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가는 요한계시록 3강(1장)

요한계시록 1장 - 계시, 장차 오실 이, 일곱영, 구름,

2021-04-26     정윤석 기자

사람들은 집에 들어갈 때 번호키를 누른다. 집 문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는 단 하나다. 그 번호를 눌러야만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여러 번 잘못 누르면 ‘락’이 걸린다. 매우 난처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을 열 때도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바른 패스워드가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이라는 열쇠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 돌리는 예배, 즉 찬양과 경배’의 코드다. 어린양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가 요한계시록을 여는 바른 열쇠다(메릴테니. 요한계시록 해석. CLC. 1989. 34). 그리스도를 따르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영광을 돌리며 예배하게 된다. 반면 어린양을 따르지 않고 배척한 무리들은 하나님의 인·나팔·대접에 이르는 가혹한 심판에 직면해야 한다. 바른 패스워드를 터치하지 않고 엉뚱한 걸 누르면 락이 걸린다. 영원히 요한계시록의 본질적 주제에는 닿지 못하고 바깥에서 헤매는 신앙이 된다.

요한계시록을 읽고 2천년 전의 그 예수께서 여전히 우리를 통치하시는 참된 왕이시라는 게 믿어지고 그분을 경배하는 마음에 가슴이 웅장해지는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읽은 것이다. 그런데 계시록을 읽으면 읽을수록 두려움과 공포에 휩쌓이고 밤잠을 못 이루는가? 계시록의 본질을 여는 패스워드를 뭔가 잘못 눌러서다. 오늘은 요한계시록 1장을 개괄하고 그중 1장의 키워드 ‘계시, 어제·오늘·장차오실 이, 구름’을 설명하며 요한계시록의 본질적 메시지에 접근하고자 한다. 요한계시록 1장에 수많은 단어들이 나오지만 지면과 시간관계상 모두 다루지 못하고 도드라지는 개념에 집중해 보겠다.

주요 단어: 계시, 장차 오실 이, 일곱영, 구름

1. 계시

1-1. 누구의 계시인가?(계 1:1)

요한계시록은 다른 누구에 대한 계시가 아니다. 계시라는 단어는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로서 열어서 보여준다는 의미다. 그런데 무엇을 열어서 보여줄까? 예수그리스도다. 그리고 그분의 승리다. 나아가 그분을 경배하는 자들이 승리할 것을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승리하심과 그분을 경배하고 따르는 자들의 승리에 대해 열어서 보여주는 책이다. 성경을 읽으며, 특히 계시록 1장을 읽으며 우리는 누구에게 집중해야 하는지 결과를 생각하며 시작하게 된다. 그 목표점을 잃은 계시록 읽기는 실패로 이어진다. 계시의 뜻(啓(열다, 깨우다 계 示 볼 시), 묵시(默示 잠잠할 묵, 볼 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으로 귀결돼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초림 주를 증거하냐, 재림주를 증거하냐는 분리된 관점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격적으로 통일성있는 분을 믿고 따른다. 초림주냐, 재림주냐라고 말하는 것은 사이비들의 분리적 관점에서 시작되는 용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계시록도 예수를 증거한다! 

1-2. 반드시 속히 될 일이란 무엇인가?

