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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본 신사도운동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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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본 신사도운동의 영성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5.07.01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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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한일 이단사이비대책세미나, 장로회 신학대학교 최윤배 교수 발제문

예장 통합측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가 2015년 6월 25-26일 제주중문교회에서 한일연합이단사이비대책 세미나를 열었다. 한국측 강사로 나선 최윤배 교수(장신대)는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본 신사도운동의 영성'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일본측 강사인 藤枝宗浩 선교사는 신천지 예수교증거장막성전에 의한 일본의 피해상황을 주제로 강연했다. 이중 본 사이트(www.kportalnews.co.kr)는 최윤배 교수의 논문을 올린다. 원문엔 주석이 빼곡히 달려 있지만 기술적 문제로 표기하지 않았다. 주석에 인용한 문헌은 가장 하단의 참고 자료를 보시면 된다. [편집자주] 

▲ 제주중문교회에서 진행한 예장 통합측 2015년 한일연합이단사이비대책세미나(사진 대전종교문제연구소: 소장 강종인 목사)

Ⅰ. 서론

1906년 미국 아주사부흥(Azusa Revival)을 기점으로 시작된 󰡐신사도(개혁)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은 ‘늦은 비의 새 질서’(New Order of the Latter Rain) 운동을 거쳐 󰡐빈야드 운동󰡑(Vineyard Movement)에까지 발전했다. 빈야드 운동은 1990년대 중반 토론토와 플로리다 펜서콜라를 중심으로 다시 크게 일어났다. 1994년부터 존 아놋(John Arnott)은 토론토공항교회(Toronto Airport Christian Fellowship)를 중심으로 소위 ‘토론토 블레싱’(Toronto Blessing) 또는 ‘거룩한 웃음 운동’(Holy Laughter Movement)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성령세례로서의 ‘은사’ 운동에서 시작하여, ‘치유’운동과 ‘예언’운동 및 ‘이적’과 ‘기사’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외국의 신사도운동가들이 한국교회와 각종 집회에 강사로 초청되거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나 평신도가 현지에 직접 방문하여 영향을 받아 다시 귀국하여 한국에 영향을 미치거나 매체들, 즉 원서와 번역서나 인터넷 등의 온-오프라인을 통해 강력하게 전파되었다. 한국교회 안팎에서 개최된 일종의 은사, 치유, 예언과 기적집회와 세미나 등에서 혼란스런 방언 현상, 우울증 등 치유 현상, 예언 현상, 이적과 기적 현상이 나타나면서 괴이한 소리 현상, 쓰러짐 현상, 술 취한 듯 비틀거리는 현상, 혀가 풀려서 웅얼거리는 현상, 팔이 길어지거나 짧아지는 현상, 발광하면서 괴성을 지르는 현상, 울음 현상, 금이빨과 금가루 현상, 웃음 현상, 입신 현상, 심리학이나 최면술(催眠術) 등의 효과 현상 등이 나타나면서 한국기독교의 대표 교단들이 경계의 목소리를 냈다. 최태영도 직제 등을 중심으로 신사도운동을 정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정작 신사도운동이 발생한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그 영향이 최근 급격하게 감소했지만, 그 반대로 한국교회에서는 신사도운동의 신앙과 신학이 평범해 보이는 각종 신앙수련회나 신학세미나 속에 암암리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와 신학과 목회와 선교를 위해 신사도운동을 ‘개혁주의’,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우리는 본고에서 ‘영성’과 ‘개혁신학’ 또는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먼저 정의하고, 신사도운동에 대한 역사적(歷史的) 개요를 기술한 후, 신사도운동의 영성을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평가할 것이다. 본고에서 미리 밝혀두는 사실은 본고에서 활용된 자료는 국내외 2차 문헌자료에 제한되었다는 것과, 외국에서 일어난 신사도운동에 제한되어,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사도운동에 대한 자료나 연구가 전혀 포함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Ⅱ. 용어 정의
1. ‘영성’에 대한 정의

국어사전은 ‘영성’(靈性)을 ‘신령한 품성’으로 풀이한다. 독일이나 네덜란드 신학계에서는 주로 ‘경건’(Frömmigkeit; vroomheid)이나 ‘종교성’(Religiosität; religiositeit)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오다가 프랑스 로마가톨릭교회 신학과 세계교회협의회(WCC) 운동 속에서 ‘영성’ (Spiritualität; spiritualiteit)이라는 단어가 1960년대 초부터 자주 사용되었다.

‘영성’이라는 말이 얼마나 다양하게 사용되는지 다음의 분류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① 역사, 연대적 척도: 초기교회 영성, 중세교회 영성, 현대교회 영성 등 ② 민족, 지리적 척도: 서양 영성, 동양 영성, 한국 영성, 일본 영성 등 ③ 생활상태의 척도: 수도자 영성, 사제 영성, 평신도 영성 등 ④ 직업의 척도: 교사 영성, 공무원 영성, 의사 영성, 농부 영성 등. 위 분류로부터 볼 때, ‘영성’이라는 말 자체는 일반 종교나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우리는 단순하게 영성의 범주를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비종교적 영역, 가령 일반 사상이나 철학 등에서 사용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영성(spirituality)은 어떠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든지, 또는 누구의 정신과 가치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둘째, 종교적 영역에서 사용되는 종교적 영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 영성은 해당 종교나 종교단체가 종교적 체험을 통해서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표현하고, 실현한 종교적 삶의 양식(樣式)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영성은 ‘종교성’과 종교적 실천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영성이 종교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카프라(Fritjof Capra)의 질문, “신학의 목표는 무엇이며, 신학은 제도화한 종교 그리고 인간의 내면으로 흐르는 영성과의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지에 대한 매터스(David Steindl-Rast)의 다음의 대답 “종교 없는 영성은 가능하지만 영성 없는 종교는 불가능하다. 제대로 된 종교라면 영성을 빼놓고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 다음에, 신학의 이론이 없이도 종교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종교와 종교적 영성이 없이 제대로 된 신학이 나올 수는 없는 일입니다.”에서 잘 나타난다.

