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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구경꾼에서 믿음의 주인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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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구경꾼에서 믿음의 주인공으로
  • 이병주 변호사
  • 승인 2014.10.07 0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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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칼럼]위로받는 믿음에서 씨름하는 신앙으로![2]

이 글은 이병주 변호사(기독법률가회 실행위원, 국제국장)가 인문학 서평 사이트인 아포리아 홈페이지(바로가기)에 2014년 8월 25일 올린 칼럼입니다. 주제는 매우 무겁습니다. 길을 잃은 양 같은 한국교회 평신도의 현주소를 그리고 있습니다.

평신도의 위로받는 신앙의 ‘과잉’과 ‘왜곡’을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씨름하는 신앙, 세속과 싸우는 믿음으로 나가야 할 당위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주제는 무거운데 글이 매우 따스합니다. 사회와 교회의 급진적 변화를 바라는 조급함에 대해서는 시간의 무게감을, 교회안에 안주하는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는 신앙에 대해서는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참 가치를 역설하며 아주 천천히 독자를 설득해 갑니다.

참고로, 이 변호사가 주장하는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는 일부에서 말하는 ‘자아의 죽음’이나 ‘자기부인, 자아 파쇄’ 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 변호사의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교회나 목회자를 위한 종교적 희생, 선교사급의 ‘헌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세속화된 평신도의 실체와 교회안에 안주하며 머무르려는 죄악된 자기에 대한 부인을 하고, 사회적 차원으로 씨름하는 믿음의 십자가를 지라는 견지에서의 ‘자기 부인’입니다. A4 용지 23페이지에 이르는 원 글을 3차례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측에 있습니다. [편집자주]

3. ‘씨름하는 믿음’의 회복‘ - 한국교회 평신도의 신앙적 회개 운동

3.1. 씨름하는 믿음의 내용: 세상의 원리와 하나님의 원리 사이의 긴장, 인간의 본성적 한계와 자기부인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으로 인한 문제점만을 지적하고, ‘씨름하는 믿음’의 결핍을 해결할 길에 대해서 함께 논의하지 않는다면 답답한 일이 될 것입니다. 가능한 만큼, 우리가 회복하여야 할 ‘씨름하는 믿음’의 의미와 내용과 방법, 그 주체와 과제와 성격에 대해서 시론(試論)적으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씨름하는 믿음’의 의미(意味)를 생각해 봅니다. ‘씨름하는 신앙’의 회복은 한국 교회를 위한 우리나라 기독교 평신도들의 신앙적 회개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집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예수님의 선포는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우리의 얼굴과 마음과 머리와 몸을 돌이키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평신도들의 첫 번째 회개는 하나님을 찾아서 ‘우리의 허망한 삶과 세상으로부터 교회 쪽으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돌이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교회라는 좁은 공간 안에서만 바라보고 세상 속의 하나님은 쳐다보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심각한 부작용과 믿음의 배신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평신도들에게 필요한 두 번째 회개는 하나님을 찾아서 ‘교회 바깥의 세상과 삶 쪽으로’ 우리의 마음과 몸과 믿음의 열심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갇혀 있고 교회 밖의 세상과 교회 밖의 우리 삶은 성공과 경쟁이라는 세상 신(神)의 지배를 당하고 있으며, 오히려 경쟁과 성공의 세상 신(神)이 모습을 바꾸어 교회당으로까지 침입해 들어와 있습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living sacrifice)로 드리라’는 바울 사도의 명제는 하나님께 헌신한 목회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평신도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산 제사’는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믿음으로 태우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몸이 교회에 있을 때, 그리고 우리의 영혼과 심리적인 부분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칠분의 일’만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나머지 ‘칠분의 육’, 먹고 살고 다투고 싸우는 인생과 세상의 모든 영역, 우리의 착하고 거룩해 보이는 부분만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냉정하고 두려워하고 회의적이고 절망에 빠지는 인생의 모든 부분이 우리 신앙의 주제가 되고 씨름의 영역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삶을 향해서 돌이키는’ 이 회개의 책임은 남이 아닌 우리 평신도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잘 믿어 왔는데, 무슨 신앙적 회개가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그동안 열심히 믿어온 우리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순전히 믿어왔더라도 지금 우리로 인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의 거룩’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그 자체’를 회개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 평신도들에게 요구되는 회개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씨름하는 신앙’의 요소(要素)를 생각해 봅니다. 세상과 삶 속에서 씨름하는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要素)는 ‘긴장(緊張)’입니다.

