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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트니스 리의 삼일론 논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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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트니스 리의 삼일론 논박 2
  • 교회와신앙
  • 승인 2001.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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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배 총장(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1편에 이어 계속>

2-6. 그리스도의 성결성 여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셨을 때, 그는 인성을 입었다. 그러나 이 인성은 거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성품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오직 한가지 차이점은 우리의 성품에는 죄가 있었으나, 그의 성품에는 죄가 없었다. 죄가 없게 되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것은 같지 않다. … 그의 육신은 죄있는 것도 아니었고, 거룩한 것도 아니었다. … 그러므로 인성을 입은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그의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다"(85-영몸, 76쪽).

참으로 어이없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우리와 같은 성정이라는 것은 일리 있는 말인 것처럼 들리나, 성경대로 바로 말한 것은 아니다. 주님은 그 모친 마리아의 몸 안에서 잉태되었으므로, 우리와 같은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여기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라는 것은 마리아의 육신 곧 우리의 육신과 같은 육신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 왜냐하면, 죄의 좌소(座所) 곧 그 보금자리가 육신이 아니고, 그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영혼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될 때, 깨끗하게 지음받았으므로,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 아담의 원죄도 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억만 죄악이 넘어온 것은 속죄를 받아야 할 자기백성들의 죄악을 담당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마치 뱀처럼 저주를 받아 못박혀 죽으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라고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셨을 때, 그는 인성을 입었다. 그러나 이 인성은 거룩하지 않았다."(85-영몸, 76쪽).

이것은 물론 옳은 주장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이 우리와 같았지만,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의 人性은 神性과 분리되질 않는다. 성경은 한결같이 증거하기를 그는 거룩한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 4:34);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7);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행 3:14);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행 4:27);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롬 11:16);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2-7. 성부와 성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주하심

"나아가서 아버지 하나님도 또한 그 영이시다(요 4:24).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 인격은 모두 그 영이시다. 만일 아버지 하나님이 그 영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분이 우리 안에 오실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가 그 분을 접촉할 수 있는가? 더욱이, 만일 아들 하나님이 그 영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분이 우리 안에 오실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가 그 분을 체험할 수 있는가? 아버지와 아들이 바로 그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87-경륜, 15-16쪽).

영(靈)은 우리 안에 내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옳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을 모두 같은 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는 영이시지만,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영은 아니고, 오직 그에게서 나오시는 영 곧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만약 성부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다. 어떻게 성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처럼 감히 생각할 수 있는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에 임재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셨다: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출 19:17~22).

성자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는 몸과 영혼이 있는 분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주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그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라고 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8. 人性과 神性의 不可分離性
"행 13:33에서는 왜 그가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했는가? … 그는 육신을 입었을 때, 그의 하나님 성분인 신성을 사람의 성분인 인성 안으로 가져왔다.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부활하기 전에 땅에서는 하나님의 성분과 사람의 성분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하나님 성분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분이었지만, 그의 사람의 성분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분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의 성분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이 아들의 명분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그에게는 부활이 필요했다. 부활 이전에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그의 인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이 인성은 하나님께로서 나야 했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4절에서는 그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고 말하고 있다.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성결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는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독생자에게는 신성만 있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인성이 없었다. 그러나 부활 안에서 그는 신성과 인성을 다 지닌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85-영몸, 73-74쪽).

위에서 줄친 부분은 모두 이상한 생각들이다: "그의 하나님 성분인 신성을 사람의 성분인 인성 안으로 가져왔다"; "부활 이전에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그의 인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로마서 1장 4절에서는 그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하나님의 독생자에게는 신성만 있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인성이 없었다. 그러나 부활 안에서 그는 신성과 인성을 다 지닌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

또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말하고 있다: "두번째 성분은 성육신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다. 성육신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람 속으로 모셔왔고, 하나님의 신성한 성분과 인성이 연합되게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사람이 있다"(87-경륜, 13쪽).