셋째, 기독교 내에서 기독교 영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여러 종교들 중 하나라는 비교종교학적 의미나 종교다원주의적 의미에서 기독교 영성은 두 번째 범주에 넣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기독교 영성을 신학적 방법 때문만이 아니라, 필자의 주된 신학적 관점은 ‘개혁신학’이기 때문에 타종교의 영성과 기독교 영성을 질적으로 구별하고자 한다. 맥그라스(A.E. McGrath)는 영성에 대한 기본 정의를 “특정종교의 독특한 개념들과, 특정종교의 기초와 양상에 근거한 삶을 가져오는 것을 포함하면서, 성취된 그리고 참된 종교적 삶에 대한 탐구와 관계된다.” 라고 말하고, “기독교 영성은 기독교의 근본적 개념들과, 기독교신앙의 기초에 근거하고 기독교신앙의 국면 안에서 사는 것에 대한 총체적 경험을 함께 가져오는 것을 포함하면서 성취된 그리고 참된 종교적 삶에 대한 요구이다.” 라고 정의한다.

기독교 안에서도 기독교 영성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은 기독교 영성사(靈性史)나 최근의 기독교 신학자들에게서 쉽사리 발견된다. 기독교 영성사에서 “‘영성’의 의미나 사용용도가 미묘하게 여러 모양으로 변화를 겪어 왔다.”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歷史)와 오늘날의 영성과 영성운동들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 때문에, 우리가 ‘영성’에 대해 확정적으로 정의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영성과 기독교 영성에 대한 다음의 몇 가지 정의들 중에서 영성과 기독교 영성에 대한 정의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영성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상응하여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양식”이다. “영성이란 한 사람의 전인격적인, 또는 어떤 집단의 전공동체적인 삶의 태도, 가치관, 세계관, 비전들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개념이다. 따라서 영성이란 넓은 의미에서, 필연적으로 규범적인 기독교 용어라기보다는 가치중립적이며, 기술(記述)적인 용어”이며, 기독교적 의미에서 “영성이란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따라 이 세상의 현실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삶의 정신, 태도, 비전, 가치관, 방식 전체를 가리킨다.” “기독교 영성은 초월자와의 인격적인 관계-변화의 체험-역사현장에의 참여라는 3각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본 ‘경건’(pietas) 또는 영성의 본질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인데,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모든 차원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되고 확증되었으며,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복음 안에서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열려진 참 인간적인 삶의 능력인데, 우리의 인생관, 가치관, 행복관의 인식과 관계되며, 그와 같은 실천 가운데서 감격, 감사, 기쁨,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능력과 관계된다.

우리는 기독교역사와 신학에서 나타난 영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성서적 관점에서 여과시켜 수용하면서도, 모름지기 “기독교” 영성 또는 “기독교적” 영성의 초석으로서 네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론적인 기초를 가져야 한다. 기독교 영성의 삼위일체론적 관점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영성의 여러 관점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모든 시각들 중에 모든 것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기독교 영성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 있다. “기독교 영성(christelijke spiritualiteit)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에 대한 훈련과 묵상이다.”

둘째, 기독교 영성은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을 아우를 수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 기독교 영성은 “이제 올 영원한 세계를 바라 봄 때문에 지금 있는 이 세계를 외면하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이 세상의 참된 존재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 한계를 바로 인식함으로써 이 세상을 바르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다.”

셋째, 기독교 영성은 모름지기 ‘기독교적’이 되려면, 기독론(그리스도론)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우리의 영성의 실체를 찾을 수 있음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열려진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롬5:1, 10-11, 고후5:18).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화목의 관계이다(롬8:14-16, 갈4:6).”

