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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돌핀 도는 얘기 좀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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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돌핀 도는 얘기 좀 해볼까요?”
  • 정윤석
  • 승인 2015.01.29 02: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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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원자료 수집·분석·연구의 마스터, 이영호 목사

이영호 목사(70, 팽성장로교회)는 현재 활동하는 이단대처 사역자중 가장 나이 많은 사람에 속한다. 그러나 활동에 있어서는 여느 청년 못지 않다. 법정 소송이 있든, 사건 취재가 있든, 자료 수집을 하든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전국을 누빈다. 필자는 2015년 1월 27일 경기도 평택에서 이 목사를 만났다. 그는 진한 남색 버버리 코트를 입고 나왔다. 그의 차는 검정색 코란도(구 모델 중 가장 인기리에 팔렸던 2DOOR 차량)다. 70줄에 들어선 그에게선 아직도 야인의 냄새가 풍긴다.

▲ 코란도를 타고 이동을 앞두고 있는 이영호 목사

이단 원자료들과 함께 먹고 자는 이영호 목사
그는 기독교한국장로회, 소위 기장 소속 목사다. 한신대를 졸업했다. 한신대 출신 목회자로서는 유일한 이단대처 사역자다. 기장 소속 목회자 중 자신의 교단에 ‘이영호 목사’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가 이단대처 사역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이 목사는 소속 교단에서보다 이단대처 사역자들 사이에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거처는 평택 인근이다. 필자는 7~8년전 이 목사의 거처를 방문한 일이 있다. 경기도 평택, 외딴 논길을 지나서야 그의 거처가 나왔다. 당시 필자는 그의 집에서 군고구마와 김치를 먹은 적이 있다. 그 고구마를 이번엔 먹을 수 없었다. 이 목사는 평택에서 거처를 옮겨 이동할 곳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평택의 짐을 포장하고 정리하는 중이라 필자를 그곳으로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교회 최고령 이단대처 사역자 이영호 목사의 ‘주특기’는 이단단체의 원자료 수집과 현 이단들의 비교 연구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야와 관련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단 대처 사역자들은 종종 이단자료를 찾다가 없을 경우 이영호 목사를 찾아간다. “이 목사에게 없는 자료라면 한국 어디에도 없는 거다.”라며. 그만큼 이 목사에게는 이단들의 원자료-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고서들까지-가 다양하게 구비돼 있다.

고서에 대한, 이단의 원자료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보니 그의 거처도 서가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수 년 전, 서고를 벗어나 평택 시내에 집을 얻어서 살았던 적도 있다. 그런데 며칠 후 문제가 발생했다. 책자 묶음 몇 개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 후로 이 목사는 책과 떨어져서는 한시도 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 됐다. 평택 시내에 셋집을 내놓고 다시 책과 함께 먹고 책과 함께 자는 사람으로 남게 됐다.

책장 사이에서 살고 있는 이점은 여러 가지라고 한다. 이단 연구가로서 뭔가가 떠오르면 책을 뒤적이며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료 이단 연구가들 중 ‘올빼미족’이 많다는 점도 이 목사를 반긴다. 그는 “이단연구가들과 밤 11시에 통화하는 일도 잦고, 때론 새벽 2~3시까지 전화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이 목사는 책과 함께 이단사역자들과 대화하며 깊은 밤까지 연구하기를 즐긴다. ‘올빼미족’인 셈이다. 이 때가 되면 세상이 잡소리 없이 고요해진다. 밤늦은 시간, 이 목사는 영상 편집, 원고 정리, 이단 원서 연구 등으로 빠져들어간다.

이영호 목사를 만나고 싶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돈도, 음식도 그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할 게 분명하다.

이 말 한마디면 끝! “목사님, 좋은 이단자료가 원본으로 입수됐어요. 가져다 드릴게요!” 원본일수록 좋다. 그러면 이 목사는 만사 제쳐두고 당신을 만나자 할 게 분명하다. 다만 이 목사에게 없는 자료여야 하고 그가 필요로 하는 자료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그만큼 그에게선 ‘자료’, ‘책자’, ‘테이프’ 등을 얻는 게 중요하다. 그 자료를 찾았을 때, 그는 보화를 얻은 기쁨을 얻는다. 반대로, 찾던 자료가 유실되거나 불에 타 없어졌다는 말을 들을 때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그다.

▲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이 목사의 거처

모 단체의 신앙 체험기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나섰다가 화재가 발생한 곳에서 건져온 적도 있다. 제주도의 헌 책방에 가서 수소문 끝에 통일교 원리강론 이전의 판형인 원리해설을 구입한 적도 있다. 책 한권 당 30만원을 하는 것도 있었다. 최고로 돈을 많이 쓴 적도 있다. 요 근래 재판을 겪으며 모 단체의 과월호 서적을 50만원 어치 구입한 적도 있었다. 고서적을 살 때 아깝지 않았을까? 이 목사는 이런 자료라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구입하고야 마는 성미다.

