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성업 씨의 주장에 대한 비평
1) 박성업 씨(이하 박성업)의 2018년 10월 26일 ‘말세 대환란 5부’의 강연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여섯인 나팔 재앙은 적그리스도가 등장한 대환란의 장면을 예언하고 있다.
* 요한계시록 7:4의 십사만 사천은 실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 맞고 구원받는 숫자이다.
* 요한계시록 7:9의 흰옷 입은 무리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2) 성경적 비평
박성업은 요한계시록 6장의 일곱인 심판이 대환란 직전, 오늘날 이루어질 일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2018년 10월 28일 ‘한반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란 제목의 설교에서는 “김정은이 올 때 그 이후로부터 어려운 시기가 시작될 텐데 대부분 이 메시지를 듣고 멸시하고 무시할 겁니다. ···김정은이 올 때부터 급격한 환란의 때가 이 한반도에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조명하신 그 산으로 큰일이 나기 전에 피하시길 권고 드립니다”라고 하며 대환란이 일어나는 시기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당시는 남북정상회담이 무르익어가는 때였다. 김정은 방한을 기점으로 전 세계를 장악한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더욱 확장되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기근이 일어나고 20억의 사람이 죽고, 기독교인의 순교가 본격화되고, 태양이 실지로 검어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고, 하늘의 별들이 지구로 떨어지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김정은 방한 후 전 세계는 아비규환의 땅으로 변한다는 주장이다. 이 설교 후 3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김정은의 방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연 요한계시록을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오늘날의 사건으로 끌어오려는 박성업의 시도가 타당성을 가지는 것일까?
요한계시록 5:1에서 어린 양이 취한 책은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었지만, 6장에서는 어린 양이 이 일곱 인들을 하나씩 뗀다. 처음 네 개의 인 재앙은 전쟁, 물가 폭등, 기근, 질병 등으로 거대한 악의 세력의 몰락을 시사한다(1-8절). 다섯째 인은 순교자들의 기도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게 되고 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그들처럼 고난 받는 자들이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여섯째 인을 뗄 때 해 달 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겁에 질려 굴과 산과 바위틈에 숨는다(12-17절). 이 우주적 대혼란 장면은 묵시적 표현으로 심판을 당하는 악한 자들이 갖는 공포심을 극대화하는 목적을 가진다(데이비드 아우네, 『요한계시록Ⅱ』, 129). 처음 네 개의 인 재앙은 박성업이 말하는 김정은 방한 후 일어난다는 전 세계적인 대환란을 결코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보낸 일곱 교회는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로서 추상적인 차원에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온갖 유혹과 폭압에 맞서 싸우는 실제적 교회였다. 요한계시록에는 이 일곱 교회의 이름과 각 교회의 상황과 처지가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고(2-3장) 이 교회 공동체와 바벨론으로 표현된 로마 제국의 운명을 보여준다(16-21장). 즉 로마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승리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보여준다. 박성업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는 악의 세력 곧 로마 제국에 대한 심판을 묘사하는 일곱인 재앙과 아무 관련이 없다. 김정은 방한 후부터 전 세계 인구 20억이 죽고 순교자가 속출하고, 해와 달의 색깔이 변하고 별들이 지상으로 떨어지고 하늘이 말리고 산과 섬들이 자리를 이동한다는 지구 대환란설은 요한계시록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다.
요한계시록은 묵시(Ἀποκάλυψις)를 포함하고 있다(1:1) 묵시는 고도의 상징과 비유와 숫자로 구성되어있다(K Koch, “묵시문학과 종말론” 『기독교사상』, 114). 박성업이 이러한 묵시 곧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 없이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니 이런 망상에 가까운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박성업의 기괴한 주장은 계속 이어진다. 그는 요한계시록 7:4의 인침을 받는 십사만 사천이 실지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인침을 받는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의 각 지파”(4절)라고 명시되어있기 때문이다. 과연 십사만 사천과 이스라엘을 동일시하는 것이 정당한가?
