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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단 사상 어디어디 붙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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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단 사상 어디어디 붙었나?
  • 정윤석
  • 승인 2015.05.1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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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적으로 구분한 주요 이단 - 계시론을 중심으로[1]

교회 역사의 요소요소마다 이단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초대교회사에서 나타난 이단··· 지금은 어떤 모습?>(기사 바로가기)이란 글을 통해 간략히 살펴봤다. 이번에는 기독교의 조직신학파트로 나눠서 그 요소마다 나타난 이단 사상 중에 가장 이슈가 될 만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가 신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였다. 서로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어떤 학생이 말했다. 신학교에 왔지만 떠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여러분, 신학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신앙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신학교를 다니지 않더라도 신앙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한 신학은 우리를 언제나 따라다닌다는 점에서 그 학생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의 침례교신학자 스탠리 그랜츠는 “신학은 모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평신도 신학자와 전문적인 신학자의 차이는 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스탠리 그랜츠/ 이영훈 역, IVP, 1999년, 15페이지).

▲ 만민중앙교회 서점에서 판매되는 이재록 목사의 사진. 빨간 색 원 안은 그의 사진을 끼워 넣을 수 있는 열쇠 고리다.

신학이란 영어 단어로 thology 인데 ‘하나님’을 뜻하는 ‘데오스’와 ‘이성, 지혜, 사고’를 의미하는 ‘로고스’의 합성어다. 신학이란 문자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생각’, ‘하나님에 대한 추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신앙인은 하나님에 대해, 인생에 대해, 구원에 대해 숙고하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탠리 그랜츠는 모든 신앙인은 신학자다라고 주장한다. 신앙을 가진 순간 우리는 모종의 ‘색깔’을 가진 신학자가 된다는 의미다. 물론 그것이 전문적인 신학자의 영역에 들어선 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만 믿고 간다”며 신학 무용론을 부르짖는 사람들일수록 자신만의 신학과 교리에 깊게 빠져 있는 사람일 수 있다.

조직신학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생각하면서 잠시 ‘아타나시우스’(AD 296-373) 얘기를 해보고 싶다. 그는 아리우스와 논쟁하며 정통 삼위일체 교리 정립에 큰 공을 세운 초대교회사의 거목이자 교회사의 10대 신학자중 가장 첫 장을 장식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서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신화 사상(Deification)의 조각들이 발견된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려는 것이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한한 인간인 이상 완벽히 건전한 교리만 갖고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아타나시우스조차 현대 사회에서 주장했다면 매우 큰 비판을 받을 만한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간의 한계와 유한함에 대해 인정하면서 조직신학에 나타난 이단들의 문제점을 접했으면 좋겠다. 한두가지 문제 있는 주장을 했다고 상대를 이단이라고 바로 정죄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의 잘못된 주장에 대해서는 수정할 여유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2000년만에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 계시론

계시란 단어는 히브리어 “갈리”, 헬라어 “아포칼뤼프토”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하나님 자신과 그 목적, 행동에 대한 지식을 인간에게 밝히 드러내시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아포칼뤼프시스”라는 동사는 “감추인 것을 드러내다, 베일을 벗기다”는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인간의 상상과 깨달음에 근거를 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종교라는 것을 우리는 잊으면 안된다(이인규, <다른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 대림문화사, 2010년, 31페이지). 그래서 우리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문들이 있다면 그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일치하는지 되돌아보는 치열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신학적 접근은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성신학, 체험신학, 계시신학이다. 하나님을 추론할 때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이성신학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하게 갖고 있다면 이성신학은 우리를 올바른 진리로 인도하는 방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타락했다는 게 함정이다. 타락한 이성으로 우리는 바르게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체험신학도 마찬가지다. 주관적으로 체험한 것을 통해 하나님을 추론해 가는 것도 수없이 많은 오류를 낳는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계시신학,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베일을 벗겨서 말씀해주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고, 추론해낼 줄 알아야 한다.

다음 글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동의가 되시는가? 필자가 만난 한 그리스도인이 한 말을 살짝 각색한 것이다.

