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침례교회(대표 방수현 목사)가 2015년 10월 23일~25일 교회 설립 20주년을 맞아 ‘감사’를 주제로 부흥회를 열었다. 강사는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 23일 금), 박은조 목사(은혜샘물교회, 24일 토), 유해근 목사(나섬공동체, 25일 주일)였다. 20주년 부흥회에서 첫날 강사로 나서 지형은 목사는 ‘채우시는 하나님’을 제목으로 설교했다.
지 목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인식되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그는 “뺏어가는 분인가, 채우시는 분인가?”라고 묻고는 “성도들이 ‘하나님은 채우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내가 가진 좋은 것을 뺏어가시는 분’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 목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채우셨는지 설명했다.
지 목사는 고 1때 교회를 처음 다녔고 고 2때 ‘은혜’를 받은 후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집안의 맏아들로 기대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부모님은 신학대 가는 것을 극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지 목사의 결심이 워낙 굳건 해 결국 신학대를 진학했다. 이 때 지목사는 인생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심하며 인생의 마스터 플랜을 다 짜놓았다고 한다. 몇 년도에 군대를 가고, 몇 년도에는 유학을 가고 등등. 그러나 학내 데모에 연루돼 학변자(특수학적 변동자의 준말로 1970년 80년대에 운동권 학생들이 시위하다 잡히면 바로 군대로 끌려가서 학적이 재학생에서 휴학 신세가 되면서 붙여진 이름)가 됐고 군대로 끌려가게 된다. 지 목사의 인생 계획은 한순간에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이 때 지 목사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나의 소중한 것을 다 뺏어 가 버리셨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지 목사의 마음을 바꾼 건 로마서 말씀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으며 지 목사는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지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코드’를 소개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 받은 성경과 장절을 붙여서 만든 코드다. 예를 들면 빌 4.19는 빌립보서 4:19(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을 코드화해서 부른 것이다. 말씀 암송의 유익에 대해 지 목사는 어디서나 생각하고 기억하며 되새길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 말씀을 암송하며 지 목사는 채우시는 하나님을 간증하고 감사하는 인생을 살 것을 성도들에게 주문했다.
계속된 원천교회의 감사 부흥회에서 24일은 박은조 목사가 ‘교회가 세상의 희망입니다’(마 16:13~20), 25일은 유해근 목사가 '이제 감사할 수 있습니다.'(고후 12:9~10)를 주제로 설교했다. 추수감사절 헌금은 발달장애인을 위한 복지관인 브솔복지재단 셀프센터 건립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된다.
다음은 10월 23일 설교한 지형은 목사의 설교를 요약한 것이다.
본문: 빌 4:19-20
원천교회는 한국교회에 대안이 될 것이라 기대받는 교회다. 원천침례교회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잘 세워가길 바란다. 질문하나 하고 싶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생각하는 걸 본다. 하나님께서 ‘내가 갖고 있는 걸 자꾸 달라고 하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내걸 뺏어 가시는 분이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앙인들이 직접 ‘하나님은 내 걸 뺏어 가는 분이에요’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명시적으로는 그러지 않지만 마음 속에서는 그런 생각을 품는 경우가 많다.
마음 깊이 생각해 보자. 주시는 분인가, 뺏어 가시는 분인가? 채우시는 분인가, 내것을 줄어들게 하시는 분인가? 성경적으로 하라는 게 아니다. 당연히 채우시는 분이다. 그게 아니라 여러분 속 마음을 살펴보라는 이야기다. 하나님은 내게 어떤 분인가? 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가진 어떤 것을 가져가거나 달라고 하거나 줄어들게 하고, -시키는 분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꽤 많다.
