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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yoga)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와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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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yoga)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와 경계
  • 한국기독교이단목회연구소 강경호 목사
  • 승인 2015.10.22 10:15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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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이단목회연구소 소장 강 경 호 목사

▲ 한국기독교이단목회연구소 강경호 목사

오늘 한국 기독교는 무속(巫俗), 불교(佛敎), 유교(儒敎), 도교(道敎) 신앙이 혼합 형태를 띠고 있거나 기복적인 요소가 신앙 안에 어느 틈인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똬리를 틀어 좌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요가다. 이러한 요가의 모든 몸 동작은 뱀의 움직임과도 같으며 실은 뱀이 똬리를 틀듯 꼬리뼈 부분에 머물다가 ‘7 차크라’를 거쳐 등뼈를 타고 올라 뇌 속의 번갯불 같은 번쩍임에 이른다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쿤달리니’가 곧 ‘뱀심’(蛇力)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가가 웰빙바람을 타고 들어와 지금도 열풍이 식을 줄 모른다. 최근에는 대학 내에 요가학과가 생기고, 요가지도사 자격증에 도전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또한 어느 지역에서나 쉽게 요가학원 등을 볼 수 있듯이 요가가 우리 생활과 더욱 밀접해지고 있다. 특히 유명 연예인들이 요가로 다이어트에 성공해 젊은 여성들에게는 환영받는 다이어트의 방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요가의 인기는 기독교인이라고 예외가 아니라는데 있다. 문제는 기독교내에 요가를 경계하는 목소리마저도 없다는 것과 함께 오늘날에는 아무런 부담감 없이 요가를 즐기는 기독교인이 많아진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요가’는 단순히 유행처럼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이미 요가는 많은 사람들의 건강과 심신 단련의 중요한 수단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사회 안에서 안정되게 정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집이나 직장 인근의 요가센터, 구민 복지관, 백화점 문화센터, 학원, 노인 대학, 심지어 교회에서도 요가를 가르친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요가는 가장 인기 있는 강좌 중 하나이고, 초등학교 방과 후 학습 시간에 요가를 가르치는 곳도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떤 교회의 경우는 요가 강습을 알리는 광고를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 요가 수강생들을 교회 안에서 모집하기도 한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에게 요가의 숨은 위험성을 무릅쓰고 다양한 접근을 하고 있다. 즉 요가에 대하여 힌두교 색체를 배제하고 운동으로 접근하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소위 ‘홀리(신성한)요가’를 하는 크리스천 요가 수행자들은 ‘옴’을 빼고 ‘아멘’으로 대신한다. 그리고 홀리요가 클래스는 해당 클래스를 위한 주제인 성구로부터 시작한다. 각 포즈는 일반 요가와 같다. ‘요가’라는 산스크릿어를 싫어하는 차루랑가는 “높낮이 팔굽혀펴기”라고, 사바사나는 “시체포즈”라고 변경하여 부른다.

한국요가문화협회 정강주 회장은 요가의 세계적 인기를 종교성에서 찾고 있다. 즉 요가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복음이기 때문에 각광받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요가는 모든 종교의 밑바탕이 되고, 몸을 통해 호흡과 명상으로 깨달음을 추구한다고 설명한다.

흔히 요가를 동작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요가는 체조, 호흡, 명상의 3요소가 일체를 이룰 때 그 효과가 상승된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요가학원에서는 요가 호흡법에 익숙해지고 동작에 적응하기 시작하면 곧 명상을 통한 정신 수양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요가라는 말의 뜻은 ‘결합시키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바로 겉으로는 이 ‘결합’이란 자연과 인간의 결합을 의미한다. 즉 “자연과 인간의 합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요가는 호흡을 통해 우주의 에너지를 축적하고 명상을 통해 평온하고 안정감 있는 최상의 정신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눈가림에 불과하다. 실은 어떤 절대자와의 결합이며, 그 절대자는 힌두교에서 섬기는 신이다. 즉 요가는 몸으로 하는 ‘힌두교식 기도, 명상’이다. 실상 요가의 수행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은 불교와 힌두교에서 자신들의 신과 합일(한몸이 되는) 종교 의식과 일치한다. 따라서 다이어트, 스트레칭, 명상이라고 위장된 요가는 단순한 건강 단련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힌두교 종교 의식의 하나라는 것이다.

