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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론을 경계하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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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론을 경계하라(하)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3.02.25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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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과 육의 이원론
➀ 육체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구성요소에 따른 신학적인 견해에는 이분법과 삼분법이 있다. 물론 필자는 교단에 따라 다른 다양한 신학적인 견해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하여야만 하는 이원론이라는 주장은 이분법이든 삼분법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서 영(또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키는 견해를 뜻한다. 즉 살아있는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사람을 영과 육을 장소적인 개념으로 분리시켜, 영에는 하나님이 거하고, 육에는 사탄이 거한다고 가르치는 주장이다. 특히 삼분법을 이원론과 장소적으로 분리시키는 지방교회는 영에는 하나님이, 육에는 사탄이, 혼에는 사람의 인격이 거한다고 주장을 한다.
지방교회, 베뢰아, 구원파, 다락방의 주장을 살펴보자

(지방교회의 주장)
- 죄는 사단의 체현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이다. 이 두 체현들이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영 안에 있고, 사단의 체현인 죄는 우리 육신 안에 있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의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하나님, 73쪽)

- 우리는 우리 존재에 세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당신은 사단이 그의 거처를 당신의 몸, 즉 당신의 육체 속에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가? 그리고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는 것을 아는가?(위트니스 리, 왕국, 218쪽)

- 사단은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우리 몸으로부터 우리 혼에 대해 통제를 행사하고 있다. 이같이 사단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역사한다. 주님은 반대방향으로 즉 안에서부터 밖으로 역사하신다. 어느날 주님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요 축인 우리 영 안에 들어오셔서 그것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위트니스 리, 왕국, 217쪽)

(베뢰아의 주장)
- 우리의 심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졌기에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있지만 육체는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없습니다. (김기동, 마귀론 하 154쪽)

- 귀신은 사람의 영혼 속에는 들어오지 못하지만 육체 안에는 들어올 수 있습니다. (김기동 마귀론 하 63쪽)

(구원파의 주장)
(1) 영혼의 구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영혼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죄성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2) 구원받은 사람도 죄를 짓는 이유: 사단은 공중권세를 가진 자이며 인간육체를 통해 역사합니다.
(3) 구원받은 사람이 범하는 죄의 유형 첫째는 부지 중에 짓는 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육신에 아직 죄성 가운데 있기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올라오는 죄입니다 (생명의말씀 선교회 홈페이지, 이요한, 대한예수교복음침례회)

(다락방의 주장)
(1)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 1:14).
(2) 그러므로 그분은 죄가 없고 그 영은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5:45).
(3)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입니다(마 16:16~19) - 영은 하나님이시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다.” (복음편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 하나님이 우리 속에 아예 오신 것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육이고, 우리의 마음이지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신다” (류광수, 현장복음, 2과 - 새로운 생명 (3) 성령의 내주란 무엇인가?).

성경은 육과 영(또는 영혼)을 구별하는 구절이 분명히 있다. 육을 영과 다른 고깃덩어리의 부분을 지칭한다.
"육체(사르크스)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3:18)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사르크스)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계17:16)

‘육체’를 뜻하는 대표적인 히브리어 단어에는 ‘바사르’가 있는데, 그 단어는 사람이나 동물의 근육조직과 고기 덩어리를 말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전인적인 사람 혹은 총체적인 사람을 의미한다. 이 히브리어 ‘바사르’라는 단어는 약 1/3을 동물로 사용되었고, 2/3는 사람에게 사용되었는데, 단 한번도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된 적은 없다. 다시 말하여 사람과 짐승이 육체적인 어떤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육은 하나님과 반대가 된다는 의미, 즉 하나님은 영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바사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40:5)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성호를 영영히 송축할지로다"(시145:21)