1장 1절에 ‘곧 일어날 일들’(공동번역)이라고 말씀한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개역성경), “곧 일어날 일들”(현대인의 성경)이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고 하니 우리 기준의 시점에서 벌어질 일이라고 사람들은 이를 곧바로 심판 메시지로 수렴시켜 버린다. 이는 SF영화적 요한계시록이지 계시록의 참된 메시지는 아니다. 터미네이터2에서 심판의 날이라는 첫장면에 핵전쟁이 일어나고 로봇 전사들이 해골을 짓밟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요한계시록의 이미지여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밧모섬에 갇힌 사도요한(1:9)의 시점에서부터 속히 될 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1~22장에서 개괄(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75 기사 참고) 했다시피 요한계시록의 근본 메시지가 무엇이냐와도 일맥상통한다. 계시록은 어린양이 일곱머리 열뿔 달린 짐승을 이기고 승리한다라고 설명했다. 그 승리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어도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는 게 근본 계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정치적 왕인가라는 부분이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는 이미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라고 고백된다(계 1:5). 그리스도가 진정한 왕이시고 그분이 다스리는 참된 세상이 속히 오리라는 고백이다. 실제적, 정치적으로 사도 요한 당시의 황제는 도미티안이었다. 그러나 요한의 가슴속에서 참된 임금은 그리스도이시라는 게 사도요한의 신앙고백이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인해 갇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진실한 자들에게 승리가 반드시 속히 이뤄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가능한 고백이다.

1-3. 읽는 자(the one)와 듣는 자(those hearing)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

1) 계시록은 이미 2천년전에 예수께서 열어서 보여주신 계시이다. 계시란 말 자체가 열어서 보여주다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봉함된 적이 없다. 지금 시대가 계시록이 열리는 시대라는 주장은 계시록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발언이다.

2) 계시록이 봉함됐다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3절)는 말이 불가능해진다. 읽는 자는 단수, 듣고 지키는 자들은 복수로 돼 있다. 이는 2천년전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읽는 자는 한명이고 그것을 여러 명이 들을 수밖에 없는 시대상황을 반영한다. 그들이 복되고, 또한 계시록의 말씀을 지키는 자 또한 복되다고 한다. 무슨 말씀을 했는지 알아야 지킬 것 아닌가. 기록한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지킬 것 아닌가. 2천년 전에도 계시록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은 복된 인생이었다. 따라서 계시록은 마지막 시대까지 봉함된 비밀이라고 하고, 2천년만에 이것이 열렸다고 하는 것은 2천년 전의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뭐를 읽고, 듣고, 지켰다는 것인지 설명이 불가능해지게 만드는 이상한 주장이다.

계시록 1장을 펴고, 마지막 장을 읽고 덮는 순간, 2천년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 시대부터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시며 그분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최종적 승리자라는 고백을 했다면 계시록을 잘 읽은 것이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적그리스도가 두려워지고 짐승의 표를 받을까 무서워지고 핵폭발로 전쟁이 터질 게 두려워진다면 뭔가 계시록을 오해한 것일 수 있다. 줄곧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승리에 대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믿고 따르는 분이 최종적 승자가 되시고 나 또한 묻어서 승리한다는 메시지에는 감사와 찬양밖에 나오지 않는다(윗글들 천국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이만희), 신천지 요한계시록의 실상 대해부(장운철), 신천지 백신(양형주) 등에서 참고).

2.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하나님은 줄곧 3중적 의미로 찬양된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4, 8)이시다. 이 용어를 단 한마디로 함축하면 어떻게 하면 될까? ‘세세토록 살아 계신 분’(1:18)이다. 하나님께 드린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면 ‘세세토록’으로 바뀌지만 근본적 의미는 다르지 않다. 이는 하나님과 관련 계시록에서 자주 반복되는 개념이다(계 4:8, 11:17, 16:5). 이는 구약에서 출 3:14 - 스스로 있는 자다(나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자다)와 유사한 표현이다. 때로 이 용어는 알파와 오메가로도 설명된다(계 21:6, 22:13)(리차드 보쿰. 요한계시록. 한들출판사. 2000. 53).

1) 이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속에서 초월적으로 언제나 계시는 분이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인류의 최종적 시간에 마침표가 되실 존재임을 엄중하게 알려준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재림은 단절된 상태에서 오시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완전히 별개의 나라에서 별개로 존재하시다가 재림하시는 개념이 아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 재림은 어제도 계셨고, 지금·이제도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께서 장차 오신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 다시 오신다는, 강조적 오심이다. 지금 나와 계신 주님에 대한 사랑이 기초가 된 신앙인이라면 그분이 다시 오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은 반갑고 감사하고 기쁜 일이 된다. 