이 같은 사상은 人性과 神性을 분리시키는 이단사상이다. 우리는 兩性敎理 곧 '칼세돈'(Chalcedon) 교리를 중히 여겨야 한다: 人性과 神性은 서로 결합되었고, 연합된 것이 아니다. 성육신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람 속으로 모셔온 것이 아니고, 만세전부터 계시던 독생자께서 때가 찼을 때, 인성을 입으신 것이다. 이 성육신을 우리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라고 한다. 이 결합(結合)은 혼합(混合)된 것도 아니고, 분리(分離)된 것도 아니고, 분할(分割)된 것도 아니고, 신성과 인성은 각각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2-9. 계승설(successionism)
다음을 읽으면, 계승설을 연상케 한다:

"경륜의 첫 단계에 따라 아버지는 자신을 아들 안에 넣으셨고, 아들은 자신 속에 일곱가지 요소(신성, 인성, 고난의 인생, 죽음의 효능, 부활의 능력, 승천의 초월하는 능력, 보좌에 앉으심)들을 지니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 속에 들어오시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또하나의 단계, 즉 마지막 세 번째의 단계가 필요하다. 처음 단계는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몸을 이루신 것이고, 둘째 단계는 아들이 인성 안에서 성육신되심으로 일곱가지의 놀라운 성분을 포함하신 것이다. 세째 단계는 아버지와 아들이 이제 그 영 안에 계신 것이다.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아들 안에 있고, 아버지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요소들을 포함한 아들은 성령 안에 계신다"(87-경륜, 14-15쪽).

"성령이란 무엇인가?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요 15:26). 그러면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라는 핼라어 의미는 '실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실제의 영,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실제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몸으로 나타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성령의 놀라운 인격 안에서 실제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떨어진 분이 아니고, 성령은 그리스도와 떨어진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나타난 하나님이요, 그 영은 실제가 되신 그리스도이다"(87-경륜, 15쪽).

"'이제 주(主)는 그 영이시니'(고후 3:17). 이 말씀은 성령이 그리스도와 떨어진 분이 아님을 증명한다. 주(主)는 그리스도 자신이요 또한 그 영이시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여기에서도 성경은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가 그 영임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이 생명 주는 영이 성령임을 깨달아야 한다"(87-경륜, 15쪽).

"그러므로 삼일신의 세 인격은 하나님의 경륜의 과정 안에서 이어지는 세 단계가 된다. 이러한 세 단계가 없다면, 하나님의 성분은 사람 속에 공급될 수 없다"(87-경륜, 11쪽).

"삼일 하나님은 인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성육신되셨다(요 1:14, 히 2:14). 성육신되신 후에 하나님은 성육신되기 이전과는 달라지셨다. 성육신 이전에 그 분은 다만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성육신되신 후에 그 분은 사람의 껍질 안에 계신 하나님이셨다. 베들레헴 어느 주막 말구유에 놓여진 한 아기가(눅 2:7)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사 9:6).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오늘날 많은 유대 학자들처럼 구유에 놓인 작은 아기가 여호와 하나님이었음을 믿을 수 없었다"(93-삼분, 54쪽).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그 영-이시다(고전 15:45이하, 고후 3:17).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체현된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부활 안에서 그 영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 분은 그 영, 즉 공기같은 그리스도이다"(93-삼분, 87쪽).

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은 계승설이 아닐 수 없게 한다: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아들 안에 있고, 아버지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요소들을 포함한 아들은 성령 안에 계신다"; "성령은 실제의 영,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실제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몸으로 나타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성령의 놀라운 인격 안에서 실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몸으로 나타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성령의 놀라운 인격 안에서 실제가 되었다"; "세 인격은 하나님의 경륜의 과정 안에서 이어지는 세 단계가 된다"; "성육신 이전에 그 분은 다만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성육신되신 후에 그 분은 사람의 껍질 안에 계신 하나님이셨다. 베들레헴 어느 주막 말구유에 놓여진 한 아기가(눅 2:7)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체현된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부활 안에서 그 영이 되셨다. … 그 분은 그 영, 즉 공기같은 그리스도이다."

교리사상(敎理史上) 계승설은 사벨리안 이단 곧 양태론적 단일신론이었다.

2-10. 성부고난설?