넷째, 기독교 영성은 피조세계의 모든 장(場)들(그리스도인, 교회, 인간, 가정, 국가, 역사, 환경, 생태, 자연, 우주 등)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결부되어 성령론적이어야 한다. 창조주와 섭리주 및 구속주 성령께서 인간, 가정, 국가, 역사, 생태, 자연과 우주 전체를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과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해석과 선포와 적용과 실천을 가능케 하신다. 기독교 영성은 피조세계에 있는 모든 은사와 생명은 성령의 활동의 결과임을 인정하는 삶이며, 은혜로 비롯된 삶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기초한 삶이고, 거룩한 교회와 성도의 교통으로서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2. ‘개혁신학’ 또는 ‘개혁주의’에 대한 정의
우리가 의도하는 ‘개혁주의’ 또는 ‘개혁적’ (reformed; reformierte; 네덜란드어로 gereformeerd 또는 hervormd)이라는 일차적 의미는 ‘역사적(歷史的) 개혁신학(改革神學)’ 전통을 말한다. 역사적 개혁신학 전통은 세계 도처에 ‘개혁교회’ (the Reformed churches)와 ‘장로교회’ (the Presbyterian churches)라는 이름으로 약 5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6세기 ‘개혁파 종교개혁자들’ (Reformed reformers; 츠빙글리, 마르틴 부처, 깔뱅, 베자, 존 녹스 등)은 루터의 ‘이신칭의’(以信稱義) 사상을 비롯하여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사상을 공유하면서도 루터와 그의 전통을 잇는 루터교회 전통과 차이를 보였다. 개혁파 종교개혁신학은 후대 개혁파 정통주의신학(「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H. Bavinck, A. A. Hodge 등)과 개혁파 신정통주의신학(「바르멘 신학선언」, K. Barth, E. Brunner 등)을 거쳐 오늘날 현대 개혁신학전통(네덜란드의 A. A. van Ruler, G. C. Berkouwer, H. Berkhof, J. van Genderen, A. van de Beek, 남아프리카공화국의 A. Heyns, 독일의 J. Moltmann, M. Welker, O Weber, 체코의 J. Lochman, 영국 스코틀랜드의 T. F. Torrance, 미국의 C. van Til, D. L. Migliore, J. H. Leith, I. J. Hesselink 등)과, 한국개혁신학전통(예장통합의 이종성, 이수영, 김이태, 김명용, 김영한, 기장의 박봉랑, 오영석, 예장합동의 박형룡, 차영배, 김명혁, 서철원, 조봉근, 권호덕, 이승구, 김재성, 예장 고신의 이근삼, 유해무 등)에까지 이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츠빙글리와 부처와 깔뱅으로부터 시작된 ‘개혁적’ 또는 ‘개혁신학적’ 전통은 깔뱅의 제자 베자(T. Beza)를 통해 유럽대륙에서는 ‘개혁교회’의 이름으로 발전하였고, 깔뱅의 제자 존 녹스를 통해 영국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장로교회’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의 장로교회는 주로 미국 남∙북장로교회, 캐나다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 등이 파송한 장로교회 선교사들로부터 ‘역사적 개혁신학’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런 전통이 우리나라에서는 ‘개혁주의’, ‘칼빈주의’, “개혁신학‘ 전통, ’개혁교회‘(장로교회) 전통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교단이나 학자에 따라 종교개혁신학이나 특정한 시대의 개혁신학 전통이나 특정한 학자의 개혁신학 사상에만 국한시켜 너무나도 좁게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500년 역사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개혁교회의 신앙과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개혁된 교회(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는 개혁성과 개방성을 가진 명제를 신앙과 신학의 주요 원리와 정체성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 까지 올바른 개혁신앙과 올바른 개혁신학 전통에 대한 계승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구속사적 발전 속에서 개혁신학 전통을 올바르게 발전시켜야 한다. 그럴 때 ‘개혁주의’ 또는 ‘개혁신학’ 전통은 비로소 항상 “살아 있는 개혁신학 전통”이 될 것이다. 바빙크나 유해무는 자신들의 조직신학을 『개혁교의학』으로 명명했다.

Ⅲ. 신사도운동의 역사(歷史) 개요
신사도(개혁)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의 사상과 뼈대를 수립한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신사도운동의 기원을 1906년 아주사 부흥(Azusa Revival)으로 규정한다. 1900연말 저녁에 캔자스(Kansas)에 있는 토페카성서대학(Bible College in Topeka)의 학생들이 모여 송년집회를 가졌다. 여기서 찰스 폭스 펄햄(Charles Fox Farham)이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안수기도를 부탁한 여학생 오즈맨(Agnes Ozman)에게 기도를 해주었는데, 오즈맨이 중국어 방언을 했다. 펄햄의 제자들 중에 한 명이었던 세이모어(William J. Seymour)라는 흑인 목사도 나중에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성령세례로서의 방언을 체험했다. 그 후 오즈맨과 세이모어에 의해서 시작된 현대 오순절(Pentecost, 펜테코스트) 운동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신사도운동의 본격적 기원은 미국에서 시작되어 캐나다에서 크게 확산된 ‘늦은비 운동’ 사상이다. 늦은비 운동은 방언을 기독교의 새로운 시대의 상징으로 간주했던 찰스 펄햄 등의 사상이 더욱 발전된 바, 늦은비 운동의 정확한 명칭은 ‘늦은비의 새 질서’(New Order of the Latter Rain)이다. 그 시초는 미국인 윌리엄 브랜험(William Marrion Branham, 1909-1965)이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캐나다인 조지 호턴(George Hawtin)과 헌트(P. G. Hunt)가 서스캐처원 노스 배틀퍼드(North Battleford, Saskatchewan)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이곳이 늦은 비 운동의 실질적인 발생지가 되었다.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는 1949년 시애틀 제23차 총회에서 늦은비 운동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그 후 늦은비 운동은 수십 년간 잠적했다가, 1980년 이후 빈야드 운동과 피터 와그너의 제3의 물결운동 등에 의해 더욱 체계화되어 나타났다.

