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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권 구원,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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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권 구원, 무엇이 문제인가?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5.12.0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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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침례교회는 물론이며 한국기독교에 강해설교와 조직신학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친 고 장두만 교수의 주재권 구원과 관련한 글을 게재합니다. 

강서침례교회 장두만 목사/교수

미국 신학계에선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이 상당히 오랫동안 주요 신학적 이슈 중에 하나로 취급돼 오고 있다. 스토트(John Stott), 패커(J. I. Packer), 보이스(James Boice), 젠트리(K. Gentry) 같은 유능한 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주장해 온 것이지만, 이 논쟁에 불을 지핀 사람은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담임 목사이며 마스터스신학대학 및 대학원의 총장인 맥아더(J. F. MacArthur) 목사이다. 그의 저서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의 초판이 지난 1988년에 발행되었고 개정증보판이 1994년에 발행되었는데, 이 책이 미국 신학계에서 많은 찬반 논쟁을 야기했고, 그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구원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진지하게 연구해 봐야 할 문제이다. 맥아더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오늘 한국 교계에서도 동일하게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맥아더의 저서는 지난 1993년 우리나라에서「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서울, 여수룬)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주재권 구원은 몇 년 전에 이남하 목사의 저서와 국내 세미나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기 때문에 일부 독자들에겐 주재권 구원 문제가 아주 생소하진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주로 세 가지 핵심적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첫째, 주재권 구원이란 무엇인가? 둘째, 주재권 구원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진정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주재권 구원의 정의
주재권 구원론의 주장자인 젠트리는 주재권 구원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주재권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동시에 그를 자신의 삶에서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순차적으로 이뤄지는 두 가지 별개의 행동이 아니라 순수하게 믿는 한 가지 행동이다.”  또 다른 주장자인 스토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Saviorhood)과 주인 되심(Lordship)을 분리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이다”라고 한다.

이런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주재권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Savior)로 영접하는 동시에 삶 전체를 주관하시는 주님(Lord)으로 영접해야 진정한 구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 주재권 구원론자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 ‘믿다’(πιστευω) 특히 ‘…를 믿다’(πιστευω ειd)라는 표현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 속에 순종 또는 헌신의 개념이 포함돼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헌신 없이 복음의 진리를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으로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없고, 그런 것은 ‘값싼 믿음’이라는 것이다. 둘째, 성경이 구원받기 위해 회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회개가 복음의 한 요소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죄에서 돌아서겠다는 확고한 마음이나 의지가 없이 진정한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 ‘주님’(κυριοd)이라는 단어가 ‘주인, 통치권, 소유권’ 등을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객관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으로만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주인이고 통치자임을 고백한다는 것이다. 넷째, 신약성경 특히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라는 단어와 ‘신자’라는 단어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은 제자를 의미하고, 따라서 진정한 제자가 된 사람만이 신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맥아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갈보리에로의 부르심은 바르게 이해돼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재권 아래서 제자로서의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에 반응한다는 것은 신자가 된다는 의미이고, 그에 못 미치는 것은 불신이다.”

다섯째,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재권 구원론자들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상 전혀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로 간주한다. 필자는 주재권 구원론자는 아니지만 주재권 구원론자들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맥아더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정으로 믿지 않는 소위 ‘거짓 고백’의 문제와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도 맥아더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맥아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세계 인구 중 16억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름 있는 여론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들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거듭났다고 한다. 이 숫자는 수백만 사람들이 비참하게도 속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확신이라는 것은 저주스러울 정도로 ‘거짓된 확신’이다.”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거짓 고백의 문제는 1988년에 맥아더가 제기한 것이지만, 맥아더보다 훨씬 전인 1925년에 보수파 장로교의 대표적 학자인 그레샴 메이천(J. Gresham Machen) 박사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이미 제기한 바 있다. “현대 신앙 생활의 가장 큰 악 중에 하나는 내가 보건대, 일정한 공식에 따라 ‘나는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한다’고 고백만 하면 그 고백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눈곱만큼도 없어도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습의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도덕적 성품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라든지 인도주의적 사업에 종사하겠다는 막연한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수없이 교회에 받아들이고 있다. 교회 안에 있는 그런 사람 한 명이 내가 믿기로는, 교회밖에 있는 열명보다 주님 일에 훨씬 더 많은 해악을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관습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교회에 속해 집사, 권사, 장로 등 직책을 맡아 여러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 거듭난 적이 없는 거짓 신자의 문제는 우리나라도 별로 다르지 않다. 지난 1998년 6월 9일자 <국민일보>에 실린 내용을 하나 소개한다. 한국 갤럽에서 18세 이상 성인 남녀 1,613명을 대상으로 가구 방문을 통한 일대일 면접으로 조사한 종교 자료를 발표했다. 전체 인구 대비 개신교 인구가 20.3%, 불교 인구가 18.3%, 천주교 인구가 7.4%로 나타났다. 종교인 중에 개종을 경험한 사람은 16.2%였는데 개종 전에 불교를 믿었던 사람은 32.8%, 천주교를 믿었던 사람은 9.8%, 기독교를 믿었던 사람은 58.4%였다. 한때 기독교를 믿다가 다른 종교로 개종한 사람이 전체 개종자 중에 58.4%를 차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민일보>는 이렇게 지적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개종하고 있어 교회가 초신자들을 대상으로 확실한 구원관을 심어줘야 한다.” 참으로 적절한 지적이라 하겠다. 한국은 20세기 들어 온 세계가 주목할 정도로 경이적인 교회 성장을 이루었고, 그 결과로 여러 교파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대부분 한국에 있다고 자랑할 정도가 되었다. 교인의 숫자가 1,000만 명 내지 1,200만 명에 이른다는 통계 자료도 있다. 그러면 그들이 모두 분명히 거듭난 신자들인가? 그들이 모두 확실히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교인 중에 정말 거듭난 성도의 비율은 얼마인지 신빙할 만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10%를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

