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휫필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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휫필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6.05.27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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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역사위해 영성과 경건을 훈련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

1736년 6월 20일 영국의 한 교회. 목사안수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21살의 젊은 청년이 회중 앞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성도들에게 강력한 불길이 임했다. 회중들 가운데 15명의 성도는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경험을 했는데, 감명 받은 것을 넘어 열광하는 ‘미친 사람들’처럼 보였다.

 

이 일화는 18세기 이신론(Deism)이 성행하던 시절 영국과 미국을 넘나들며 ‘강력한 성령의 역사의 통로가 된 설교자’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의 첫 공적 설교 때의 일이다. 휫필드는 설교자로서 1770년 55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34년 동안 사역하며 18,000회 설교를 했으며, 18세기 영국 부흥 운동과 미국의 대각성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2016년 5월 6일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이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진행한 ‘영성포럼’에서 김영선(협성대, 조직신학) 교수는 ‘조지 휫필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한 고찰’이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김 교수는 논문에서 조지 휫필드의 사역을 돌아봄으로써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모든 사역의 열쇠는 성령님의 능력
‘조지 휫필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한 고찰’에서 김영선 교수는 “휫필드는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성령 충만한 전도자”라고 했다. 이어 김 교수는 “휫필드 설교의 특징은 성령의 설교였다”며 “영국과 미국에서는 그가 설교하는 곳마다 회개와 부흥의 역사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휫필드는 그의 모든 사역을 통틀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늘 충만해야 함을 보여주었다.

휫필드는 런던 탑에서의 설교를 시작으로 브리스톨, 런던, 스코틀랜드를 돌아다니며 설교를 했다. 최초로 야외설교를 했던 브리스톨 집회에서는 2백 명에서 시작해 1만 여명이 넘는 청중들이 모였고, 술 취함과 방탕함에 살던 킹스우드의 광부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영국 전역을 뜨겁게 태우는 시작이었다. 영국의 메이페어(May Fair)에서는 8만 명이 모인 집회에서 마이크 없이 설교한 일이 있었다, 휫필드는 “나 자신은 약했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강하게 해주셔서 아주 크게 말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어려움 없이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보스톤, 조지아, 필라델피아 등에서 휫필드의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다. 사람들은 성령에 감동되어 눈물로 회개하고, 회심했다. 종교에 무관심하던 조지아의 주민들이 경건해지고, 필라델피아 주민들은 언행이 겸손해지고 욕심을 버리게 되었다. 또한 흑인노예들의 자아의식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김 교수는 “노샘프턴에서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수많은 목사들의 뜻을 모아 미국에서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을 정신적으로 주도하게 된 것은 휘필드 설교의 영향”이라고 했다,

 

핍박에도 침묵... 사역자로서의 검소함
김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휫필드의 삶은 사역자로서의 검소함을 보여주었다. 휫필드의 삶이 성령의 역사만큼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국교회 성직자들에게 설교활동을 방해받고, 고아원을 설립한다는 명분으로 돈을 모았다는 모함을 당했다. 또한 그는 생활이 매우 궁핍했는데 런던에서의 생활고 때문에 아들 요한을 병마로 잃어야 했다. 필라델피아 사람들이 6개월 동안만 설교해주면 8백 파운드를 주겠다고 제의하였으나 그는 진정한 안식에 이르기까지 안주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
마지막으로 휫필드는 오늘 날 모든 사역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 드러내려는 영성을 보여줬다. 감리교 안에서 그는 웨슬리와 갈등을 겪었다. 휫필드는 선택된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칼빈의 예정 교리를 따르고 있었고, 웨슬리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를 따르고 있었다. 게다가 초기 감리교는 휫필드의 ‘칼빈주의 감리교 협회’와 ‘웨슬리의 감리교’가 양립했기 때문에 미묘한 경쟁심이 있었다.

김 교수는 이러한 배경에 있었던 휫필드를 ‘교파를 초월한 사역자’라고 표현했다. 그는 칼빈주의 감리교의 수장(首長) 지위를 포기했고, 존 웨슬리를 메소디스트 운동(Methodist Movement)의 수장으로 세웠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교단이나 단체 보다는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감리교와 칼빈주의 감리교가 연합해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끝으로 김 교수는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날 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역사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조지 휫필드의 성령사역에서 찾아보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성령이 오늘도 역사하실 수 있도록 휫필드와 같이 우리의 영성과 경건을 훈련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마무리 했다.