이단(異端)으로 판명되어 사라질 것 같은 늦은비 운동은 198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마이크 비클(Mike Bickle, 1955-), 밥 존스(Bob Jones), 폴 케인(Paul Cain) 등을 중심으로 ‘캔자스시티의 선지자들’(Kansas City Prophets; KCP)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 운동에 대한 어니 그루엔(Ernie Gruen) 목사의 폭로 보고서(Documentation of the Aberrant Practice and Teaching of the Kansas City Fellowship)는 신사도운동에 대한 매우 중요한 비판 자료이다. 마이크 비클이 개척한 캔자스시티펠로우십교회(Kansas City Fellowship, KCF)는 나중에 메트로 크리스천 펠로우십교회(Metro Christian Fellowship)로 개명하였고, 3,000명 이상 모이는 대형교회가 되었다. 그 후 마이크 비클은 이 교회를 사임하고, 지금의 ‘국제기도의 집’(International House of Prayer, IHOP)을 세우고, 1983년에 들었던 ‘다윗의 장막의 영(the Spirit)으로 24시간 기도하라’는 음성을 따라 24시간(356일) 기도운동을 통해 신사도운동을 전 세계에 확산시키고 있다.

또한 늦은비 운동은 198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존 윔버(John Richard Wimber, 1934-1997)에 의해서 ‘빈야드 부흥운동’으로 크게 부활하였다. 존 윔버는 척 스미스 목사가 인도하는 갈보리 채플(Clavary Chaple)에 합류하였으나 1982년에 탈퇴하였고, 켄 걸릭슨 목사가 이끌던 빈야드 크리스찬 펠로우십(Vineyard Christian Fellowship)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훗날 전 세계적인 빈야드 운동(Vineyard Movement)이 일어나게 된다.

빈야드 운동은 1989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보이는데, 1989년은 신사도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해이다. 왜냐하면 마이크 비클과 ‘캔자스시티의 선지자들’ 그룹이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폴 케인이 마이크 비클과 존 윔버 사이의 다리를 놓았다. 존 윔버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피터 와그너는 2000년 텍사스 주의 댈러스(Dallas)에서 자신이 중심이 되어 ‘국제사도연맹’(The International Coalition of Apostles; ICA)을 결성했다.

위와 같이 198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왕성하게 일어났던 빈야드 운동은 1990년대 중반에 토론토와 플로리다 펜서콜라를 중심으로 다시 크게 일어났다. 1994년부터 존 아놋(John Arnott)은 토론토공항교회(Toronto Airport Christian Fellowship)를 중심으로 소위 ‘토론토 블레싱’(Toronto Blessing) 또는 ‘거룩한 웃음 운동’(Holy Laughter Movement)을 일으켰다. 존 아놋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아 후에 신사도운동의 세계적 기수가 된 사람은 안재호(Che Ahn, 체안) 목사인데, 그는 캘리포니아의 패서디나에 있는 추수반석교회(Harvest Rock Church)에서 목회하였고, 2008년 타드 벤틀리(Todd Bently)의 사도임직식에서 피터 와그너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칭 사도이다. 그는 현재 루 잉글(Lou Engle)과 함께 약 500명의 신사도운동 교회 지도자들로 구성된 ‘국제추수선교회’(Harvest International Ministries; HIM)를 이끌고 있다.

1995년에 플로리다의 펜서콜라에서도 토론토에서 일어났던 빈야드 웃음부흥운동이 일어났다. 펜서콜라의 부흥은 1994년 브라운즈빌교회(Brownsville Assembly of God; 존 킬패트릭 목사)의 중심인물들이 토론토공항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다시 말하면 펜서콜라 부흥은 1995년 6월에 킬패트릭 목사가 존 아놋과 친분이 있던 스티브 힐(Steve Hill)을 자기 교회의 부흥강사로 초청했을 때 일어났다.

Ⅳ.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본 신사도 영성에 대한 비판

1. 사도직과 선지자직의 역사적(歷史的) 회복을 통한 역사적(歷史的) 보편기독교회의 권위 부정
신사도(新使徒)운동은 소위 ‘두 날개’로 불리는 사도직과 선지자직의 역사적(歷史的) 회복과 부활을 주장한다. 신사도운동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에베소서 4장 11절의 말씀대로 오중(五重) 직분(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복음전도자, 목사, 교사)을 교회에 허락하셨지만, 세속화된 교회들과, 교권으로 횡포를 휘두르는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교회사 속에서 사라지게 했지만, 하나님께서 종말의 대추수기(大秋收期)를 맞이하여 신사도운동을 통해 새(신, 新)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세우신다.

소위 ‘신사도 개혁교회’를 지휘하는 하나님의 엘리트 일꾼들에 해당하는 신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일반 목사들은 물론 구약의 선지자들과 바울 사도를 포함하는 신약의 사도들 이상(以上)으로 강력한 영적 능력으로 부흥과 추수를 위한 종말적 목회사역과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신사도운동의 ‘두 날개’ 주장에 대해 우리는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택하셨던 열두 사도들과, 가룟 유다 대신에 뽑힌 맛디아와(행1장),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바울 사도가(행9장) 지녔던 사도직과 동등한 사도직이 지금도 역사적(歷史的)으로 반복될 수 있는가?” 현재도 사도직과 선지자직이 역사적(歷史的)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주장은 개혁신학적 입장과는 정면으로 충돌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무 도움이나 도구가 없이도 친히 사역을 하실 수도 있고, 천사를 시켜서 사역을 하실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을 그의 사역의 도구와 수단으로 삼아 일하시는 편을 선택하셨다. 다시 말하면, 칼빈은 교회의 직분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수단으로 이해한다. 그는 에베소서 4장 11절에 대한 성경주석을 근거로 특정한 시대에만 필요했던 교회의 ‘임시직’(extraordinarium; extraordinary office; temporary office)에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를 포함시키고, 교회시대에 항상 필요한 ‘일상직’ 또는 ‘항존직’(perpectuae; ordinary office; permanent office)에 목사와 교사를 포함시킨다.