즉 요가에는 종교성이 녹아 있다. 요가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종교성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이 거의 무비판적으로 요가를 받아들이고 활동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운동 삼아 요가를 많이 하지만, 깨달음을 목표로 명상에 빠지다 보면 영적․종교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가는 단순한 운동, 스트레칭, 다이어트가 아니다. 한마디로 요가는 몸으로 하는 힌두교의 의식이다. 이를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나쁜 흑암의 세력을 자기도 모르게 경배하고 섬겨 그 영과 합일(일치)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요가를 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정서가 차분해지며 육체적인 피로도 많이 풀린다고 한다.

이러한 요가는 관념적인 사상 체계가 아니다. 요가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괴로움을 자기 안에서 찾고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몸과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자연에 그대로 몰입함으로써 절대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그리고 마음 속에서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몸에는 한 점의 부조화도 없는 상태로 자신이 절대가 되는 특수한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요가의 핵심은 참 나를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즉 참 나를 발견하면 거기서는 위대한 힘과 지혜가 떠오른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요가는 정신을 맑게 하고 육체를 단련하는 데는 크게 종교에 관련지을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가에는 인간과 하나님을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드는 사탄의 고도 전술전략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거기에는 악한 영이 똬리를 틀고자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비우라고 종용하는 일이 있게 된다. 또 네 자신이 신이라고 부추기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도록 조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뉴에이지 사상이다.

그런데 요가가 가진 운동으로서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이 요가를 무조건 받아들이기에는 위험한 요소가 많다. 따라서 요가가 가진 종교성을 인지하고 기독교 세계관에 배치되는 사상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독교계 역시 요가를 경계하기보다 흡수 또는 동화시키며 신앙에 활용하고 있다. 이른바 ‘크리스천 요가’란 이름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요가와 기독교 신앙이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이충웅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첫째, 요가 자체가 힌두교 자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요가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요가를 종교가 아닌 운동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가는 단순한 건강 증진이나 마음의 수양을 위한 수련법이 아니라 힌두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요가는 힌두교의 핵심으로 인도하는 네 가지 요소 중 하나다. 카르마, 마야, 니르바나, 요가로 힌두교에서 요가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영원한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하기 위한 수행법이다. 이러한 요가는 힌두교 신과의 합일이다. 대표적인 ‘하타 요가’의 경우 시바에게 바쳐지는 힌두교인들의 수행 방법이다.

둘째, 요가는 힌두교의 선교 전략이다. 소위 ‘라마크리슈나 미션’이 요가를 온 세상에 전파한다. 라마크리슈나는 19세기 캘커타 칼리 사원의 사제로 신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자신 스스로 신을 바라보고 몸으로 느꼈다. 이후 그의 제자인 비베카난다가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인도 캘커타에 세우면서 전 세계에 힌두교와 요가를 전파하게 된다.

셋째, 요가는 뉴에이지 운동이다. 뉴에이지란 서양의 세속적 인본주의와 동양의 고대 신비주의적인 인본주의 운동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없이 인간성의 회복과 참된 평화, 그리고 참된 행복이 실현되는 새로운 시대를 이룩하려는 범세계적인 종교 운동이다.

요가는 현대 사회 사람들에게서도 성행하고 있다. 이러한 요가가 어떤 이들은 육신적인 건강을 위한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은 종교적 진리를 추구한다는 목적 하에 이를 행하고 있다. 이러한 요가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인도의 심신 수련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즉 요가는 몸으로 하는 힌두교식 기도 명상이다. 이러한 요가의 수행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은 다름 아닌 불교와 힌두교의 수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가가 비만 해소와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며, 몸을 유연하게 하고, 정서를 안정시키는데,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많은 사람들이 요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요가는 분명한 것은 인도종교 고행(苦行)수행에 기원되었으며, 교회 일부에서 명상이니 영성이니 하면서 참선하는 모습과 흡사하게 명상, 관상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에 교회 예배당이 사찰 법당으로 착각이 될 때가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세상문화와 전통종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해보지 않고, 쉽게 받아들이는 이러한 태도를 바꿔야 한다.

