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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자들의 허황한 ‘이스라엘 회복’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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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자들의 허황한 ‘이스라엘 회복’ 주장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3.11.25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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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찬 교수, 키이스 인트레이터의 <그날이 속히 오리라> 비판

잡초도 이런 잡초가 없습니다. 이미 1992년 시한부 종말론의 사상적 배경으로서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오명을 남기는 데 일조했음에도 이 사상은 여전히 한국교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습니다. 세대주의적 종말론 말입니다. 한국교회 일각에 다시 세대주의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본지는 이필찬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bibeschatology)에 올린 글 중 세대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비판한 글 몇 가지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저자인 이필찬 교수는 합동신학대학원(M.Div)를 졸업하고 미국 칼빈신학교(Th.M)를 거쳐, 영국 세인트 앤드류스대학(Ph.D)에서 요한계시록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이고 현재는 요한계시록연구소를 설립, 많은 강연과 저술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바른 종말론 세우기에 앞장서고 있습니다<편집자주>

▲ 키이스 인트레이터의 <그날이 속히 오리라>

글: 이필찬(전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영국 세인트 앤드류스대학 Ph.D)

키이스 인트레이터는 그의 책 <그날이 속히 오리라>(2004 1쇄; 2007 제7쇄 발행 두란노 간)에서 슥 12-14장에 근거하여 열국이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이라고 해석한다(53쪽). 곧 슥 12장은 예루살렘이 국제적인 갈등의 첨예한 대립의 장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고 슥 13장은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의 영적인 원천이 예루살렘 거민에게 열릴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해석을 하면서 예루살렘이 이미 국제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려고 말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이러한 언급들은 국제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로서 그렇지 않아도 세계 평화에 위협적 요소로 남아 있는 중동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발언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서슴치 않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예루살렘을 공격할 열국이 어느 나라를 가리키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작금의 정황상 어느 나라들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인트레이터의 스가랴 12-14장의 본문에 대한 해석이 어떤 점에서 본문의 왜곡이라 할 수 있는가? 그는 구약을 해석하는데 일관성 있게 신약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비롯한 부활과 승천의 사역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고 구약의 말씀이 가감 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들의 종말적 약속들을 예수님의 사역의 관점을 통하지 않고 미래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구약의 말씀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의해 재해석되어야 한다. 신약 성경 저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물론 종말적 사건으로 이해하지만 초림도 역시 종말적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을 통해 선지자들이 종말에 일어날 일이라고 약속했던 사항들이 성취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신약 성경에 무수히 많이 기록되고 있다.

인트레이터는 마 24:29과 행 2:16-21에서 모두 욜 2:28-32(마태복음은 30-31절만 인용)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그의 해석의 요지는 예수님은 마 24:9에서 미래적 종말과 관련하여 요엘서를 인용하였고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미래적 의미의 종말에 일어날 성령 부어주심을 통한 부흥과 관련하여 요엘서를 인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근거하여 종말에 부흥이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지막 때에 온 열방이 주께 돌아오는 큰 추수를 가져 올 것이며, 이스라엘의 폭발적인 부흥으로 그 절정에 이를 것이다”라고 한다(55쪽). 결국 그 부흥은 이스라엘의 부흥으로 귀결된다. 그는 이것을 두 번째 오순절이라고 간주한다. 인트레이터는 바로 이 점을 전제하여 마 24:19과 행 2:16-21을 왜곡하고 있다.

인트레이터의 이러한 해석에는 마 24:19과 행 2:16-21 두 본문 뿐만 아니라 욜 2:28-32에 대한 성실한 해석의 절차들이 생략되고 있다. 먼저 욜 2:28-32을 인용한 행 2:16-21이 과연 미래적 의미의 종말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이 미래의 종말에 일어날 부흥을 의미하는 것일까? 욜 2:28-32과 행 2:16-21을 비교하여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세 개의 주제가 있다.

주제1)
환상/꿈과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예언

행 2:17-18
17)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ἐν ταῖ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7-18절)

요엘 2:28-29
28)그 후에(μετὰ ταῦτα)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28-29절)

주제2) 우주적 붕괴의 언어를 통한 심판
행 2:19-20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들) (τέρατα)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들) (σημεῖα)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19-20절)

욜 2:30-31
30)내가 이적(들)(τέρατα; מוֹפֵת)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30-31절)

주제3) 남은 자의 구원
행 2:21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욜 2:32
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32절)