필자는 맥아더가 제기하고 있는 거짓 고백의 문제뿐 아니라, 달라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인 대럴 박(Darrell Bock)이 맥아더의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분석하면서 맥아더가 제기하고 있는 6가지 주장에 동의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면에서 필자도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1. 구원 얻는 믿음이란 복음 진리에 대해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이다. 복음에 대한 지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진정한 믿음이란 지식 이상인 것이다.
2. 죄로부터 회개는 복음을 제시할 때 반드시 포함돼야 하며, 따라서 믿음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받는 그 순간 예수님이 실제로 삶의 주인이 되어 모든 것들을 지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4. 진정한 구원은 분명히 열매를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열매를 찾아보는 것은 행위에 의한 구원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면 그 열매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요, 믿음의 자연스런 결과이기 때문이다.
5.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가 나중에 분명히 부인하고 돌아선다면, 그는 처음부터 구원받은 사람으로 볼 수 없다.
6.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언제나 구원받은 것이다”는 확신은 진정한 고백을 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며, 이런 확신이 적용될 수 없는 거짓 고백도 분명히 있다.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맥아더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자도 학자, 목사로서 오랫동안 동일한 고민을 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맥아더가 범하고 있는 몇 가지 착오 내지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맥아더의 구원 개념이 불분명하다. 자신의 목회 경험과 연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목사로서, 일단 ‘믿기로 결단하고’ 침례(세례)를 받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다시 침례를 준다. 그들은 침례받은 후에 진정한 회심에 이르게 되어 진실한 구원의 표현으로서 다시 침례 받기를 원한다. 우리는 거의 매주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침례탕에서 그런 간증을 많이 듣는다.”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일단 믿기로 결단하고 침례(세례)를 받았으나 그들의 삶에서 아무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 진정으로 거듭났는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침례 받을 즈음 거듭났지만 확신이 없다가 나중에 다시 침례 받고자 할 즈음 확신을 갖게 된 것인가, 아니면 처음에 전혀 구원이 아니다가 나중에 참된 구원을 받고 다시 침례에 순종하게 된 것인가? 이들의 영적 신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맥아더의 입장은 참으로 아리송하다. 맥아더는 그들이 처음에 침례받을 때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에게 침례를 주었을 것이 아닌가? 그들은 침례를 받을 당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해 구원은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면에서 맥아더의 견해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이미 메이천(J. Gresham Machen) 박사가 지적했듯이, 일정한 요식 행위에 의해 상담자가 말하는 대로 소위 말하는 ‘영접 기도’를 따라서 했을는지 모르겠지만 진정한 영접은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참으로 구원받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본고 후반부에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한다.