그러면 지금도 “교회가 사도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나 “교회가 사도적(apostolic)이다.”(apostolicam Ecclesiam)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네덜란드의 후껜데이끄 (J. C. Hoekendijk)는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교회의 세상에 대한 봉사를 교회의 사도성으로 이해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간주하여, 현재 교황이 제1대 교황이었던 베드로의 교황권을 역사적(歷史的)으로 계승하는 것을 사도직의 역사적 계승으로 이해한다.

여기에 반대하여 칼빈은 교회의 사도성을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교회가 구약성경의 선자자들의 말씀과 신약성경의 사도들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성경과 성령을 통하여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진리의 연속성과 ‘교리의 연속’(successio doctrinae)을 유지할 때, 그 교회는 사도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도적이며, 사도적 교회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진리의 연속성 속에 있는 교회가 바로 사도적인 교회이고, 이런 교회가 바로 사도적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미 교회 안에 있는 교회의 직분(교황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직접 부여했던 사도직이 역사적으로 계승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신사도운동은 그 동안 교회사 속에서 없어졌던 사도직과 선지자직을 오늘날 부활시켜 사도와 선지자로 부름 받아 임명된 특정한 사람들을 통해 세워지고 이룩될 ‘신사도개혁교회’를 주장하고 있다. 결국 신사도운동은 약 2000년간의 기독교회가 교권을 위해 사도직과 선지자직을 일방적으로 폐기시키고, 이 두 직분을 유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역사상의 보편 기독교회의 권위와 역사성을 결정적으로 훼손시키고 있다.

2. ‘직통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로서의 정경(正經)의 절대성 붕괴
로마가톨릭교회와 기독교(개신교, 프로테스탄트교회) 사이의 가장 큰 차이들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로서의 정경(正經; Canon)에 관한 이해일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기독교가 인정하는 66권의 성경 이외에 외경(外經)이라는 다른 책들이 포함된 성경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황무오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교황이 발표하는(ex cathedra) 교황교서는 교회전통에 속하지만, 기독교의 정경이나 로마가톨릭교회의 정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계시로 간주된다. 결국 로마가톨교회에는 기독교가 인정하는 정경에 ‘새로운 계시’가 이미 추가되어 있고, 계속적으로 추가될 수 있다.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두 날개’로서의 사도직과 선지자직의 역사적 회복은 기독교는 물론 개혁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고백하는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의 원리를 정면으로 대치될 뿐만 아니라, 그 원리의 근간을 흔들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신사도운동은 신(新) 사도와 선지자는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예언’을 받아서 예언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소위 ‘직통계시’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 2000년 교회사 속에서, 특히 몬타누스(Montanus) 이단(異端)에게서 발견되는 ‘직통계시’ 사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로서의 정경의 절대적 권위를 훼손하는 사상이다.

한국장로교회는 물론이고 세계의 대부분의 장로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제1조는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직통계시’를 다음과 같이 전적으로 부인한다.

“주님은 여러 기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회에 대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기의 뜻을 선포하시기를 기뻐하셨다(히1:1). 그리고 나중에는 진리를 더 잘 보존하시고 전파하시며, 육신의 부패와 사단과 이 세상의 악에 대하여 교회를 더 견고하게 건설하시고 또한 위안하시기 위하여 주님의 뜻을 온전히 기록해 두시기를 기뻐하셨다. … 이것이 성경이 가장 필요하게 된 원인이다(딤후3:15, 벧후1:19).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해 주시던 이전 방법은 현재 중지되어 버렸다(히1:1-2).”

칼빈도 그의 당시에 성경 자체를 무시하고, 성경 이외에 교회나 그리스도인 각자의 상황에 따라 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계시’를 주장한 열광주의자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칼빈에 의하면,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성경 이외의 ‘새로운 계시’를 받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해서 성경을 읽고, 교회에서 목회자의 설교를 경청하고, 성경공부 등을 통해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말씀에 동일하게 머물러 있어야 한다.

“요사이 어떤 견실치 못한 사람들(열광주의자들, 필자주)이 나타나서 거만하게도 성령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이 성경 읽기를 거절하면서 소위 그들(종교개혁자들, 필자주)이 죽은 문자에 아직도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그들이 순진하다고 비웃는다. …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직무는 듣지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 우리의 마음을 복음이 전해준 동일한 교리에 머물러 있게 하는데 있다.”

3. 비성경적 성령론을 통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비정상적, 비윤리적 삶
우리가 앞에서 “신사도운동의 역사적(歷史的) 개요”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신사도운동은 성령세례와 절대적인 관계에 있는 ‘방언’은사 중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치유’ 은사를 거쳐서, ‘예언’ 은사 및 ‘이적과 기적’ 은사로 옮겨갔다. 오늘날 교회와 신학에서 방언 은사에 대한 인정의 문제와, 성령세례에 대한 문제는 뜨거운 감자에 속한다.

