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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복 목사의 종말론 해명서에 대한 평가[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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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복 목사의 종말론 해명서에 대한 평가[2014년]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4.12.08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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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교단안에서 활동하는 목회자를 비판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장 고신 교단은 그 일을 했습니다. 아마도 신흥 종말론자들이 기승을 부리는 때 예장합동측에 속한 이광복 목사의 종말론과 관련한 평가를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사려해서 인듯합니다. 예장 고신측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가 2013년 9월 63회 총회시 보고한 이광복 목사에 대한 연구 보고서와 2014년 64회 총회시 보고한 이광복 목사의 종말론 해명서에 대한 평가를 게재합니다. 이에 대한 균형잡힌 접근을 위해 기회가 된다면 이광복 목사가 고신측에 2014년 4월말 경 보낸 해명서를 게재할 계획입니다.

고신측은 이광복 목사에 대해 2013년 총회에서 '종말론에 있어서 통속적 세대주의자들의 견해를 수용한 그의 징조에 대한 해석은 주의해야 할 것들이다'고 보고했습니다. 이후 이 목사에게 소명기회를 줬고 그는 해명서를 보냈으나 2014년 고신측은 2013년과 동일하게 ‘성도들에게 잘못된 종말론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2014년 총회 보고 내용에 대해 이광복 목사는 사도신경에 대해선 교수회의 지적을 적극 수용하여 수정할 의향이 있다고 재차 언급하였고 종말론에 관해서는 자신의 주장은 한국교회가 함께 연구해야 할 신학적 과제라고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자료를 통해, 바른 종말론 정립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얻으시길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이광복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가 2013년 제63회 총회에 제출한 “이광복 목사의 종말론에 대한 평가 보고서(이하 ‘평가 보고서라’함)에 대해 2014년 4월 말경에 해명서)『고신교단 총회회의록 종말론 평가보고서에 대한 해명서』이하 ‘해명서’라 함)를 보내왔다. 이『해명서』에서 이광복 목사는 “교수회의 ‘평가보고서’ 가운데는 본인의 주장이나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거나 오해된 부분이 없지 않다”고 한다. 그러면서 “물론 부분적으로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지적해 주신 것도 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수정하겠다”고 한다. 이런 말들은 상당히 부드럽고 겸손하게 들린다. 마치 신학대학원 교수회가 그의 견해를 오해한 것처럼 들리게 만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실제’ 이다. 과연 사실(事實)이 그러한가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의 그러한 말들이 과연 사실에 의해 뒷받침 되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본 평가서에서는 그의 주장들에 대해 일일이 답을 하고 평가를 하기보다도 그의 핵심 주장들에 대해, 과연 그가 자기의 주장을 수정하거나 청회했는지, 그의 말이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를 살펴보고 평가 하고자 한다.

그의 핵심 주장은 그의 책『세대주의 오해에 대한 변증』에 스스로 잘 요약해 주고 있으며 신학대학원 교수회의 “평가 보고서”에서 항목별로 평가 하였다. 이광복 목사의 핵심 주장은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 할 수 있다. 1)무화과나무 비유 해석 문제; 2) EU를 적그리스도 국가로 보는 문제; 3) EU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주장하는 문제; 4) 666 해석 문제 5) 사도신경에 대한 문제. 여기서는 이 항목들에 대해서는 지난번의 “평가 보고서”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 또 다시 상론(詳論)하지 아니하고, 이광복 목사의 해명이 과연 타당한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어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

I. 무화과나무 비유 해석 문제
이광복 목사는 마태복음 24장 32절의 무화과 나무 비유를 1948년의 이스라엘 독립으로 본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것” 이스라엘의 독립(회복)을 예언한 것이라고 보면서 이때를 출발점으로 하여 종말의 징조들을 본격적으로 나타나며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근거로 이광복 목사는 마태복음 21장 19절에서 예수님이 저주하신 ‘한 무화과나무’를 여기서 다시 가리키기 때문에24장 32절의 ‘그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수회“평가 보고서”에서 이러한 해석은 많은 무리가 따른다고 평가하였다. 왜냐하면 이광복 목사의 주장은24장 32절에는 원문에 의하면 관사(article)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무화과나무는 앞에 나온 21장 19절의 ‘무화과나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21장19절의 ‘무화과나무’가 꼭 ‘이스라엘’을 가리키느냐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24장 32절의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리킨다는 주장은 문법상.그리고 문맥상 맞지 않다.