둘째, 맥아더는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주재권과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소원이나 각오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두 가지는 많은 부분에서 중복되고 있지만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맥아더는 이 구분에 대해 굉장히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달라스신학대학원과 트리니티 복음주의신학대학원 교수를 역임한 존슨(S. Lewis Johnson)도 이에 공감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맥아더는 종종 ‘전적인 헌신’이 구원의 필수 요건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같이 보이다가, 다른 데서 자신의 입장을 수정한다. 그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당신의 주권적인 주재권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어떤 경우에도 구원의 소망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면서, 굴복과 순종에 대한 요구를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완화시키고 있다.” 필자는 맥아더의 책이 교계를 분열시키고 많은 학자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실제적인 주재권과 주님으로 모시고자 하는 마음이나 소원을 어떤 때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어떤 때는 구별해 사용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래서 예수를 믿은 사람은 순종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우리는 죄악 된 육신의 잔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순종하지는 못한다(cf. 고후 7:1; 살전 3:10).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소원은 참 신자에겐 항상 있는 법이다(cf. 롬7:18). 성경 전체에서 신앙과 순종이 항상 밀접히 연관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 주장한다. “믿는 자는 때로 불완전하기는 할지라도 순종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갈망을 낳지 않는 신앙은 전혀 신앙이 아니다. 순종을 거부하는 마음의 상태는 순전하고 단순한 불신 상태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동시에 참 신자는 구원받는 그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적으로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모든 구절들은 논란의 여지도 없이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포함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구원 얻는 믿음의 표시는 예수의 주재권에 대한 굴복이다”라고 주장한다. 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예수께 나아올 때,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께 나아오는 것이다. 이 진리를 제외한 메시지는 어떤 경우에라도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결함이 있는 메시지다. 왜냐면, 그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만 제시하고 주님으론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요, 죄에 대한 권위를 갖지 않는 구속자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요, 자신이 구원한 사람에게 아무런 명령을 할 수 없는 약하고 병든 메시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맥아더나 다른 주재권 구원론자들이 정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참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를 삶의 모든 분야에서 주인으로 모시지는 못할지라도 그런 소원은 분명히 있음을 주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구원받는 순간 예수께서 실제 삶의 주인이 돼야 참된 구원임을 주장하는 것인가? 만약 주재권 구원론자들이 주장하는 바가 첫 번째 의미라면 전혀 문제될 게 없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게 되면 바로 그 순간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되고, 그 성령께서 예수를 주로 모시고 그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삶에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순종하되, 불완전하게 할 수도 있고, 한동안 순종하다가 얼마 후에 믿음이 약해져 제대로 못할 수도 있다. 대럴 박 교수도 유사하다. “한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로 보게 될 때 성령의 임재는 잘 드러날 것이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갈망과 친밀감을 갖게 될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는 것이 로마서 8장 14~16절 말씀이 가르치는 주된 내용같이 보인다.” 

그러나 만일 첫 번째 의미가 주재권 구원론자들의 진의라면 그들은 지금까지 쓴 논문이나 책을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주장을 정확하게 표현해 쓸데없는 혼란을 야기하지 말았어야 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주재권 구원론자들 특히 맥아더의 경우에 그가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실제로 주장하는 내용을 달리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것도 수용하기 어렵다. 맥아더나 다른 주재권 구원론자들은 글쓰기의 초보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책이나 논문으로 출판한 내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주장이 모호하다는 비판은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주재권 구원론자들의 주장이 두 번째 의미라면 참으로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맥아더의 경우엔 다소 애매하지만 주재권 구원론자들은 두 번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주장을 단호하게 반복해서 내세우고 있다고 보여진다.

1. 이 경우에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객관적 주재권과 주관적 주재권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거듭난 신자라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당시에 객관적 주재권 -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하나님이라는 사실 - 을 모두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신자들이 구원의 순간에 주관적으로 예수를 실제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거듭났지만 매일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존슨(S. Lewis Johnson)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논의에서 양측의 수사가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에서의 ‘전적인 헌신’의 필요성을 부르짖는 소리나 ‘예수님이 모든 면에서 주님이 아니면 그는 전혀 주님이 아니다’라는 공허한 구호를 반복하는 것은 확실히 사람들을 오도하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상황에선 자신들의 주장을 대개 수정한다. 역사적인 신앙 고백을 연구해 보면, 믿음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믿음이 공격을 받아 약해지기도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예, 행 10:14에서 베드로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한 것을 생각해 보라).”

2. 만일 주재권이 복음의 일부라면, 구원의 확신을 갖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적을 것이다. 한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주재권을 완전히 확립하려면 평생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필자는 1968년에 거듭나 약 6개월 동안 감격과 눈물 속에서 살았고 진정으로 주님 뜻대로 살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 누가 “목사님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주재권이 형성되어 있느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나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그렇게 돼 있다”고 답변하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필자는 거듭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예수님을 삶의 모든 분야에서 주님으로 모시고 싶은 강한 소원을 갖고 있고, 어느 정도는 돼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주재권 구원이 맞다면, 분명히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죽기 전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일서 5장 9~13의 말씀과 분명히 상충되는 가르침이다.

3. 주재권 구원은 구원과 제자도 또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고 있다. 구원이란 기본적으로 죄 사함을 의미하며, 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성령의 역사로 인해 일어난다. 그러나 주재권·성화·제자도는 구원 받은 후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할 수는 없지만 구분할 수는 있다. 