성경의 기자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라고 하였던 것은, 영과 대조되는 고깃덩어리만이 하나님을 송축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말하며 모든 인류가 그 육체를 갖고 있다는 함축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신약에서 ‘육’은 헬라어 ‘사르크스"라는 단어이며, 히브리어 ‘바사르’는 70인역에서 ‘사르크스’로 번역되었으므로 호환성이 있다. 물론 ‘사르크스’라는 단어도 순전히 영과 대조되는 근육조직과 신체적인 기관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 히브리어 ‘바사르’와 같이 대부분 육체는 사람 자체를 뜻한다.
즉 히브리어 ‘바사르’와 헬라어 ‘사르크스’는 대부분의 경우,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인간자체를 표현할 때에 사용되어진다. 예를 들면 우리 한글에서도 ‘육체’라는 단어는 ‘영(영혼)’과 대조되어지는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인간 자체’를 말할 수도 있다. 또한 한글에서도 ‘육체적’이라는 단어는 전인적인 인간 자체의 본능과 욕망, 혹은 죄악을 상징한다. 당연히 영혼을 배제한 고깃덩어리의 육체 자체가 욕망과 죄악을 갖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바울은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대조시키면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영을 좇는 자’는 "성령을 좇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총체적인 인간‘을 말함으로서 ’성령 하나님‘과 대조되는 경우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육신이 죄로서 거한다는 표현은 그 육신이 곧 성령을 거스리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다음 성경본문과 같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즉 본문은 인간의 육체와 인간의 영이 구별되고 대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인간과 ‘영’이신 성령하나님이 구별되고 대조되어지는 것이다. 또한 히브리어 ‘루아흐’ 혹은 헬라어 ‘프뉴마’로 표현되는 ‘영’이란 때로는 인간의 영, 즉 인간의 내적인 생명력으로서 신적 실재와 접촉하는 직접성과 관련되어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성령을 가르킨다. 인간의 영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태어난 후에 성령으로 다시 거듭나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앞서 말하였듯이, 바울이 말한 ‘육신을 좇는 소욕’의 개념은 사람을 육과 영으로 분리하고 구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보호를 좇는 삶’과 반대되는 개념을 의미한다.

바울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하여, 바울이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것은 영과 육신을 분리하자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표현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이 표현한 영에 있는 자는 거듭난 사람을 뜻하며, 육신에 있는 자는 성령이 없는 거듭나지 못한 자를 뜻한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6-7)

즉 바울이 말한 ‘육체의 소욕’이란 영혼을 제외한 고깃덩어리만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반대되는 총체적인 인간의 소욕을 말하는 것이 명백하다. 위 성경본문 요한복음 3:6-7은 성령으로 난 것이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어 거듭난다는 것은 없었던 영을 갖게 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그 영을 강퍅하게 하셨다"(신 2:30)는 것처럼, 성경은 불신자에게는 영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에 그 ‘영’이 없거나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영이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음을 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과 단절된 영은 죽은 것이며, 그는 곧 ‘육신에 있는 자’로 표현된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을 때에, 그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도 함께 포함되어졌다. 바울이 허물과 죄로 죽었으나(엡2:1)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롬6:11)고 말하였을 때에, 영과 육을 구별하고 분리하자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영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고후5:17)

물론 인간은 죽어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서 썩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곁으로 가게 되며,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의 부활을 기다리게 될 것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으며,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대부분 영과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총체적인 인간을 말하거나 혹은 개념상으로 영과 대조되는 육체로서의 의미를 표현한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살아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경우가 언급되지 않는다. 야고보서 2장26절과 같이, "영혼없는 몸은 사실상 죽은 시체"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영성개발원이니 영성신학이니 하는 곳에서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키는 주장을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전혀 비성경적인 주장이며, 헬라철학적인 이원론 사상일 뿐이다. 더욱이 지방교회, 베뢰아같은 곳에서는 죄가 육체에 거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생각하여 보아야만 한다. 죄는 그 자리를 육체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연 영혼(혹은 영)이 배제된 육체가 죄를 지을 수 있는가? 영혼이 없는 육체는 시체일 뿐이다. 또한 죄란 물질명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헬라철학적인 이원론자들과 영지주의, 마니교등은 이 세상의 근원을 영(선)과 물질(악)의 두가지로 구별하려고 하며, 모든 창조의 근원을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신의 두 세력으로 양분하려고 한다. 즉 세상의 악은 모두 사탄으로부터 온다고 간주하며, 물질은 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초래된 것으로 봄으로서, 육체는 근원부터 악하고 죄가 거하는 좌소이며 악신이 거하는 장소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한 헬라철학은 초대교회 영지주의 이단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할 때에는, 우리의 육체만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적인 인격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간주 되는 것이다. 육은 그 자체만으로 악하거나 악의 원천이 되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이 죄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에 죄가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며, 인간자체가 죄인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그 능력에 있어서 약하고 힘없는 존재가 된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성경에는 육체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을 뜻하였고, 영이신 하나님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었다.

