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학술원이 2015년 6월 5일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해븐리터치 사역평가'를 주제로 발표한 김영한 원장의 글입니다.
머리말
필자는 손기철의 치유사역에 관하여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에서 조심스레 평가하고자 한다. 기독교 학술원은 3년 전 월례 발표회(2012년 4월)에서 다룬 바 있다. 장신대 현요한은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과 신학에 관하여” 발표에서 균형잡힌 평가를 했으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이철은 그의 저서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모든 은사 운동을 모조리 정죄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무분별한 태도를 지양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오늘날 일어나는 은사 사역이 공교회와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한 보다 객관적인 태도로써 본인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1. 긍정적 측면
1) 인격적 성령관
손기철은 성령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요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한다. 그는 “성령님을 인격이 아닌 어떤 알 수 없는 기묘한 능력이나 에너지로 취급한다든지, 하나님을 돕는 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세계 창조에 협력하셨으며, 진리의 영이시고, 보혜사이시며, 전능하신 분이고, 사랑이시라고도 한다.
그는 성령의 내주, 그리고 구원(칭의 혹은 중생)과 구별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대하여 3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령의 내주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할 때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심이다.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신다고 해서 온전히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아니다. 온 우주에 편재하신 성령(with us)은 예수를 믿을 때 우리 안에 거하신다 (in us).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우리의 삶을 그분에게 양도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단순한 내주가 아니라 충만히 거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 즉 기름부으심은 ‘함께 거하심(with us)’과 ‘안에 거하심(in us)’과는 다르다. 그것은 ‘위로부터 임하심(upon us)'에 달려 있다. 이러한 그의 성령 이해는 성령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그리고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한 분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성령 이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2)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한 온건한 이해
손기철에 의하면 구원은 믿지 않는 죄인에 대한 것이지만, 성령세례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것처럼 성령세례는 구원 뒤에 주어질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구원과 동시에 혹은 먼저 받을 수도 있다. 성령세례는 성령충만의 상태에 들어가는 시작, 출발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 영광의 임재, 안식, 내적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관련된다. 성령세례는 옵션이 아니라, 말씀을 깨닫고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성령충만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성령세례는 성령이 강력하게 임함으로 우리의 인격과 행동을 일시적으로 지배하심을 뜻하는 반면,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의 결과로 생긴 은사와 열매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삶을 말한다고 한다.
그는 성령세례와 기름부으심을 구분한다. 성령의 임재는 그분의 영광, 그분의 인격을 가리키는 반면에, 기름부으심은 그분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영광의 임재 가운데 안식하는 것은 성령이 우리의 혼과 육을 다스리는 것(성령의 내적 열매)이요, 기름부으심은 우리의 혼과 육을 통해 이 땅에 실체로 나타나는 것(성령의 외적 열매인 은사) 이라고 한다. 기름부으심은 사역을 위한 것이요, 은사 즉, 외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개혁신학의 관점에서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자신의 삶을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자는 성령을 받은 자요 중생한 자로 본다. 성령충만이란 반드시 은사와 표적과 능력만을 가르키지 않고 거룩한 생활, 성화의 원동력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오순절신학이 말하는 것처럼 제 2의 경험이나 세례로 간주하기 보다는 말씀의 사건을 통해서 성령의 임하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손기철의 성령론은 하나님 말씀을 받음보다는 은사와 표적의 나타남으로 치우쳐있는 것은 사실이나, 온건하다고 볼 수 있다.
3) 방언보다 삶의 열매 강조
손기철은 오순절 교파와는 달리, 방언이 성령세례의 표적으로서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방언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방언의 유익을 강조한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방언이 성령세례의 판단 기준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성령세례를 체험한 사람은 누구나 다 잠재적으로 방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방언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라고 강조한다. 그의 이런 견해는 성령세례를 중생과 구분하며 방언이 반드시 표적으로 따라온다고 보는 소위 고전적 오순절 교파의 견해와는 다르다. 성령의 은사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소위 제3의 물결 운동의 주장과도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론은 대체로 은사에 대하여 열려 있는 개혁신앙의 신자들에게도 수용될 수 있다.
