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산 선교사(차이나네트워크연구소 선교훈련디렉터)가 12월 13일 천안대학교대학원에서 ‘오늘의 중국가정교회’란 주제로 간증하며 한국교회가 중국선교를 하는 데 있어서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는 ‘친구로서의 사랑’이라고 강조했다. 장 선교사는 15년 동안 중국에서의 선교 경험을 얘기하며 “한국교회가 동정하며 지원하며 돕겠다는 의식을 갖고 접근하는 것은 선교에 해가 된다”며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지적했다.
장발에 정장을 하고 강단에 선 장 선교사는 “지금 제가 넥타이에 와이셔츠를 입고 머리도 정리가 된 채로 섰는데 중국에 들어갈 때는 일부러 잠바하나 걸치고 후줄근하게 입고 들어간다”며 “깔끔하게 하면 중국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선교는 친구로 다가가는 것이고, 그들을 만나면 집에 들어가 아무 곳에나 철퍼덕 앉아서 식사도 같이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선교사의 자세라는 것이다. 장 선교사는 “최대한 중국 사람들이 ‘너는 나와 똑같은 동족이다’고 생각하게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돼서 웃고, 울고, 춤추고, 노래하는, 친구가 되는 것이다. 장 선교사는 그들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살아온 이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면 눈물부터 흘려요. 그들에게는 누군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도 생소한 개념이거든요. 지금 중국의 기성세대들은 어려서부터 공산주의를 처절히 체험한 사람들이에요. 사회주의 국가의 부속품은 됐을지언정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사랑을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요. 어려서는 탁아소에 맡겨져서 자라왔어요. 부부가 만나는 시간은 잠자리 외에는 없어요. 잠자리를 같이 해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동에 시달리다가 왔기 때문에 잠밖에 안 잡니다. 집에서 단란하게 식사하는 경우도 없어요. 마을에 있는 공동식당에서 식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국 농촌에선 부부간·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는 중국이 개방된 후에도 여전히 안고 있는, 특히 중국 농촌으로 가면 절실히 느낄 수 있는 현실이다. ‘사랑에 배고픈’ 그들과 친구로서 하나가 되는 것이 선교적 마인드로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는 지적이다.
장 선교사가 중국가정교회로 가서 3년 동안 한 일은 청소, 부엌 일(설거지, 요리) 등이었다. 교육 시간에는 같이 앉아서 성경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하나가 됐다. 이곳에서 자신이 ‘신학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란 것은 중요치 않았다. 사랑하는 중국 사람을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그들과 몸을 부대끼는 과정으로 걸어간 것이다. 중국선교는 그들의 언어는 기본이고, 그들의 문화와 신앙형태와 생각을 비롯한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중국 선교는 그들과 함께 T셔츠 하나에 잠바만 걸치고 하는 거예요. 찬양이 좋으면 같이 박수치고 그들이 춤을 추면 같이 따라 춰요.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어 해요. 한국에 와서 그렇게 하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데 중국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게 그들의 문화예요. 중국 선교를 지망하려는 분들이 내게 ‘중국 선교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중국어를 마스터 하라, 그리고 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라고 얘기해요.”
이것을 전제로 해야 선교의 실마리가 풀린다는 얘기다. 몇몇 사람들이 장 선교사에게 또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중국 가정교회를 개척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고. 장 선교사는 “가정교회를 개척하는 데는 1시간이면 된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의 친구로서 그들을 사랑한다는 전제가 됐을 때 가능한 얘기다.
“중국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이면 가정교회 하나를 개척할 수 있어요. 1시간 동안 옆에 앉은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면 그들은 10시간을 자기 얘기를 하려고 해요. 처음에는 ‘예수에 대해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그런 사람 우리 동네에 없었는데?’라고 말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반드시 자기 가족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을 봤어요. 가정교회가 하나 생기는 거예요.