이 긴장은 세상 나라의 원리와 하나님 나라의 원리 간의 긴장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긴장을 놓치는 것은 어느 쪽의 방향이든지 하나님에 대한 실질적인 배신과 세상의 가치에 대한 투항이 됩니다.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신앙, 세상과 갈등하지 않는 세상과 화합된 신앙은 세상과 믿음 사이의 긴장을 놓아버린 신앙입니다.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시키는 신앙적 투항(投降)주의는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세상 신(神)에 대한 신앙으로 바꾸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일하고 먹고 사는 세속 인생은 신앙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교회생활에만 올인하고 우리의 삶과 세상에 대한 신앙적 고민과 분투를 경시하는 신앙적 청산(淸算)주의 또한 세상과 하나님 간의 긴장을 풀어버린 잘못된 태도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철수시켜 ‘하나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교인이 세상적인 영향력을 확보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편다.’는 생각도 하나님의 원리와 세상의 원리 간에 긴장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착각에 근거합니다. 교인이 세상적인 영향력을 확보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이미 세상의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믿는 사람이 출세하였다고 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세상의 원리와 하나님의 원리 사이의 긴장은 굉장히 깊고 팽팽합니다. 이것을 쉽고 얕게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세상은 악하고 믿음은 선하다. 세상은 탐욕스럽고 신앙은 순전하다’는 생각으로 이 긴장을 다루면 필패(必敗)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세상에서 일하고 먹고 사는 ‘나와 가족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에 인생의 거의 모든 수고를 바칩니다. 생물학적 신진대사(新陳代謝)를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신앙적인 견지에서는 이것을 무의미하거나 타협적이거나 죄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신앙적 태도도 많습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한 노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 자체가 죄스러운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현실이라는 성격이 강합니다. 선악을 너무 빨리 구분하지 말고 천천히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선한 노동’과 ‘타인을 이기기 위한 악한 경쟁(성공)’의 경계가 분명하다는 생각도 낭만적입니다. 원론적으로 내가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은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인생의 ‘필연’이고, 남을 이기는 ‘성공’은 인생이 넘치는 ‘과잉’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땅과 물건뿐만 아니라 서비스와 사람까지도 모든 것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만들어버린 상공농사(商工農士)의 현 시대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세상에 상품으로 내어놓아 파는데(팔리는데) ‘성공(成功)’하여야 ‘노동(勞動)’을 하고 생활(生活)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윤리적, 규범적으로 나를 살리는 ‘노동’과 남을 죽이는 ‘성공’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졌습니다. 인류 사상 물질적으로는 가장 풍요롭고 화려한 현 시대가, 인류 사상 인간에 대해서는 가장 가혹하고 냉정하고 쪼들리게 만드는 시대가 되어버린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노동’과 ‘성공’ 사이에서 아주 예민한 영적 분별이 필요합니다. 성공을 멀리한다고 노동을 놓아버리는 것도 신앙적으로 잘못이고, 노동을 위해서 성공으로 개같이 끌려가는 것도 신앙적인 위험입니다.

‘씨름하는 믿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이 씨름은 세상에의 투항(投降)도 아니고 세상으로부터의 이탈(離脫)도 아닙니다. 세상과 삶 속에 두발로 단단히 버티고 서서, 세상이 주는 압박을 견디어내고, 내 삶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현실을 낭만적으로 보지 않고 믿음을 순진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둘 사이의 긴장을 끝까지 팽팽하게 유지하는 것이 우리 평신도들에게 요구되는 ‘씨름하는 믿음’의 핵심적 요소(要素) 내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씨름하는 믿음’을 풀어나가는 방법(方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적 한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자기의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상충하는 두 개의 신앙적 명제가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연약한 죄인이다. 믿는 인간도 죄인이다.’라는 명제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명제입니다. 씨름하는 믿음은 이 두 개의 명제를 두고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씨름을 해야 합니다. 한쪽만 붙잡으면 절망하고 타협하거나 억지를 부리다가 넘어지게 됩니다.