위의 구절처럼 세 개의 주제로 나누어진다. 먼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경우에서 베드로는 종말적으로 성취된 구원의 주제를 다룬다. 첫 번째의 경우에 행 2:17-18에서 베드로는 요엘 2:28-32을 인용함으로써 요엘서에서 기대했던 성령을 부어주심과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며 이상을 보는 종말적 사건이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확증하여 선포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 사역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순절의 성령의 오심도 의심할 여지 없이 종말적 사건이다. 특별히 욜 2:28의 ‘그 후에’(μετὰ ταῦτα)라는 다소 중립적 의미를 갖는 문구를 행 2:17에서 ‘말세에’(ἐν ταῖ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직역하면 ‘마지막 날들에’라고 할 수 있다)라는 문구로 변형하여 표현함으로써 오순절 사건이 종말적 성취의 사건이라는 사실을 확증하고 강조한다.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행 2:19-20)에는 좀 특이하다. 문자적으로 볼 때 오순절 사건에서 성취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트레이터로 하여금 이 본문을 미래적 의미의 종말로 이해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행 2:17-18에서 이미 오순절 사건의 종말적 성취의 의미를 보여 주고 있다면 행 2:19-20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베드로가 요엘 2:28-29과 함께 요엘 2:30-31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첫번째 경우와 동일하게 성취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요엘 2:30에서 ‘이적들(τέρατα; מוֹפֵת)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라는 문구를 베드로는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들) (τέρατα)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들) (σημεῖα)를 베풀리니’라는 문구로 ‘징조들’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변형시켜 사용한다. 이러한 단어의 첨가를 통해 종말적 성취의 정황을 더욱 강조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에서 설교하는 키이스 인트레이터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는 행 2:22의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셨다”라는 문구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기사와 표적’(τέρασι καὶ σημείοις)이라는 문구는 행 2:19의 ‘기사와 징조’(τέρατα σημεῖα)와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이미 요엘서의 종말적 기대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오순절 사건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종말적 성취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도록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베드로는 ‘기사와 이적’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의 발생과 ‘해와 달’과 같은 천체의 파괴적 변화(요엘 2:30-31)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한 내용의 요엘서를 인용함으로써 종말의 도래를 선포하기를 의도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행 2:21에서 베드로는 욜 2:32의 전반부를 사용하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라고 선포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욜 2:32의 말씀의 전체를 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위의 요엘서 말씀에 ‘남은 자들’( בַשְּׂרִידִים >שָׂרִיד)이란 단어는 이사야 1:9에서 그루터기 같이 남은 자를 묘사할 때 사용된 바 있다. 베드로는 결국 당시 유대인 청중들에게 이 요엘서가 말하는 남은 자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들이 요엘서의 약속대로 이 남은자들의 주인공이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는 것을 베드로는 이어지는 그의 설교에서 밝히고 있다.

위의 내용에서 행 2:17-21은 단순히 미래에 이루어질 부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약속된 종말적 사건으로서의 오순절의 의미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마 24:19의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라는 문구도 역시 행 2:19-20의 경우와 같이 요엘 2:30-31말씀의 인용을 통해 종말의 도래에 대한 징표를 보여준다.

인트레이터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 땅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예수를 통치자로 하는 완전한 사회를 세우는 것이다”(58쪽). 그러면서 그 왕국은 “확대된 다윗 왕국”이되 예수님이 왕이되는 나라라고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라면 어떤 과제에 직면하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트레이터는 당면한 목표 세가지를 제시한다: 성령 충만, 세계 복음 전도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58쪽). 이 세가지는 혈통적 이스라엘 회복 운동을 하는 그룹이 신사도 운동과 접목이 되며 성령 집회를 강조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 목표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매우 우려스러운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책 61쪽에 의하면 “토라의 율법 조항들은 우리가 먼저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면서도 “그러나 만약 그 평화의 제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군사적으로라도 그 상황을 해결해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며 어처구니 없게도 이러한 내용과는 전혀 상관 없는 다윗의 시편 120:6-7(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을 인류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이 엄청난 주장을 위해 인용한다. 이 시편은 경건한 시편 저자의 개인적 관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현대의 국가적 관계에 적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28쪽에서 “나는 이들 메시아를 믿는 군인들이 종말의 격전에서 특별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현대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군사행동이나 그 이스라엘을 위한 아랍권에 대한 이라크 침공과 같은 미국의 군사 행동을 정당화 하고 있다(비록 그가 그런 의도가 아닐 지라도 그런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 그리고 현대의 국제 분쟁의 경우들을 보면 그 어느쪽 나라의 평화 제의를 상대방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평화제의를 하는 쪽은 언제나 자기 입장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제의하게 되므로 상대방에게는 불리한 조건이 되어 결렬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 모 방송사에 올라온 키이스 인트레이터의 강연목록

더군다나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처해있는 중동의 상황은 평화 제의 따위는 언제든지 휴지조각처럼 되어 버릴 수도 있는 지경에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평화 제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군사적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은 군사 행동을 성경을 근거로 정당화 시켜 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트레이터는 평화를 비전으로 뉴에이지 운동의 “세계 평화를 구체화하라”는 슬로건을 인용한다. 그런데 그는 그 평화의 조건에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도 구약 이사야 2:1-4이 그것이다.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는 “만약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원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61쪽).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구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 중심의 세계 세력 재편이다. 구약은 아무래도 종말적 전망을 이스라엘 회복을 중심에 둔다. 그런데 만일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들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중심으로 세계 평화를 논하게 된다면 그것은 엄청난 오류를 가져 오게 될 것이다.

