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는 세 계파로 나뉘어 활동 중이다. 그 중 이요한측과 박옥수측이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교단 명칭을 갖고 왕성하게 활동중이다. 이요한측은 경기도 안양의 인덕원역 4거리에 위치한 서울중앙교회가 중심이 돼 있으며 산하 기관 중 ‘생명의 말씀 선교회’가 있다. 박옥수측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기쁜소식 강남교회를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유관 기관으로 ‘기쁜소식선교회’, 국제청소년연합(IYF)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권신찬(사망)-유병언측은 서울 삼각지에 위치한 서울교회를 중심으로 각각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과연 어떤 교리를 갖고 어떤 방법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을까? 본서를 통해 아무쪼록 구원파의 미혹을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본글은 진용식 목사가 극동방송 등을 통해 구원파에 대해 문답식으로 해설해 놓은 것을 보강해서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필자: 진용식 목사(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1. 구원파란 무엇인가?
Q. 한국교회를 미혹하는 구원파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먼저 구원파라는 집단이 어떤 단체인지 소개해주십시오.
A. 구원파는 세 계파로 나뉘어 활동 중입니다. 그 중 이요한측과 박옥수측이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교단 명칭을 갖고 활동합니다. 이요한측은 경기도 안양의 인덕원역 4거리에 위치한 서울중앙교회가 중심이 돼 있으며 산하 기관 중 ‘생명의 말씀 선교회’가 있습니다. 박옥수측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기쁜소식 강남교회를 중심으로 활동 중입니다. 유관 기관으로 ‘기쁜소식선교회’, 국제청소년연합(IYF) 등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권신찬(사망)-유병언측은 서울 삼각지에 위치한 서울교회를 중심으로 각각 활동하고 있습니다. ‘침례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때문에 정통 교단에 속한 ‘기독교한국침례회’가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Q. 구원파는 언제부터 누구에 의하여 시작된 것인가요?
A. 구원파는 1961년 4월 미국인 독립 선교사인 딕 욬(Dick)을 통하여 복음을 깨달았다는 유병언과 같은 해 11월에 네덜란드 선교사 길기수(Case Glass)를 통하여 죄 사함을 깨달았다는 권신찬 씨에 의하여 대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Q. 그러면 결국 구원파는 국내에서 창설된 것이 아니고 외국에서 수입된 이단으로 보아야 하겠군요.
A. 그렇다고 봐야 하겠지만, 권신찬·유병언 두 사람은 1963년경부터 선교사들과 관계를 끊고 독자노선을 추구하였습니다. 그 후 이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성경을 왜곡함으로 교리는 변질되어 갔고 자신들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로 구원파를 형성해 왔습니다.
Q. 그러면 대한예수교침례회를 이끌고 있는 박옥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A.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이름의 구원파를 이끌고 있는 박옥수는 1961년 딕욬, 길기수, 데릭 얼(Der Earl)등 독립 선교사들이 대구에서 운영했던 성경학교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유병언과 함께 공부하다가 1960년대 초반에 결별하고 ‘대구중앙교회’를 세워 독립 목회를 하던 사람입니다. 박옥수는 1982년부터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한예수교침례회’ 라는 간판을 걸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Q. 구원파를 이끌고 있는 이요한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A. 이요한은 본명이 이복칠이라는 사람인데 1983년에 구원파 자체 내에서 안수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구원파 교주 유병언, 권신찬의 사업운영을 비판하다가 이탈하여 현재 본부격 교회인 경기도 인덕원역의 서울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Q. 그러면 이들에게 영향을 주어서 구원파를 만들게 했던 딕욬, 길기수, 데릭 얼 등 외국의 선교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A. 예, 이 사람들은 정통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아니고 스스로 국내로 왔던 독립 선교사들이며 신학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Q. 결국 잘못된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또 자기의 교리를 추가해서 만든 것이 구원파의 교리라는 말씀이군요. 그러면 현재 국내에 이들의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A. 3계파의 규모가 각각 다릅니다. 대표적으로 이요한 파의 경우 전국에 141개 교회, 해외에 80여개 교회, 4만5000여 명의 신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박옥수 파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기쁜소식 강남교회를 중심으로 전국에 국내 225개(300여명의 교역자) 지교회와 해외에 70개의 지교회(100여명의 선교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1년에는 국제청소년연합(IYF: InternationaI Youth Federation)이라는 단체를 창립하여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포교하고 있고 대학교 캠퍼스에 IYF 라는 동아리 이름으로 영어 회화를 무료로 가르쳐주는 것으로 학생들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교세는 약 2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Q. 그런데 왜 이들에게 ‘구원파’ 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까?
A. 그것은 이들이 정통 교인들을 미혹할 때 ‘구원받았습니까?’, ‘언제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묻기 때문에 붙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10단계 질문서라는 유사한 질문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질문: 선생님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실히 알고 믿습니까?
두 번째 질문: 선생님은 거듭나셨습니까?
세 번째 질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확신하십니까?
다섯 번째 질문: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여섯 번째 질문: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
일곱 번째 질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이 아닙니까?
여덟 번째 질문: 구원받은 것이 확신되어집니까?
아홉 번째 질문: 재림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열번째 질문: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처럼 구원과 관련한 질문을 하면서 접근을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구원파란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Q. 그런데 구원파가 국내외에 큰 영향을 미치고 성장하게 된 데에는 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예 그것은 방송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생각됩니다. 기독교복음침례회의 권신찬은 장로교 목사였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에서 1962년 목사직을 면직 당한 사람입니다. 그 후 권신찬은 독립교회로 전전하다가 1966년 인천복음주의방송국(극동방송의 전신)의 전도과장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방송의 프로인 ‘은혜의 아침’이라는 설교를 맡아 매일 아침 방송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이 시간을 통하여 자신의 구원파 교리를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에 권신찬은 청취자 수양회라는 것을 매년 여름하면서 구원파 교리를 전하였고 교계에서 문제를 삼게 되자 결국 극동방송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권신찬이 극동방송에서 방송했던 기간동안 그 영향은 막대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한예수교침례회의 박옥수는 기쁜소식선교회 주최의 ‘서울시민을 위한 성경세미나’와 이것을 열 때마다 신문, 방송을 통해 대대적 홍보를 감행하며 포교의 장을 넓혀 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국제청소년연합, 소위 IYF라는 단체를 통해 청년, 대학생들에게 어학연수, 해외 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하라며 다가가고 있습니다. 대한예수교침례회 이요한 파의 경우 ‘생명의 말씀선교회’를 통한 말씀사경회, 비디오 테이프와 인터넷을 통한 설교방송으로 성도들을 미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방송은 복음전파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곳에 이단이 침투하면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정말 이단의 방송국 침투를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구원파 권신찬 씨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A. 권신찬은 1937년 3월 영해 공립 보통학교를 나와 1940년 일본 통신 중학교를 중퇴하고, 1951년 예장 총회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51년 11월 30일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1962년 12월 31일까지 12년간 경북 주파교회, 영양읍교회, 경산읍교회, 대구 칠성교회 등지에서 목회를 하다가 1962년 12월 31일 경북노회에서 목사제명 처분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학문적으로 신학적으로 빈약한 사람이었고 기성교회에 대하여 반항적이었습니다. 그는 구원파를 만들어 기성교회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고 기성교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교리를 만들고 비판하는 설교를 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