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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와 여호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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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와 여호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Narroway
  • 승인 2016.02.11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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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머무는 국가의 수도 한가운데는 커다란 모스크가 있다. 한국 사람들의 대표적인 집회장소가 광화문이듯이,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이 모스크 앞 광장이 국가적으로 상징적인 장소이다. 주소도 1번지이다. 이슬람 정기예배가 있는 금요일 오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모스크 주변으로 펼쳐진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려는 것이었는데,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날을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에 의해 모스크 인근의 차량운행이 전면 통제되고 있었고, 대부분의 가게들은 문을 닫고, 그마나 문을 열어둔 몇몇 가게에서조차 기도시간에는 들어올 수 없도록 하고 있었다. 모스크는 이미 가득 차 사람들은 그 앞의 광장과 차도에까지 자리를 폈다. 추운 겨울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무릎을 꿇고 연신 절을 하는 무수한 사람들. 이곳이 이슬람국가임을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 미로슬라브 볼프의 <알라>(IVP)

18세기 북아메리카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그의 일기를 보면 인디언들이 야밤에 모닥불 주위를 돌며 종교의식을 행하는 모습을 언덕위에서 우두커니 내려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느꼈던 마음이 이러했을까? 한편으로 무슬림들의 투철한 종교심이 무섭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 생각 없이 아버지 곁에서 이리저리 눈길을 돌리는 아이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꾸란을 읽어보거나 무슬림의 신앙에 대해 어느 정도 접해본 기독교인들은 중대한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저들은 과연 누구에게 절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아담과 아브라함과 예수가 섬겼던 하나님(알라)을 섬긴다고 주장하는 무슬림들.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여호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최근 미로슬라브 볼프의 [알라]라는 책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저자가 출간기념회에서 밝힌 책의 요지를 한 언론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기독교는 물론 유일한 종교이자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종교임에 틀림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독실한 무슬림들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 이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말씀은, 사람들이 다른 이해를 갖고 있지만 하나의 대상을 예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는 다르지만, 대상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 제 주장의 요지입니다.” 세계적인 테러위협과 시리아 난민사태, 국내에서는 할랄푸드가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논쟁적인 화두를 던지는 책이라 여겨진다.

볼프 교수는 아래와 같이 덧붙인다. “비근한 예로 유대인들도 기독교인들이 고백하는 삼위일체 신관을 갖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유대인들에게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비난하진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지만, 그들을 ‘우상숭배자’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까지 책망하셨지만, ‘우상숭배자’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기사를 접한 필자가 아는 한 선교사의 반응은 이랬다. ‘이 사람 주장이 옳다면 우린 다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군요.’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른 종교나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복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간증을 듣곤 한다. 그리고 흔히 간증자들은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셨다고 고백한다. 한 사람이 진리를 찾아 헤매는 구도의 과정에서 성령님은 그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셨던 걸까?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종교나 신앙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고 계셨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그 다른 종교나 신앙에 있을 때 내가 예배하고 기도했던 대상이 기독교의 하나님이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가 경배하는 대상은 이신론 속의 기계적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신 바로 그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분명한 신앙과 고백이 없이 기독교인일수는 없다. 창조주 유일신 자체를 고백하는 종교는 허다하다.

그러나 유대교나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경우는 선을 긋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포함한 이 세 종교가 모두 아브라함이 섬겼던 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슬림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MBB-Muslim Background Believer) 가운데서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가 무슬림이었을 때 찾고 구하던 그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는 고백이 있는 반면, 이전의 삶에 대해 ‘완전 속았던 것이다, 지독한 우상숭배였다’라고 고백하는 자들도 있다. 선교전략적인 면에서도 한 부류의 선교사들은 개종자들도 하여금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전의 종교활동을 끊어내라 도전하기도 하고, 다른 부류의 선교사들은 개종자들로 하여금 모스크를 떠나지 말고 그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무슬림으로 살면 된다’라는 식의 내부자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사도바울이 아테네에서 했던 설교를 떠올려보자.

(사도행전17:22-31) ...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도바울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는 말을 통해 아테네시민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심을 평가절하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한편,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분명하게 전했다. 우리 역시도 타종교인들을 대할 때 경쟁상대로 여기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적대감을 갖기보다는, ‘그들이 알기 원하나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하리라’는 은혜와 긍휼의 태도가 필요하다.

이슬람국가에 살고 있는 모든 선교사들은 무슬림을 향한 큰 긍휼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라와 여호와가 같은 대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강한 거부감을 나타낼 것이다. 필자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런 류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더러 위험하다 여기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다른 여타 종교와 달리 이슬람이 갖는 독특성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무슬림 역시 아테네 시민들처럼 범사에 종교심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듣고 배우려는 태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독교인들보다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아노라고 주장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슬람은 기독교보다 후대에 생겨났다. 이전 글에서도 나누었듯이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는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파편적인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신앙을 오해하고 있었으며, 예수님의 신성과 십자가와 부활 전부를 부정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기독교의 주장을 왜곡에 의한 것으로 일축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두셨다 말하는 이들에게도 경고하노라 그들에게는 그에 대한 지식이 없고 그들의 선조들도 그러했으니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슬프게도 거짓이노라(꾸란 18:4-5).”