결론을 미리 말하면 이 십사만 사천과 이스라엘 각 지파의 이름은 실제가 아닌 상징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뺀 열 지파는 이미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본문의 이스라엘 지파의 명단 속에는 중요한 에브라임 지파와 단 지파는 누락되어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1세기에는 문자적으로 열두 지파는 없었다. 십사만 사천의 144는 옛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새로운 이스라엘의 열두 사도의 수인 12에 12를 곱한 수이다(21:12-14). 십사만 사천은 이 144에 1,000을 곱한 수이다. 1,000은 이스라엘의 군대 조직의 기본 단위이다(민 31:4; 대상 27:1-5). 따라서 십사만 사천은 지상의 투쟁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 공동체를 상징한다.(M. 유진 보링, 『요한계시록』 198-199).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실제로 해석한다면 요한계시록의 상징체계는 허물어지고 만다. 박성업이 ‘이스라엘’과 ‘십사만 사천’을 실제로 해석하는 것은 무지가 원인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스라엘’(2;14; 7:4; 21:12), ‘유대인’(2:9: 3:9), ‘예루살렘’ (3:12; 21:2, 10)도 모두 실제가 아닌 상징이다.
박성업의 황당한 주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요한계시록 7:9의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 중에서 나온 ‘흰옷 입은 큰 무리’를 이방인이라고 단정한다. 과연 그럴까? 박성업에게 묻는다. 이 흰옷 입은 무리들을 이방인들로 제한할 만한 단서가 본문에 있는가? 이 흰옷 입은 사람들에게서 왜 유대인은 배제되어야 하는가? 세계 각국을 의미하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에게서 유대인을 제외할 수 있는 지적이 본문에 있는가? 이들을 가리켜 이방인이라는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인가?
흰옷 입은 무리가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것(9절)은 이들이 승리한 무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환란’(14절) 가운데 있었지만 잘 통과하고 승리한 자들이다. 이들은 어린 양의 피로 옷을 빨아 입은 자들이다(14절). 따라서 흰옷 입은 무리들은 박해를 이기고 나온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 공동체를 상징한다.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에 맞서 힘겨운 싸움 중에 있는 요한계시록의 수신자 즉 1세기 교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서 있는 흰옷 입은 무리를 보면서 이미 승리한 교회로서의 자기 자화상과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흰옷 입은 무리가 이방인이라는 박성업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다.
박성업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구원, 유대인의 혈통적 구원을 추구하는 세대주의나 메시아닉 쥬의 사상에 물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대주의와 메시아닉 쥬는 구약의 선지서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이전의 영광을 다시 찾게 될 것이라고 믿는 집단이다. 이들은 특히 우주적 종말을 열방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조망한다. 박성업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1948년과 1967년에 회복되었으므로 구약의 약속을 달성했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세계의 수도가 되며 재림도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과연 이스라엘이라는 존재가 박성업의 주장대로 문자적 의미로 회복되어야 할 대상인가? 과연 혈통적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는가?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들, 특별히 선지자들의 종말적 약속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자세히 규명한다. 이는 구약의 종말적 약속들에 대한 기독론적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대부분 유대 사회의 일원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유대 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무엇인지 인식하고 있다. 그 이슈는 이스라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메시아의 출현은 언제인가? 포로 상태는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선지자들이 약속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은 언제 올 것인가? 등등이었다. 그러나 헬라에 이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유대인들의 현실은 그러한 기대와 소망을 요원하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절망적인 사회적 이슈를 함께 공감하면서도 새로운 대안을 가지고 나온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전체 조망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재해석했고, 현재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어떻게 결실을 맺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 그리스도로 제시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분이며 그분을 통하여 옛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약속들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구약의 선지자들의 약속을 재조명한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자.
마태는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1:1)이라 호칭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구약의 구속 역사의 핵심 인물로서, 마태가 예수님을 그들 자손으로 묘사하는 것은 구약의 약속들을 성취하실 분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의 역사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마태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3:2)라고 선포한다. 이는 하나님이 통치가 지상에서 발현되고 있음을 알리는 표현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 지금 이 땅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외친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마태는 세례요한의 화법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과 사두개파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칭한다(3:9). 그리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며 그들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마 3:9)고 권한다. 마태복음 12:34에서 예수님도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 마태복음은 왜 자기를 언약의 백성이라 믿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파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이라 했을까? 그들이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포로 귀환 전 선지자들에게 지적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박성업이 중시하는 혈통적 이스라엘의 존재가 의미 없다고 선포한 것이다.
마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3:9)고 했던 세례 요한의 외침을 인용한다. 여기서 돌들은 이방인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곧 돌들이 회개하지 않은 유대인들보다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더 가질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세례 요한은 혈통적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가 사라졌다고 선포한다. 마태는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말함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유대인들도 얼마든지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도 박성업이 강조하는 혈통적 이스라엘이 더 이상 의미 없어졌음을 시사한다.