“서울에 사는 이문진 집사(가명·32)는 요즘 서울 불광동이란 지역에 활동하는 타종교의 영을 대적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 중이다. 몇 주 전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불광동의 불광이 佛光이 아닙니까? 석가의 빛이 임하는 동네란 뜻이죠. 결국 기독교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영적인 세력의 활동이 지역적으로 강한 곳입니다. 타종교의 영을 효과적으로 대적하고 영적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성도 여러분이 많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집사는 영적전투 속에 있다는 긴장감을 갖고 매일 기도시간마다 이 문제를 빼놓지 않고 기도하는 중이다.”(인터넷신문 <교회와신앙> 2005년 3월 16일자 기사).

필자가 2005년도에 청소년 선교단체에서 활동하는 한 목사의 기자회견에 참석했을 때다. 기자회견 장소에서 어떤 목회자가 자신이 서울의 용산에서 사역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용산의 ‘용’(龍)은 성경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용’자를 씁니다. 그래서인지 용산에는 유난히 악한 영의 역사와 기운이 강하고 이에 따라 퇴폐향락업소와 각종 범죄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가 더욱 영적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인터넷신문 <교회와신앙> 2005년 3월 16일자 기사).

이런 얘기들을 들을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라고 상고해 보는 게 바른 자세다. 만일 성경에서 사탄을 ‘용’으로 상징했다고 ‘용’자 가 들어가는 곳에 사탄의 역사가 많다면 지금 당장 ‘쌍용’이라는 기업은 이름을 바꿔야 한다. 이름에 ‘용’자가 들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개명해야 한다. 만일 ‘용’자에 사탄이 역사하는 어떤 기운이 실제로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서울 불광동에서 태어나 용산에서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용인에서 대학을 나오고 쌍용에 취업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이렇듯 카카오톡, 페이스북, 유튜브를 통해 필터링되지 않는 온갖 잡다하고 허탄한 신화의 홍수 속에 그리스도인들은 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계시신학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따라서 조직신학을 대할 때 ‘조진신학’이라면서 무시하거나 어려워할 것만 아니라 성경 계시의 체계를 세워가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2007년 3월이었다. 필자는 각각 다른 3종류의 교주 신격화 단체에서 나온 신도들 5명과 인터뷰를 했다. 그중 한 명이 “우리 단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노래와 비유의 말씀을 아는 것이었다. 비유의 말씀을 알면 결국 한사람을 알게 된다. 그 목자를 알아야 구원이 된다고 배웠다. 그들은 이런 비밀이 6천년 동안 감춰졌던 것인데 이제 밝혀졌다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다른 단체에서 나온 여신도가 계속 웃었다. 자신의 단체에서도 교주가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는 계시론과 관련한 문제다. 누군가가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할 때 지적할 수 있다. 누군가 하나님의 음성, 또는 하나님을 만나서 직접 말씀을 듣고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선포이며 새로운 진리의 출현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곧 이단 문제와 직결된다고 보면 된다. 현대의 많은 문제 단체들에 이러한 ‘직통계시’론적 문제는 고스란히 발견된다. 정통교회에서 직통계시는 좋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일부 문제 있는 인사들이 신적 존재로부터 직접 음성이나 환상을 듣고 진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일컫기도 한다. 때론 길흉화복을 알게 되는 점술과 같은 형태도 직통계시로 인식하기도 한다.

예장 통합측이 이단으로 규정(1999년 84회 총회)한 이재록 씨에 대한 연구 보고서에 ‘직통계시’란 용어가 등장한다.

“지나치게 직통 계시를 강조하여 마치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언제나, 무슨 일이나 계시를 받는 것 같이 말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병자들을 치유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기독교 신앙을 무속적 신앙으로 오해하게 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직통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시를 받아 자신이 특별한 사명을 부여 받았다는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직통계시라는 용어의 정의도 이에 준해 이해한다면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직통계시는 기독교가 용인하는 건전한 범위 안에서의 영적 체험, 기도의 응답,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는 마음의 감동과는 구별해야 한다.

