가는 통상적인 사유방식이 아니라 미래-현재-과거로 거슬러 내려오는 역전적인 사고를 통하여 조명했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성령 안에서 신자가 누리는 종말론적인 실체인 칭의의 과거와 미래가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점이 더욱 확실해진다.

8. 칭의, 교회, 하나님 나라
칭의는 개인 구원뿐 아니라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핵심 사상이다. 칭의는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인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개념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들이 그 의의 열매를 누리는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이 되어 성령 안에서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잔치를 누리는 새로운 성전이며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이다. 교회에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것(롬14:17)이 바로 칭의의 열매이다. 이 하나님나라의 공동체에 들어가는 조건은 믿음으로 값없이 얻는 의로움이다. 그래서 교회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은 칭의이며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자에게 사죄와 의롭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대언한다. 교회의 입문의식인 세례도 칭의에 근거한다. 세례 시에 수세자에게 칭의가 공적으로 선언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의로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연합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교회의 일원이 되는 자격이 전적으로 우리 밖에서 주어지기에 우리 안에 자랑할 것이 없다. 그래서 교회는 육신을 자랑하거나 신뢰할 것이 없고 십자가로 자랑하며 성령으로 봉사하는 이들의 공동체이다.

칭의가 교회의 정체성 뿐 아니라 교회봉사의 원리를 규정한다. 칭의의 바탕 위에 세워진 사역의 원리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이다(엡4:2). 공로와 보상 원리를 따라 작동되는 세상의 가치 시스템과는 달리 교회는 은혜의 원리를 따라 인정받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의해 주관되는 공동체이다. 또한 칭의가 교회생활과 예배의 특성을 결정한다. 교회의 예배와 성찬은 성령 안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장차 도래한 그 나라를 대망하는 행위이다. 교회의 선포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교회에서 칭의의 복음이 성령의 능력을 전파되어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야 칭의론은 방종의 라이선스가 아니라 거룩함의 채널로 작용한다.

나아가 칭의 교리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뿐 아니라 인간 서로 간에 쌓인 높은 장벽을 제거하며 인종과 성별과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분열을 치유하는 교리이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한 성령 안에 연합하게 하는 교리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데는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차별이 없으며 이 동일한 믿음으로 한 백성이 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가 개인과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고 온 세상에 확산되기를 원하신다. 교회에 성령 안에서 현실화된 하나님나라의 첫 열매인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과 평강과 희락이 세상으로 파급되게 하신다. 성전으로부터 생명수가 흘러나오고 샬롬이 강같이 흐르는 구약의 소망이 새로운 성령의 거처이며 성전인 교회를 통해 실현되게 하신다. 하나님이 새로운 성전인 교회(엡2:21-22)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엡5:18), 거기서부터 흘러나가는 생명수로 온 누리를 적시며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피조물을(롬8:21) 새롭게 하며 만물을 회복하고 충만케 하신다.

바울은 이 종말론적인 비전을 내다보며 교회를 정의하기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고 했다(엡1:23).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신 의로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의 풍성함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와해된 온 피조세계를 치유하고 회복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질서와 통치가 인류 뿐 아니라 온 세계에 온전히 실현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게 한다. 그러므로 칭의의 복음은 개인의 구원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상을 당신과 화목케 하시고 죄로 파괴되고 오염된 온 우주를 갱신하여 의로 다스리고 주관하는 하나님 나라의 수립까지 포괄한다.

칭의 교리는 구원 메시지의 심장이며 심오한 영성의 바탕이고 복음의 젖줄이며 고통당하는 양심의 위안이다. 또한 칭의의 복음이 타락한 교회를 돌이키는 가장 강력한 은혜의 방편이며, 영적 회복의 바탕을 제공한다. 교회가 부흥할 때마다 다시 부활했던 메시지가 타락한 당신의 백성이 돌이키면 단번에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칭의의 복음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흥과 개혁을 고대하는 한국교회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도 칭의의 복음이 부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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