라이트너(Robert Lightner)가 이 문제를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주재권 구원은 점진적인 성화와 칭의의 차이 또는 제자도와 아들 됨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구원의) 조건과 결과를 섞어 놓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되기(being)와 그리스도인으로 되어가기(becoming)를 혼동하는 것이다.” 
복음에 주재권이라든지 그 외에 다른 어떤 요소를 도입하는 것은 복음을 전적으로 왜곡하는 행위이다. 사실상 “복음에 주재권에 대한 고백을 첨가하는 것은 복음의 강조점인 은혜를 파괴하는 위험한 일이다. 얼마만큼의 주재권이 돼야 구원 얻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나?”30 우리는 구원의 조건과 구원의 결과를 세심하게 구별해야 한다. 복음은 어떠한 경우에도 손상을 입지 않도록 순수하게 보존돼야 한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는 진리 -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갈 1:6~9; 고전 15:3~4).

4. 이 견해는 성경에 언급된 육신적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렵다. 육신적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카테고리에 속하는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특정한 상태를 가리키느냐 하는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육신적 그리스도인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구원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육신적 상태에 있는 신자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난 롯은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이지만(벧후 2:7), 오랫동안 헌신되지 못한 채 살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11)는 물론이고 전반적으로 볼 때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시기, 분쟁, 분열 등으로 가득찬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전 3:1~4).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전 3:2b~3a)라고 하면서 탄식했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사데교회(계 3:1~6)나 라오디게아교회(계 3:14~22) 성도들은 대부분 육신적 그리스도인이었다.

셋째, ‘신자’라는 단어와 ‘제자’라는 단어가 성경 특히 사도행전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신자는 모두 제자라는 주장은 용납하기 어렵다. ‘제자’(μαθητηd)라는 단어는 ‘배우는 자’라는 의미이고,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주어진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신약 성경에서 ‘제자’라는 단어는 적어도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같이 헌신된 제자들을 의미하기도 하고(마 10:1; 16:13~20, 24~27; 눅 14:25~35; 요 6:67) 참 신자를 의미하기도 하며(행 6:1~2, 7; 11:26; 14:20, 22, 28; 15:10) 신앙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냥 배우고 싶어서 좇아다니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한다(눅 6:17; 요 6:60, 66).  맥아더도 ‘제자’라는 단어가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제자와 신자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자’와 ‘제자’라는 단어에 대한 동의어 여부보다 헌신된 그리스도인과 헌신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성경이 인정하느냐 마느냐이다.

성경이 그런 차이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앞서 언급했다(마 16:24~27; 막 8:34~38; 눅 9:23~26; 14:26~27).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제자도는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 찰스 빙(Charles Bing)은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제자도에 관한 구절을 모두 석의적으로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구원은 그저 주는 선물이지만, 제자도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구원은 주로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와 연관되지만, 제자도는 주로 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연관된다.

구원은 구속과 화해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포함하지만, 제자도는 하나님의 뜻 전체를 포함한다. 구원에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믿어라’라는 것이지만, 제자도의 조건은 ‘거하라, 순종하라, 사랑하라, 자신을 부인하라, 십자가를 져라, 따르라, 자기 생명을 버려라, 가족을 미워하라”와 같은 것들이다. 구원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지만, 제자도는 모든 생애에 걸친 성장 과정이다. 구원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이지만, 제자도는 신자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반응이지만, 제자도는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반응이다. 구원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제자도는 현세의 상급과 영원한 상급을 결정하는 것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만, 제자도는 행위로 얻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제자’라는 단어의 제한적 용법에 근거해 신자와 제자는 동일하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에선 제자라는 단어가 참 신앙이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할 정도로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재권 구원론자들은 칼슨(D. A. Carson)이 말한 바 “성경의 편파적 사용”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나 헌신이 없는 구원은 ‘값싼 신앙’이라 하여 매도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할 수 있다.
1. 기독교 진리 자체가 믿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 진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교회 배경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기독교 진리를 처음 들을 때 그것을 이해하기는 너무 어렵고 믿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 1:18a)라고 했고, 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2-23)라고 했다. 그러므로 불신자가 예수를 전인격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불신자에게 복음 진리는 비합리적이고 어리석게 들리는 것이다. 라이리(Charles Ryrie)는 예수 믿기가 쉽지 않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한 가지 이유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믿을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믿을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비주재권 구원론자들이 구원은 기독교 신앙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신 신앙의 첫걸음에 불과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신자는 훈련받고 양육받아야 하며, 그 훈련이란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수의 좋은 제자로 예수를 따르는 것은 많은 대가 지불이 요구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9장 18~27절을 비롯해 성경 여러 곳에서 제자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 결코 값싼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저자: 강서 침례교회 장두만 목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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