우선 문법적으로 보면, 이광복 목사는 헬라어 관사 ‘호’의 용법에는 “전에 언급했던 것을 재차 가리킬 때 그 사물을 한정하여 다루는 용법도 있다”고 하면서 자기주장을 굽히지않고 더욱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핀트가 어긋난 것이다. 헬라어 관사의 용법중에 앞에 나온 사물을 가리키는 용법이 있다는 것은 관사의 ’일반적 용법‘을 말한 것이며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논란되고 있는 것은 마태복음 24장32절의 ‘무화과나무’에 사용된 관사가 과연 그런 용법인지 아니면 다른 용법인지 하는 것이다.

교수회의 ”평가보고서”에서는 마태복음 24장32절에 사용된 관사는 앞에 온 것을 다시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무화과나무’라는 종(種,genus)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즉, 포도나무나 사과나무 또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무화과나무’라는 종 전체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관사라는 의미다.

헬라어 문법에 관한 것은 전문적인 내용이므로 좀 더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보통명사에 사용되는 헬라어 관사는 용법이 아주 많지만 크게 보아 다음 두가지 용법으로 사용된다.

1) 앞에 나온 것을 다시 가리키는 용법: 예를 들면 ‘호 안트로포스’= ‘알려진, 정해진, 이전에 말해진 사람’
2) 종적 용법: 예를들면 ‘호 안트로포스’ = ‘종(種)으로서의 사람’(즉, 짐승이나 그런 것들과 대비되는 존재로서의 사람), 이런 두 용법 중 마태복음 24장 32절에 ‘무화과나무’ 앞에 사용된 관사는 앞에서 나온 것을 가리키는 첫 번째 용법(die anaphorische)이 아니라 ‘무화과나무’라는 종(種)을 가리키는 용법이다. 그런데도 이광복 목사는 관사의 일반적 용법을 들어서 마태복음24장 32절에 사용된 관사도 첫번째 용법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핀트가 어긋난 동문서답식 답변이다.

우리가 이런 전문적인 문법에 관한 것을 모른다 할지라도 문맥을 잘 살펴보면 우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일반 독자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32-33절은 이렇게 말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여기에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이라고 하셨다. 만일 32절의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이 이광복 목사가 주장하듯이 이스라엘의 독립(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33절에서 예수님은 “이와같이 이 일을 보거든···”이라고 하셨을 것이다. ‘이 일’ 곧 ‘이스라엘 회복’을 보거든···이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는 ‘이 모든일’이라고 되어있다. ‘이 모든 일’은 바로 앞(4-31절)에서 말한 모든 징조들을 말한다.

곧,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 전쟁, 기근, 지진 등을 가리킨다. 이런 징조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을 알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에 대해 자연의 이치를 들어 설명하신 것이다. 곧,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말하자면 이런 자연의 섭리를 통해 때를 분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에서 말한 이 모든 징조들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을 알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것”은 특별히 1948년에 이스라엘이 다시금 나라를 회복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앞에서 말씀하신 여러 징조들을 염두에 두시고서 자연의 이치를 빌어 설명하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옳은 것은, 이미 제출한 교수회의 “평가보고서”에서도 지적했듯이, 누가복음 21장 29-32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에 비유로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여기 29절에 보면 그냥 ‘무화과나무’라고 하지 않고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라고 되어 있다. 만일 이스라엘의 독립사건을 가리키려고 했다면 그냥 ‘무화과나무’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나무들’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자연의 이치’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그리고 31절에서도 ‘이런 일’은 원어로는 복수로 되어 있어서 ‘이런 일들’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24장 33절의 ‘이 모든 일’과 다르지 않다.

II. EU를 적그리스도 국가로 보는 문제
이광복 목사는 그의 『해명서』에서 EU를 적그리스도 국가로 보는 견해를 철회하지 않고서 자기의 견해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본인은 다니엘서 금신상 기사인 2장 33-34절과 41-43절에 소개된 ‘열 발가락 국가’에 대해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국가로 보고 이들 ‘유럽 연합(EU)’'로 연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상당한 무리가 따르는 해석’이라고 교수회의 “평가보고서”에서 지적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또 다시 논의하지는 않겠으며, 이광복 목사의 견해에 변경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바이다.