구약적 프레임을 가지고 세계 평화를 논한다는 것은 기름을 가지고 불구덩이로 뛰어 드는 것처럼 위험하다. 예수님은 어떻게 평화를 가져 오셨는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어 주셨는가?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예수님이 인트레인터의 논리대로라면 그를 따르는 군중들을 모아서 로마 정부를 전복시키고 이사야가 꿈꾸던 바로 그 유토피아의 세계를 신속하게 이루셨을 것이다. 당시 예수님의 세력이 얼마큼 위협적이었는가는 마 26:5에 대제사장들이 사람들의 민란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날짜를 계산할 정도였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병사들을 향하여 칼을 휘두른 베드로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마 26:52-54)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약의 이사야가 꿈꿔왔던 세계 평화를 가져 왔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전쟁이 아니다. 무력을 통해서라도 평화를 이루자고 주장하는 인트레이터에게 예수님은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라고 반문하신다. 요한복음 20:19에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Εἰρήνη)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에게 진정한 평화를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이것이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는 성취의 프레임이고 신약적 프레임인 것이다.

인트레이터는 계속 구약적 프레임을 이어간다: “그러면 어디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할 것인가? ‘시온’, 즉 예루살렘에 임한다. 예루살렘이 이 세계 평화의 중심도시로 나타나 있다. 평화를 염원하는 비전은 사실상 ‘예루살렘과 관련된’ 비전인 것이다(62쪽). 이 주장을 세계 어느 나라가 동의할까? 어느 나라가 이 플랜에 동의해 주어 예루살렘 중심의 세계 평화에 이바지해 줄까? 대부분의 나라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트레이터의 답은 전쟁이다. 구약의 프레임에 갇힌 이스라엘 중심적 사고는 이처럼 엄청난 해석의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인트레이터는 사 9:6-7의 말씀의 성취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소개한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평화 조약”에서 출발하여 “다윗으로 이어가시며 다윗의 후손을 통해 이 세상에 완전한 평화의 시대가 오게 하시겠노라고 약속하셨다”(65쪽). 이것에 대한 근거 구절이 삼하 7:14와 사 9:7이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그리고 이에 대한 성취로서 신약의 눅 1:32-33과 2:14을 제시한다.

32)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2-33)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인트레이터가 신약의 성취 구절로 위의 두 본문을 발견한 것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는 이사야 9장의 예언을 성취하려고 오셨다. 즉 평화의 왕으로 오시고 다윗의 보좌에 앉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분은 아브라함 언약을 새롭고 더 완전한 언약이 되도록 확장시키셨다. 또 다윗의 왕국이 영원한 왕국이 되도록 확장시키셨다”고 한다. 이러한 진술도 얼핏 보면 매우 타당한 발언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들의 이면에 숨겨진 의도가 엿보인다. 곧 인트레이터는 예수님의 사역의 과점에서 구약의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왕국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다윗 왕국의 관점에서 그것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성취의 관점에서 아브라함과 다윗 왕국의 존재는 과정이고 그림자이다. 예수님은 다윗 왕국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지 다윗 왕국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인트레이터는 그것이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의 약속과 다윗의 왕국의 존재는 그 자체가 보존되고 발전되어야 하는 실체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 실체를 더 실체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은 다윗 왕국을 온전히 회복하여 사 2:1-4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 이스라엘 중심의 세계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 평화를 구현하기 위하여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중심적 사고에서 발현된 패턴대로 ‘곡과 마곡’의 전쟁도 불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약속과 시스템이 어떻게 신약에서 성취의 형태를 띠는가는 이미 앞에서도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 다윗의 화려하고 군림하고 호령하는 왕권의 리더쉽의 성취는 철저하게 패배하고 고난을 받으며 멸시받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던 군중들이 그들의 기대대로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 해방을 이루지 못한채 빌라도의 법정에 선 나약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처절한 배신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로고 외치고 말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트레이터의 논리대로라면 절대로 다윗 왕권의 성취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을 통해 세계 중심 국가로서 이사야의 비전대로 로마 제국의 절대 권력을 전복시키고 세계 평화를 기대하였건만 돌아온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다윗과 같은 목자로 세우셨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빛의 소망을 보여 주셨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방언으로부터 하늘 이끝에서 저끝으로부터 불러 모으시는 다윗 왕의 리더쉽을 훨씬 뛰어 넘는 강력한 리더십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정작 예수님께서 다윗 왕권을 구약의 패러다임대로 발전 계승시키시기를 원하셨다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채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 마귀가 제기한 이 세상의 모든 영광과 부귀를 마다할 이유가 없으셨을 뿐만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산으로 자신을 숨기시거나 자신을 찾아 정치적 메시아로 삼으려고 했던 군중들을 피하여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실 이유가 없으셨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더욱 더 불필요한 소모적 행위였을 것이다.