"아버지의 모든 충만은 아들 안에 거하시며(골 1:19; 2:9), 아들로 나타나셨다(요 1:18). 모든 것의 무한량한 공급이 되시는 아버지는 아들안에서 몸을 입고 나타나셨다(요 1:1).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바 되었다(골 1:15). 그러므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요(요 10:30), 아들은 아버지라고 불리운다(사 9:6). 전에는 사람이 아버지를 접촉할 수 없었다. 그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었고, 그 분의 성격은 오로지 하나님에 속한 것이었다. 아버지 안에 하나님과 사람을 잇는 다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아들 안에 나타내셨고, 인성안에서 성육신 되셨다. 아버지께서는 아들 안에서 자신의 신성(神性)을 인성과 연합하기를 기뻐하셨다. 사람이 가까이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이제 성육신을 통하여 가까이할 수 있는 분이 되셨다. …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 안에 공급하기 위한 첫 단계는 성육신 되심으로 자신을 사람으로 나타내는 것이다"(87-경륜, 12쪽).

"더구나 고후 3:17에는 '이제 주는 그 영이시니'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그 영은 성령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라고 불리워지고, 주님이신 그 아들은 또한 그 영이시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임을 의미한다"(87-경륜, 54쪽).

위에서 "아버지는 아들안에서 몸을 입고 나타나셨다"; "아들은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하나님은 … 인성안에서 성육신 되셨다. … 사람이 가까이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이제 성육신을 통하여 가까이할 수 있는 분이 되셨다"; "아들은 아버지라고 불리워지고, 주님이신 그 아들은 또한 그 영이시다" 등등, 아들은 아버지라고 불리워진다니, 주후 190년경의 노에투스(Noetus)나, 220년경의 로마의 감독(현 교황) 프락세아스(Praxeas)의 성부고난설과 너무나 비슷하다. 이들은 물론 이단자들이었고, 아들-아버지(휘오-파토르) 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낸 것과도 서로 비슷하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으실 때, 자기 자신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신 것으로 되니, 보통으로 웃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더욱이, 고후 3:17에서 '이제 주는 그 영이시니' 라는 말씀은 주님이 성령이 되셨다는 말씀은 결코 아니다. 그 다음에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라고 함을 보아 주님이 계시고, 그의 영이신 성령이 계시는데,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주님이 성령으로 변했다면, 곧 '주의 영'이라는 말씀을 할 필요가 없고, 그냥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 떡을 가지시고 "이것은 내 몸이다" 라고 하셨을 때, 자기 자신이 떡으로 변한 것이 아닌 것처럼, 주는 영이라고 해서 주님이 성령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에게 일곱 눈이 있다 라고 하는 계 5:6의 말씀처럼, 어린 양에게 성령이 풍성하게 넘치므로, 주는 영 곧 성령이 한량없이 넘치는 분이시고, 이 어린 양의 일곱 영 곧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서는 자유함이 있다는 것이다.

III. 단일신론(單一神論, monarch- ianism)

다음의 사상은 양태설(modalism)이 아닐 수 없다.

3-1. 양태설: 세 인격으로 나타난 한 분 하나님

"하나님이 사람 속에 넣어 주시는 것은 영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하나님이 이 역사를 어떻게 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삼일성에 의해 이 역사를 하신다. 삼일(三一) 하나님 곧 '아버지-아들-성령'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다. 과거 수세기동안 기독교에는 삼일성(Trinity)에 대한 많은 이론들이 있었다.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세 인격으로 나타난 한 분의 하나님이시다"(87-경륜, 10-11쪽). "사랑과 은혜와 교통은 세 단계에 있는 한 가지 성분이다. … 이와 같이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도 세 인격 안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근본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표현이요,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 안에 전해주는 것이다"(87-경륜, 11쪽).

3-2.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한 人格的 內住

"다음 구절들을 주의해 보자.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 만유 안에 계시도다'(엡 4:6).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후 13:5). '… 그의 영이 너희 안에 거히시면…'(롬 8:11). 이 세 구절의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과 그 영이 우리 안에 계심을 계시하여 준다. 그러면 몇 가지 인격이 우리 안에 있는가? 셋인가, 하나인가? 우리는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삼일(三一)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다. …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성령도 있다"(87-경륜, 16쪽).