▲ 몰몬교 조셉스미스의 초상

세계 4대 이단 중의 하나로 분류되는 몰몬교는 자신들의 경전인 ‘몰몬경’(재단법인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회, 1967년)에서 창시자 요셉 스미스의 간증을 등장시킨다. 그의 체험은 다음과 같았다.

“1823년 9월 21일 저녁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였습니다. 내가 이같이 하나님을 우러러 간구하고 있을 때 한줄기 광채가 내 방에 깃들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빛이 점점 퍼져 마침내 내 방은 한낮의 햇빛보다 더 밝아지더니 홀연히 누가 내 침대 맡에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의 발이 마룻바닥에 닿지 않는 것으로 나는 그분이 공중에 서 계심을 알았습니다.
···
그분은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내게 보내진 천사 모로나이임을 밝히고 하나님께서 내게 시키실 일이 있다는 것을 전하였으며··· 그분이 내게 이같이 판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동안 내 마음 가운데는 시현이 열려 나는 판이 묻힌 곳을 선명하게 똑바로 볼 수 있었으며 그 후 실제로 내가 그곳을 찾아 갔을 때 나는 바로 그곳임을 알았습니다.”(<몰몬경>, p.9).

모로나이라는 천사가 광채를 띠고 나타나 온전한 복음이 쓰인 ‘책’이 묻힌 장소를 알려줬다는 것이다. 그 책을 찾은 스미스는 번역을 할 때도 신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고 교회를 세울 때도 계시를 받고 자신들의 단체 안에 예언자, 번역자, 사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예언자 학교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요즘 한국교회의 신사도운동가들처럼 말이다.

세계 4대 이단 중 안식교의 설립자인 엘렌지 화잇도 직통계시자였다. “그 때 갑자기 성령께서 엘렌에게 임했다. 그는 성경의 거룩한 예언자가 받았던 계시를 회상케 하는 방식으로 계시를 받게 되었다”(재림마을, <예언자 엘렌 G. 화잇>, ‘약한 자 중에 가장 약한 자’ 중에서).

통일교도 직통계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통일교의 교주 문선명 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36년 4월 17일 부활절 아침에 기도하던 중 예수가 나타나 ‘인류구원사업의 소명이요 공식하명’이라는 메시아 사명을 맡겼다고 주장한다. 그가 몇 차례 거절했으나 예수는 ‘그대가 아니고서는 이 중대한 책임을 감당할 사람이 없다’고 거듭 당부하여 큰 사명을 맡겼다고 주장한다(기독교대한성결교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건강한 성결인 건강한 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부, 2007년).

자칭 보혜사요 이긴자라는 에덴성회 이영수 씨에 대해 <한국의 신흥종교>(탁명환, 국제종교문제연구소, 1987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60년 4월에는 이상 중에 보니 사닥다리가 이 씨가 다니던 전도관과 하늘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1961년 8월에는 이 씨가 주님을 직접 만났는데 주님은 너무나 젊고 미남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누군지 모르고 질문을 했는데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예수의 손을 잡고 하늘나라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뵈었다고 한다”(위의 책, 42페이지).

▲ 경기도 모란공원묘지에 있는 구인회 씨의 묘지

자칭 재림예수라는 천국복음전도회의 구인회 씨도 직통계시를 받는다.
“구인회 씨가 부여중학교 3학년 재학중이던 16세 되던 12월 어느날 새벽, 하늘에서 노란 광채가 보이면서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사랑하는 내 아들다! 너는 신앙촌에 들어가라’”(현대종교 편집국, <자칭 한국의 재림주들>, 국제종교문제연구소, 235페이지).

구 씨는 그 후에 또 음성을 듣는다. 1971년 음력 1월 17일의 일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제 만민의 경배를 받으라’ 그러더니 구인회를 중심으로 양편으로 흰옷입은 천사들이 끝이 보이지 않도록 늘어서서 절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리가 사라지더니 모든 나무들이 만화에서 보는 것처럼 일제히 달려와서 두 열로 늘어서서 절을 하고는 사라졌다···이어서 또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하나님은 조직적이고 과학적이다. 그것은 이사야 11장에 있다’ 그래서 성서를 펴보니 과연 그 구절이 있었으며 그 후부터 가만히 있어도 신구약 66권을 통달했다고 구 씨는 주장하였다”(위의 책, 236페이지).