III. EU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보는 문제
이광복 목사는 EU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본인은 다니엘서 2장을 계시록 17장과 연결시키면서 열 발가락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곧 EU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의 견해에 변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

IV. 666 문제
이광복 목사는 계시록 13장의 666에 대한 견해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면서 오히려 교수회의 “평가보고서”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해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귀 교단 신학위원회 분들의 평가는 본인의 666해석을 오해하신 듯 합니다. 본인은 결코 IC 카드 자체를 666과 동일시한 적이 없습니다. 본인은 666에 대해 대환난을 배경으로 하여 적그리스도가 통치 수단으로 사용할 화폐수단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수회의 “평가보고서”는 이광복 목사의 견해를 오해하지 않았다. 교수회의 “평가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광복 목사는) “물론 오늘날 상품 판매에 흔히 사용되는 바코드(Bae code) 등으로 보는 이론들은 반대하지만, 적그리스도가 통치수단으로 사용할 화폐의 일종으로 본다. 현재 화폐의 역할을 하고 있는 ‘IC 카드’의 발달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현재 화폐 구실을 하고 있는 IC 카드의 발달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말은 이광복 목사가 그의 책 『계시록 난해 해설』 (서울: 흰돌, 1996), 414쪽에서 한 말 그대로이다. 그런데 이광복 목사는 『해명서』에서 “본인은 결코 IC 카드 자체를 666과 동일시한 적이 없습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수회의 “평가보고서”는 이광복 목사가 “IC카드 자체를 666과 동일시했다”고 말하지 않고 “현재 화폐의 역할을 하고 있는 ‘IC카드’의 발달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고 이광복 목사의 말을 그대로 말하였다. 그런데도 이광복 목사는 마치 교수회가 이광복 목사를 오해하여 잘못 말한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 이광복 목사의 다음 말은 이러한 것을 잘 보여준다.

“본인이 666을 IC 카드와 같은 것으로 주장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귀 교단 신학위원회 분들께서 본인의 666해석을 오해하신 듯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광복 목사가 오해했거나 왜곡하고 있을 뿐, 교수회의 “평가보고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며 이광복 목사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여 실은 것뿐이다. 어쨌든 계시록의 666을 ‘적그리스도가 통치수단으로 사용할 화폐의 일종’으로 보는 그의 견해는 건전하지 못하며 통속적인 세대주의자들이 많이 취하는 견해이다.

V. 사도신경 문제사
이광복 목사는 “사도신경 자체에 대한 비판을 가하거나 사도신경을 불신한 적이 없습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가? 교수회가 공연히 오해해서 문제를 만들었단 말인가? 신학 대학원 교수회의 “평가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사도 신경에 대한 견해에 대한 평가를 시작한다. “이광복 목사는 사도신경에 대해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양면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고 나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 그의 견해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에, 이광복 목사가 “결코 교회에서의 사도신경 사용 자체에 대해 반대하거나 그릇된 일이라고 지적한 바가 없다.”고 자기를 변호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사도신경을 가톨릭교회의 산물로 보고 가톨릭적 해석을 마치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해석인 양 제시하면서 사도신경을 비판하는 한, 이런 자기 변증은 설득력이 없다. 이미 고신교회 안에서 이광복 목사의 강의로 인하여 사도신경 무용론을 주장한 경우가 있지 않은가?”

이광복 목사는 후의 『해명서』에서도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서 자기는 “사도신경 자체에 대한 비판을 가하거나 사도신경을 불신한 적이 없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본인의 의도는 사도신경 자체를 비판하거나 불신한 것이 아니요, 사도신경을 오용하여 배교와 교세 확장 도구로 삼는 카톨릭의 의도를 경계하기 위함입니다.”고 한다. 그는 “본인의 저서에 혹시라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내용이 있자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또는 “본인의 사도신경에 대한 의도와 달리 지금이라도 성경적으로 지적될 만한 내용이 본인의 책에 있다면 그에 대해서는 기꺼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말뿐이며 실제로 그렇게 수정하거나 철회한 것은 아니다.