인간이 악하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요, 만일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예수님처럼 완벽하게 선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가능하였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아무리 잘 믿는 사람도 인간의 본성적 한계, 이기적이고 연약하고 편안함을 바라고 아니면 다른 사람의 칭찬과 명예와 자기 만족감을 바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믿는 내가 믿는 나를 볼 때, 믿는 내가 믿는 다른 사람을 볼 때, 믿는 내가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볼 때, 인간의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한계를 잊어버리면 필연 착오와 실패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우리는 ‘끝까지’ 사람을 믿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욕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절대 믿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에 대한 믿음은 위선을 낳고 남에 대한 믿음은 실망을 낳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인간의 본성적 한계는 해결될 수 없다.’ 이 명제는 교묘하게 또 하나의 면죄부로 됩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그냥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편안한) 체념으로, ‘나는 피를 흘리지 않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평생 받아먹고 살려고 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게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복음 10:38, 16:24)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단지 종교적 의무나 강제가 아닙니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하면 좋지만 안 해도 하나님의 하해와 같은 사랑이 우리를 용서해 주니까 ‘그만’인 예수님의 지나가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고 애쓰지 않으면’ 우리는 잘 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악하다’는 명제는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지 ‘인간은 원래 악하니까 그냥 악하게 살아도 된다.’는 허용이자 인간 본성에 대한 축복과 찬양이 아닙니다. 압도적인 세상의 신(神)은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자기를 인정받고, 자기의 십자가를 벗어던지라’고 설교합니다. 우리는 평생 이 설교를 따라 삽니다. 안 믿는 사람도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경쟁의 세상에서 끝까지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하고 우리는 평생 ‘자기를 인정받는 일’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세상 신의 설교에 따라 자기의 십자가를 벗어버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우리는 세상 신이 우리에게 지우는 ‘경쟁의 십자가’를 지고 허덕거리면서 ‘성공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우리를 몰아대는 세상의 드라이브(drive)를 부인하는 것이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 등에 ‘세상이 지우는 주는 십자가’를 받아 지는 일을 피하기 위한 방어(defense)의 몸부림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너무 무리하게 비현실적으로 부인하면, 무리가 억지가 되고 억지가 실패가 되고 실패가 좌절을 낳고 좌절이 실망을 낳고 실망이 포기를 낳습니다. 세상적 욕망의 삶을 부인하고 일을 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의 부담이 됩니다. 예수님은 30년간 목수의 아들로, 목수로 사셨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진다고, 급하게 아무 십자가나 막 지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기의 인생에서 지어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는 두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 본성적 한계와 약점을 분명히 알고 잊어버리지 않으면서, 언제 어떻게 세상과 나의 삶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 평신도들이 살아야 할 ‘씨름하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3.2. 씨름하는 믿음의 현실적 모색: 삶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전투적 헌신과 현실적인 씨름

다음으로 ‘씨름하는 믿음’의 현실적 영역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씨름하는 믿음은 우리 삶과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운동경기로서의 씨름이 팔과 다리와 허리와 무릎과 어깨와 심지어 머리까지 인체의 모든 자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일하며 먹고 사는 생업의 ‘사적’ 영역과 사회 속에서 서로 협력하고 싸우는 사회정치적 시민생활의 ‘공적’ 영역, 그리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연구하는 ‘초월적’ 영역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믿음이 ‘초월’적 영역에서의 씨름에만 치우치고 국한되어서 나머지 삶과 세상의 ‘사적’, ‘공적’ 영역에 대한 믿음의 씨름을 방기(放棄)하고 결국에는 세상의 힘에 거꾸로 압도당하는 믿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제는 우리 삶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 대한 믿음의 씨름을 시작해야 합니다.