3-3. 유일한 하나님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8:4절, 6절과 디모데전서 2장5절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을 가리킨 대명사는 '나'가 아니라, 복수인 우리이다(창 1:26~27).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 한 분 이상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이단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유일한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 우주 가운데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라면 왜 복수 대명사가 사용되어야 하는가?"(87-경륜, 52-53쪽).

"창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하나님(엘로힘)은 복수이다. 그러나 그 동사 '창조하시니라'는 단수이다. … 그렇다면, 내가 묻겠다: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분인가?"(87-경륜, 53쪽).

"마 28:19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제자를 삼아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구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한 인격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름들로' 라고 말하지도 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단수) 라고 말하고 있다"(87-경륜, 54-55쪽).

3-4. 수박과 같은 하나님: 온전한 수박(父) - 조각난 수박(子) - 수박의 즙(성령)

"수박을 여러 쪽으로 잘라서 먹으면 위로 들어가 즙이 된다. 그러면 이것들은 각각 다른 세 가지인가, 한 가지인가? 나는 이것이야말로 삼일성(三一性)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임을 확신한다!"(87-경륜, 55쪽).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그 수박은 먹혀진 후 없어진다. 본래 그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후에 그 수박은 온 가족 속에 있는 것이다"(87-경륜, 55-56쪽).

3-5. "근본(父) - 체현(子) - 실제화(성령)"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이며, 그 영은 그리스도의 실제화이다. 그리스도는 그 영으로 실제화된다. … 성령은 또한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의 실제화이다(요 14:16~20)"(93-삼분, 89쪽).

"근본이신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체현되시고, 아버지의 체현이신 아들은 그 영으로서 실제화되신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의 셋 모두는 그 영 안에 계신다. 우리가 그 영 안에서 혹은 그 영 안으로 침례받았을 때, 삼일 하나님 안으로 침례받았다. 그 영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완성이 되었다(90-그 영, 11쪽).

"하나님은 근본이시요, 그리스도는 근본의 체현이시며, 이 그리스도는 그 영으로서 실제화되신다. 그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달하심이고, 하나님의 체현의 실제화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체현되시고, 그리스도는 그 영으로서 실제화되신다. 그 영은 그리스도의 실제화이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근본이신 바로 그 하나님의 체현이시다"(90-그 영, 8쪽).

3-7. 최종 완결된 그 영

"그 영은 또한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이신 완결된 그 영이다(마 28:19; 계 22:17). 마 28:19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언급된다. 아버지는 근원이며, 아들은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온 과정이며, 그 영은 우리에게 도달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최종완성이다"(93-삼분, 90쪽).

그러나 "성부는 신성의 근원이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홀로 영원히 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그 영은 최종 완결된 것이 아니고, 항상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시는 영으로서 처음부터 완전한 영이시다. '영원한 나오심'(pro- cessio aeterna)이라는 신학적 용어가 있다는 그 자체가 교부시대부터 정립된 교리임을 알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에도 이것이 명시되어 있다: "The Holy Spirit is eter- 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3-8. 보혜사이신 주님 자신의 또다른 형태의 보혜사 성령

"주님은 요 14:16~17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실제)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또 다른 보혜사를 언급하셨을 때, 이 보혜사가 또다른 형태 안에 계신 그 분 자신임을 말씀하고 계셨다. 그 분은 육신 안에서 보혜사이셨지만, 부활 안에서 그 영이 되셔서 또다른 보혜사가 되셨다. 이 영이 실제의 영이신데, 그리스도의 실제이다. 그 분이 실제의 그리스도, 실제의 예수시다"(90-그 영, 21쪽).

3-9. 세 부분으로 구성된 한 인격의 하나님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한 분 하나님으로서 경배한다"(90-그 영, 22쪽);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거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93-삼분, 52쪽);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세 이름이 아니라, 신성한 삼일성의 유일한 이름이다. 이러한 이름은 복합적인 칭호이다. 성경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이나, '주 예수'나, 혹은 '주 영'(고후 3:17)과 같은 많은 신성한 칭호들이 복합적인 칭호이다. 마 28:19에 있는 복합적인 이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93-삼분, 52쪽).