다음은 김영선 교수가 발표한 논문이다(각주 제거). 주석이 필요한 분은 다운로드해서 보시면 된다(다운로드 받는 곳). 

조지 휫필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한 고찰
김영선 교수(협성대, 조직신학)

Ⅰ. 휫필드의 간략한 생애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18세기 이신론(Deism)이 횡행하던 시대에 미국과 영국을 7번이나 넘나들며 영적 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글로스터(Cloucester)에서 태어난 휫필드는 18살이 되었을 때 옥스퍼드의 펨브로크 칼리지에 입학하여 학업을 비롯한 모든 일에 열정을 다하였다. 따라서 방탕한 친구들은 그를 유혹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는 찰스 웨슬리가 건네준 책, 헨리 스쿠갈(Henry Scougal)의 『인간의 영혼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1677)을 통해 참된 기독교 신앙이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임을 깨달았다. 또한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고 성찬에 참여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를 갈망하다가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것은 어떤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받게 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 순간 휫필드는 영혼의 평안함과 함께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휫필드는 하나님이 그분의 사역을 위해 자신을 부르셨다고 확신하고 1736년 6월 20일 21세의 나이에 목사 안수(deacon)를 받았다. 안수를 받은 후 세인트 메리 드 크립트교회(St. Mary de Crypt)에서 처음으로 공적인 설교를 할 때에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고 성령의 불길이 임하는 것을 감지했다. 예배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강렬하게 은혜를 받아 열광할 정도였다. 그 당시 벤손(Benson) 감독에게 보고된 내용은 15명이 휫필드의 설교를 통해서 미쳐버렸다는 것이다. 벤손 감독은 그 미친 것이 다음 주일까지 망각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하여 휫필드의 설교를 인정하였다.

성령을 따라 말씀을 증거하는 휫필드의 명성은 글로스터, 브리스톨, 런던, 스코틀랜드 그리고 그 이외의 여러 지역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휫필드는 설교자로서 34년 사역하는 동안 18,000회 설교를 했다. 그는 녹이 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기를 바라며 그의 마지막 삶의 순간까지 설교를 하였다. 휫필드는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설교를 하고 밤을 지낸 후 그 다음 날인 1770년 9월 30일에 55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Ⅱ. 영국에서의 성령의 역사

1. 목사 안수 후 런던 탑에서의 역사
휫필드는 런던 탑 예배당에서 목회를 하던 한 친구가 설교를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하여 런던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그의 설교가 진행되자 회중들은 진지하게 경청하였고, 마음에 뜨거운 감화를 받아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다. 그 이후 두 달간 런던 탑에서 사역을 하였는데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여 귀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감동을 받았다. 이후 그는 여러 곳에서 설교 초청을 받고 설교자로 나섰다. 그가 하는 설교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강대상으로 걸어 나갈 수 없을 정도였고, 교회의 공간이 비좁아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가야 했다.

2. 브리스톨에서의 역사
휫필드는 1737년 3월 브리스톨의 킹스우드에서 최초로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2백 명 정도 모였으나, 그 다음에는 2천 명 정도, 그 다음에는 1만 여명이 넘는 청중들이 모였다. 킹스우드의 광부들은 술 취함과 방탕 속에서만 살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휫필드의 설교를 듣고 죄를 깊이 뉘우치고 눈물을 흘렸다. 대학의 학장인 사무엘 데이비스(Samuel Davies)는 휫필드의 설교에는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다고 하였다.

브리스톨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영국 전역을 뜨겁게 태우는 예고편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여러 지역으로부터 설교 요청을 받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그가 거리를 걸어갈 때 ‘왕의 행렬’과 같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인사했다. 그것은 모두 그의 기이하고 놀라운 설교 때문이었다.

3. 런던에서의 역사
휫필드는 런던에 머물면서 낮에는 주로 무어필드(Moore fields) 공원에서 밤에는 주로 케닝턴 공원(Kennington Common)에서 집회를 하였다. 휫필드는 무어필즈에서 설교를 하였을 때 거의 3만 명이나 모인 사람들로 인해 설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였으나 사람들은 휫필드가 다치지 않도록 길을 비켜주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설교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서서 그의 설교를 경청하다가 한 목소리로 시편과 주기도문을 암송하였다.