내 체험을 말해보겠다. 벌써 30여 년전 일이다. 20대 초반의 일이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집안이었다. 2남 2녀다. 부모님도 예수를 믿지 않고 한국동란 때 월남하신 평범한 가정이었다. 누님이 한분 있었지만 사실상 내가 장남이었다. 제 연배, 장남하면 가정에서 의식, 대우가 달랐다. 부담을 안고 살았다. 집안이 넉넉지 않으니 돈 많이 벌어야 겠다. 부모님 고생하시니 내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1 때 교회를 다녔고 고2때 은혜를 크게 받았다. 그 때 신학공부하자, 목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반대가 당연했다. 부모님은 예수도 믿지 않았다. 아들이 둘이지만 나는 맏아들이었다. 기대가 많으셨다. 내가 똑똑해서가 아니다. 장남이기 때문이었다. 그 장남이 신학을 한다고 하니까, 반대가 당연했다. 그러나 내 결심은 분명했다.
어머니는 나를 만류하실 때도 있지만 내 결심이 확고하면 허락하고 기다리실 때가 많았다. 그 어머니가 참 감사했다. 결국 신학대를 갔다. 시험치러 갈 때였다. 아침 일찍 나가면서 부모님이 주무시는 방 앞에서 ‘아버님, 저 시험 보러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이불을 뒤짚어 쓰셨다가 인사하는 내 목소리를 듣더니 얼굴까지 더 이불을 뒤집어 쓰셨다. 내가 당황했다. 아버지는 “이놈아,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 그러셨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이게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 모두 예수 믿으시리라 믿었다. 신학대 4학년 때가 됐다. 1980년대였다. 격변기였다. 197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신군부가 장악할 때였다. 전국 대학교가 데모를 할 때였다. 나는 신학교 1학년 때 군목 시험에 합격했다.
합격한 거 때문에 아버지의 노여움이 조금 플렸다. 나는 그때 이미 마스터 플랜이 다 세워져 있었다. 연도까지 다 세워놓았다. 몇 년도에 유학가고, 몇 년도에 귀국해 교수가 되고 등등이었다. 내가 다니던 신학대에서도 이런 저런 데모가 있었다. 나도 그에 관계돼, 무기정학을 당하고 말았다. 학변자(특수학적 변동자의 준말로 1970년 80년대에 운동권 학생들이 시위하다 잡히면 바로 군대로 끌려가서 학적이 재학생에서 휴학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가 돼서 결국 군목 합격한 것도 취소가 돼 사병으로 끌려가게 됐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가장 죄송할 때가 이때였다. 부모님께 참 죄송하다는 생각이 생생하다. 그런데 군대 가면서 신학공부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신학대학교 문제가 복잡했고, 나라 전체도 어지러운데, 전국적인 학교 데모가 있기 전에 학교 문제로 데모가 있었다. 젊을 때였으니까, 너무나 신학대에 실망했다. 신학대 교수들은 대게 목사님들인데, 그들에게도 실망을 했다. 교계에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실망을 했다. 군대로 가서, 학변자로 가면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때는 젊을 때였다.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을 때였다. 내 인생을, 사실 목회,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부를 건다고 했을 때다. 인생을 건게, 성숙한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주님향한 비전이기보다 개인의 야망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상태에서 나는 인생을 주님께 걸었다. 그러나 학변자로 군대 가면서 완전히 나의 인생을 헝클어졌다.
졸업하고 2-3년있다가 군목으로 가고, 군대 마치면 독일가고, 등등 인생의 청사진을 기도하며 세웠는데 뒤죽박죽이 됐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가 이때다. 인생 계획이 헝클어질 때가 제일 힘들었다. 오히려 군생활하면서 신체적으로 힘들었을 때는 견딜 만했다. 그때 생각했다. 고 2때 만난 하나님, 그분께 모든 것을 걸었는데,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이 뺏어 가신다고 생각해서 더 힘들었다. 그런데 군생활 중에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지형은을 위한 죽으심임이라는 게 깨달아졌다.