오늘날 방언의 은사에 대한 입장은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자들 사이에도 다양하다. 그러나 필자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12장에 기록된 방언은 오늘날도 가능하며, 반드시 개인의 차원에서 성경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성령세례를 방언 은사와 성화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접과 칭의 차원에서 이해하면서도, 물세례(유아세례, 세례)와 항상 배타적 관계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필자는 신사도운동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방언의 결과로 파생된 문제나 성경적이지 않는 정통 기독교 밖의 유사(類似) 방언이나 가짜 방언을 문제 삼는다.

또한 성경은 치유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복음서에 나타난 35개 이적들 중에 ‘치유’(治癒, healing) 이적은 17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 사역(치유 이적 17회, 자연 이적 8회, 축사 이적 6회, 소생 이적 3회, 징벌 이적 1회) 중에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여기에 기초하여 어떤 신학자나 목회자는 목회현장과 선교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총체적 구원 사역 자체가 힐링 사역의 전부인 것으로 오해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전체를 그의 치유 사역으로 완전하게 환원시키는 것도 문제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부터 그의 치유 사역을 전적으로 배제시키는 것도 성경적 태도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풍부한 구원 사역 속에 그의 치유 사역을 포함시키는 것이 올바른 이해이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은 병든 사람을 고치시는 ‘라파’(רפא)의 여호와이시고(호6:1), 예수 그리스도도 공생애 동안 치유 이적을 많이 행하셨고(마15:28), 지금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치유 은사를 통해 우리를 치유하신다.(고전12:9, 28, 30) 비록 완전한 구원과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신령한 몸의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겠지만, 구원의 일부로서의 치유는 삼위일체론적 근거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 종교나 미신 속에서도 치유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성경적 관점에서 치유 은사를 인정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한 치유 사역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창조주와 섭리주 및 구속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신비하고도 놀라운 일들을 경험한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의 선지자들과 신약성경의 사도들을 통해서 행하신 이적과 기적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적에 절대적으로 기초하여,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예배와 기도와 목회와 선교현장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현장에서 신비하고도 놀라운 일들을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신중하게 평가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일부 자유주의적 성경학자들처럼 성경 속에 기록된 이적과 기적 사건 자체를 부인하여 삭제하거나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교회와 다른 수단들을 통해 행사하실 수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밖의 일반 종교세계에서나 심리학이나 최면술 등을 통해, 마치 애굽의 술사(術士)들이 모세 앞에서 행했던 것처럼, 기적이나 이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다.

신사도운동에서 자칭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행해지는 정경 이외의 ‘새 계시’로서의 예언 행위는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절대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우리가 앞에서 말했다시피, 오늘날의 ‘예언’은 직통계시를 통한 “새로운 계시”를 받는 방법이 아니라, 정경으로서의 66권 성경을 성령의 내적 조명과 기도를 전제한 올바르고, 책임적인 해석학적 과정을 통해서 이해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된다. 개혁파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는 그의 당시 이 문제로 열광주의자들과 논쟁하면서 지금도 선지자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열광주의자들에 반대하여, 그의 당시 목사와 교사(신학대학교 교수, doctor)가 성경에 기초한 설교와 신학을 통해서 선지자의 기능을 성령론적으로, 교회론적으로 수행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꿈이나 느낌 등을 통한 미래 일에 대한 예감이나 예측 등을 예언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성경의 계시에 기초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성경적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주로 다음 세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 제사장, 왕 등을 비롯하여 오늘날 목사나 장로나 집사가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로 부름 받을 때, 성령의 임재의 약속과 상징으로서 공적 직무에 취임하는 경우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서 공식 취임하실 때 세례를 받으신 경우가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유아세례나(성인) 세례를 받을 때 만인제사장직(모든 신자 제사장직;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속에서 성령세례와 결부되는 경우가 있다. 이 세 경우는 모두 성령론과 결부되지만, 성령의 전적인 자유가 반드시 전제되고, 보장되어야 한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신품성사’(神品聖事, the Sacrament of Order)를 할 때나 종부성사(Extreme Unction)를 할 때, ‘기름 부음’의 행위는 기적이나 주술적 방법에 기초한 ‘은혜의 주입’(gratia infusa) 개념이 사용되는 바, 칼빈은 여기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신사도운동에서 인위적으로 또는 자동주의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성령의 바텐더’(the bartender of the Holy Spirit) 개념이나 성령과 은사의 일방적 ‘배분’(impartation) 개념은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전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성령의 󰡐바텐더󰡑는 성령의 큰 권능을 받은 자로서 마음만 먹으면 성령을 언제든지 불러올 수 있고,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자기 마음대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듯이,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자기 마음대로 자신이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언제든지 베풀 수 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도 성령께서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그의 뜻에 따라 임재하시고, 은사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의 큰 권능을 가진 ‘바텐더’로서의 신(新) 사도나 선지자가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도구와 수단을 넘어서서 주체적으로 그리고 주권적으로 행사하여, 신 사도와 선지자가 원하는 특정한 사람에게 기도나 안수함으로써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권능을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배분(impartation)하고, 전달할 수 있다. 성령의 사역(work)에 대한 위와 같은 개념들 속에는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이해된 ‘은혜의 주입’ 개념이나 어떤 종교나 미신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적이며, 비인격적이며, 주술적이며, 교주적(敎主的)이고도 영웅적인 측면이 강력하게 나타난다.