직통계시자들의 목록에 시한부 종말론자들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에 대거 등장했던 그들의 체험은 황당무계 그 자체다. 이중 H씨가 체험했다는 내용이다.

"1987년 9월 2일 H가 12시 자정예배를 드리던 중 기도시간에 주님께서 H를 천국으로 부르셨다. 천국은 지구의 북쪽에 있으며 밖에서 보는 천국은 큰 불덩어리로 되어 있었다. 천사와 함께 천국에 도착하니 큰 불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것이었다.
...
H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도착하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서 일어나시더니 H를향해 걸어오시는데 신기한 일은 그 예수님의 보좌에는 예수님이 그대로 또 앉아 계시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H를 반갑게 맞으시며 '내가 너에게 보여줄 것이 있어 너를 불렀노라'고 말씀하셨다. H는 주님의 손을 잡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따라갔다"(<마지막 빛의 눈물>, 1994년, 96~97페이지).

"어린종들이 본 환상에 의하면 황금독수리가 H전도자를 지키고 있었으며 수많은 천군천사들이 이 숭인동 제단을 겹겹이 진을 치고 지키고 있었고 천사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며 성전의 꽃들이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다고 한다. ···

그리고 천사들이 성도들에게 은가루 금가루를 뿌려 주었으며 주님께서 이 날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며 성도들에게 직접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다고 한다. 1990년 8월 20일! 이날을 기해 어린종 H는 이 시대의 전도자로서의 사명이 시작된 것이다. 주님의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을 예비해야 하며 7년대환난에서 성령님과 더불어 요한계시록을 실현하고 이 땅위에 예수의 이름을 이루게 될 H"(위의 책, 275~276페이지).

모두 직통계시들이다. 이외에도 '8일 동안 피를 흘려 원죄가 없어졌다'는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 씨도 있다. 그는 △1998년 7월 3일 하나님의 보좌가 만민중앙교회에 내려왔고, 내가 단 위에 오를 때 주님의 제자들이 서서 인사했다 △주님이 금요 철야 때 교회에다 새예루살렘 열쇠를 놓고 가셨다 △선지자들, 주님의 제자들도 나를 보면, 영안이 열려 보시면 목례하는 것 볼 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 교회 신도 중에는 심지어 하나님이 이재록 씨와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 좌편에 이재록 씨의 영이 앉아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영안이 얼리니 그런 게 보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현현하여서 육으로 보면 사람인데 영안이 열려서 보면 예수님 자체라는 예수왕권세계선교회(왕권회)의 심화실 씨도 있다. 필자가 왕권회측을 취재할 당시 이 단체의 한 신도는 자신이 수없이 천국과 지옥을 올라갔다 왔는데 갈 때마다 보좌에 심화실 씨가 앉아 있었다며 심 씨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

이처럼 직통계시를 받았다는 사람들의 실례를 나열하면 한도 끝도 없을 지경이다. 위에 언급한 사람들이 모두 직통계시를 얘기하고 있으며 공통적으로 한국교회가 이단 내지 문제단체로 규정을 한 사람들이다.

직통계시는 왜 문제점을 갖는가?
직통계시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통해 얻는 건저한 체험, 마음에 떠오르는 감동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크다. 

1) ‘이단 식별론과 유형들(서양, 한국)’(예장총회 출판부)이란 글에서 심창섭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직통계시자들 중에는 자신이 영적으로 직접 받은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절대복종과 순종의 대상으로 특수화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다.

2) 정통교회에 대해 참 진리를 이탈하였다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교회의 갱신과 진리운동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럴 경우 기존의 기독교에 환멸을 느끼도록 신도들을 유도하며 공격과 비난을 일삼고 나아가서 기존 기독교를 위선과 거짓 종교집단으로 몰아 붙여 다니던 교회에 분열과 분쟁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문제다.

3) 직통계시를 받은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하는 자로 여기는 사례가 많다. 그의 말을 듣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된다. 그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신적권위를 부여한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인간을 신처럼 여기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다.