4) 자기 관리 철저: 자신의 신격화 거부
은사 치유자들은 대규모 치유 집회를 정기적으로 인도하고, 국내외적으로 집회를 다니면서 치유 받았다는 사람들의 뜨거운 간증에 접하고, 자신을 따르는 열광적인 추종자들을 만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빠질 수 있다. 그런데 현재로는 손기철은 철저히 자신이 치유자가 아니요, 하나님이 치유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은 “빈 깡통”이요, 치유와 기름부으심의 “통로”라고 강조하고 있다. 왕의 기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칫 다른 동료 인간들에게도 왕권을 가진 자로 나서게 되고, 섬기는 왕의 모습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과거에 박태선이나 양도천이나 문선명이 초자연적 사역을 하다가 교만에 빠져서 자신을 신격화하는 이단에 빠진 것과 같은 전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5) 그의 치유 사역은 성령의 현재적 사역 이해와 복음 전도에 실제적 효과
총신대 교수 김지찬이 지적하는 바 같이 “소위 정통주의자들은 예언의 은사가 중지되었다는 점만을 강조할 뿐, 수천 년 전에 히브리인들과 초대교회에 주었던 성경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왜 계시가 되는지를 생동감 있게 드러내지 못함으로써 일반 교인들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손기철은 평신도로서 하나님 말씀과 성령 임재와 사역의 현재화를 경험하게 하고 그에 대한 갈망을 회복하는 데 공헌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송영옥이가 지적하는 바 같이 “손 장로는...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머리로만 아닌 몸 전체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강조“하는 것에 평신도로서 목회자나 신학자 못지 않게 공헌하고 있다. 초자연적 현상을 도외시하는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예수의 치유사역이 단지 신화적 치장에 불과한 것으로 무력화되는 상황 속에서 손기철의 치유사역은 복음전도에 하나의 실제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2. 비판적 고찰
1) 모든 질병 치유론: 불치유(不治愈)에 대한 설명 부재
손기철은 사도 시대 이후에는 은사나 기적이 종료되었다고 생각하는 은사중지론에 반대하면서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치유하시며, 모든 사람을 치유하시기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치유 받지 못하는 사람은 의심과 불신앙으로 예수님 앞으로 오지 않는 사람들뿐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그가 주장하는 모든 질병치유론은 그의 치유사역에는 도움이 되는 교리가 될지는 모르나 이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질병을 낫게 하실 수 있으나 모든 질병의 치유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육신의 가시 이야기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손기철은 사도바울의 육체의 가시(고후 12:7-9)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2) 왕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선포 ?
손기철은 『왕의 기도』라는 책에서 왕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 요건, 구체적인 방법, 예문까지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도에는 세 종류 즉,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기도가 있는데 ‘왕의 기도’는 바로 이 세 번째 기도라고 한다. ‘왕의 기도’는 “왕이신 예수님처럼 문제를 향해 꾸짖고 명령하는 기도”이다. 왕의 기도가 꾸짖고 명령하는 것이라면 왕의 선포라고 해야지 왜 왕의 기도라고 하는가? 그가 말하는 “왕의 기도” 즉, 선포는 질병이나 질병을 가져오는 악령이나 저주에 대하여 하나님 자녀의 권세로 명령하는 것이다. 이러한 왕의 기도는 선포하여 낫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그 책임을 미룰뿐 아니라 복음이해를 오로지 병 치유를 통한 이 세상에서의 무병삶이라는 기복에 두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낫지 않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불간섭에 대한 십자가 신앙의 의미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손 장로가 하는 왕의 기도의 구체적인 예가 다음이다: “나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 .. 병에서 지금 나음을 입었음을 선포하노라... 질병이 그의 몸에서 사라질지어다.” 이러한 문구에서 왕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기 보다는 병든 자를 향하여 명령하는 기도를 여러번 반복한다. 그러니까 왕의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 선포가 되어 버린다.
3) “왕의 기도”를 “자녀의 기도,” “자녀의 선포”라고 맥락에 따라서 사용하면 어떤가?
왕의 기도에서 선포(세상을 향해 명령)와 기도(하나님께 간구)가 혼동되고 있다. 하나님에게 간구할 때는 “자녀의 기도”라고 하며, 병자나 마귀나 세상을 향하여는 “자녀의 선포”라고 하면 혼동되지 않고 적절히 그 대상에 맞도록 사용될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자녀의 기도라고 해서 그 기도의 상달 능력이 적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자녀의 선포라고 해서 그 선포의 파급력이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말, 용어에 있지 않고 예수의 권셰, 바로 성령의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맺음말
손기철 장로가 올해부터 스스로 문을 열고 학술원 월례회에 나와서 질문도 하고 목회자와 학자들과 여러 신학적 문제에 대하여 토의를 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교주나 사이비들이 독선적인 태도로서 자기를 폐쇄하여 어떤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와는 다르다. 그는 미국에서 생명과학 연구로 박사학위(Ph.D)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20년 이상 건국대 생명과학부 교수로 봉직하고 있으며 온누리교회 시무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은사를 합리성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유연하고 겸손한 태도에서 그의 치유사역이 한국교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기대를 해보게 된다.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선한 동기에서 그에게 하는 충고를 그가 잘 받아들여 그의 사역이 한국교회에서 초교파적으로 인정함을 받아 오늘도 역사하는 성령의 지속적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