즉, 이슬람은 유대교처럼 유일신에 대한 신앙과 메시아에 대한 소망 속에서 그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을 인정함으로 연속성을 유지하는 형태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에 대한 정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가르친 종교이다. 이슬람은 오랜 기간 기독교를 이웃으로 두고 교리논쟁을 지속해왔으며, 특별히 19세기부터는 기독교 내 자유주의 신학의 결과물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를 공격하기도 했다. 기독교인인 우리가 듣기에도 부끄러운 기독교 측의 실수와 오류로 인해 이슬람문명권이 받아야했던 역사적 상처의 깊이도 깊다. 정확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무슬림들은 구약과 신약이 심각하게 왜곡되었으며, 오직 꾸란만이 한 치의 왜곡도 없이 전승되었다고 믿는다.

2. 이슬람은 기독교로의 개종이나 기독교의 선교를 차단하는 신학적, 법적장치를 갖고 있다. 볼프 교수는 구원에 관한 이슈와 정치신학적인 면을 분리하여, 종교간 갈등과 충돌을 피하고 인류공영을 위해 협력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중동이나 이슬람국가에서 느끼게 되는 공기는 전혀 다르다. 기독교로 개종한 무슬림들은 강력하게 결속된 기존의 공동체를 떠나는데 있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며,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경우도 많다. 필자는 이번 주만 해도 대사관으로부터 아래와 같은 메일을 받았다. “그간 수차례 공지해드린바, OOO에서의 선교활동은 불법으로 간주되어 해당자는 경우에 따라, 체포, 구금되어 형을 복역하거나, 추방 등의 조치를 당할 수도 있으니, OOO 법 및 관습‧문화를 존중하고, 스스로의 안전의식을 제고하는 등 상시 유념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시리아난민을 대상으로 사역하던 선교사 가정이 추방당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물론 중동국가들도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놀이터에서 만난 10살짜리 아이도 ‘우리나라는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어요’라며 어디선가 배운 듯한 말을 늘어놓지만, 실제로 포교활동이나 개종에 대해서는 분명한 압력이 존재하기에 공정한 경쟁일 수가 없다. 많은 이슬람국가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를 가족들이 때리거나 심지어 죽이는 행위는 죄로 여겨지지도 않고 처벌받지도 않는다. 구원에 관한 내적신념과 정치적인 면을 분리해서 생각하자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체제 속에서 자유롭게 종교를 선택하는 서구사람들에게나 통용되는 안이한 생각일 뿐이다. 독실한 무슬림들은 여전히 구약에서나 등장하는 신정국가를 꿈꾼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런 방식의 신정국가가 비참한 실패로 끝났으며,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믿는 자들이다.

3.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의 핵심에는 구원의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성경과 꾸란의 등장인물이 같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이야기들 속에서 “인간의 죄 - 구원의 방식 - 종말”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갈 수도 있다. 볼프 교수는 ‘우리가 유대인들을 우상숭배자라고 여기지 않듯이 무슬림도 우상숭배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똑같이 유대인의 예를 들어 신앙적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유대교가 결단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빌립보서3:4-9)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 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의 관계를 분명히 정의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핵심적인 사역이었다. 율법주의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 바울이 가장 경계했던 바였다.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이야기는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구약은 승리의 역사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내내 이어진 처참한 실패로 말미암아, 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지를 강렬하게 증거한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죽으시고, 믿는 자에게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 이것이 구원이고 우리 신앙의 요지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아담의 죄는 심각한 타락이라기보다 잠깐의 실수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왜곡된 가르침과 불신앙적인 통치체제만 없다면 모든 자연인은 무슬림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알라를 향한 종교적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다. 독실한 무슬림의 모습은 어쩐지 유대인을 닮아있다. 특정한 방향을 향해 드리는 정기적인 기도, 기도를 위한 정결의식과 복장, 절기들, 금식, 음식에 대한 규정들, 경전암송, 신정국가를 향한 소망... 세속적인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철두철미한 종교적 습관들. 예루살렘에서 공부한 한 교수님은 정통파 유대인의 그런 모습을 ‘종교적 광기’라고 표현했다. 그 모든 행위를 향한 바울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로마서 10:1-3)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 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결국 무슬림은 창조주 유일신 알라를 섬기고 있다고 하여도, 자신의 죄의 깊이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필요성도 깨닫지 못하며,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거듭남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지하드를 통한 신정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다. 성령의 견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개종자를 처벌함으로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려한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72명의 미녀가 수종드는 천국을 꿈꾼다. 복음을 전해 들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남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이슬람국가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꾸란을 외우고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며 무슬림으로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극명한 차이로 인해 신앙의 표현에 있어서도 전혀 다른 모습들이 전개되는 것이다. 복음이 가진 이 선명함을 드러내지 못하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통점을 찾아 갈등을 해소해보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시도일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이 읽는 구약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이슬람의 꾸란을 읽고서 그 누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유대인의 예를 들며 무슬림이 우상숭배자가 아니며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대상을 예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향하는 것을 내버려두자는, 참으로 위험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외국인이 서울의 야경을 보며, 십자가 네온사인이 많은 것을 보고 인상적이라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필자의 집에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면, 서울의 십자가만큼이나 많은 녹색 조명의 모스크첨탑을 마주하게 된다. 하루 다섯 번,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소리도 어김없이 울려 퍼진다. 가게 한켠에 혹은 거리 구석에서 기도카펫을 깔고 절하는 무슬림들. 그들이 그 막연한 구원을 얻기 위해 기도의 의무를 행할 때, 우리는 복음이 주는 자유 안에서 ‘사도바울의 눈에 비늘을 벗겨주신 그 하나님이 저들의 눈을 열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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