이 목사는 신용 카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 개를 갖고 다닌다. 카드를 갖고 다니는 이유도 책 구입 때문이다. 헌책방을 들렀다가 고서적을 발견하고 갑작스레 구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이 목사는 지금까지 이단과 관련한 책·사람들을 끊임없이 찾아다녔다. 그리고 기적처럼 소중한 자료와 사람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말랐다. 밥 한 끼면 책 한권을 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식사를 거른 적이 많아서다. 많이 굶고 다니자 건강검진 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은 적도 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위에 빵꾸가 났다’고 한다. 그 후로 최소 2끼 식사는 반드시 챙겨서 먹는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헌 책방을 다 알다시피 다녔다는 이영호 목사도 요즘에는 인터넷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때로 책이 있는 줄 알고 갔다가 허탕치는 사례도 있어서다. 그 허탕이 인터넷 활용을 잘 하게 되면서 줄었다고 한다. 그리고 필요한 책이 있으면 기본적으로 2권씩 구입한다.

이 목사는 자신을 향한 불만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에 대해 ‘자료가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지는 않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소리가 있다. 그래도 때가 올 거다. 적절할 때에 소장한 자료들을 한국교회가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개하겠다.”

‘코레오바고’, 즉 사도행전 17장에서 가져온 새敎(新興宗敎)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은 한국의 아레오바고라는 뜻이다. 이 목사는 사이비종교 관련 서적 1만 5천여권 이상(2005년 추산)과 기타 연구를 위한 비디오·카세트 테이프 등을 소장하고 있으며 회원들의 참여와 후원으로 이단 연구와 교역자·제직·평신도 교육을 하고 있다. 한달에 한 번 아레오바고사람들의 정기 모임을 갖고 있다.

이영호 이단연구의 특징 ‘비교 이단론’

이단 원자료를 토대로 한 그의 연구 방법은 정확한 자료 중심의 비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00년대 초반에 인쇄된 이단과 관련한 자료가 소장된 만큼 이단단체의 원류 비판에도 강점을 갖고 있다. 그가 저술한 소논문의 제목들만 봐도 그렇다. <정득은의 생의 원리 요약과 분석>(2006년 11월 발표, 정득은은 ‘피갈음’ 사상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여성으로서 1897년생이다), <초원 김백문의 사상개요>(2007년 5월; 김백문은 통일교 문선명과 전도관 박태선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 유명하다), <전도관의 교리서 오묘 비판>(2008년 6월 아레오바고 사람들에 발표), <성경원리연구회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분석 비판>(2009년 아레오바고사람들에 발표), <예언의 불발탄(몬타너스부터 시한부종말론까지)>(2008년 1월) 등이다. 이 논문들에는 자료의 출처와 근거가 매우 세밀하고 명확하게 제시돼 있다. 이 목사는 이단의 원자료를 근거로 ‘정직한 비판’을 하고 싶어한다.

“이단 원자료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이단 비판의 ‘근거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원자료를 토대로 정직하게 비판하고 싶어서다. 만일에 고소·고발이 있다고 치자. 원자료를 토대로 정확하게 입증 자료를 제시한다면 재판부의 태도는 달라진다. 고소·고발에 대한 대처뿐 아니라 이단 원자료가 있어야 설득력이 있는 연구 결과도 나온다. 심지어 이단에 속한 사람이 볼 때조차 ‘이 연구 결과는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심도 있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

▲ 탁명환 소장 추모 20주기 예식 때 축도하는 이영호 목사

이단 원자료를 이용한 연구의 방법론은 ‘비교 이단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신흥 종파들에 대해 비판할 때 ‘이단’이라고 지적하지 않고 그의 주장이 과거 통일교나 전도관 등의 이단들에서 이미 주장됐던 것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면 누가 봐도 ‘이단’이라고 공감할 수 있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게 이 목사의 ‘비교 이단론’이다. 이미 이단들이 사용한 교리였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해도 독자들 스스로 ‘이단문제’를 정리해 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단사역자가 되기를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이단연구 한다고 해서 무슨 우월감 같은 것 갖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세미나 강사로 불려 간다고 돈이 굴러 오거나 교계에서 붕붕 뜨게 되는 자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사역을 해나가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단으로 비판 받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도 주문했다. 상대를 마치 도깨비나 정신병자처럼 우습게, 또는 함부로, 무시하는 태도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이단을 공격하고 내 이름을 내기 위한 자세도 지양해 주길 바랐다. 그는 “나와 내 교회와 내 교인들이 바로 서야 한다는 자세로, 교회성장과 바른 신앙의 주춧돌이 되자는 마음으로 이단연구를 해야 한다”며 “이단대처 사역을 하면서 마치 한국교회 검사장이나 재판관이 된 것처럼 생각하는 태도로 나서면 안된다”고 비판했다. 서두름과 조급함도 버릴 것을 주문하며 그는 “연구결과를 숙성시키라”고 거듭 당부했다.

