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신천지 이단을 주의하라는 정통교회의 외침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이단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그 결과는 신천지의 급성장이 말해줍니다. 2000년 이후부터는 매년 1만명씩 늘었습니다. 2010년 이후에도 성장이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때로 1만명, 때로는 2만명이 늘어 현재 17만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신천지의 무서운 급성장. 그들이 진리여서일까요? 신천지는 자신들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런 급성장을 이룬다고 자위 중입니다. 예를 들어 사기꾼이 늘어난다면 그건 그들이 진실하기 때문일까요? 신천지처럼 사기포교를 하는 부도덕한 집단이 느는 것은 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건 단지 병리현상일 뿐이지요. 그래도 그들이 ‘이단’이다는 규정적 차원의 대처뿐만 아니라 그들이 왜 늘어나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모색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대처, 그래서 결과적으로 신천지로 인해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전도가 안된다는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신천지의 급성장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들의 열정적인 포교, 그리고 포교대상에 대한 치밀하고 철저한 분석과 연구(그들은 포교를 위해 많은 공부를 하고 전략을 짭니다)가 그것입니다. 사영리/ 전도폭발이라는 짜여진 콘텐츠로 접근하는 우리식 관계전도에 비하면 그들의 포교전략은 사기포교라는 점을 제외하면 매우 탄력있고 융통성 있는 요소도 있습니다.
신현욱 목사의 진단을 시리즈물로 다뤄봤습니다. 신현욱 목사와의 인터뷰는 2016년 3월에 진행됐습니다. 신 목사의 인터뷰 내용을 기자의 글이 아닌 신 목사의 주장 자체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시간이 흘렀지만 독자들에게 신천지의 급성장과 관련 많은 생각 거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편집자주]
1980년대, “계시록 알아야 구원!” 무데뽀 포교
정윤석 기자(정): 오늘 대화의 주제는 왜 신천지가 급성장하고 있느냐 입니다. 이 부분을 진단을 하고 싶어요. 신천지의 성장을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로 나눠 각각 그들의 포교 컨셉트와 성장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짚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현욱 목사(신): 제가 1986년에 신천지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당시 본부가 경기도 안양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출석했지요. 초대 청년회장을 해서 포교활동을 우리 청년부에서 전체적으로 주도를 했어요.
정: 그 당시에 몇 명 정도 모였나요?
신: 그때 한 300명 정도였어요.
정: 본부만이었나요?
신: 본부에 한 300명 정도. 그리고 전국 지교회 다 합쳐봐야 몇 백 명. 다 합쳐봐야 천 명이 안 됐을 때였죠. 초창기에 청년들이 전국 투어하면서 포교활동을 했을 때는 같이 다닌 사람들이 십여 명이 안 됐어요. 그때는 포교 방법이 단순했어요. 매주 목요일마다 이만희 총회장이 직강하는 계시록 집회가 있었어요. 그때 사람들 데리고 오는 게 포교방법의 전부였어요.
정: 단지 들으러 와라!
신: 그렇죠. 사람들이 지인들을 직접 데리고 오는 거예요. 알음알음 소문을 통해서도 왔어요. 이만희 총회장의 강의 내용은 단순했어요. 처음부터 “이 시대의 사명자를 만나야 된다”, “계시록 모르면 천국 못 간다”고 하고···. 그러니 그게 전도가 되겠어요. 그때 비유풀이니 이런 과정들이 없었어요. 그냥 바로 그냥 요한계시록 직강으로 가니까 전도가 될 리가 없었죠. 또 하나는 전국 집회를 했어요. 대구를 중심으로 대전, 광주, 부산, 대구 이렇게 전국 순회 집회를 했어요. 봉고차에 우리 청년들 7~8명 데리고 다니면서 그 지역에 가서 일주일간을 포교를 하는 거예요. 집회 한 주 전에. 한 주 전에 일주일간 우리가 활동을 하고 옮기면 이만희 총회장이 와서 그곳에서 집회를 하고. 우리는 또 활동을 하고 옮기면 그 다음에 이제 거기에 와서 이만희 총회장이 집회를 하고. 이런 식이었죠. 집회하는 방식이 똑같았죠.