4) 적지 않은 경우, 직통계시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현저히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문제다. 최병규 목사(예장고신 유사기독교연구소장)는 <바른신앙>(2005년 9월호)에 기고한 ‘한국교회와 소위 직통계시의 문제’라는 소논문에서 이와 관련하여 “자신들은 정통기독교가 해석하지 못한 부분들을 해석할 수 있도록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 유사기독교적인 부분들에 대하여 자신들만이 ‘바른 풀이’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그들의 교주가 풀이한 해설서를 성경과 동일한 권위 혹은 성경 위의 권위로 간주한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직통계시자들에게는 특징이 있다.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만나고 했다는데 그 내용은 한 개인의 특수화, 신격화, 우상화와 직결시킨다는 점이다. 때론 시한부 종말론처럼 명백하게 성경에 어긋나는 것도 ‘계시 받았다’는 이유로 사람들 사이에 ‘시대의 진리’로 둔갑시켜서 유통되기도 한다. 모두 계시론적 문제라 할 수 있다.

직통계시가 많은 폐단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당시부터 현재까지 판을 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천국과 지옥을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며 심지어 지옥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람, 부시 대통령이 마지막 때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 기록하는 천사들이 자신의 옆에서 자신의 설교말씀을 기록한다는 사람 등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들을 추종하는 신도들 또한 적지 않다. 한 마디로 직통계시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직통계시의 인기가 식지 않는 이유는 ‘성경만으로는 부복하다’는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최병규 목사는 <바른신앙>(2005년 9월호)에서 Hoekema교수의 말을 인용 “그래서 자신들의 주관적인 체험과 해석을 절대화하여 그것을 마치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고 지적한다.

신비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막연한 호기심도 한 요인이다. 김지철 목사(소망교회)는 2007년 3월 2일 국민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누군가가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소문나면, 마치 사울 왕이 답답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아 나선 것처럼(삼하 28:7 이하),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떠돌이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란 것을 내 귀로 직접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호기심과 관심이 문제인 것이다.

날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사랑 고백은 성경에 넘치도록 있다. 그런데 직통계시를 좋아하는 자들의 경우 대개 이 말씀을 볼 때는 마음에 한 조각 감동이 일지 않는다. 그런데 직통계시자들을 통해 “사랑하는 딸아", 또는 "사랑하는 아들아”로 시작하는 소위 대언 기도를 들으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마음이 흡족해진다. 이 행위가 도가 지나치면 어떤 때든, 무슨 일을 하든 직통계시 예언기도를 받지 않으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마약에 중독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직통계시 예언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계시론적 이단에 쉽게 경도돼 간다.

지금까지 언급한 계시론적 문제가 체험적인 데서 발생했다면 ‘말씀보존학회’(대표 이송오)는 TR사본을 원문으로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과 그것의 한글판인 한글 킹제임스성경만이 마치 하나님의 영감된, 오류없는 성경이라는 극단적 견해로 문제가 된 단체다. 그들의 주장과 이에 대한 반론을 정리해본다.

▲ 일부 기독교 서점에서 판매되는 말씀보존학회 발행 책자

킹 제임스 성경과 그 원문인 TR(Textus Receptus)만이 하나님이 보존하신 성경인가?
→ 답변:
“TR의 기원은 중세의 인문주의자요 신학자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에서 시작된다. 그 당시까지 시중 판매용으로 제작된 헬라어 성경은 전무하였다. 그래서 프로벤이라는 인쇄업자의 종용으로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사본을 수집하였지만, 실망스럽게도 12세기경의 사본 5권 밖에는 입수하지 못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가 입수한 사본 가운데 요한계시록을 포함하고 있는 사본은 단 한 권뿐이었고 그것도 마지막 6절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부득이 라틴어 벌게이트(Vulgate)성경을 번역하여 그 부분을 채워 헬라어 성경을 시중에 내놓았다. 1515년 10월 2일에 시작된 인쇄가 1516년 3월 1일에 완성되었다. 1,000페이지 가량되는 방대한 작업을 너무 급히 인쇄했기 때문에 오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헬라어 성경출판은 대성공이었다. 그것은 4판에 69쇄가 발행되었다.