성경은 선악 간의 문제에서 육체와 영혼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 육만 더러운 것이 아니라 영도 더러운 것이 되며 전인적인 인간이 곧 더러운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육체에 사탄이 거하며, 육체에 죄가 있다고 하거나, 영은 죄가 없으며, 영에 하나님이 거한다는 주장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1)

또한 성경은 육체에 사단이 거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예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육체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도 혼도 죄를 짓는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soul)을 보전하느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spirit)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7-18)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네페쉬)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시 41:4)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spirit)을 감찰하시느니라” (잠 16:2)

마귀가 우리의 육체에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생각을 넣는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13:2)

마찬가지로 육체만이 죄악되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육체도 영과 함께 전인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사람을 육체와 영(영혼)으로 구별하여 죄는 오직 육체에 있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며 성경은 그렇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니"(시63:1)

➁ 죄는 전인적인 기관으로서 마음에 있다.

성경적인 표현을 보자면, 죄는 마음에 있다. 마음은 영을 표현하는 기관이며 마음 안에 영이 있으며, 또한 몸이 있으므로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의 마음은 육체와 영혼의 전인적인 기관으로서 존재한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heart)을 주고 그 속에 새 신(spirit)을 주며, 그 몸(flesh)에서 굳은 마음(heart)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heart)을 주어서"(겔11:19)

성경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인간은 영(영혼)이 배제된 육체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으로 죄를 짓는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히: 레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히: 레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마음(헬: 칼디아)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15:19)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헬: 칼디아)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헬: 칼디아 포네로스)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3:12)

즉 성경에서 ‘육체의’ 라는 말은 ‘죄많은’ 이라는 단어와 동일시되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육체 자체에 죄가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육신을 가진 인간 자체가 연약함으로 유혹의 목표가 되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헬라인 이원론자들과 같이 죄가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그 영향과 활동이 지정의에 미쳐 전인적으로 죄가 파급되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죄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보다 확실한 성경적인 증거가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 5:28-30)

죄는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른 눈과 오른 손이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heart)에 음욕을 갖는 것이 죄이기 때문이다, 성경본문은 실제로 오른 눈을 빼거나 오른 손을 자른다고 하여 죄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으로 죄를 지음으로 지옥에 간다는 강조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➂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마귀가 들어올 수 있을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물론 우리는 악한 영과 대적하여야 하며,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말씀으로 무장하여야 한다. 그러나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들에게는 마귀나 귀신이 들어올 수 없다고 본다. 만약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들을 귀신이 들어와서 그를 사로 잡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작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또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주셔서 인도하고 보호하는 이유가 없어진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성경적인 근거로 보아서는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들에게 귀신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견해가 옳다고 보아야 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요일 4: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 5:1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 4:7)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살후 3:3)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너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8-29)

또한 아래 본문은 귀신이 들어올 수 있다는 내용은 아니지만,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은 성령과 마귀를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4-18)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신갑주라고 말하며, 능히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 말한다. 성령 안에 거하는 우리들은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13-17)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빌 1:28)

4) 이원론적인 번영신학의 오류
이러한 이원론에 의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이 내주하고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여 쫓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 즉 마귀가 모든 죄의 원인이 되었고, 악의 원인이었으며, 불행과 질병과 사고와 가난의 원인이었으므로,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면 이러한 문제가 모두 해결이 되어야만 이러한 이원론자들의 주장이 진리라는 것이 증거될 수 있다.