IV. 결론

1951년부터 54년까지에 전파한 윗트니스 리의 설교의 내용이 처음으로 알려졌을 때(54-영봉, 서문)의 내용과 약 10년 후에 출판된 글(1963-64)과 30년후의 글(1994년)을 비교하면서 그의 생각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를 살핌으로써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윗트니스 리는 처음부터 주께서 부활하심으로 그 영 곧 성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영이 되심으로써 그들 안으로 들어가셨다"(54-영봉, 49쪽). 그 영이 되었다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승천을 인정한다: "비록 그 분이 나중에 하늘로 승천하셨지만, 그 분은 여전히 제자들 안에 내주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는 그 영이셨고, 또 이날까지 그러하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도 그러하실 것이다. 오늘날 그 분은 하늘에 앉아 계시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그 영으로서 영 안에서 믿음으로 그 분을 접촉하는 모든 자들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54-영봉, 50-51쪽).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승천하신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영 곧 성령이 되신 것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영이 되심으로써 그들 안으로 들어가셨다"(54-영봉, 49쪽). "오늘날 그 분은 하늘에 앉아 계시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그 영으로서 … 제자들 속으로 들어가신다"(54-영봉, 50-51쪽).

1963년부터 64년에 출판된 책에서는 양태론의 증거가 완연히 나타난다. 주님은 부활 후 그 영이 되셨다는 것이고 승천에 관한 말은 없다: "그 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육신 안에서가 아닌 그 영으로서 그들에게 돌아오셨다. … 지금 주님은 그 영이시므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다. …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후에 그 분은 그 영이 되셨다. 오늘날 바로 이 영이 우리 안에 있다"(63-누림, 33쪽). 요 20:21~22에 근거하여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은 저희 안으로 숨을 내쉼으로 성령이신 그 분 자신이 저희 안으로 들어오셨다.

… 그 호흡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었다"(64-신약1, 92-93쪽). 요 14:17~18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또 다른 보혜사이신 그 영은 다름 아닌 또 다른 모습(형태)의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이해할 수 있다. … 그 분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 분은 영으로 변화되셨다. 우리는 이것을 물과 수증기로 예를 들 수 있다. 물이 수증기가 되더라도, 물의 본질은 여전히 동일하다. 그것은 형태만 다를 뿐이다. … 그 분은 또 다른 형태로 변화되고, 변모되셔야 했다"(64-신약1, 95-96쪽). "그 분은 죽고 부활하시고 나서, 그 분은 그 영으로 변화되셨다. 그리고 그 때에 그 분은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었다(64-신약1, 98쪽).

이렇게 말함으로써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는 것, 아버지가 아들이고, 아들이 그 영이라는 것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이 아닐 수 없다: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심으로써 그 분의 인성은 변화되어 그 분의 신성 안으로 이끌려졌다"(64-신약1, 100쪽).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셋이시다. 그러면 세분이 우리 안에 계시는가? 아니면 한 분이 우리 안에 계시는가? 우리 안에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이시오, 아들이 그 영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 안에 세분이 계셔야 한다(64-신약2, 175쪽).

결국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성경보다도 체험을 강조한다: "다시금 이것은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을 우리의 체험에 의해서만 깨닫게 될 수 있음을 예시해 준다. … 실제적으로, 우리의 체험 안에서, 세분은 하나이시다"(64-신약2, 175쪽).

그러나 윗트니스 리의 생각은 순식간에 또 바뀌어 세 분 모두가 우리 영 안에 계신다고 한다: "오늘날 세 분 모두가 우리 영 안에 계신다. 우리는 세 분이 분리되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64-신약2, 176쪽).

그러면서도 윗트니스 리에게 하나님은 세 분일 수는 없으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라고 담대하게 말한다(64-신약2, 234쪽). 이와 같이 그는 끝까지 철저하게 단일신을 고집한다. 부활 후에 숨으로 내쉰 호흡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한 것은 그 양태 곧 변모의 과정까지 세심하게 변증한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 안으로 성령을 호흡해 내셨는데, 그 호흡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었다"(64-신약1, 92-93쪽).