한 노인이 신문을 보고 있길래 옆에 가서 살짝 훔쳐봤어요. 그들은 감추지 않고 옆 사람이 잘 볼 수 있도록 신문을 대주죠. 노인들은 말 벗이 없기 때문에 옆에서 신문을 보면 하염없이 얘기를 늘어 놓기 시작합니다. 모두 들어줍니다. 몇 시간이고 열심히 들었더니 나중에서야 노인이 ‘당신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지나가는 길손인데 여관이나 잠잘 곳을 찾고 있어요’라고 했더니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자고가라’고 합니다. 인심이 아주 좋아요. 들어갈 때는 빈손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호박씨를 사 갖고 들어갑니다. 호박씨를 다 깔 때까지 잠을 안자고 밤새도록 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밤새 노인의 얘기를 듣고 대화를 하다가 하나님이 감동하는 시간이 되면 예수 얘기를 꺼네요. 그리고 마음이 열린 분에게 ‘당신이 이제 믿음의 조상이 됐다’고 말하며 복음을 전하면 이 노인이 가족들을 전부 불러 모아 이 얘기를 같이 들어보자고 합니다. 복음이 전 가족에게 전파되는 순간이에요. 복음을 얘기하다가 지치면 노래(찬양) 하나 가르쳐 주고, 노래하다가 신이 나면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해요. 그리고 배고프면 먹죠. 이런 식으로 가정교회가 생겨나는 거예요.”
장 선교사는 “중국에 선교사가 활동하며 선교하던 시기보다 그들이 모두 추방되고 모든 문호가 닫혀 있을 때 성령님의 강권적 역사로 퍼져간 것이 중국의 가정교회”라고 설명한다. 중국선교를 하며 차를 타고, 산을 넘고, 차가 갈 수 없어서 오토바이를 타고, 오토바이도 들어갈 수 없어서 걷다가, 다시 산을 넘고 끝없이 들어간 농촌 오지에서도 가정교회 교인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들은 부모님이 남겨 준 마태복음 7장 한 장만을 갖고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15년을 사역하자 장 선교사를 한국인으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장 선교사는 같은 한국인 선교사들에게도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히지 않는다. 철저히 중국인으로서, 그들의 친구가 되려는 마음 때문이다.
장 선교사는 이제 한국교회가 중국의 가정교회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복음화와 핍박받는 중국 가정교회를 위해서다.“1990년 대 중반에 나온 한 자료에 의하면 중국가정교회에 대한 정부의 핍박 내용이 요약돼 있어요. 구금 270만명, 당시 가정교회 교인이 5천만명이었으니 20명 중 1명꼴로 구금했다는 얘기가 되죠. 강제노동 43만명, 지명수배 750명, 실종돼서 생사가 불확실한 사람 20만명, 고문으로 인한 사망 1만명, 고문으로 인한 장애 2만여 명, 가택연금 13만명, 금품 및 재산몰수 112만명이었어요. 이게 중국가정교회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겪는 실제 현실입니다.”
장 선교사는 “매주간 중국가정교회 신도들의 체포소식이 계속 들려오고 있다”며 “한국교회가 그들의 아픔에 친구로서 동참하고, 저항할 힘이 없는 그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들은 잡혀 가면서도 정부·지도자·국가를 위해서 기도한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고통으로 안 보고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다. 감옥에 들어갈 때는 “드디어 재소자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가 생겼다”며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하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중국가정교회에 귀한 자매 한 명이 있었어요. 저랑 가정교회를 인도하며 공안에 자주 잡혀갔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잡힐 때마다 손가락 마디 하나씩이 잘렸어요. ‘같이 집회 인도하는 사람의 이름과 인상착의를 대라’는데도 말을 하지 않다가 고문을 당한 거예요. 공안들이 족쇄를 양팔에 채우고 공중에 매단 다음 몽둥이로 실신할 때까지 때린 적도 있어요. 기절하면 깨우고, 다시 때리고, 그리고는 손가락을 자르고. 그래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다가 그녀는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갔죠. 의사가 ‘더이상 가망이 없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풀려났어요. 마지막으로 그 자매를 보기 위해 그 집을 찾아갔어요. 고문으로 인해 거의 죽어가던 그 자매가 저를 보고는 ‘미안하다’고 해요. ‘왜 미안하다고 할까’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말을 잇더군요.