포스터에는 이만희 총회장을 향해 아예 “약속한 사자, 대언의 사자” 이렇게 해놓기도 했어요. 때론 이충진 목사라고 소개하기도 했어요. 포교하는 방법에는 전략이라는 게 없었어요. 봉고차 타고 다니면서 핸드 마이크, 메가폰 이런 거 들고 “요한계시록 모르면 천국 못 갑니다! 계시록 집회가 열립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참 그때는 용감했던 거 같아. 한 마디로 무식한 거죠. 무데뽀.
노상에 <계시록의 진상>, <신탄> 이런 책을 펴놓고 팔면서 집회 전단지를 나눠줬어요. 그때는 감추고 속이고 사기치고 이런 게 아니었어요. 그냥 막 다 드러내놓고. 그러니 누가 오나요. 신도들은 고생만 한 거지. 포스터 수천 장, 또 전단지 수만 장을 그 몇 명이서 정말 그때가 내 기억으로는 가장 고생을 했던 기억이 바로 그때 전국 집회 할 때였어요.
대도시를 발로 직접 뛰어보니 부산 같은 경우는 정말 힘들었어요. 산이 많고, 지대도 넓고, 그걸 다 발로 다니면서 다 포스터를 붙였어요. 그 당시에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오공본드라는 게 있어요. 통에다가, 이런 들통에다가 풀을 넣고 오공본드를 섞어 가지고 그걸 붓을 들고 전봇대에 일일이 붙이고 다녔어요.
정: 몇 시 간 정도 하신 거예요?
신 : 뭐 아침부터 하루 종일 했어요. 하루 종일. 때론 새벽 2시, 3시까지. 그리고 전단지 수만 장. 많은 사람이 하면 힘이 덜 드는데, 그땐 사람이 없을 때니까. 우리 본부에서 내려간 팀, 그리고 거기 현지에 있는 청년들 몇 명, 집사들. 10여 명씩! 많지 않았죠. 그때 전국 집회를 하면서 했지만 결론은, 고생만 하고 거의 전도가 안 됐다는 거예요. 시끄럽게 하고 다니면 그 지역이 막 떠들썩했을 거 아니에요. 일주일 동안을 전단지, 포스터, 노방 막 이렇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시끄럽게 떠들썩 하게 하긴 하는데 막상 사람은 안 오는 거야. 지금 생각하니까 그걸 보고 누가 오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전도가 그냥 계획도 없고 그냥 노골적으로, 아주 직접적으로 전략이 없었을 때예요. 그렇게 1980년대는 그냥 보냈다고 봐야 해요.
정: 천 명 선에서 큰 변동 없이 80년대가 넘어가는군요.
신: 정통교회 교인들은 오지 않는 상황에서 1987년에는 이만희와 함께 두 증인이라고 하던 홍종효 씨가 조직을 이탈하면서 또 사람들이 줄어들어요. 그러다 1988년도에 신천지의 종말론이 불발하면서 또 사람들이 대거 이탈을 하는 사태가 벌어져요. 본부에선 종말론에 대한 파장이 컸어요. 본부에서는 ‘때·시기’에 대한 기대가 아주 강했으니까요. 1988년에는 또 한 무리가 떨어져서 영생교 조희성 쪽으로 가는 무리들이 또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크게 늘지를 않고 거의 답보 상태였던 게 1980년대라고 할 수 있어요.
1990년, 무료성경신학원···신천지의 여명기
신현욱 목사: 눈에 확 띄는 성장을 못하다가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게 바로 무료성경신학원입니다. 1990년 6월이었어요. 서울 사당동 방배 경찰서 옆에 무료성경신학원이 처음 생겼어요. 처음 명칭이 무료기독교신학원이었어요. 이걸 오픈하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이 된 거죠.
정윤석 기자 : 이게 왜 전환점이 됐나요?
신: 그 당시에 이단단체인 김모 씨의 S교회에 부목사로 있던 J목사라는 사람이 신천지로 넘어오게 됐어요. 근데 J가 있던 이단단체에는 벌써 ‘실로신학원’이란 이름으로 신학원이 운영이 되고 있었거든요. J가 들어오면서 실로신학원을 벤치마킹해서 만든 게 신천지 무료성경신학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J가 무료기독교신학원의 초대 신학원 원장이 된 거죠. J의 이력을 홍보할 때 많이 써먹었어요. 3개 학교에서 신학을 했다. 근데 지금 생각하니까 대부분 다 그게 그냥 군소신학이었던 거죠. 제대로 신학을 한 게 아니었죠. 그런데 뭐 무슨 신학, 무슨 신학, 무슨 신학 하면서 “3개 신학을 한 박사가 왔다”며 그분을 주로 원장 타이틀로 홍보를 하고 전단지를 뿌리기 시작한 거예요.
