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길자연 목사)를 비롯 한국교회 주요 교단들과 보수권 교계 지도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와 행정수도 이전 등 국책 현안들에 반대하는 입장을 잇달아 표명하며 여권(與圈)과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다.
한기총은 10월 4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10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대한민국을 위한 특별구국기도회’를 개최하고 한국사회가 분단 후 최악의 안보위기, 정체성 혼란, 국론 분열 등 총체적 위기에 놓여 있다며 ‘국보법 폐지, 행정수도이전 반대’를 주장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한기총은 이 같은 입장을 이미 시국성명서로 발표한 데 이어 길자연 대표회장이 최근 박근혜 대표(한나라당)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동일한 주장을 하는 등 반여(反與) 보수 색채를 분명히 하고 있다.
9월 중에 진행된 예장 합동, 통합 등 주요 교단들의 총회에서도 약속이나 한 듯 정부의 주요 정책들에 반대하는 입장들이 시국성명서로 잇달아 채택됐다.
예장 합동(총회장 서기행 목사)은 9월 24일 충현교회에서 1천여 명의 총대들이 모인 가운데 시국성명을 채택하고 “오늘의 국가상황이 매우 우려스럽다”며 “남북의 분단과 대치상황이 현실이며 공산주의 이념이 불변한 때에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교회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며 합당하게 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국민의 폭넓은 의견 수렴 없이 역사와 전통을 허무는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추진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민심이 혼란하다”고 행정수도 이전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정부는 국민통합, 민심안정, 경제발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튼튼하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장 합동측의 시국성명서 채택은 89회 총회 사상 초유의 일이다.
예장 통합(총회장 김태범 목사)도 9월 17일 소망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1천500명의 총대들이 모인 가운데 합동측과 주요 내용을 같이 하는 시국성명서를 일부 총대들의 반대 속에 기립박수로 채택했다.
통합측은 이 성명서에서 “우리나라는 과거 어느 때보다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며 “정부는 민생문제를 도외시한 채 과거사 들추기, 국가보안법 폐지, 행정수도 졸속 이전 등 이념적이고 정략적인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통합측은 “국보법의 인권침해 조항은 고치되 자유민주체제를 지키기 위한 ‘안보를 위한 법’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행정수도를 졸속으로 이전하지 말고 우선 국민적 합의를 모으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외에 예장 고신측도 제 54차 총회에서 ‘나라를 위한 우리의 결의’란 제목의 대동소이한 시국성명서를 채택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김진호 감독회장)도 9월 15일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를 골자로 한 성명서를 발표했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총회장 정원희 목사)도 9월 22일 유사한 내용의 시국성명서를 채택했다.
주요 교단들이 이같이 반여(反與) 입장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는 가운데 이에 앞서 소위 교계의 지도자급 목회자들도 설교 등을 통해 같은 목소리를 냈다.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는 9월 12일 주일예배 설교에서 “최근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판시에 정면으로 맞서 국가보안법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공언하고 여당이 이를 당론으로 확정하는 상황”이라며 “그만큼 대한민국은 국가존립과 안보에 관한 사상최대의 위기의식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우려했다. 이 목사는 “현재 우리나라는 대다수 국민들이 극도로 위기를 느끼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도 같은 날 설교에서 “국민들의 삶이 고통스러운데 이것은 뒤로 한 채 정치인들이 모여서 과거사 문제에나 매달려 지나간 과거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고 있다”고 친일청산 문제 등에 대해 비판했다.
김홍도 목사(금란교회)는 8월 22일 설교에서 “3·1절도 모르고 8·15도 모르고 6· 25도 모르는 386세대들이 나라를 망치려고 하고 있다”며 “누가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는가? 남의 족보나 뒤지고 남의 묘를 파헤치며 수치스러운 과거사를 들추어 매장시키려는 일은 온 세계에 나라를 망신시키고 국위를 추락시키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한기총을 비롯 한국교회 주요 교단들과 여러 지도자들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책 현안들에 반대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국민적인 합의를 토대로 정국을 포용적·통합적으로 이끌지 못하는 현 정권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계의 노골적인 반여(反與) 보수 행보에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한명수 목사(창훈대교회 원로)는 “교회와 교단은 양극단에 치우친 이론을 지양하고 통합이론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정치적 사안과 관련해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정치적 역학 구도를 예의주시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에 시국선언문이 터져 나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예장 통합측의 시국선언문 채택에 반대한 정우겸 목사 등 일부 통합측 목사들은 “세상의 소망이 되어야 할 교회가, 화해로 이끌어 가야 할 책임을 저버리고 오히려 한편에 치우쳐 편 가르기와 갈등을 조장하고 있음은 한국 교회의 수캇라며 “기득권을 지키는 일과 정치적 쟁점을 부추기는 일에 앞장서서 선언한 시국선언문의 내용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기감 소속 박철 목사는 감리교희망연대 홈페이지(http://www.kmchope. com)에 올린 글에서 “과거 독재정권에 권력안보 차원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수많은 희생자들을 만들어 냈고 수많은 인권유린사태가 있었을 때 한국감리교회는 어떤 입장이나 태도를 취했는가?”라고 반문하며 기감이 시국선언문을 채택한 데 대해 “감독이라는 분들이 과거 권력과 타협하며 자기보신에 급급했던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똑같은 견해를 내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또한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반전평화기독연대,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K) 등 진보적 그룹에 속하는 단체들은 국가보안법 폐지가 우리 사회의 제도적 민주개혁과 한반도의 장기적 평화를 앞당겨 준다며 9월 15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부터 광화문까지 평화걷기 행진을 하는 등 정부 정책과 관련해 교계의 보수권과 대조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