웰빙 열풍을 타고 침투한 요가가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 같지만 이방종교와 신접(神接)하는 행위이다. 즉 다이어트나 명상과 함께 붙어다니는 요가는 단순한 건강 단련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의 하나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요가가 힌두교식 기도라는 사실을 모르고 행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종의 이방 종교 의식을 우리 삶 속에서 행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건강을 위해 혹은 심신의 수련과 차분한 정서를 갖고 학습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별 생각 없이 하는 요가가 흑암의 세력과 나쁜 영들에 노출되는 통로가 된다. 심지어는 이방 신들과 접촉하는 결과까지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또한 크리스천의 삶에서 요가를 허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요가를 통해 얻어지는 차분함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나 평화가 아니다. 요가를 함으로 자신도 모르게 이방 종교식 기도를 하며 이방 신들과 접촉하는 통로를 열어 놓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분명 요가는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의 대표적인 수련법이다. 이에 이 시대의 가장 반기독교 사조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은 동양의 신비주의 종교, 특별히 인도의 힌두교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힌두교의 대표적인 수련법 중의 하나인 요가를 기독교인이 수용해서는 안 된다.

요가의 수련법이 반기독교적 세계관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힌두교에 대한 이해를 할 때에 더 알 수 있다. 즉 힌두교에는 영혼구원의 길이 세 가지 있다. 그 하나는 업보를 쌓는 길이다. 이것은 종교적 의식과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헌신의 길인데, 이것은 신을 사랑하며, 신에 대한 완전한 의탁과 신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으로 특징짓는다. 마지막 셋째로 지식의 길이 있다. 여기서 지식이란 신비한 깨달음(覺)의 경지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다. 그런데 요가는 이 세 가지 구원의 길에 있어서 세 번째에 속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진정한 실체는 온 우주의 유일한 실체인 브라만(대우주정신)에 종속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인간이 브라만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각기 독립된 실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세상에는 온갖 고통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에게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자신이 독립된 실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대우주정신인 브라만에 종속되는 길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 개인이(힌두교에서는 한 개인의 정신을 ‘아트만’이라고 한다) 대우주정신이 브라만에 귀속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대우주 속의 일부라고 ‘깨닫는’ 길뿐이다.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힌두교도들은 여러 가지 수련과 고행과 명상, 참선 등을 수행한다. 이러한 수련 과정을 통하여 한 개체는 이제 독립적 실체에서 벗어나 브라만에 함몰, 또는 합일되는 완전한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힌두교의 구루(Guru-스승) 중의 한 사람인 오쇼 라즈니쉬는 「저 너머의 신비와 시」에서 명상을 통해 우주와의 합일의 경지로 들어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침묵하라. 눈을 감아라…그대가 그대의 중심으로 깊이 움직여 들어가면, 그대는 거대한 정적과 미묘한 침묵, 커다란 평온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가 중심에 도달하면…이 중심이 우주와 연결시켜 준다. 이 문을 통해서 그대는 우주로 들어갈 수 있고, 존재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마헤리쉬 요기 같은 구루는 만트라(mantra: 영적 스승이 신참자에게 은밀히 주기도 하는 외견상 무의미하게 보이는 산스크리트어)의 반복적 암송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만다라(mandala: 매우 정교하게 구성된, 종종 매혹적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원형 모양으로서 실재의 완전성에 대한 상징)에 대한 묵상도 수련법의 하나로 권장된다. 요가 역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힌두교도들이 깨달음의 길로 가기 위한 하나의 수련법이다. 특별히 요가는 참선이나 명상, 묵상과는 다르게 브라만과의 연합을 가능하도록 촉진시켜 주는 모든 신체적, 정신적, 영적 훈련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교적인 종교적 수련법이 어떻게 현대인들에게, 특별히 세상문화를 분별해야 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조차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일상의 삶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유야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요가가 종교적 수련법이라는 실체를 감추고 현대인의 건강과 무병장수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을 빼거나 또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킬 수 있는 하나의 건강 프로그램으로 접근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탄은 때론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접근해 와서는 결국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후11:14). 따라서 이제 그 실체를 안 이상, 우리 기독교인은 건강을 이유로 다른 종교의 수련법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지 못한 일로 여겨야 한다. 특별히 요가 수련법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수련에 의해 구원의 길에 도달하고자 하는 반기독교적 구원론과 맞닿아 있다면 우리 기독교인은 더더욱 경계해야 될 일이다. 따라서 “건강을 위해서인데 그게 뭐 그리 대수냐”라는 주장은 위험한 육신 중심한 신앙관이다. 오히려 성경은 분명 (살전5:22)“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미국 남침례교신학교 알버트 모흘러 총장도 미국에서 불고 있는 요가 열풍에 대해 “요가는 기독교 신앙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모흘러 총장은 ‘미묘한 육체, 크리스천은 요가를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요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육체에 대한 이해로 일관한다. 믿는 자들은 육체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크리스천 요가’란 것이 가능하다면, ‘크리스천 기운동’, ‘크리스천 타이치(太極)’, ‘크리스천 펑슈이(風水)’, ‘크리스천 최면술’, ‘크리스천 점성술’, ‘크리스천 초월명상(TM)’도 생겨날 수 있다. 심지어는 ‘크리스천 레이키(靈氣)’, ‘크리스천 염불’, ‘크리스천 강신술’도 받아들여지고 용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 요가’란 용어는 ‘그리스도+벨리알’이란 공식과도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조화를 이룰 수가 결코 없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주로 배우고자 하는 요가는 「하타요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몸으로 만의 하타 요가를 배우고자 할 때에도 우리는 결코 거기에만 머무를 수 가 없다. 그 기본 및 궁극적인 정향성은 결국 영성(靈性) 혹은 종교성(宗敎性)이기 때문이다.