케닝턴 공원에서 설교할 때도 약 3만 명의 사람들이 설교를 주의 깊게 듣고 큰 은혜를 받았다. 휫필드가 기록한 런던 사역의 일지는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녁 6시에 케닝턴에서 설교했는데 엄청나게 큰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임했다”(1739년, 5월3일). “모인 사람은 2만 명 정도였고 많은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5월 5일). “약 5만 명의 사람들이 모인 듯했고 80대의 마차가 왔다”(5월7일). “설교를 시작하자마자 비가 그치고 햇빛이 비쳤다. 그래서 설교 중에 그 역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5월 9일). “저녁에 6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설교했다...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내게 능력을 주셨다. 내가 설교하고 있는 동안에 시종일관 지속된 청중들의 진지함은 참으로 주목할 만했다.”(5월 13일). “집회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크게 녹아져서 세상에서 제일가는 냉소자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5월 27일). “저녁에는 하이드 팍(Hyde Park) 근처의 메이페어(May Fair)에서 설교했다. 거의 8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비록 나 자신은 약했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강하게 해주셔서 아주 크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어려움 없이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6월 1일).

휫필드가 런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설교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죄를 깨우쳤으며 많은 죄인들이 위로를 받았다. 이 같은 역사는 휫필드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8만 명이 모인 집회에서 마이크 시설도 없이 설교한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

4. 스코틀랜드에서의 역사
휫필드는 스코틀랜드의 여러 지역을 순방하면서 전도집회를 개최했는데 가장 기록적인 집회를 개최한 곳은 캠버슬랭(Cambuslang)에서였다.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통회의 눈물을 흘렸고, 회중들은 그날 밤, 그 들판에서 밤새도록 기도와 찬양을 하였다. 캠버스랭의 부흥 운동은 성령의 강한 역사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에게서 광적인 것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Ⅲ. 아메리카에서의 성령의 역사

1. 조지아에서의 사역
휫필드의 조지아에서의 설교 사역에 대한 식민대륙의 사무관 윌리엄 스텝헨스(William Stephens)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청중이 매일 불어나서 예배 장소가 너무 좁다. 마음을 사로잡는 강론으로 사람들을 계속 감동시켰다.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739년 휫필드의 조지아에서 설교 사역에 대한 평가가 있다. “우리 주민들의 태도에 곧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종교에 무관심하던 그들이 모두 점점 경건해졌다. 저녁때 거리를 걷노라면 골목골목의 모든 가정마다 찬양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2. 필라델피아에서의 사역
휫필드의 설교는 필라델피아 주민들의 생활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그들의 언행이 겸손해졌고 집집마다 찬송이 흘러 넘쳤다. 어떤 사람은 휫필드의 설교에 혹해서 호주머니에 있는 돈이 몽땅 털릴 것이 걱정되어 집회 참석 전에 집에서 미리 용돈까지 다 꺼내 놓고 갔다가 설교를 듣는 도중에 집으로 다시 와서 금궤 안에 있는 것까지 모두 바쳤다. 휫필드는 사람들 앞에 서기만 하면 불을 토해내듯 설교하였다. 이처럼 휫필드는 성령에 사로잡혀 설교하였다.
휫필드는 설교를 쉽게 함으로써 학식이 전혀 없는 흑인들에게도 영적인 진리를 전하였고 또한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는 노예를 돕고자 하였다. 그는 흑인 노예들의 비인간적인 참상을 고발하는 글을 썼다. 휫필드의 노예인권 운동은 노예들의 자아의식을 일깨웠다. 이런 영향으로 흑인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노래(흑인 영가)로 호소하고 승화시켰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대부분의 흑인영가들은 당시 휫필드의 설교를 들은 흑인들이 위로를 받은 후 그 내용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3. 보스톤에서의 사역
휫필드가 보스톤에서 매일 이른 아침에 집회할 때마다 눈물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회심을 몰랐던 보스톤 주변의 목회자들 가운데 20여명이 회개하였고, 많은 이들이 신앙상담과 기도를 청하여왔다. 1741년 겨울 동안 수 천 명의 회심자들이 등록하였다. 보스톤에서의 마지막 집회에 3만 명 이상이 모였는데 이 숫자는 당시 보스톤 인구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당시 지성의 요람이었던 하버드와 예일대 학생들까지도 휫필드의 설교를 듣고 변화되었다. 휫필드의 설교를 들은 100여 명의 학생 중 7명 만 아무 감동을 받지 못했을 정도로 거의 모든 학생들은 거듭난 것처럼 보였다.