보혜사는 변형된 주님이시다 라는 생각은 양태론이 아닐 수 없다: 요14:17-18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또 다른 보혜사이신 그 영은 다름 아닌 또 다른 모습(형태)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 분은 영으로 변화되셨다. 우리는 이것을 물과 수증기로 예를 들 수 있다. 물이 수증기가 되더라도, 물의 본질은 여전히 동일하다. 그것은 형태만 다를 뿐이다. 그 분은 또 다른 형태로 변화되고, 변모되셔야 했다"(64-신약1, 95-96쪽). "그 분은 죽고 부활하시고 나서, 그 분은 그 영으로 변화되셨다(64-신약1, 98쪽).

"주님은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분은 육신에서 놀라운 인격이신 그 영으로 변화되셨다(고전 15:45下). 우리 안에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이시오, 아들이 그 영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 안에 세분이 계셔야 한다. 다시금 이것은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을 우리의 체험에 의해서만 깨닫게 될 수 있음을 예시해 준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체험 안에서, 세분은 하나이시다"(64-신약2, 175쪽).

결국 윗트니스 리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시다"(64-신약2, 234쪽).

90세에 쓰여진 글에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God's Economy and the proper Livng of a God-Man)은 1994년 10월 18일부터 21일에 켈리포니아 아나하임에서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로부터 온 장로들과 가진 교제에서 윗트니스 리가 준 메시지이다: "먼저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 둘째로, 육신 안에 계신 이 분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94-경륜, 14쪽). "하나님은 셋이 아니다. 그 분은 하나이면서 셋인 분이시다. 그 셋의 최종완결이 누구에게 있는가? 그것은 개시(開始)인 아버지에게 있지 않다. 또 과정인 아들에게도 있지 않다. 삼일 하나님의 최종완결은 그 영에 있다. 그 영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완결이다"(94-경륜, 26쪽).

더욱이,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 되심은 엄청난 '되심'이라는 주장에는 아연실색치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 되심은 엄청난 '되심'이다, 하나님의 영은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의 과정을 통하여 최종 완결된 영이 되셨다. … '되다' 라는 단어는 엄청난 것을 포함한다. …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이 문제를 본 사람은 극소수이다. 오히려 어떤이들은 고전 15장45절 하반절이 말하는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는 말씀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 … 오늘날 생명 주는 영은 최종 완결된 영이다"(94-경륜, 29쪽). "고후 3:17이 말하는 바, '주는 그 영이시니' 주님이 그 영이 되어서 우리 안에 계시므로 18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날마다 변화되고 있다"(94-경륜, 30쪽). "하나님은 하나이면서 셋--아버지, 아들, 영--인 분이시다. … 이 영은 곧 부활 안에서 변형되신 그리스도가 삼일 하나님의 최종완결이시다. 교회가 하락(下落)할 때, 이 최종 완결된 영은 일곱 영이 되었다"(94-경륜, 33, 40쪽).

이로써 우리는 윗트니스 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일신 사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성경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고전 8:4에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 한다. 이 말씀은 6절과 연결시켜야 한다. 원어 '헤이스'를 우리말 성경에 '한' 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4절에서와 같이 '한 분' 하나님으로 하면 명백해진다. 그 한 분 하나님은 곧 아버지라는 것이다(고전 8:6).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다. 아들이 한 분이시고, 성령이 한 분이시다(엡 4:4~6).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 분이시지만, '한' 하나님이시다. 이 세 분의 권능과 지혜와 지존하심이 영원하시며, 무한하시며, 불변하시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시다.

삼위란 세 위격(位格, three persons) 곧 '세 분'이라는 뜻이고, 일체(一體)란 '한 몸'이 아니고, '하나' 라는 뜻이다(참고: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1~3의 말씀 곧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를 바로 번역하고, 3절을 능동문으로 고치면, 다음과 같이 되어 보다 명백해진다: "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그 하나님을 향하여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그 하나님을 향하여 계셨고, 그 하나님께서 그 말씀(성자)이 없이는 만물을 지은 것이 하나도 없었느니라". 여기서 그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은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 아버지가 육신이 되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에도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이 육신이 되셨다 라고 우기니, 도대체 어떠한 심장인가!
(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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