마태는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8:11-12)고 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 더 이상 유대인의 전유물이 아님을 선포한다. 마태는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11:13) 라고 하고 누가는 이를 좀 더 분명하게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 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16:16)고 선언한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다. 이 구약의 선지자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무늬만 언약의 백성에 머물지 말고 회개하여 진정한 언약의 백성으로 거듭나기를 촉구했다. 이는 박성업이 주장하는 혈통적 이스라엘의 존재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음을 선언한 것이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문구에서 복음이란 단어는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의 메시지로 활용된 이사야 40:9(아름다운 소식)과 41:27(기쁜 소식), 52:7(좋은 소식)을 차용한 단어이다. 마가는 자신들이 여전히 바벨론 포로로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이 예수님이야말로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진정한 자라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즉 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회복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라고 선언함으로 복음서를 시작한다. 즉 말씀으로 모든 만물이 지어졌는데 그 말씀이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고 선포한다(1:14). 처음 창조 때의 창조 사건을 주도했던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게 된 사건은 충분히 새 창조에 대한 기대를 가지도록 만든다. 요한은 에덴에서 아담의 실패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통해 새 창조를 계획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새 이스라엘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새 창조의 역사를 열고 계시다고 선포한다. 고린도후서 5:1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을 새 창조라고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새 창조의 회복을 신약의 성도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박성업이 말하는 혈통적 이스라엘의 회복은 더 이상 없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는 장면을 기록한 후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성취로 오셨다는 사실을 밝힌다(2:14-21).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성전에서 몰아내시고 환전상의 돈을 쏟으시고 그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다. 이 모습을 본 유대인들이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고 답하셨고 요한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성전은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이었다고 주석을 단다(2:21).
예루살렘 성전이 예수님의 몸으로의 전환되었다는 이 선포는 과히 파격적이고 획기적이다. 이는 구약적 개념에서의 예루살렘 성전이 더 이상의 의미가 없어졌음을 나타낸다. 이처럼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의 약속들이 재조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차후에 이 주제는 더욱 세세히 다루기로 하고 이쯤에서 맺음을 하고자 한다.
박성업은 특정 전제를 가지고 성경에 접근한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구원, 유대인의 혈통적 구원을 전제로 설정하고 성경을 읽는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이는 세대주의 전형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박성업의 종말관은 세대주의적 해석과 메시아닉 쥬의 종말사상과 동일하다. 2021년 4월 3일 ‘잘못된 세대주의와 666 짐승의 표’라는 제목에서 박성업은 세대주의가 잘못되었고 공언 하지만 박성업의 종말론과 세대주의 종말론은 판박이다. 둘 다 혈통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종말의 중심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2. 다음은 2018년 10월 26일, ‘말세 대환란 5부’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올라간 박성업의 주장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가 이제 대환란 끝 부분을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가보겠습니다. ···첫째 인 말은 ···적그리스도의 영향력이 확장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붉은 말이 ···마태복음 24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전쟁이 곳곳에서 고조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셋째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경제적인 기근이 옵니다. ···넷째인은 ···칼 흉년 사망, 짐승으로 세계인구 1/4이 죽습니다. ···우리가 80억이라고 보면 ···한 20억명 정도가 청황색 말에 의해 죽습니다. 적그리스도가 등장해서 말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니까 순교자들이 나오는 거에요. ···순교가 본격화되는 것을 말하는 거에요. ···여섯째 인을 떼니까 ···해가 검어지는 세상에 살고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달도 실제 핏빛이 돼요. ···우리 시대의 이야기에요. ···그 다음 우리가 잘 아는 7장입니다. ··· 이 십사만 사천이 누구라고 되어 있느냐면 4절에 어느 자손의 지파래요? 이스라엘. ···이 인은 실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치는 거에요. ···이 지파들에 대해서 소위 신학하는 분들은 “야 그 지파들을 어떻게 구분하냐?”하는데 하나님이 하시지 우리가 어떻게 해. 이 십사만 사천에게 인을 칩니다. ··· 이 일 후에 ···셀 수 없는 수많은 무리들이 나와요. ··· 이방인들이죠.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구분해서 기록을 하고 있어요(박성업, 2018년 10월 26일, ‘말세 대환란 5부’, https://www.youtube. 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