그의 성경은 그후에도 스테파누스(Stephaus), 베자(Beza), 엘제비르(Elzevir) 등을 통해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특히 엘제비르는 그의 2판(1633)서문에서 에라스무스 헬라어 성경의 인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본문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TR(Textus Receptus = Received Text)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고, KJV의 신약 부분은 바로 TR에서 번역된 것이다."(장두만, <목회와 신학> 1998년 6월호).

TR사본은 1515년 에라스무스가 당시 5개 정도의 사본과 라틴어 벌게이트 성경을 기초로 번역한 헬라어 성경이다. 이것이 대대적 성공을 거두며 수많은 사람에게 읽히며 붙여진 게 ‘표준원문’이라는 용어이지 처음부터 성경 원문으로서 오류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오류가 없는 성경인가?
→답변: "KJV은 1611년에 번역된 성경이다. 언어는 역사성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그 의미가 변화된다. 약 400년이 경과하면서 단어의 의미가 바뀐 경우도 많이 있고, 1611년 이후에 성서 고고학은 물론 다른 학문도 급격히 발달되어 성경의 배경이나 단어의 의미가 분명히 밝혀진 경우도 많이 있다. 사본의 수도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나게 많이 있다. TR의 원형인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이 겨우 5권의 사본을 사용해서 편집된 것임에 비해 지금 우리는 약 5,400여 권의 헬라어 사본을 가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모든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킹 제임스 유일론을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망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전반적으로 볼 때 KJV은 좋은 번역이고 믿을 만한 번역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번역판이기 때문에 오류가 상당히 많다. 우리가 성경의 영감을 말할 때 그것은 원본에만 국한시키지 결코 사본이나 번역판에까지 확대해서 적용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사본과 번역판은 다소간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장두만, <목회와 신학>, 1998년 7월호).

킹제임스 성경은 고의적으로 누락, 삭제한 성경구절 ‘없음’이라는 부분이 없다.
→답변: 이는 성경의 장·절 구분이 언제 어떤 성경에서부터 시작됐는지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된다. 성경의 장·절 구분은 프랑스의 인쇄업자인 스티븐스(R. Stenphens)에 의해 1551년 출판된 헬라어 신약에서 신약의 절(7,959절) 구분이 이뤄졌다. 계속해서 그는 1555년 구약 전체(23,214절)에 현재와 같은 장절 구분을 한 라틴 벌게잇을 출판했다(성경의 장절 [聖經-章節, chapters and verses of the Bible] (교회용어사전 : 교리 및 신앙, 2013.9.16., 생명의말씀사). 중요한 사항은 이제부터다. 킹제임스 버전이 원문으로 채택한 TR사본은 이 벌게잇 성경에 헬라어 사본을 조합해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TR사본에는 ‘없음’이라는 부분이 없다. 이 책을 기초로 장절 구분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1611년 출판된 킹제임스성경도 TR사본을 원문으로 했기 때문에 ‘없음’이라는 구절이 없다. 그러나 이후 눈부신 사본학의 발달로 권위있는 헬라어 사본이 발견되면서 특정 구절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성경 원문에도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구절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없음’이라고 처리한 것이다. 원문에 대한 정직한 접근을 마치 사탄이 감추어 놓기 위해 일부러 '없음'이라고 표기하고 고의적으로 누락했다고 보는 것이 말씀보존학회의 극단적 입장인 것이다.

4~5개에 불과한 헬라어 사본만으로 조잡하게 편집된 TR사본과 이를 원문으로 채택해서 번역한 KJV, 이를 한글로 번역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신봉하며 현재 서구 세계가 사탄의 사주를 받아서 교묘히 짜고 <King James>성경을 제거하려고 하고 있다는 피터 럭크만과 이송오 목사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무지한 주장이라는 게 예장합동측 1998년 83회 총회의 결론이다.

신론과 관련해선 <초대교회사에 나타난 이단··· 지금은 어떤 모습?>(기사 바로가기)에 언급한 삼위일체 항목을 참고하면 좋겠다. 다음 편에서는 조직신학의 ‘인간론’ 파트를 다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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