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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외에 실상이 더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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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외에 실상이 더 필요한가?”
  • 정윤석
  • 승인 2013.10.15 0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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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권위자 이필찬 교수의 신천지 해석 해부하기 1강(계 1장)

요한계시록의 권위자로 알려진 이필찬 목사(전 웨스트민스턴신학대학원 대학교 신약학 교수)가 ‘신천지 요한계시록 해석 해부하기’(신요해)를 주제로 지구촌교회 지하 1층 그레이스홀에서 10월 11일(금)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강연을 진행했다. 뉴스앤조이와 이필찬요한계시록연구소가 주최한 이 세미나는 12월 13일까지 매주 금요일 계속된다. 첫날 강연은 요한계시록 1장의 바른 주해와 신천지 해석의 허점을 비판하는 데 맞춰졌다. 이를 위해 이 교수가 참고한 신천지측 자료는 ‘요한계시록의 실상’(보혜사·이만희 저)와 신천지측 고등과정 성경공부 교재였다.

신천지 비유풀이의 목적

▲ 분당 지구촌교회에서 매주 금요일 열리는 이필찬 교수의
신천지 요한계시록 해석 해부하기 강좌

이 교수는 본격적인 요한계시록 해부에 들어가기 전, 몇 가지 사항을 간략히 언급하고 지나갔다. 먼저 신천지식 비유풀이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신천지식대로 사고토록 하기 위한 ‘오리엔테이션’시키는 과정이라고 지적했다. 신천지식 사고의 프레임을 신도들의 머릿속에 집어 넣기 위한 절차일 뿐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해석의 전개 방식도 나선형으로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것을 단순명료하게 파헤치는 일은 쉽지 않았고 그에 대한 성경적 대답을 하는 것도 쉬운 작업은 아니라고 말했다. 성도들이 신천지식 계시록에 쉽게 빠지는 이유는 ‘세대주의적 계시록 해석’이 뿌리내린 한국교회의 토양 때문이라고도 비판했다.

그의 강의 진행은 신천지의 주장, 그에 대한 비판, 성경적 바른 해석 순으로 이어졌다. 이 순서는 이단상담소에서 신천지 상담을 하는 기법과도 동일한 방식이다. 이단상담소에서도 신천지의 주장, 그에 대한 비판, 성경적 바른 해석의 순서대로 진행한다. 그래야 신천지 신도들이 귀를 열고 듣기 때문이다.

쉬운 강의, 그러면서도 난해
이 교수는 ‘신요해’ 강연을 하며 개념 정리부터 했다. 계시록 1장을 해석하며 매우 선명한 용어 설명 후 강연을 진행했다. 이 ‘한방’에 신천지의 허점은 시작부터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반면 이 교수의 주장 중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도 있었다. 그의 강연을 기자의 글로 풀어서 전개해보겠다.

개념 정리를 위해 이 교수가 첫 번째 던진 질문은 ‘요한계시록이 어떻게 기록됐을까’라는 것이었다. 기계적으로 기록했을까, 유기적으로 기록했을까? 기계적이라면 요한은 단지 글 쓰는 기계처럼 하나님께 사용돼 그가 불러주는 대로 적었다는 의미다. 요한은 계시록의 참의미를 전혀 모르고 기계처럼 사용됐다는 견해다. 반대로 유기적이라 함은 요한의 언어습관, 감정, 세계관, 지식, 성장배경, 경험 등 총체적 인격이 성경 기록시에 사용됐다는 설명이다.

답은 당연히 유기적! 하나님이 많은 환상을 요한에게 보여 주셨다. 그러나 그것의 참 의미를 전혀 모르고 로봇처럼 요한이 쓴 게 아니라 그 환상을 보고 기록하는 과정 중에 유기적인 감동이 있었다는 의미다. 계시록뿐 아니라 모든 성경이 유기적으로 영감됐다. 바울서신을 예로 들면 그 서신에는 바울의 언어습관, 지식, 배경이 총체적으로 사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의에 따라 보혜사·이만희가 썼다는 <요한계시록의 실상> 45쪽에 나오는 내용이 자연스레 부정된다. 그 내용에서 이만희 씨는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환상으로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했지만 그 예언이 언제 이루어지는지, 실체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다만 예수님께서 환상으로 보여 주신 계시를 기록했을 뿐이다”고 주장한다. 기계적, 로봇처럼 계시록을 썼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 강연하는 이필찬 교수

두 번째 던진 질문은 ‘예언’의 정의가 뭐냐는 것이었다(계 1:3). 이 교수는 ‘예언’의 참 뜻을 아는 것이 계시록 이해의 중요한 키워드라고 설명했다. 보통 사전적 정의가 한국 교인들의 뼛속 깊게 새겨져 있다. ‘미래에 대해 미리 하는 말’, 많은 사람이 그렇게 이해하는데 사전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성경을 통해 그 정의가 맞는지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교인들이 사용하는 많은 기독교적 언어들이 성경적 의미로 걸러지지 않고 사전적 의미에서 그친다며 이런 사전적 정의가 오히려 성경의 참 뜻을 곡해·오해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예언도 그렇다는 의미다. 이 교수는 예언의 원조는 선지자들이라며 이들이 감당한 예언의 사명을 요약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창조주·구속주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의 심판을 선언하고 회복한 후 새이스라엘로 변화하는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것’이다. 이게 선지자 예언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 테마속에서 과거·현재·미래가 유기적으로 통합돼 있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예언’을 단순히 미래에 대한 얘기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계시록 1:3의 예언의 의미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 사용되는 예언의 의미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그래서 성경의 ‘예언’에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공포가 아니라 순종이 필요하다. 삶의 변화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계시록은 어떤 책인가를 보는 것도 신천지식 계시록 해석을 깨기 위한 중요한 전제다. 계시록은 편지(계 1:4)다. 편지라 할 때 어떻게 읽을까라는 주요 원리를 배울 수 있다. 발신자가 있고 수신자가 있다. 편지는 매우 개별적 문서다. 3자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군대간 아들에게 편지를 쓰면 둘 관계 때문에 편지에는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추억, 고유한 언어적 선택이 발생한다. 제대로 이해하려면 둘안의 역사에 있었던 내용을 이해해야 언어가 제대로 파악된다.