J가 초대 원장이 되고. B강사, L강사가 초등 강의를 하고, 제가 중등 강의를 했어요. 그런데 이게 당시 성경에 대해 알고 싶어하던 성도들의 필요와 맞아떨어진 거 같아요. 그때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국민일보에 광고지를 끼워서, 지금은 이단으로 규정됐으니 할 수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시기에 국민일보 일간지 지국마다 전단지를 제작해서 광고지를 대규모로 뿌리게 된 거예요. “무료성경신학원, 초·중·고등 6개월이면 성경통달”이렇게 해서 전단지를 만들어서 돌렸어요. 특히 신학원은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해야 했으니까 가장 활용하기 좋은 게 국민일보였어요. 그래서 국민일보 지국에 삽지를 넣은 것이 효과가 컸고, 그러다 보니까 1990년대 순복음교회 교인들이 많이 오게 된 계기가 됐어요.
정: 어느 정도로 사람이 몰렸나요?
신: 두 달에 한 번씩 개강을 했는데 한 번 개강하면 100명 이상씩 왔어요.
정: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었나요?
신: 그렇죠, 다.
정: 지금은 센터에 반수 이상은 바람잡이들이잖아요?
신: 그때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냥 다. 근데 장소가 좁았기 때문에 거의 자리가 꽉 찼어요. 그런 식으로 한 7~8년 동안은 계속 성장을 했어요. 그래서 신학원 1기, 2기, 3기 수료생을 냈고 신학원도 전국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어요. 서울에 1990년에 처음으로 사당동 무료성경신학원을 시작했고 1992년에 서울에 구의 신학원, 불광 신학원, 또 인천, 전남 광주 등 전국적으로 세워지는데 1년에 한 20개씩 세워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무료성경신학원이 거름 장치 역할을 했어요. 1980년대에는 바로 신천지로 들어오도록 했잖아요. 그러니까 안되겠다, 필터링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온 게 성경공부 과정인 거예요. 이건 어떻게 보면 다른 이단과의 차이가 바로 그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이게 신천지의 어떤 지금 외적 성장의 가장 핵심요인은 바로 마케팅 전략의 성공이라고 봐요. 그 마케팅 전략의 핵심이 바로 신학원 센터를 운영한다는 거죠. 다른 이단들의 경우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이런 전략이 저는 가장 성공요인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그게 전국적으로 막 세워지면서 어쨌든 1980년대에 천 명이었다면 1990년대에 만 명을 모았으니까요.
정: 열 배 성장을 했네요.
신: 그렇죠. 그래서 신학원이 그 당시에 한 40개 이상, 한 50개까지 신학원이 운영이 됐어요.
정: 90년 6월 한 개에서 시작해 1990년대 말이 되면 40~50개로 대폭 늘었군요.
신: 50개까지 늘었어요. 그리고 신천지 교회로 들어가는 관문이 신학원이 되니까 그 관문을 통해서 사람들을 걸러 가니까 숫자도 늘어나지만 어떤 효과가 또 있냐면, 이미 교육을 다 시켰어, 교리로 이미 세뇌가 된 그런 사람들을 교회에 들여오니까 교회에서의 탈락율도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죠. 충성스럽게 세뇌된 사람들의 헌신을 바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거예요.
2000년, 복음방과 모략 포교의 등장
신: 1980년대에는 신천지교회로 입교했다고 해도 왔다 갔다 변동이 많았는데, 그런데 이제 적어도 신학원이라는 6개월 과정을 통해서 들어온 사람들이니까 교리적으로도 무장이 된 상태고 그러니까 교회가 점차 안정이 되게 됐죠. 그리고 지역별 열두 지파가 자리도 잡아가게 됐어요. 그런데 1990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면서 부득이하게 포교전략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돼요. 무료성경신학원이 한계에 부딪힌 이유가 뭐냐하면, ‘무료성경신학원=신천지’ 이런 등식이 성립된 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입소문이 나면서부터 수강생 모집이 잘 안되기 시작했어요. 무료성경신학원으로 포교하는 데 한계가 온 거예요. 그게 어디냐, 전라도 지역 같은 경우에. 그런 데는 빨리 성장을 한 반면에 소문도 빨리 나게 된 거죠. 그러다 보니까 그쪽에서 먼저 돌파구를 찾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전라도가 그 당시에는 다 베드로 지파였는데 순천에 K라는 강사가 있었어요. 순천 지역에서 소위 신학원보다도 먼저 신학원 오기 전에 뭔가 또 거름 장치가 또 있으면 좋겠다. 소위 이제 복음방이라고 하는 것이죠. 복음방이라고 하는 개념이 도입이 된 거죠.
