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3-29 14:27 (금)
[주도홍 칼럼] 사전에 이단에 이기려면[뉴스미션]
상태바
[주도홍 칼럼] 사전에 이단에 이기려면[뉴스미션]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3.04.19 04: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단은 교회사와 같이한다. 이단 없는 교회 역사를 생각하면 좋겠지만 그것은 비역사적이며 비현실적이다. 성경에도 이단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거나 인간의 몸을 입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경우이다. 성경은 그들을 적그리스도(antichrist)라 일컫는다. 특히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원론에 빠진 영지주의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250년 전부터 있어온 대표적 이단이다. 이단은 교회를 괴롭혀 왔으며, 역으로 이단에 대처해 바른 교회를 힘써 세웠다. 이단문제에 부딪혀 교부들이 신학의 정립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단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사전예방과 사후처방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렇게 효과적이지 않으며, 이단은 놀랄 정도로 대대적으로 세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신자 수도 늘어나고 있고, 반듯한 건물도 지어 현대인을 세련되게 유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목회자들은 이단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런대로 역사를 가진 기성교회도 파고들어 어려움을 주며 분열을 획책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가져오는 이단대처 방법 중에 사후처방은 그 효과가 미미하고 교육도 어렵고 성공한다 해도 부작용이 크다. 이단에 빠진 자가 교육을 스스로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왜 교인들이 기성교회를 이탈해서 이단에 쉽게 빠지는가 하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바른 신앙기초도 없이 신앙생활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세례도 고작 몇 주간 교육을 받은 상태로 토요일 오후 간단한 문답을 하지만 제대로 대답도 못한 체 목사 장로의 인자한 선심용 세례를 받는다. 이렇게 기독교의 근본도 모른 체 세례자가 되어 어느 순간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어 그럴 듯한 교인행세를 불안하게 한다. 이들은 이단의 유혹을 받으면 구별이 안 된 상태에서 쉽게 빠져들고 만다. 무엇보다 신앙의 권태기가 찾아왔을 때, 보다 다른 그 무엇이 있어 보이는 그럴듯한 ‘보암직한’ 이단의 유혹에 빠져들고 만다. 뭐가 다르고 문제인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아, 이를 말리는 교회의 사후처방을 급기야는 ‘땅 따먹기 식’으로 비난하기에 이른다. ‘어디서든지 신앙생활 잘하면 되지 않는가?’ 식의 항의를 해오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단 대처 사전예방법 두 가지를 생각하려 한다.

첫째, 교리교육이다. 교리교육은 기독교교육의 근본이다. 바른 신앙인을 양성하기 위해 교리교육은 필수적이다. 세례를 받기 위해 철저한 교육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교회교육이 쉽지 않지만, 세례를 받기 위해 교회가 일 년 이상 애를 써서 교육할 때 신앙의 기초가 형성되며 여러 가지 유혹 가운데서도 보다 성숙한 신앙에로 성도들을 이끈다. 2천년 교회사는 이를 위해 교리문답서(Catechism)를 만들었다. 신앙고백(confession)이란 일반적으로 선언적이어서 일반 신도들의 이해를 가져오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묻고 답하는 식의 평이한 교육을 통해 신앙고백을 이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교리문답서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제네바 교회교육의 모든 목적을 성만찬에 바르게 참여함에 두었다. 그런 맥락에서 제네바교회법을 ‘성만찬 법’(칼 바르트)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바른 교회의 판단기준은 보이는(visible) 복음과 보이지 않는(invisible) 복음의 유무에 있었다. 순수하고 바르게 복음이 전파되고 집행될 때 바른 교회라는 것이다. 칼빈은 성도들이 바른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바른 복음의 수혜자가 되는지를 힘써 교육했다는 말이다. 당시 교회는 교리교육에 일 년 이상 정성을 쏟았다. 교리교육이 비로소 끝났을 때, 정한 주일에 세례를 주었고, 세례식이 끝남과 동시에 성만찬에 참여시켰다. 성만찬에의 참여란 진정한 교회의 일원, 천국백성이 되었음을 확인시키는 복된 영적 예식이었다.

둘째, 수준 높은 윤리적 삶이 요구된다. 이단들이 기성교회를 문제 삼는 여러 가지 중 하나는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이다. 바른 목회자도 성도도 찾아 볼 수 없다고 비난한다. 그렇다고 이단들이 그토록 윤리적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남 눈의 티를 보듯이 한국교회의 크고 적은 비리들을 문제 삼아 침소봉대한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기성교회에 실망과 회의를 갖고 이단에 빠진 자들은 비로소 바른 교회 바른 신앙을 찾았다고 항변하듯 큰 소리를 친다. 물론 윤리가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바른 신앙인은 윤리적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기에 한국교회는 보다 수준 높은 삶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도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는 자’를 지도자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세상의 칭찬을 듣겠는가? 신앙심이 두껍고 새벽기도 나오고 교회봉사 잘 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윤리적 도덕적 삶이 세상인의 모범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성도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다.

사실 기독교인의 수준 높은 윤리적 삶은 복음전도를 위해서도 많은 힘이 된다. 어찌 윤리적으로도 처진 사람들이 믿는 신앙을 가지려고 하겠는가? 그만큼 ‘어떻게 사느냐’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중요한 판단 근거라는 말이다. 교회의 분열, 수준이 되지 않는 비상식, 비윤리, 부정부패, 타락 등이 한국에 이단이 성행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윤리적 삶이란 먼저는 개인 대 개인의 영역에서 제시되는 작은 윤리인 미크로윤리(micro ethic)에 국한시켜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이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며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대처하는 매크로윤리(macro ethic)까지를 포함한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인권, 환경, 남북관계, 다문화 등에 있어서도 기독교인들이 바른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수도원적 신앙교육의 패러다임을 뛰어넘어 교회교육의 폭을 보다 넓힐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양질의 교사들이 어느 영역에서든지 이를 기꺼이 담당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흥회식 집회 뿐 아니라, 전문 기독교인의 특강식의 집회도 가질 필요가 있다 하겠다.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 한국교회는 사전예방법을 가져와야 하는데, 첫째, 교회사의 지혜가 말해주는 최소한 일 년을 기본 단위로 세례 전 진지하고 차분한 교리교육을 필히 이행해야 하며, 둘째, 수준 높은 기독교인의 윤리적 삶이 보다 복잡해진 21세기에도 두드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본지 제휴 <뉴스미션> 2013년 4월 12일자 주도홍 교수(백석대)의 칼럼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