“요가란 단순하게 몇 가지 동작만을 가르치거나 체형을 교정하는 기술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건강과 영혼을 맑게 만드는 영적(靈的)인 귀감이 되는 진정한 스승(구루)이 되시기를 권유하는 것입니다”(홍익요가연구원)

“요가는 모든 종교의 핵심인 명상을 수행의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붓다, 예수, 마호메트, 선승 등의 깨달음, 계시, 신통력 등이 모두 요가 즉 명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요가 코리아)

“요가는 의타적 자세가 아니고 스스로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내어 새롭게 배우고 깨치는 자기 믿음의 길이고 자신과 주변에 대한 이해의 길이다. 요가는 예속된 종의 길이 아니고 자유로운 주인의 길이며, 저 세상으로의 도피적 태도와 사후 지옥에 대한 공포의 태도가 아니고, 이 세상에 대한 탐구와 인간 스스로 해결을 짓는 창조적 성장의 길”이다.(요가라이프)

그런데 예수님을 요가 수행자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예수가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몇 년간을 하타 요가를 배우는 요기로서 인도의 카슈미르에서 지냈다고 하는 것이다. 인도 내에서 일부 힌두교도들, 특히 시바파 사두들은 예수가 환영으로부터 자유롭고 초능력을 사용한 것은 요기로서 훈련을 한 결과라고 말한다. 즉 바다 위를 걷고, 크고 작은 기행을 벌이며,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것 등이 그가 요가 수련을 통해 그 부수적 산물인 초능력을 갖게 된 증거라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한 이야기는 예수가 요가 수행자였다는 전설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호흡 조절법을 통해 심장박동을 멈추게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하타 요가에서처럼 예수는 육신을 정신적인 성숙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신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행을 함으로써 그 모든 죄들을 태워버렸다. 이러한 주장들에 따르면 예수는 3일간의 깊은 수면 후에 제자들에게 잠깐 나타났다가 인도의 카슈미르로 가서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는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기도 한다.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예수를 다른 종교창시자처럼 요가 명상가로 보는 점, 인간의 죄성을 부인하는 점, 자력구원을 내세우며 하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다는 점 등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요소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자신 안에 저런 사유방식들과 그리스도교 고유의 신앙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다고 여기고 통합을 도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영적 만용이다. 그리고 반드시 차이점들이 따라와서 충돌하고 말썽을 부리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종교에서 혼합주의(syncreticism)는 금물인 것이다.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다면 요가의 모체인 힌두교 신앙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알려져 있듯이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3억 3천만여 신을 숭배하는 다신교를 배경으로 생겨났다. 힌두교는 승려를 정점으로한 엄격한 계급주의(카스트제도)와 나중에 불교의 기본개념이 된 업(業), 윤회(輪廻), 그리고 고행(苦行) 등을 핵심교리로 삼고 있는 종교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가 자신 안에 왜곡된 신앙요소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 때는 문제가 안 될 수 없다.