그게 1990년대 후반쯤? 후반 가면서 새로운 타개책이 필요했던 거예요. 뭔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과 함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게 복음방과 함께 바로 소위 말하는 모략전도가 등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모략전도! 그 전에도 “무료성경신학원은 신천지가 아닙니다”라고는 했지만 처음부터, 거짓으로 위장을 하고 지금처럼은 안 했거든. 그런데 다양하고 계획적인 거짓말, 속임수 전략이 등장했는데 그게 소위 대박이 난 거예요. 순천 지역이. 그래서 지금도 단일 지역으로 보면 순천이 다른 지역보다 신천지 교인의 수가 많을 거예요.
복음방은 이제 센터 들어가기 전에, 옛날로 말하면 신학원입니다. 센터라는 건 2000년 중반에 넘어가서 제가 나온 다음에 센터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 그전에는 그냥 다 신학원이었어요. 신학원(센터)에 신천지 성경공부 시키려고 데려갔는데 공부하다가 떨어져버리니까 장소가 오픈된다 이 말이에요. 어렵게 장소를 구해서, 임대해서, 인테리어까지 다 하면 돈이 적어도 몇 천만 원에서 많게는 1억씩 투자가 되는데 보안 유지가 안되는 거죠. 사람이 왔다가 “어, 여기 신천지 아냐?” 하고 떨어져버리니까 결국 소문이 나면서, 타격을 받은 거예요. 그렇다고 그 장소를 바로 그냥 또 쉽게 옮길 수도 없고. 이러다 보니까 “안되겠다. 신학원으로 바로 사람을 데려가지 탈락률이 많고 장소가 너무 일찍 오픈된다. 한번 걸러서 신학원으로 데려가야겠다.” 그러니까 더 교묘해진 거죠. 그리고 더 구체적이고 좀 더 디테일해진 거죠. 속임수가.
모략전도를 도입한 순천이 너무 잘 되니까, 그걸 지재섭 베드로 지파장이 “그 방법이 뭐냐”고 알아보고는 “그걸 베드로 전역에 확산시켜라”고 지시했어요. 그래서 이제 베드로 지파에서 전국적으로, 베드로 지파에서 다 그걸 공유하게 되고 너무 잘 되니까 거기 있던 당시 강사였던 장방식 지파장(현재는 대전 맛디아 지파)이 그 방법을 대전 맛디아, 충청도 맛디아에 적용을 해서 또 맛디아 지파가 성장한 거예요. 그게 이제 서울·경기로 오면서 신천지 전체에 소위 모략전도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확산이 된 거죠.
그리고 모략전도 중에 정통 교회 안으로 신천지 신도를 보내 포교를 하는 추수밭 전도 전략이 있었어요. 추수밭 전도 전략도 호남에서 시작해서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면서 포교전략이 다양화되고 구체화되고, 교묘히, 그리고 간교하게 된 거죠. 이러다 보니까 2000년대 전까지만 해도 요한계시록 세미나, 무료성경신학원 이런 정도로 신천지를 인식하고 있을 때였으니까, 이쪽이 너무 간교하게 전략이 수정되니까 정통교회의 대처는 따라오질 못한 거죠.