4. 노샘프턴에서의 역사
휫필드가 보스톤을 떠나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사역하는 노샘프턴(Northampton)에서 설교할 때 에드워즈는 설교 시간 내내 울었다. 그는 휫필드가 강단 위에 섰을 때부터 그의 교회가 성령으로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휫필드도 집회에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것을 느꼈다. 사실 에드워드는 상당히 이성적인 사람이라 거의 눈물이 없는 사람인데, 휫필드의 설교에 눈물을 흘렸다. 에드워드는 1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휫필드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휫필드가 다시 영국으로 간 후 에드워드는 휫필드의 설교에 감동을 받은 수많은 목사들의 뜻을 모아 신대륙에서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을 정신적으로 주도하였다. 윌리엄 쿠퍼(William Cooper)는 휫필드가 이끈 영적 대각성 운동의 불길을 가리켜 “우리에게 사도 시대가 다시 임한 것 같다”고 까지 말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는 성령의 역사였다.

Ⅳ. 성령 사역의 고초와 박해
1. 사역에 대한 폭도들의 행패

휫필드의 공동체가 활기를 띠게 되자 국교회 성직자들은 휫필드에게 설교 장소를 제공하지 않았고 다른 곳에서 설교하는 것도 방해하였다. 찰스톤에 있는 성 빌립교회(St. Philip's Church)의 주교의 권리를 위임받은 가든(Garden)은 영국교회로부터 휫필드의 설교활동을 방해하라는 명령을 받고, 휫필드가 고아원을 설립한다는 명분으로 영국에서 많은 돈을 모았고, 신대륙에서도 그런 수법으로 많은 돈을 모았다는 등의 말로 휫필드를 공격하였다. 휫필드는 트집을 잡으려고 작정한 사람에게는 어떤 설명도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일체 대꾸하지 않았다.
휫필드를 비롯한 초기 감리교 지도자들은 폭도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역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폭도들은 집회소로 쳐들어와 설교를 방해하고, 회중들을 때리고 발로 차기도 하였고 여인들의 옷을 벗기고 강제로 추행하려고 하였다.

2. 사역에서의 경쟁과 양보
일반적으로 감리교회의 창시자를 존 웨슬리로 생각하지만 역사적인 실태에서 보면 감리교회로 발전하게 된 공동체를 처음으로 결성한 사람은 조지 휫필드였다. 왜냐하면 최초의 칼빈주의 감리교 협회(Calvinistic Methodist Association)는 웨슬리의 감리교 협회보다 18개월이나 빨리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1742년 9월 장막(Tabernacle)이란 곳에서 휫필드의 사상과 정신을 따르는 3천여 명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렸다. 1743년 말쯤에는 영국 내의 다양한 지역에 무려 60여 군데의 공동체가 세워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조직체를 통틀어 ‘휫필드의 감리교 공동체’(Whitefield’s Methodist Societies)라고 불렀다. 얼마쯤 지나서 휫필드는 호웰 해리스가 웨일즈에서 결성한 공동체와 자신이 결성한 공동체를 연합시켜 ‘칼빈주의 감리교 협회’라고 칭하였다. 휫필드는 이 모임의 종신 의장으로 지명되었다. 이로서 ‘휫필드의 감리교’와 ‘웨슬리의 감리교’가 양립하게 되었다.

웨슬리와 휫필드 사이에 미묘한 경쟁의식이 있었다. 휫필드는 아르미니안 감리교와 칼빈주의 감리교가 연합할 수 있다면 많은 난관이 극복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휫필드는 1750년 칼빈주의 감리교의 수장(首長)의 지위를 포기하고, 존 웨슬리를 메소디스트 운동(Methodist Movement)의 수장으로 세웠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만류하였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이들을 일축시켰다. “도대체 칼빈은 무엇이고 루터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인물들과 분당을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을 바라봅시다...우리는 그분만이 전파되도록 하십시다...나는 누가 제일 윗자리에 있는가에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내 자리를 압니다...그것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리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내 이름을 따르는 무리를 원치 않습니다.” 이로 인하여 오늘날 감리교의 지도자요 창시자는 휫필드가 아닌 웨슬리로 알려지게 되었다.