이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총괄적으로 ‘영적전쟁’이라고 부르며, 귀신축사, 대적기도, 선포기도, 땅밟기등의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특히 신사도운동은 가난의 영을 쫒아냄으로서 부의 이동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며, 영적도해의 땅밟기기도와 대적기도, 선포기도로서 하나님나라를 지상에서 인간 스스로가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많은 선교단체들이 가계저주론을 가르치고, 죄를 종이에 적어 불태우는 무속적인 방법까지 가르치고 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는 "죄"란 첫째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을 뜻한다
죄란 “하나님과 반대방향을 지향하는 것”(It is directed against God)이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죄”라는 단어 중에서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는 “하타”이며, 헬라어로는 “하말티아”로서, “표적을 빗나가다”라는 뜻이다. 즉 죄는 단순히 사회의 도덕적인 기준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말하며, 그 기준에 부족한 상태나 그것을 어기는 자체를 말하며, 즉 하나님의 뜻을 역행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진 것을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다시 말하여 예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된다. 마귀의 일은 인간이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이며 즉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 독생자이신 예수를 보낸 이유가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17)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눅 4:43)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유부터 잘못 가르치는 곳은 정상적인 기독교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특히 이러한 이원론을 주장하는 베뢰아나 지방교회, 다락방, 구원파들은 모두 양태론자로서, 성부하나님 자신이 직접 육신을 입고 온 것이 예수라고 가르친다.

이들은 영은 인격이 없으므로 육체를 가져야만 된다고 가르치는데, 즉 하나님과 사단이 서로 인간의 육체를 빼앗기 위하여 들어왔다는 이원론적인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베뢰아는 마귀를 축출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게 된다. 다락방은 마귀의 일을 멸한다는 성경구절을 알면서도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으로 해석을 고의적으로 하고 있다. 요한일서가 말하는 “마귀의 일”은 죄에 대한 문제이지, 창3장을 해결하는 일이 아니다.

(다락방, 복음편지 4과, 왜 우리에게 예수만이 길이 되는가?)
▶요일3: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중대한 말이 나왔다.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마귀와 마귀의 일 두 가지로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바로 이 마귀의 세력을 멸하려 오셨고,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

인터콥의 최바울의 백투예루살렘도 이러한 베뢰아 귀신론과 신사도운동의 영적도해사상이 나타나는데, 최바울은 자신의 문제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잘못을 수정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백투예루살렘이라는 용어를 BTJ로 바꾼 것이라고 변명을 하고 있다. 즉 그는 자신의 교리적인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인류역사는 에덴의 영적전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어 에덴에 두시자 사탄이 간교한 뱀의 육체를 입고 침입합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후에 하나님도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인간사회에 진입하십니다. 그리고 영적전쟁을 본격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입니다. 인류역사는 처음부터 영적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최바울, 왕의 군대, 144쪽)

-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역사는 인간 개개인을 구원하셨지만, 하나님나라의 완성은 인간 개개인이 구원 받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단의 권세를 멸하고 모든 권세를 하나님 앞에 무릎꿇게 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역사 이후에도 하나님의 세계경영은 자구영적 전쟁의 차원에서 계속되는 것입니다.(최바울, 왕의 군대, 118쪽)

또한 다락방의 책과 양육교재, 베뢰아 김기동목사의 책에서 수없이 발견되는 요일 3:8의 “예수가 오신 목적이 바로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은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상에 근거를 둔 것이다. 즉 현재는 하나님과 사탄이 대결하였던 간극론의 연장전 선상에 있다. 세상을 하나님과 마귀의 대결구도로 보고,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되며, 이것이 곧 구원론이 되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첫째 하늘에서 하나님을 배신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원수를 심판하고 멸하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려 하는 것입니다."(김기동저, 마귀론 상12쪽)

- 인류구원보다는 사단의 정죄가 먼저다. 사단이 정죄되지 않으면 구원도 있을 수 없다. 아직 인류가 없을 때 마귀 정죄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실 것이 작정되었다(베아10,30) (베뢰아원강, 574)

김기동목사는 배멀미, 차멀미와 연탄가스중독도 귀신 때문이며, 임신중독의 헛구역질도 귀신때문이라고 가르치며, 예수가 오신 목적이 사탄을 멸하기 위함이며, 사람은 그것을 예비하기 위한 도구로 창조되었을 뿐이라고 가르친다. 이와같이 예수의 오신 목적을 변질시키는 것은 신사도운동의 피터 와그너도 동일한다.