그러면서 2000년 들어서면서 전국적으로 추수밭 전략이 확산되고 이쪽은 더 교묘화 되면서 폭발적인 성장의 계기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1980년대 10년 동안에, 기간으로는 10년이 아니에요. 80년 3월 14일부터 시작했으니까. 천 명이던 게 1990년대에 만 명이 되고, 2000년대에 1년에 만 명씩 들어오는 계기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소위 모략전도라는 게 제대로 먹힌 거죠. 전략 전술에서 결국 성공을 한 거예요. 그런 면에서 10년 동안 만 명이었는데 2000년대 들어서 평균 1년에 만 명씩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2010년에 10만 명이 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어쨌든 마케팅 전략의 성공이다. 제가 볼 때는. 뭐 교리의 문제이기 전에 전쟁으로 말하면 전략전술을 잘 세운 거고, 반면에 우리는 상대적으로 우리 편에서는, 정통교회 입장에서는 무방비 상태였고, 그리고 전혀 감을 잡지 못했고. 그리고 이런 것들이 구체적으로 오픈돼서 저쪽에서 대응하는, 또 대처하는 이런 사역도 없었고, 많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 전통교회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에 무방비 상태에서 그냥 무관심하고 그런 사이에 신천지는 급성장을 하는 계기가 됐죠.
충청·호남 지역이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복음방·모략전도를 도입했다면 서울·경기에는 그 포교전략이 2006년경부터 올라와요. 그때부터 저희가 추수밭 훈련을 본격화했으니까. 베드로 지파나 충청도 맛디아 쪽에는 이미 그게 어느 정도 무르익은 상태였지요. 그래서 2007년이 되면 훈련된 추수꾼들이 각 교회에 파송하는 시기였어요. 2007년이. 그러니까 추수꾼이, 추수밭 전도 전략이 서울·경기에서는 그렇게 크게 어떻게 보면 꽃을 피웠다고는 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꽃을 피우는 해에 2006년 연말에 교회에 파송된 신천지 추수꾼 교적부가 공개되고, 그러는 바람에 MBC PD수첩에 나가고 뭐 이러는 바람에 그런 분위기가 깨져버렸죠. 오히려 들어갔던 사람들이 다 철수할 수밖에 없는, 4만 5천 명 이상의 신도들 명단이 그대로 공개가 되면서 이거는 들어가는 게 아니고 오히려 빼내야 될 그런 상황이 되니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되면서 그런 면에서는 참 다행스럽게 생각을 해요. 만일 그 사건이 터지지 않았으면 그 사람들이 거의 2006년에 준비해서 2007년에 서울·경기에 추수꾼들이 다 들어가고 전국적으로 추수꾼들이 다 자유롭게 들어가면서 교회가 같이 힘들었을 수 있고, 신천지로서는 어떻게 보면 좋은 계기를, 기회를 놓쳐버린 결과가 된 거죠.
2007년 5월 8일 날 MBC PD수첩이 터지면서 비로소 “저 신천지 뭐야?” 이렇게 표면화가 됐지, 그 전만 해도 몇 만 명이 신천지에 들어와서도 완전히 교묘하게 빠져나가니까 그렇게 크게 신천지로 인한 피해를 체감하지 못했던 시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다가 이제 제가 나오고, 2007년 PD수첩 터지고 이러면서 조금 경계를 하고, 분위기가 좀 신천지에 대한 분위기가 환기가 되는 계기가 됐지만 그래도 대처가 미흡했죠. 그러는 사이에 신천지는 정말 급성장을 하는 그런 계기가 됐죠.
“영적 안보, 제자훈련·양육·헌신·봉사보다 중요”
정: 목사님, 2007년도 이후에 한국교회도 신천지 대처 활동들을 활발하게 시작해야겠다는 경각심을 갖게 된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속적으로 늘어날 거라고는 혹시 예상하셨나요?