나는 인트레이터에 대한 이러한 분석이 오해이며 잘못된 것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인트레이터는 중동의 갈등의 이유를 “인류가 전반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려 반역하기 때문에 야기된다”고 하였다(66-67쪽). 그리고 “영원한 평화와 번영이 있으려면, 먼저 죄와 반역의 뿌리가 제거되어야만 한다”며 세상은 하나님 뿐만 아니라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마쉬아흐(메시아: 왜 굳이 이렇게 어렵게 히브리어식으로 발음하는지 모르겠다: 필자주)에게도 반역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의 의도는 다음의 내용에서 그 본래의 의도가 드러난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소제목 하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사람)을 통해 이 땅에 당신의 권위를 세우셨다. 또한 하나님은 예루살렘(장소)을 택하셨다. 따라서 사람뿐만 아니라 그 땅도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과 택하신 장소를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하였다(68쪽).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장소로서의 예루살렘을 받아들이는 것을 동일하게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장소로서 예루살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가 정확하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진술 때문이다. 이 글을 보고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두 표현-‘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장소’-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가 아닌가를 알기 위한 시험하는 수단이 된다. 하나님은 그분이 택하신 사람과 장소를 통해 사람 안에서 죄와 반역의 뿌리를 찾아 내신다."

장소로서의 예루살렘을 받아들이느냐 않느냐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가 아닌가를 알기 위한 시험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람(예수님)과 장소(예루살렘)을 통해 사람 안에서 죄와 반역의 뿌리를 찾아 내신다는 것이다. 곧 장소로서 예루살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안에 죄와 반역의 뿌리가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세상은 하나님 뿐만 아니라 그의 기름부음받은 자에게도 반역하고 있다는 말은 곧 장소로서 예루살렘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염두해 두고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트레이터의 엄청난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지?

죠지 래드는 세대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와 교회의 이야기라는 두 개의 상이한 이야기를 본다. 이 명백한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두 개의 극단적인 다른 대답이 제안되어서 예언에 대해 공부하는 이는 누구나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것과 교회를 위한 두 개의 상이한 계획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틴의 약속된 땅을 상속받기로 된 신정 민족이었으며, 현재도 그렇고 장래에도 그럴 것이다. 바로 이들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구약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실현될 때, 문자적인 다윗가의 왕이 되실 것이다. 이런 체제를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라 한다. 일반적으로 세대주의의 주조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각각 다른 방법으로 다루시는 일련의 세대나 시기를 나누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G. E. Ladd, The Last Things And Eschatology For Laymen라는 제목의 책이 이승구 역으로 <개혁주의 종말론>이라는 제목[이레서원 간 2000]으로 출간 책의 9-10쪽)

오히려 세대주의의 주된 특색은 하나님께서 두 개의 다른 계획과 운명을 예상하고 계신 두 개의 하나님 백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신정적인 지상의 이스라엘이 있고, 영적으로 천상적인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C. C. Ryrie, Dispensationalism Today, [Moody Press, 1965], 67)(G. E. Ladd, The Last Things And Eschatology For Laymen<개혁주의 종말론>10쪽에서 재인용).

"예언 해석의 둘째 방법은 점진적 계시를 인정하고 구약을 신약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이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일치를 강조함으로 해서 세대주의자들은 대게 이를 '언약 신학'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방법을 지지하는 필자는 언약 신학의 분위기에서 자라나서 이 방법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실상 필자는 처음에 세대주의자였었다.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명에서 주어진 새로운 계시로 해석되어야만 하고 때로는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귀납적인 성경 연구에서 나온 확신이다"(Ladd, 10쪽).

위의 래드의 세대주의에 대한 명쾌한 정의에서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면서 이스라엘-예루살렘 중심적 성경해석이 바로 세대주의라고 한다면 바로 인트레이터의 성경 해석은 이러한 세대주의의 정의의 범주에 정확하게 들어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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