휫필드는 커다란 조직을 이끌만한 뛰어난 능력과 역량이 있었지만, 감리교 운동의 분열을 막고, 웨슬리를 감리교의 수장으로 추대하기 위해 수장 직을 포기한 것이다. 휫필드는 이미 웨슬리에게서 ‘첫째가 아니고서는 만족하지 않는’ 공명심을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싸움과 분열을 막기 위해서 그로 하여금 감리교 단일 수장이 되게 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자신의 이름이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지도자의 지위를 그만두었다. 설교자로서 자신의 이름은 땅에 묻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 드러내려는 휫필드의 영성이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3. 웨슬리와 예정론 교리 갈등
예정론에 대한 웨슬리의 비난으로 인해 휫필드는 한 때 이단자라는 낙인이 찍혀 실의에 빠진 적도 있었다. 휫필드의 신학 체계는 흔히 ‘칼빈주의’라고 불리지만 휫필드 자신은 이것을 “은혜의 교리”(The Doctrine of Grace)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했다. 은혜의 교리는 휫필드 신학의 틀을 형성하는 뼈대요, 그의 일상의 삶 속에서 고백되는 삶의 원리였다. 휫필드는 선택된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칼빈의 예정 교리를 따르고 있었고, 웨슬리는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를 따르고 있었다. 아르미니안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웨슬리는 예정론을 비판하였다. 웨슬리의 선택의 교리에 대한 입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편견을 갖게 하였다. 휫필드는 이로 인한 고충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웨슬리가 선택의 교리에 대하여 그처럼 끔찍한 색깔을 입혀놓은 탓에 그들은 나를 보려고도,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며...그들은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하나님께서 나를 망하게 하실 것이라고 협박하는 편지를 보내는 자들도 있다.”

Ⅴ. 성령 사역에 대한 평가와 과제

1.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설교가
휫필드는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성령 충만한 전도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설교하였다. 그가 설교할 때 성령이 임재하였다. 그의 설교를 들었던 청중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어떤 사람이 그의 설교를 출판하려고 원고를 부탁하자, 휫필드는 “당신이 설교와 함께 빛과 우레와 무지개를 인쇄할 수 있다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는 말로 그 부탁을 거절하였다. 설교의 내용은 옮길 수 있으나 진정한 설교는 종이에 옮길 수 없다는 것이다. 휫필드 설교의 특징은 성령의 설교였다. 백작부인의 집에서 설교할 무렵 당시 불가지론 철학자로 유명한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그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휫필드는 내가 이제까지 접해본 설교자 가운데 가장 능력있는 설교자 이며, 그의 설교는 30km를 걸어서 올만큼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휫필드의 설교를 높이 평가하였다.

2. 교파를 초월한 사역자
18세기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존 웨슬리를 꼽는다. 반면 휫필드는 웨슬리의 조력자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러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그가 조직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오직 복음 전파에 만족하고 교파나 조직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지 않았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연합이었다. 휫필드는 아메리카에서 칼빈주의 신앙을 견지하는 동역자들과 함께 사역했지만 웨슬리보다 더 연합적인 정신을 가지고 사역했다. 아놀드 달리모어가 말한바와 같이 휫필드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웨슬리보다 한 수 위에 있었다.

3. 사역자로서의 검소함과 가난
휫필드의 생활은 매우 궁핍하였다. 휫필드는 고아원을 모금한 돈을 착복했다는 비난에 대하여 “내게는 지갑 같은 것이 없다. 나는 가진 것을 모두 다른 이들에게 준다”고 하였다. 그가 놀위치(Norwich)에서 설교하는 동안 ‘예언자의 방’에서 지냈는데 불결하고 냄새나는 이부자리에 누워서 벼룩에게 물어뜯기기도 하였다. 그의 궁핍함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요한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런던에서의 생활고로 인하여 고향 글로스터(Gloucester)로 가는 도중 몸이 허약한 아들이 찬바람을 맞으며 시달렸다.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아들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아들 ‘요한’이 병고로 죽었을 때에도 휫필드는 전도 집회로 출타 중이었다. 휫필드는 가난 때문에 아들을 잃었다는 자책으로 심한 통증을 느꼈다. 세계적인 전도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흿필드의 살아가는 모습은 이러했다. 필라델피아 사람들도 그 곳에서 6개월 동안만 설교해주면 8백 파운드를 주겠다고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기 까지 그는 안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휫필드는 18세기 영국 부흥 운동과 아메리카의 대각성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휫필드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으며 하나님이 자신을 길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믿었다. 또한 성령이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며 그분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믿었다. 휫필드의 사역은 인간의 노력이나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날 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역사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조지 휫필드의 성령사역에서 찾아보게 된다. 성령은 오늘도 역사하신다. 성령이 오늘도 역사하실 수 있도록 휫필드와 같이 우리의 영성과 경건을 훈련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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