육신의 건강을 추구하고 자신을 육성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악한 영에 의해서 조정을 받는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각자 마음속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나, 자신의 능력을 일깨우는 것도 정상적인 방법을 찾아서 해결해야지 악한 영의 힘을 빌어서 일시적인 안정을 찾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이므로 피해야만 한다.

요가가 가진 운동으로서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이 요가를 무조건 받아들이기에는 위험한 요소가 많다. 따라서 요가가 가진 종교성을 인지하고 기독교 세계관에 배치되는 사상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현대 교회는 예배 기능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와 함께 하기 위해서 교회건물을 문화센터공간으로서 제공하고 있는 교회들이 많아지고 있다. 즉 컴퓨터방, 도서관, 상담실, 취미교실 등으로 교회가 지역사회에 개방되어 지역주민들이 교회를 부담 없이 이용하므로 열린 교회로 나가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 안에서 이런 것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방 신들과 접촉하는 통로를 열어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한국교회 곳곳에서는 새로운 지역선교의 수단으로 문화센터가 주목받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교회문화센터를 어떻게 복음과 연결지어야 할지도 고민해야지 악한 영에게 들어와 활동할 수 있는 멍석을 깔아준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임을 경계하고 막아내야 한다.

각 주 생략, 참고 문헌
“크리스천과 요가는 물과 기름”
뉴스미션, 이동희 기자, “몸은 ‘개운’, 영은 ‘찜찜’-요가의 영적 메세지 주의해야”,
노우호, “그리스도인은 요가를 해서는 안됩니다.”(http://cafe.daum.net/lonelylane/k5AC/163)
“크리스천 요가, ‘옴’대신 ‘아멘’”,「크리스찬투데이」, 2012. 3. 28.
“한국교회 요가에 영적메시지 주의해야”, http://cafe.daum.net/dm3179/21xX/323
박재권, “요가, 무엇이 문제인가?”, http://cafe.daum.net/dm3179/21xX/318
신상목, “‘요가, 힌두교의 선교 전략이다’ … 이충웅 김천대 교수”, 「국민일보」, 2011. 10. 4.

“요가 다이어트, 명상은 성경적인가?”, http://cafe.daum.net/RAACH/YmV/31

김대진, “요가, 요주의!”, 「교회와 신앙」, 2003. 7. 16.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21
신상목, “미국은 지금 요가 열풍… 남침례교신학교 알버트 모흘러 총장 경고”, 「국민일보」, 2010. 9. 25.
“‘크리스천 요가’, 괜찮나?”, http://cafe.daum.net/dm3179/21xX/322
“‘요가’는 괜찮은가?”, http://cafe.daum.net/dm3179/21xX/320
Richard Waterstone, INDIA, 이재숙 역, 「살아있는 인류의 지혜 인도」, (서울: 도서출판 창해, 2005), p.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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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돌이 2017-07-13 11:21:1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꼼꼼하게 분석해 주셨네요.
그리고 kenosis님, 우리가 서양의학/약학을 온몸으로 느끼고 깨달으려고 하며 서양의 의학/약학과 하나가 되고자 합니까? 아닙니다. 그저 서양의료법에 따라 좋은 것을 취하여 건강을 찾는 것입니다. 요가는 좋은 것만 찾아 취하기에는 이방신이라는 악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지요.

kenosis 2016-02-22 10:59:09
요가에 관한 지식 부족과 기독교요가인들에 대한 현실 간과가 염려됩니다. 특히 논리적 오류가 많이 보입니다. 다음 문제를 풀으시면서 생각을 다듬어보심은 어떨지?
서양의학/약학은 철저히 유물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깊이 들어갈수록 영적인 그 어떤 것은 없다. 유물론은 기독교의 영적 세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 서양의학/약학을 신뢰하고 접할수록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좀 먹는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정윤석 2015-10-26 04:15:09
댓글 감사합니다~ 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며 경계하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sori 2015-10-24 22:51:47
.요가에 대한글을 잘 읽었습니다. 역시 꼼꼼하게 쓰셨는데 요가에 대한관심들이 없나 댓글이 없네요
요가나 단월드가 생활체육이나 건강문제로 가장한 사이비 종교단체의 포교수단인데 교회가 광고까지 하며
교회 안에서 요가를 한다는게 무지인지 무관심인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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