성령론, 특히 성령의 은사론과 관련하여 신사도운동 속에서 방언 현상, 우울증 등 치유 현상, 예언 현상, 이적과 기적 현상이 나타나면서 괴이한 소리 현상, 쓰러짐 현상, 술취한듯 비틀거리는 현상, 혀가 풀려서 웅얼거리는 현상, 발광하면서 괴성을 지르는 현상, 울음 현상, 금이빨과 금가루 현상, 웃음 현상, 입신 현상, 심리학이나 최면술 등의 효과 현상 등이 강력하게 나타난다.

위와 같은 현상들을 주도하는 대부분의 신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은 물론 위의 현상을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회복되어 이전보다 더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정상적이고, 올바르고, 거룩한 삶을 살기보다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파괴적이면서도 비윤리적인 비정상인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은 신사도운동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 해외에서 신사도운동을 주도하는 지도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집회 도중에 수많은 거짓 예언을 하고, 심리술이나 최면술을 사용하여 속이고, 성적(性的)으로 타락했고, 많은 추종자들은 정상적인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힘들어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마7:15-27)

4. 잘못된 구원과 선교 방법을 통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오도(誤導)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칭의나 회개나 성화 이해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신앙이 항상 전제된다. 신사도운동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과 용서를 전제한 참된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율법주의적 정죄와 회개 이해가 나타난다.

‘다윗의 장막’에 근거하여 신사도운동은 24시간 365일 연속 중보기도와 예배를 강조한다. 기독교에서 기도와 예배가 절대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고 지극히 정상적이다. 문제는 정상적이고도 일상적인 삶을 완전히 제쳐 놓고 특정한 장소에서 기도와 예배에만 며칠씩 몇 달씩 몇 년씩 몰두하는 것이다. 신사도운동이 이해한 중보기도의 개념에는 큰 문제가 있다. 신사도운동에서 중보기도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성령 안에서 구속주이시며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차원에서 중보기도가 아니다. 신사도나 선지자나 특정한 사람들이 구속주이며 유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버금가는 중보자들이 되어 중보기도의 은사와 직분을 특별히 받았다는 사실이다.

신사도운동은 지나치게 ‘새 포도주’, ‘성령의 술’, ‘군화(軍靴)신은 신부(新婦)’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신비주의적 구원론을 띠는가 하면, 매우 전투적인 신앙운동을 추구한다. 물론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miltans ecclesia)이지만, 신사도운동이 사용하는 ‘군대’(‘요엘의 군대’, ‘예수의 군대’ 등) 개념은 근본주의적 종교에서 발견되는 이분법적인 전투 개념이 지나치게 강하다.

선교방법과 관련하여 ‘영적 도해’(Spiritual Mapping), ‘지배권’(dominion), ‘땅 밟기 중보기도’(Prayer Walk), ‘7대산 정복 운동’, ‘백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 등은 미신적이거나 이원론적인 방법과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근거한 선교 방법으로써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상당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5. 신학과 성경에 대한 몰이해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반(反)신학적, 비성경적 사고로 유도(誘導)
신사도운동의 지도자들(신사도, 선지자, 목사, 평신도)의 상당수는 사회에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교회에서 신앙훈련도 받지 못했고, 정상적인 신학 교육기관에서 신앙훈련과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고학력주의나 엘리트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예외는 있지만, 어떤 사회에서도 지도자가 되려면 그 직위와 분야에 걸 맞는 인격성과 전문성을 반드시 구비해야 한다.

신사도운동 속에 있는 상당수의 지도자들은 신학에 대한 이해와 성경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설교 내용 속에 잘못 이해된 교리 내용이나 잘못 해석된 성경 주석 내용이 다반사(茶飯事)다. 기독교회와 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삼위일체론을 잘못 이해하여 반(反)삼위일체론에 빠지는가 하면, 성경을 종종 문자적으로 또는 알레고리적으로(allegorical) 해석한다.

가령 24시간 365일 중보기도 개념을 구약의 󰡐다윗의 장막󰡑으로부터 주석했는데, 구약시대 제사장들이 조(組)를 편성하여 24시간 365일 법궤를 중심으로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오늘날도 특정한 장소인 󰡐국제기도의 집󰡑(IHOP) 등에서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24시간 365일 무아지경이나 황홀경 속에서 찬송가 한 구절을 수십 번씩 반복적으로 부르면서 기도와 예배를 드린다. 우리는 개인의 경건 목적이나 신앙공동체 훈련 차원에서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시간에 집중적으로 기도드리고 예배드리는 자체를 결코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초대교회뿐만(행2:46) 아니라 오늘날 교회의 신앙생활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최근에 접어들수록 한국교회에서 다른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더욱더 증가하는데 비해 기초 교리공부 훈련이나 성경공부 훈련이나 바람직한 기도 훈련이 태반으로 부족한 현상이 나타난다. 신사도운동은 한국교회의 이 같은 취약점을 역이용할 수 있다.