이단 연구 보고서를 완성하고 이를 숙성시키는 시간을 되도록 길게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숙성이 안된, 급조된 보고서를 내놓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헌의하고 늦게 발표가 되더라도 완성도 높은 내용이 나오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때론 이단으로 비판받는 상대에게 기회를 주는 아량도 있어야 하고 이니셜 처리해서 상대를 보호하고 기회를 주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목사는 지금도 박태선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람, 나운몽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람이 새벽예배에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목회자들이 이단의 영향을 받은 설교를 해도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교인들 중에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라고 한다. 이 목사는 “신약성경에서 이단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 곳이 없다”며 “이단에 대한 연구를 하면 할수록 한국교회는 바르게 서 갈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목사는 요즘 한국교회의 이단연구의 공조 체제에 금이 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목사는 이단대처 사역자들의 연대와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아끼고 위해 줄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공조체제가 금이 갔을 때, 이단대처 사역자들은 희생을 겪어 왔다고 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고 원세호 목사이고, 그 다음 희생자가 최삼경 목사였다는 것이다. 이런 희생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단대처 사역자들이 서로 힘써서 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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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호 목사 고향은 전북 진안이다. 이곳에서 1946년 태어났다. 이름은 영화 영(榮)자에 넓을 호(浩)자를 쓴다. 이 목사는 “내게 주어진 이름 뜻대로 사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필자가 ‘한국교회에 어떤 이단연구가로 기억되고 싶은가’라고 묻자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녀들 얘기를 꺼냈다. 이 목사는 “한국교회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기 보다 내 자식들이 ‘형편없는 아버지는 아니었구나’라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며 “원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들려 준 게 없어서다”라고 덧붙였다.

▲ 이단대처 교육 장소에서 촬영하는 이영호 목사

그는 아이들에게 해 준 게 없다고 말했다. 교회 개척, 이단대처 사역, 이단 연구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활동했지만 그 사이에 자녀들은 훌쩍, 스스로 크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첫째가 대학에 들어갈 때 이 목사는 등록금을 대주며 말했다고 한다. “첫 학기 등록금은 대준다. 그러나 다음 학기부터는 네가 장학금을 받아서 다니든지, 아니면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네가 벌어서 다니든지 학비는 네가 알아서 해야 한다.” 그 후로 자녀 2명은 모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첫째는 카이스트로, 둘째는 미국으로 건너가 은행원으로 취업했다고 한다.

이 목사는 1988년 엘리야 복음선교원에 관심을 갖고 글을 썼는데 이 내용이 고 탁명환 소장(현대종교)의 눈에 띄면서 이단대처 사역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필자는 최삼경 목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리고 이영호 목사와도 인터뷰를 하면서 고 탁명환 소장에 대한 얘기를 반복해서 들을 수 있었다. 한국의 이단대처 사역에 탁 소장이 큰 획을 그은 것만은 분명하다. 이 목사는 탁 소장에 대해 “이러저러한 많은 평가가 다양한 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게 있다. 이단성이 있는 문제의 단체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고 지체없이 지적하던 강단진 분이었다. ‘내가 그분 입장이라면 과연 나설 수 있었을까?’라고 회의적이었던 문제에도 당당히 나섰던 분이었다.”

경기도 평택에서 이 목사는 홀로 추운 겨울에 난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전기 장판 하나 깔고 책 연구에 몰두한 적도 많았다. 이 목사는 이단연구가 끼리의 소통/ 자료 교환/ 교육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며 5년전부터 구성한 새종교 연구 모임인 아레오바고 사람들을 통해 이 일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이 모임은 한달에 한번 모이고, 현재 57차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그는 한국교회가 지향(指向)해야할 선교적 방향에 대해 “1/4이 기독교인이면 3/4이 이단이나 이교도라는 이야기이다. 이3/4을 복음화 하려면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이 이단이나 이교에 대해 철저히 연구를 해야 한다”며 “성경이 이단이나 이교 때문에 기록된 것이고, 목회와 설교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단을 모르고는 바른신앙, 바른목회, 전도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길만이 진정한 교회연합과 한국복음화의 지름길” 이라고 역설했다.

이영호 목사와 필자는 평택 장당동에 위치한 맛두부촌에서 식사를 같이 했다. 두부보쌈정식(13,000)을 주문하면 청국장, 비지, 두부찜, 보쌈, 파저리, 두부김치 등 두부와 관련한 모든 음식을 체험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먹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12시부터 3시까지 이영호 목사와 필자는 된장처럼 묵은 대화들을 나눌 수 있었다. 대화가 끝난 후 이 목사는 검정 코란도를 몰고, 야인처럼 경기도의 모처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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