2) 따라서 이 재림의 사건은 미래에 최종적으로 벌어질 일뿐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 삶의 종말과 관련해서도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종말에는 두가지가 있다. 역사의 종말과 개인의 종말이다. 역사의 종말 마지막에 그리스도는 재림한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와 단절돼 있는 분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늘 나와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분이다. 그리스도와 그렇게 연합된 우리가 죽는 순간, 즉 개인의 종말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와 참된 연합된 존재로서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된다. 이것 자체가 재림은 아니지만 개인의 종말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새로운 차원으로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 될 것이다.

# 요한이 받은 삼중적 계시: 그가 받은 계시는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19)로서 묘사된다. 마치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관련한 표현이다. 어제도 계시고 오늘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라는 표현이 하나님께 돌려진 것처럼 요한이 받은 계시가 그렇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듯, 그에게 주어진 계시 또한 시간을 초월한 초월적 메시지이자 계시임을 드러내주는 말씀이다.

#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의 잘못된 접근. 
‘장차’에만 집중한다. 하나님의 존재에 집중하지 않고 그분이 영으로 특정인의 몸으로 임재한 것을 재림이라고 하며 마지막 때에 자신들의 단체로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와 뭔가를 새롭게 ‘창설’한다는 제한적 개념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이 사도요한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초월적으로, 내재적으로 함께 하심을 부인한다. 따라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의 의미를 잘 해석하지 않으며 오직 ‘장차’에만 집중해 미래적 오심에만 초점을 맞춘다. 계시록의 미래 예언이 이뤄지는 자신들의 단체와 그것을 예언하고 해설하는 지도자를 부각시키는 데 인생을 건다. 반면 바른 접근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영원성에 집중하며 개인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3.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
실제 일곱 영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슥 4:10과 비교해서 보자. 여호와의 눈은 일곱 개인가? 완벽한 영, 거룩한 영, 충만한 영, 온 세상에 편재한 하나님의 성령을 의미한다.

4. 구름 타고 오시리라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요한계시록 1:7).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그’이다(김주원. 요한계시록으로 정면돌파. 기독교포털뉴스. 2019. 31). 그분,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한 단어다. ‘그’가 계속 해서 반복될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전체를 통합적으로 살펴봐도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 그리스도이시다. 여기서 우리는 재림과 관련 몇 가지 정리해야 할 게 있다.

4-1. 그분은 영원토록 살아 계시다.

계시록 1:17~19절 말씀이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전에 죽었는데, 세세토록 살아 계시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계신 그분이 다시 오신다는 의미다. 그래서 어떤 인간의 몸을 대신 입고 올 이유가 없다.

4-2. 우리는 ‘재림’을 믿지 환생을 믿는 게 아니다.

초림주와 재림주의 인격이 바뀌어 온다면 그건 ‘재림’이 아니라 ‘환생’에 가깝다. 왜냐하면 2천년전에 오신 분도 예수, 다시 오실 분도 예수여야 재림인 것이다. 재!림!은 다시 임한다는 의미다. 재림은 그래서 환생과 다르다. 환생은 불교식 세계관에서 나왔다. 사람이 죽어서 다른 인격,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게 환생이다. 또는 죽은 사람의 영이 다른 사람에게 임해서 오는 걸 환생 또는 빙의나 접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환생이나 빙의나 접신이 아니라 ‘재림’을 믿어야 한다. 다시 재, 임할 임! 그분이 다시 오신다. 부활승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 그분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인격적으로 그대로 다시 오셔야 재림이다.