‘미안해요. 당신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서.’ 떠나 보내는 사람이 안타까워하고, 정작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찬양하는 거였어요. 공안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저는 뒷문으로 나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중국 가정교회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중국의 가정교회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단지 중국선교사라는 사람들이 ‘중국의 어느 지역에서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고, 신도들이 몇 명 모이고, 무슨 프로그램을 도입해 부흥을 시키고 어린이들이 얼마나 모이게 될 것이니 후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그것에 관심을 갖는 거 같아요. 중국선교사라는 사람들이 선교 보고를 한다면서 집회 열고 글을 몇 개 써내면 그 주간에 그 지역의 중국가정교회는 초토화가 됩니다.”
장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가정교회에는 현재 한국교회의 돈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형제라고 하는 우리들의 기도소리를 듣고 싶은 겁니다. 친구로서 자신들에게 다가온 예수님을, 똑같이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형제·자매들의 기도의 응원을 듣고 싶은 겁니다. 그들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뭔가 하려는 것은 동정이요, 교만입니다. 갖은 핍박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온전히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려는 그들을 위해서 마음을 열고 나가는 것이 한국교회에 필요합니다. 저는 선교사뿐만 아니라 ‘보내는 선교사’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 응원하는 사람 말입니다.”
장 선교사는 간증을 마친 후 중국가정교회의 한 자매가 만든 찬양을 부르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장 선교사는 중국현지에 있을 당시 찬양을 만든 그 자매에게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떤 분입니까?”라고. 그 때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갓난아이 때부터 나를 지켜보시고 언제나 내 곁에 있는 다정한 친구예요. 내가 들판을 걸을 때, 갈데없이 쫓기다가 동굴 속에 숨어서 목을 축이기 위해 물방울에 입을 대고 있을 때도 함께 계셨어요.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다가 이 세상 떠나는 날에도 내 곁에 계실 영원한 친구예요.”
지금 중국의 가정교회는 친구처럼 다가오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원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 장 선교사는 중국선교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기본적인 사항도 지적했다. 가장 첫 번째는 그곳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점이다. 외면적으로는 시장개방을 했지만 중국은 여전히 탁아소에서부터 사회주의 이념교육시간을 갖는 철저한 사회주의 국가다. 마르크스주의와 모택동 사상을 견지하며 공산당의 일당 독재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또한 선교 이전에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들의 자문을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장 선교사는 중국가정교회를 한 목소리로 결집하는 복음적 지도자인 ‘린씨엔까오’ 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중국정부가 두려워할 정도로 중국가정교회 전체를 한목소리로 아우를 수 있는 지도자란 것이다. 서양의 선교사들은 대부분 자문을 받는 과정을 거치는 데 유독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곳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이라고 장 선교사는 지적했다.
장 선교사의 중국선교와 관련한 이야기는 중국선교공동체 카페에서 더 볼 수 있다. http://cafe.naver.com/bethanyfellowship.cafe
다음은 장 선교사가 간증을 하며 부른
중국가정교회의 한 자매가 지은 찬양의 가사다.
주님, 당신은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친구요,
나의 가장 사랑하는 동반자시니이다
나의 마음이 매일 주를 사모하며,
날마다 주의 얼굴 뵙기를 갈망하나이다
내 인생 매 순간마다, 내 인생 매 시절마다
주의 손으로 나를 이끄사 주의 곁으로 다가가게 하시고
나의 갈 길을 가르치시사 사망에 빠지지 않게 하시니
주의 사랑 어찌 그리 지극하신지
나의 마음이 놀라지 않을 수 없나이다
주가 계시니 내가 무엇을 더 바라리이까
나의 마음이 주와 더불어 하나가 되었나오니
나는 이미 주님만 따르기로 맹세하였고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