6. 잘못된 은사, 기도, 선교 운동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올바른 은사, 기도, 선교운동을 요청함
필자는 신사도운동을 연구하면서 필자 자신과 한국교회를 뒤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필자가 청년이었던 1970년대와 1980년대만 해도, 한국교회는 여러 집회 장소(교회, 기도원, 여의도광장, 체육관 등)에 함께 모여 뜨겁게 기도하고 예배했다. 교회에서는 날마다 낮과 저녁으로 다양한 교리공부반과 성경공부반이 있었고, 어린이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여름과 겨울 수련회 기간은 거의 일주일이나 되었다. 한국기독교선교 초기에는 사경회(査經會)가 몇 주씩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기존 교회보다도 신흥 사이비 기독교단체들이 더 열심을 내어 은사집회나 치유집회나 예언집회 등 각종집회를 체육관 등에서 매우 자주 전국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신흥 사이비 기독교단체들은 비복음적이고도 비성경적인 내용을 가지고, 왜곡된 교리와 진리를 가지고 열심히 그리고 결사적으로 기존교회를 넘어뜨리려 호시탐탐노리고 있다.

한국교회는 1906년 평양부흥운동 때 이상(以上)으로 진지하게 성경을 배우고, 성경에 기초하여 열심히 기도하는 󰡐사경회(査經會)󰡑라는 귀한 전통, 󰡐성서한국(聖書韓國)󰡑이라는 훌륭한 전통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배우고, 기도하고, 각자의 모든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실하게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 충만을 통해 각자에게 필요한 성령의 은사를 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 올바른 성령의 은사운동과 올바른 기도운동과 올바른 선교운동을 기존교회 안에서 일으켜주실 것을 간절히 소원한다.

신사도운동의 실수들과 약점들을 바라보면서, 성령의 은사가 부족하여 무력해진 교회, 성령의 열매가 없어 사랑의 실천이 부족한 교회, 기도와 선교 열정을 잃어버린 교회, 말씀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것이다.

Ⅴ. 결론
우리는 본고에서󰡐영성󰡑과󰡐개혁신학󰡑이라는 용어를 먼저 정의하고, 신사도운동에 대한 역사(歷史)를 간략하게 기술한 뒤에, 신사도운동의 영성을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여섯 가지로 평가해 보았다. 󰡐신사도(개혁)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은 1906년 미국 아주사 부흥(Azusa Revival)을 기점으로 시작된 ‘늦은비의 새 질서’(New Order of the Latter Rain) 운동을 거쳐 󰡐빈야드 운동󰡑(Vineyard Movement)에 이른다. 빈야드 운동은 1990년대 중반에 토론토와 플로리다 펜서콜라를 중심으로 다시 크게 일어났다. 1994년부터 존 아놋(John Arnott)은 토론토공항교회(Toronto Airport Christian Fellowship)를 중심으로 소위 ‘토론토 블레싱’(Toronto Blessing) 또는 ‘거룩한 웃음 운동’(Holy Laughter Movement)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성령세례로서의 은사운동에서 시작하여 치유운동과 예언운동 및 이적과 기적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외국의 신사도운동가들이 한국교회와 각종 집회에 강사로 초청되거나 한국교회의 목회자나 평신도가 현지에 직접 방문하여 영향을 받아 다시 귀국하여 한국에 영향을 미치거나 책이나 인터넷 등의 매체들을 통하여 전파되었다.

비종교 분야에서의 영성과 일반 종교분야에서의 영성과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진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되고 확증되었으며,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복음 안에서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열려진 참 인간적인 삶의 능력인데, 우리의 인생관, 가치관, 행복관의 인식과 관계되며, 그와 같은 실천 가운데서 감격, 감사, 기쁨,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능력과 관계된다. 개혁교회의 ‘경건’(pietas) 또는 영성의 본질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인데,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모든 차원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우리가 본고에서 정의한 ‘개혁주의’ 또는 ‘개혁적’(reformed; reformierte; 네덜란드어로 gereformeerd 또는 hervormd)이라는 말의 일차적 의미는 ‘역사적(歷史的) 개혁신학(改革神學)’ 전통이며, 역사적 개혁신학 전통은 세계 도처에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es)와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es)라는 이름으로 약 5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는 신사도 영성을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여섯 가지로 평가해 보았다.

첫째, 신사도운동의 사도직과 선지자직의 역사적(歷史的) 회복의 영성은 역사적(歷史的) 보편 기독교회의 권위와 역사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다.
둘째, 신사도운동의 ‘직통계시’의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로서의 정경(正經)의 절대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셋째, 신사도운동의 비성경적 성령론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비정상적, 비윤리적 삶을 초래케 한다.
넷째, 신사도운동의 잘못된 구원과 선교 방법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구원관과 선교관을 오도(誤導)한다.
다섯째, 신사도운동의 신학과 성경에 대한 몰이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반(反)신학적, 비성경적 사고로 유도(誘導)한다.
여섯째, 신사도운동의 문제된 은사, 기도, 선교 운동으로부터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기초한 올바른 은사운동, 올바른 기도운동, 올바른 선교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할 역사적 큰 책임감을 갖게 된다.

신사도운동의 영성에 대한 개혁신학적 평가를 통해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유익을 얻었다. 하나는 신사도운동의 영성과 신학이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위협하는 심각한 수준이라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기존 교회로서 우리는 자신의 영성과 신학의 취약한 부분을 뒤돌아 보아야한다는 사실이다. “개혁된 교회(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는 신앙과 신학의 주요 원리와 정체성을 우리는 계속 실천해야할 것이다. 개혁교회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과 그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항상 다스리시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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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야드운동’: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참여자 및 동조자 징계 결의, 1997년 제82차 총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도입금지 결의, 1995년 제81차 총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신, 참여금지 결의, 1996년 제46차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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