이만희도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지 두 번째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재림이 아니다. 정명석도, 안상홍도, 재림이 아니다. 재림은 인격적 변이나 변질이 있는 게 아니다. 다시 기억하고 되새겨 보자. 그분께서 다시 오시는 게 재림이다. 반복해서 되뇌여 보자. 2천년전의 그분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다. 다시 재반복한다. 2천년전에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리신 그분이 다시, 다시,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게 다시 재再! 임할 임臨, 재림의 참 뜻이다. 이제 재림에 대해 설명했으니 ‘구름’을 설명하겠다. 기억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1) 구름은 영으로서 ‘한 육체’를 택하거나 ‘사람’을 비유한 게 아니고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신다는 의미로 동원한 단어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말씀했다. 가심을 본 그대로이니 제자들이 하늘로 가신 어떤 모습이 어땠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행 1:9이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여기서 3가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첫째 “그들이 보는데” 둘째, “올려져 가시니”, 셋째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이다.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올라가셔서 구름이 가려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실 때 이렇게 가셨으니 재림하실 때 “볼지어다”, “구름”, “오시리라”(계 1:7)라는 사도행전의 세가지 구문이 그대로 사용되는 게 당연해진다. 따라서 구름은 영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오심을 강조하기 위해 동원한 단어이다.

2)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때 사람으로 오시는 게 아니라 2천년 전에 육체로 오셨던 그분이 영광의 왕으로 오신다는 의미다(계 1:13~18).

구름타고 오신다니 손오공의 곤두운을 얘기하며 우스갯 소리로 비하하는데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신다는 의미는 손오공처럼 구름을 둥둥 탄다는 의미가 아니다. 구름을 타고에서 ‘타고’로 번역된 헬라어는 메타(μετὰ)로서 with라는 뜻이다. 메타 톤 네페론(μετὰ τῶν νεφελῶν) 구름을 타고라기 보다는 구름과 함께 오신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구름과 함께오신다는 의미는 ‘구름을 둥둥 타는’ 손오공처럼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재림이 영광과 위엄 중에 오시는 것임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구름이란 단어가 어떻게 활용됐는지 확인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고하였으므로”(출 19:9).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 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 칠 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모세를 부르시니라”(출 24:16).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쌔”(출 34:5).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왕상 8:10).

구름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과 위엄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이게 영이 육체 가운데 임한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다시 재림하신다는 의미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구약의 용법과 마찬가지로 구름타고 오신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영광과 위엄’ 가운데 있을 것을 상징하는 용어이다.

#구름의 잘못된 해석
영을 의미한다. 재림 때에 예수님께서 보이는 육으로 오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으로 온다. 그 영이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재림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인격의 변이와 변질이 생긴다. 그래서 재림이 아닌 환생과 유사해진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다는 그 대상을 재림주라고 주장하는 교리라는 점에서 적그리스도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정통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타고 오신다는 구름은 당신의 영광된 재림을 의미하는 단어로 해석한다. 

소결:
한 교인이 암에 걸렸다. 늘 얼굴이 검었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 간암 말기였다. 의사는 그 교인이 6개월밖에 못 산다고 했다. 그때 그에게 두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하나는 ‘나는 안 죽는다. 하나님이 살려 주실 것이다’였다. 두 번째 생각은 ‘죽더라도 천국에 간다’였다. 초등학교 아들 둘, 그리고 젊은 아내를 두고 그분이 세상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 집사님은 교회를 가면 누구보다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지금도 그분의 얼굴이 눈에 생생하다. 그분이 참된 재림 신앙을 갖고 살았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재림에 대한 관점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의 계시록 해석은 이장림식 시한부 종말론이나 혹세무민했던 사이비 재림 운동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개인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을 통합한 종말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각각 분절된 재림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서 받아들여지는 그리스도의 오심, 그것이 성도와 교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참고도서:

김주원. 이단대처를 위한 요한계시록으로 정면돌파. 수원: 기독교포털뉴스. 2019.
리차드보쿰. 요한계시록신학. 서울:한들출판사. 2000.
메릴테니. 요한계시록 해석. CLC. 1989.
양형주. 신천지 백신. 두란노. 2020.
장운철. 신천지요한계시록의 실상 대해부. 수원: 기독교포털뉴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