- 우리는 두 번째 아담인 예수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 회복하시려고 오셨음을 살펴 보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인류를 위해 부여하신 통치권을 되찾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을 살펴 보았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 오셨다. 에덴동산에서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었던 아담의 권세를 찬탈할 수 없었으나 예수님은 역사를 되돌리시려는 공격적인 의도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피터 와그너, 도미니온, 146쪽)
이러한 이원론의 주장은 마귀를 멸하는 것이 모든 해결방법이 되어진다. 예수를 영접하면 죄와 악이 없어져야만 하고, 가난과 질병과 사고와 불행이 모두 없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거듭난다고 하여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스스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락방, 현장복음3과 - 예수의 이름)
▶예수 이름을 믿고 부르기만 하면 사단의 권세가 결박된다.
골1:13절에 우리를 “흑암 권세에서 건져 내셨다”고 하였다.
요일3:8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문제 중의 문제는 사단이다. 여러분의 사업에 문제중 문제는 사단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사단을 찾아가 점치고 하는 것이다.

다락방 류광수목사가 가르치는 양육교재를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더욱이 신사도운동에서는 가난도 사탄때문이라고 주장한다.

- 또한 전체적인 구조를 뒷받침하고 있는 ‘땅’과 땅위를 운행하고 있는 공중권세는 영적 전투를 심각하게 다루어야할 필요성을 강조하게 만든다.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은 의로운 사회변혁이라는 개념을 싫어한다. 사단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왔다. 사단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번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가난과 비참함은 마귀가 강력하게 추구하는 목표이다.(피터 와그너, 도미니온, 19쪽) - 사단이 교회로 하여금 거대한 부의 이동을 수용할 준비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가장 효과적인 책략 중 하나는 가난의 영을 통하여 악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 도미니온, 236쪽)
더욱이 가난뿐 아니라 병균도 사탄이 아담의 통치권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질병 자체를 없앨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따라서 가난은 병균과 같이 아담의 통치를 찬탈한 산물임이 틀림없다. 이같은 견해에 따르면 가난은 묵인되거나 감소시켜야할 대상이 아니라, 진정으로 변화된 도시에서 제거해야할 요소이다. 그리고 그 일은 이루어질 수 있다. (피터 와그너, 도미니온, 225쪽)
- 아마도 근본적인 통치명령 안에는 HIV 바이러스 자체를 극복하고 제거하는 것을 포함하여 더 이상 이러한 것이 존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주장이 일리가 있다면 그 원리를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주장이 일리가 있다면 그 원리를 더 확대하여 이제는 암, 알츠하이머, 당뇨, 심장병, 각종 경화증, 그리고 심지어 감기에까지 그 범위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환자들을 돌보는” 대신 우리는 “질병 자체를 없애버리는”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피터 와그너, 도미니온, 224쪽)

실제로 피터 와그너는 자신이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를 통하여 광우병을 없앴다고 주장한다.

- 선포할 때에는 하나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있는 어떤 것들을 이루어지도록 선언하는 것을 말한다.....우리는 하나님께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권세를 사용해서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명령해야 한다 ...... 예를 들면 나는 광우병이 유행할 때 독일에서 공적인 모임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 때 하나님이 내게 광우병을 행하여 사도적인 선포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2,500명이 모인 앞에서 그렇게 했고, 바로 그날이 광우병이 보고된 마지막 날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내게 주어진 권세로 그 병이 멈출 것을 명령했다. 그때 그 일이 이루어졌다. (피터 와그너, 도미니온, 170-171쪽)

이원론은 한국교회에 심각한 복음의 변질을 가져왔으며,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을 초래하였다. 적지 않은 성도들은 마귀를 쫓아냄으로 나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이 곧 예수를 영접하는 이유로 알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이 비록 이단들에 의하여 가르쳐왔지만, 정통교회라는 명칭 안에서도 이러한 주장들이 유명한 부흥사나 목사들을 통하여 혹은 양육프로그램이나 이름있는 선교단체에서 ‘영적전쟁’ 혹은 ‘영성운동’, ‘내적치유’라는 이름으로 가르쳐지고 있었다는 것이 현실이며, 우리는 이러한 이원론을 경계하여야만 한다. 그 이유는 이원론은 다른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때로는 의인을 고난당하게 하시며, 악인을 형통하게 하실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고 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고난이 천국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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