신: 네 예상을 했죠. 계속 이렇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금 교회의 모습들, 교계에 제가 와보니까 어떻게 보면 저는 그것을 영적인, 이단과의 영전전쟁에서의 이건 영적 안보문제 아닙니까. 이 안보문제는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것 아닙니까. 성장이니, 제자훈련, 교육, 양육, 충성, 헌신, 봉사···. 이런 것보다도 어떻게 보면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 진리 안에 머물러 있을 때 모든 게 의미가 있는 거지, 나라 잃으면 아무것도 아니듯이, 교계가 전체적으로 근데 안보 불감증에 빠져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문제가 그냥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거예요. 누가 신천지로 미혹됐다! 그러면 “그 사람이 잘못해서 넘어간 거야, 오죽 신앙을 제대로 못했으면 빠졌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가지, 이 문제를 교회 차원, 교계 차원, 이런 차원에서 공동 대처하는 게 적다 보니까 ‘아, 이렇게 가다가는 피해가 클 수밖에 없겠구나!’ 제가 처음에 기대했을 때는 똘똘 뭉쳐서, 저쪽이 그러하듯이 저쪽은 전국에 교회가 50개 산재해 있어도 똘똘 뭉쳐서 한 교회 같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도 모든 교회들이 연합해서 연합기구도 있을 거고, 그래서 똘똘 뭉쳐서 공동 대처를 하면 신천지는 몇 만 명밖에 안 되니까, 대처가 될 줄 알았어요. 한국교회가 덩치가 적습니까, 숫자가 적습니까, 저들보다 재정적으로 적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면에서 우리가 저쪽과 비교해서 열세일 게 없다, 그런 기대를 했지만 제가 겪어보니까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거는 효과적인 대응이란 게 어렵겠구나!” 그러면서 이제 제가 어떻게 보면 좌절감을 느끼게 됐죠. 그러면서 이제 이단사역하는 사람들이 다 비슷하지만, 다 그런 느낌을 갖죠. “아, 그냥 아무리 말해도 안 되겠다. 겪어봐야 알겠구나!” 그러니까 다 피해를 경험하면서 배워가야 하는 거 같아요. 피해를 경험하면서 배우지, 미리 배우질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예방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피해가 계속 클 수밖에 없고, 그리고는 그냥 자조 섞인 얘기가 나오는 거죠. “에이, 당해봐야 알지”, “겪어봐야 알지”, “그래, 우리가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고···” 이런 식으로 자포자기 같이 되더라고요.
그 반면에 신천지는 아주 독기를 품고, 우리하고 너무 대조적이잖아요. 제가 볼 때는 이게 남북이 대치된 상황하고 너무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안보 상황에 대한 서로 분위기가 너무 다르잖아요. 남북이. 우리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저쪽에서 뭐라고 해도 우리는 별로 체감이 안 되잖아. 근데 저쪽은 그냥 독기를 품고 그냥 호시탐탐 쳐내려올 듯이 이런 분위기란 말이죠. 이런 분위기에서는 우리가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러니까 1년에 2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거예요. 결과가 말해주는 거예요. 전쟁의 결과가 지금 어쨌든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의 결과가. 우리 상담소에서 저쪽에 있는 사람을 빼내는 수가 다해도 천 명을 못 빼내는데 1년에. 결국 2만 명은 포로로 잡혀가고 우리는 천 명을 빼낸다 하더라도 이거는 이 수적인 싸움에서 결론은 뭐냐면, 우리가 지금 철저히 완패를 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거죠. 그게 바로 안보 의식의 결여, 안보 의식이 부족하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만희 총회장이 살아 있는 한, 올해 86세지만 앞으로 2년만 더 살아도 신천지는 20만에 육박할 거다. 지금 16만 1천 800명 정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1년에 거의 2만 명씩 넘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추세를 쉽게 누그러뜨릴 수 없을 거다. 뭔가 획기적인 대책이 세워지고, 각성하는 계기가 만들어져야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결국 저쪽은 끊임없이, 전쟁으로 말하면 전략을 세우고 전술을 만들고 해서 계속 진화해온 반면 우리는 전혀 거기에 대해서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늘 뒷북을 치는 거예요. 뒷북을 치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도 아닌, 소 잃고도 외양간을 계속 못 고치는 이런 거예요. 사후약방문도 아니에요. 사후에 약방문도 안 해.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런 이단 문제에 대해서 너무 우리가 방치해두고 있지 않았나. 방치했다고 밖에는, 피해자들이 2만 명이 빠져나가는데 그 책임을 누구한테 물을 것인가. 빠진 사람한테만 개인적으로 각자 “네 신앙은 네가 책임져” 이런 식으로만 그냥 떠넘기기에는 너무 안타깝지 않냐는 거예요. 양들이 지금 2만 마리가 이리에게 늑탈 당하는데 그러면 목자는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나올 거 아니예요. 목자가 왜 필요하냐 이거에요. 양들을 지키고, 교회가 양들의 울타리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제대로 울타리를 쳤더라면, 또 제대로 목자가 양들을 가시권에 두고 계속 지키고 보호했더라면, 또 잘 무장을 시켜서 그들과 영적으로 싸울 수 있는 힘을 길러줬더라면 그런 것들은 예방할 수 있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있는 거죠[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