신학생이었으니 이미 칼빈, 웨슬레의 회심과 바른 구원론이 어떤 것인지 다 알았을 때 아니겠는가? 대학부도 지도하고 설교도 하던 사람이니 말이다. 1981년도 겨울 쯤이었다. 로마서를 읽고 그것을 해설해 놓은 책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달았는데 그것이 내 가슴 속에 밀려 들어왔다. 골고다의 예수의 보혈이 지금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감동이 밀려 들어왔다.
갑자기 십자가 앞에서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이, 그저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라는 게 깨달아졌다. 군생활한 곳은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감사하다고 하는데, 그때 어려웠어요, 힘들었어요, 기왕 지난 거 감사해요, 하나님의 뜻이겠지, 그런 차원에서 감사하는게 아니라, 나를 사병으로 살게 하면서 고통과 번민의 시간을 보낸 게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만일 내가 군에 안 끌려갔으면 나는 교만한 학자가 됐으리라. 주님 왜 제 것을 뺏아가시죠? 고민하고 원망하던 내게 하나님은 내게 이런 것을 보여 주셨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깨달으면 하나님이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니라 주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은혜가 되면 장 숫자, 절 숫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의 코드로 기억한다. 빌 4.19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의 코드 가운데 하나다. 빌 4:19(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위대한 구절이다. 꽤 오래 전에 암송했다. 암송하면 어떤 곳에서든 읊조리고 떠올릴 수 있다. 이 말씀을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체험했다. 한 지역에서 집회 인도를 했다. 자카르타에서였다. 집회를 했는데 서울 옆의 인천이나 분당처럼 도시가 있었다. 집회를 할 때는 긴장을 많이 한다. 그러다 집회가 끝나면 마음이 홀가분하고 편해진다. 자카르타 집회 후 선교지역을 돌아보며 은혜를 받았다. 집회도 끝났겠다 참 홀가분한 상태에서 내가 하루 정도 여유있는 시간이 생겼다.
호텔에 들어갔다. 테러 문제로 호텔 주변의 경비가 삼엄했다. 호텔 밖에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은혜도 받았겠다, 시간 여유도 있겠다, 야외에서 한시간 정도 수영을 했다. 하나님, 선교지에서 받은 은혜 감사합니다, 반나절을 행복하게 보냈다. 수영장 옆에 샤워 부스가 있는데 수영복 입은 채로 샤워를 할 수 있는 부스가 있다. 빌 4.19를 암송했다. 묵상했다. 눈을 감고 묵상하는데, 공중에 이 구절이 쓰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구절, 읽기만 해도 은혜가 되지 않나? 생각만 해도 행복한데 공중에 써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앞과 가장 뒤의 구절이 하나님이! 채우시리라! 이렇게 두 단어가 튀어나오면서 커지는 느낌이었다. 마음에 감동이 밀려 왔다.
그래 내가 걸어온 인생 여정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채우셨다는 감동이 몰려 왔다. 이 단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하나님이 채우시리라! 내 삶의 무엇인가, 좋은 게 생겼다면 누가 채운 건가?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뺏어 간다고요, 채우신다고요? 채우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뺏는 분이 아니라 채우시는 분이었다. 지금도 이 구절을 생각하면 인도네시아의 야외 수영장이 생각난다. 채우시리라 앞에 단어가 또 끼어 들었다. ‘쓸 것을’이었다. 또 깨달음이었다. 하나님은 쓸 것을 채우신다. 사람이 살면서 누구나 돈, 물질, 재력이 필요하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물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물질을 ‘잘’ 쓰는 사람이다.
물질적인 것은 결국 다 나간다. 물질의 대표는 돈이다. 돈은 결국 나간다. 세상 떠나면 돈도 내것이 아니다. 모든 재물은 결국 두 가지 방식으로 나간다. 쓰든지, 뺏기든지! 그래서 나는 제안한다. 쓰라! 쓸 곳부터 정해서 쓰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쓸 곳을 생각하자. 하나님, 이 곳에 돈을 쓰겠습니다. 돈 쓸 곳을 생각하자. 하나님이 쓸 것을 채우신다. ‘모든’이다. 모든 것을 채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