제 3자가 편지내용을 거두절미하고 자기 식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면 왜곡과 오해가 발생하는 법이다. 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수신자가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7교회 성도들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21세기의 언어습관으로 접근하면 해석에 당연히 오류가 생긴다.

대표적으로 666이 그렇다. 항간에 666, 짐승의 표가 베리칩이라는 소문이 돈다. 한마디만 묻자. 소아시아 7교회의 성도들이 ‘베리칩’이 뭔지 알았나, 몰랐나? 오늘날을 사는 성도의 생각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 이토록 어처구니 없는 해석을 하게 된다.

환상계시와 실상계시
계시록은 계시(1:4)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거나 예수의 사명을 대신하는 진리의 목자에 대한 계시가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다. 신천지는 비슷하게 해석하는 척하며 예수를 언급하는 것 같으나 사실상 자기들의 약속의 목자라는 이만희를 위한 ‘계시’로서 요한계시록을 대한다. 계시록을 통해 예수를 가르치지 않고 나타내지 않으면 그건 계시록을 잘못보는 거다. 신천지는 예수를 슬쩍 언급하면서도 이만희를 약속의 사자라며 부각시킨다. 신천지는 이런 명백한 계시록 말씀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해 계시한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그분이 생명과 영생을 가져다주는 주님이란 것을 거부한다.

“계시록이 응하고 있는 오늘날은 계시록에 약속한 이긴 자(계2, 3장, 21:7)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 이를 부인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그 말씀을 믿지 않는 자이며 마귀의 영에게 조종을 받는 자이다”(요한계시록의 실상, 37p).

계시록은 예수에 대한 계시임에도 불구하고 신천지에서는 요한계시록의 ‘계시’를 두 가지로 나눈다. 환상·실상계시다. “계시는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장래 이룰 일을 이상으로 미리 보여주는 ‘환상 계시’이며 다른 하나는 약속한 예언을 실물로 이루어서 보여주는 ‘실상 계시’이다. 환상 계시는 이룰 실상에 대해 증거하기 위해 필요한 청사진과 같다··· 당시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환상으로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했지만 그 예언이 언제 이루어지는지, 실체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다만, 예수님께서 환상으로 보여주신 계시를 기록했을 뿐이다”(요한계시록의 실상, 45p).

▲ 이필찬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청중

신천지는 요한계시록을 1935년에 태어난 이만희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신천지의 주장과 달리 계시록은 요한이 직접 환상을 보고 듣고 7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록했다. 게다가 이 책은 ‘봉함된 책이 아니다(5:5~6).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그 봉인을 뗀 책이다. 단지 신천지가 요한계시록을 봉함된 책이라고 하는 이유는 1984년이 돼서야 나타나는 이만희가 봉함을 연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깔아놓은 포석일 뿐이다. 요한의 기록 자체가 ’실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실상 그 이상의 실상은 필요치 않다.

이필찬 교수의 강의 중에는 납득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는 계시록 1:7절의 ‘구름타고 오시리라’의 헬라어와 다니엘 7:13절의 70인역 헬라어를 비교분석하면서 이 말씀은 “재림이 아니라 승천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볼지어다(헬라어 이두, 다니엘에서도 이두), 오시리라(헬라어 에르케타이, 다니엘에선 에르케토-에르케타이의 변화), 구름(네페론, 다니엘에서도 네페론)이라는 단어가 동일하게 반복되는데 다니엘은 구약적 배경에서 인자 같은 이가 하늘의 하나님 앞으로 ‘와서’ 온 천상천하의 왕으로서 공개적으로 그 지위가 공포되는 승천의 현장이라는 설명이다. 역시 계시록의 1:7의 ‘오시리라’도 우리 입장에서 예수님이 오시는 재림이 아니라 ‘예수께서 승천해서 하나님께로 오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납득되지 않는다. 성경 번역부터 그렇다.
“보십시오.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공동번역)
“그분이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현대어성경)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표준새번역).
“아멘, 그분이 지금 오고 계신다! 구름타고 오시는 분”(메시지)

주석들도 요한계시록 1:7을 승천이 아닌 재림으로 표현한다.
“이곳에서 이두(헬라어)는 바로 이어지는 예언, 즉 예수의 오심에 대한 예언의 진실을 확인하는 역할”(WBC주석 요한계시록 상, 393~394쪽, 데이비드 아우네, 솔로몬, 2011년)
“‘볼지어다, 그가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리로다’(7절)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고 하는 예언으로부터 시작해서”(428쪽, 메튜헨리 주석, 기독교문사, 1984년).
“여기서 ‘오시리라’로 번역된 ‘에르케타이’는 본래 ‘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에르코마이’의 직설법 현재형이지만 여기서는 미래적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과 임박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68쪽, 옥스포드 원어성경대전, 제자원, 2006년).

요한계시록 1:7절의 앞 뒤 문맥을 봐도 하늘에서의 승천을 묘사한 것이라고는 보기는 어려운 요소가 있다. 이 교수의 주장에 대해서는 2개월 동안 강의를 더 들으며 기자(기독교포털뉴스 www.kportalnews.co.kr)가 풀어가야 할 숙제로 남겨 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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