이광복 목사는 과연 사도신경 자체에 대해 비판을 가하거나 불신한 적이 없는가? 그는 2013년 2월 1일에 발행된 그의 책 『사도신경으로 본 카톨릭의 정체』18쪽에서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사도신경 안에 그릇된 요소들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여기에 보면 ‘사도신경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고 ‘사도 신경 안에’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사도신경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광복 목사 자신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처럼 ‘사도신경’ 자체에 장단점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그러나 2013년 8월 1일에 발생한 위 책 2쇄에서는 윗부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수정하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카톨릭이 하는 것처럼 이를 성경과 같은 신적 권위를 지닌 모호한 내용으로 여기는 것, 사도신경을 가지고 진리를 왜곡하는 모습은 주의해야 한다.” 이 2쇄가 나온 시점은 2013년 8월 1일이다. 신학대학원 교수회의 보고서가 신학위원회에 이미 제출 되고 난 후이다. 그렇다면 이광복 목사는 정직하게 자기가 신학대학원 교수회의 “평가보고서”를 보고 나서 자기의 잘못된 견해를 수정했다고 밝혔어야 했다. 그러나 이광복 목사는 2014년 4월말경에 신학대학원에 배달된 그의 『해명서』에서 “본인은 사도신경 자체에 대한 비판을 가하거나 사도신경을 불신한 적이 없습니다.”고 말하고 있다. 분명히 비판한 적이 있으면서도(2013년 2월 1일 발행한『사도신경으로 본 카톨릭의 정체』 1쇄), 2013년 8월 1일에 발생한 2쇄에서 그 부분을 삭제 또는 수정해 놓고서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해명서』에서는 “본인의 저서에 혹시라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내용이 있다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고 말하지만 만일 그가 정직하게 말하려고 했다면 “(2쇄에서) 이렇게 수정했습니다.”라고 밝혔어야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해명서』에서 “하지만 본인은 직접적으로 카톨릭교회가 사도신경을 만들었다고 본인의 저술에서 다룬 바가 없습니다. 다만 카톨릭교회가 이를 사도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한 것을 비판하기는 하였습니다.”라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가? 이광복 목사는 1쇄에서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사도신경은 카톨릭교회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사도신경이 카톨릭교회에서 기원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듯이 사도신경은 카톨릭교회가 존재하기 전에 이미 있었다. 그런데도 이광복 목사는 사도신경이 “카톨릭 교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카톨릭 교회는 성경을 왜곡하며 온갖 이단적 가르침을 펼쳐왔다.”고 말함으로써 사도신경에 대해 매우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책 결론에서 “... 사도신경을 만들어 낸 유사 기독교 집단, 배교집단인 카톨릭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이광복 목사는 분명히 카톨릭이 사도신경을 만들어 내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같은 책 2쇄(2013년 8월1일 발행)에서 이광복 목사는 서문과 결론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삭제하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서문에서는 “하지만 이 시대 카톨릭 교회는 사도신경을 악용하고 왜곡하여 그릇된 신앙을 유포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1쇄의 “엄밀히 말해 사도신경은 가톨릭 교회에서 비롯되었다.”부분을 삭제하였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는 “... 유사 기독교 집단, 배교집단인 가톨릭이...”라고 말함으로써 1쇄의 “사도신경을 만들어 낸”이란 글자 아홉 글자를 삭제하였다. 이렇게 문제되는 부분을 후에 삭제해 놓고서 이광복 목사는 “본인은 직접적으로 카톨릭 교회가 사도신경을 만들었다고 본인의 저술에서 다룬 바가 없습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그가 정직하다면 “본인은 신학대학원의 평가보고서를 읽고 나서 본인의 견해를 수정하였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내용이 있다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또는 “···기꺼이 수정하겠습니다.”고 하는 말은 공허하게 들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광복 목사의 견해는 사소한 한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의 기존 견해에 변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자기의 견해를 더욱 강경하게 주장하는 것들이 많다. 사도신경에 대해서는 그의 『해명서』에서 “본인은 사도신경 자체에 대한 비판을 가하거나 사도신경을 불신한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님을 그의 저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솔직하게 “전에는 그렇게 주장하였으나 이제는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견해를 바꾸었다”고 말했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본인은 그런 적이 없다”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정직하지 못하고 옳지 못한 태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이라도 성경적으로 지적될 만한 내용이 본인의 책에 있다면 그에 대해서는 기꺼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는 말은 공허하게 들릴 수 밖에 없으며, 이광복 목사는 사실상 자기 견해를 수정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광복 목사의 종말론에 대한 견해는 세대주의는 아니지만 세대주의 견해와 유사한 것들이 많으며 개혁주의와는 다른 것들이 많다.

그의 성경 해석은 원어와 문맥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은 것들이 많으며, 성도들로 하여금 그릇된 성경 해석과 종말론으로 오도하는 불건전한 것들이 많다. 따라서 그의 종말론은, 특히 징조 해석에 있어서는, 세대주의적 견해에 가까운 불건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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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2014-12-11 15:42:54
그러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택하신 백성들을 다 모으는 것까지 보거든 예수님이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줄 알라...이렇게 되네요?
틀렸나요?
설명좀 해주시겠어요?

하기야 2014-12-11 15:41:28
‘이 모든 일’은 바로 앞(4-31절)에서 말한 모든 징조들을 말한다.....
그러면
31절까지의 일들을 보거든 예수님께서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줄 알라는 말씀인가요?
31절의 내용은?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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