삶의 공적, 시민적 영역에 대한 믿음의 씨름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정치 얘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혜는 여전히 유효할 수 있습니다. 개별 교회가 당파적 미움을 촉발시키는 정치적 논의를 감당할 능력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대해서는 정치 얘기를 해야 합니다.’ 정치는 인간의 공적 생활과 공적 이웃사랑의 핵심적 논의가 벌어지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사생활 원리와는 별도로 성도의 공생활 원리가 나와야 하고, 내가 먼저 살고 남는 것을 조금 나누어주는 사적 이웃사랑을 넘어 사회적으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자를 돌보는 공적 이웃사랑의 길이 논의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이웃사랑의 문제를 모두 사적이고 개인적이고 영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적 요구를 경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적 지혜를 바꾸어 말하면 ‘(개별) 교회에서는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전체로서의) 한국 교회에서는 사회와 정치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합니다. 믿음에 대한 공적 논의에서는 정치의 필연성인 당파적 대립과 혐오감이라는 요소가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서워서 신앙의 공적 영역과 공적 책임에 대한 논의와 씨름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2014년 세월호 사고를 통해서 나타난 한국 사회 전체의 공적 책임감 상실입니다. 사적으로 점잖고 잘 믿는 기독교 평신도들이 사회를 다스리는 자리에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교회가 가르쳐온 ‘성도의 사생활원리’의 파탄입니다. 그러니까 듣기 싫고 말썽이 생기더라도 우리의 공적, 시민적 삶에 대한 ‘믿음의 씨름’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필연적으로 기독교인 내부의 정치적 사회적 논쟁도 세상의 정치적, 당파적 논쟁을 감싸 들여야 합니다. 교회에서 중산층 기독교인도 발언권이 있지만 가난한 기독교인도 발언권을 허락받아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보수와 진보를 공히 뒷받침하는 하나님의 원리에 따른 공적, 시민적 원리를 궁구하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절대적으로 옳고 상대방은 절대적으로 그르다’는 선악과입니다. ‘정치적인 선악을 따지지 말라’는 것은 ‘더 나쁜 선악과’입니다. 겉(말)과 속(판단)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과 삶의 불의에 분노하고 하나님이 공의를 추구하려는 거룩한 분노’를 악(惡)한 것으로 판단하고 ‘세상을 그냥 그대로 두는 것, 세상의 악을 온전히 용납하는 것’을 선(善)하다고 보는 비겁한 심판관의 태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인생과 세상의 공적 영역에 대한 ‘씨름하는 믿음’은 현실의 불의에 분노하고 맞서 싸우는 것과 함께 인생과 사회와 역사의 깊은 곳까지도 들어가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싸우고 다투고 발언하지 않으면 모두가 겁을 먹고 눈치를 보고 간신 같이 굴면, 아무 변화가 없지만, 인류의 역사를 도도히 흐르는 정의와 공의의 역사에는 ‘져도 이기고, 이겨도 지는’ 시간의 무게감이 있고 인간의 선악과 사회의 양면성이 때때로 뒤엉켜 전복되는 깊은 심연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사람이 살아가는 일하며 먹고 사는 인생, 우리 삶의 ‘사적(私的)’ 영역에 대한 ’믿음의 씨름’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가장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가장 많은 고민과 연구와 모색과 실천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빠지는 두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빠지는 것’과 ‘먹고 사는 일을 천시하는 것’입니다. 앞의 문제는 이미 많이 얘기했습니다. 실제로는 ‘먹고 사는 일을 천시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그래서 진지한 평신도들은 거룩한 일에 헌신한 목회자나 선교사를 보면서 열등감을 느끼고, 정의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회운동가·공익활동가를 보면 또 열등감을 느낍니다. 그리고는 헌금을 내고 후원금이나 낼 뿐 자기 인생을 하찮게 여깁니다. 그러면서도 그 하찮은 인생을 엄청 열심히 살지요. 여기에는 굉장한 모순과 위악(僞惡)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한 초월에 헌신한 목회자·선교사의 삶과 고상한 정의에 헌신한 사회운동가·공익활동가의 삶 속에만 들어있을까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재판을 받은 후(창세기 3장), 인간의 운명은 ‘땀을 흘리며 노동하며 먹고 사는 일’에 들어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을 찾는 일’ 이외에는 이웃과 함께 ‘일하며 먹고 사는 일’을 몸통으로 하여 구성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땅’의 본체입니다. 이 일하고 먹고 사는 삶, 그 자체에서 세상의 원리와 하나님의 원리 간의 씨름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빠진 ‘거룩’과 ‘정의’는 자칫 ‘뿌리 없는 줄기’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일하며 먹고 사는 삶을 두고 하는 ‘씨름하는 믿음’은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실천적입니다. 그 구체화를 위해서 몇 가지 과제들을 순서대로 말한다면, 첫째로는 ‘내가 일하며 사는 것’ 자체의 신앙적 의미를 생각하는 것(몰입하지도 허무하지도 않게), 둘째는 ‘직장과 일터에서 이웃과 함께 일하고 살아가는 믿음의 원리’를 구체화하는 것(믿음으로 일하는 법-성실하되 악독하지 않고 충성스럽되 간신이 되지는 않는), 셋째는 내가 하는 ‘일’의 신앙적 의미를 찾아나가는 것(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제도라는 선한 측면과 세상의 욕망이 사람들 속에서 작동하는 운동법칙의 악한 측면 사이의 긴장을 종합해서)이라는 주제들이 잡힙니다. 우리는 그동안 세상의 일은 세상의 일로만 이해하고, 믿음은 교회와 내 마음 속에만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가끔 아주 가끔 ‘내가 하는 직업에도 이런 정도 신앙적 의미가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이제는 작심하고 이 문제에 대한 믿음의 씨름을 집단적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크게 눈에 띄지도 않고 겉으로 큰 변화를 나타내기도 어렵지만, 우리의 인생과 믿음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가장 본질적인 평신도의 회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씨름하는 믿음’을 전개함에 있어서 ‘전투적 헌신’과 ‘현실적인 씨름’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더 착하고 더 열정적인 사람은 전투적인 헌신의 형태로 믿음의 씨름을 하고, 덜 착하고 덜 열정적인 사람은 현실적인 인생 속에서 믿음의 씨름을 합니다. 소수의 사람은 전투적인 헌신으로 믿음의 씨름을 하고, 다수의 사람은 현실적인 인생으로 믿음의 씨름을 합니다. 두 가지 길이 모두 중요합니다. 양자 간에 선악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투적 헌신’은 선봉대(先鋒隊)의 역할을 하지만, 진정한 힘은 ‘현실적인 씨름’의 본대(本隊)의 정신과 능력에서 나옵니다. 저는 소수의 ‘전투적 헌신’ 이상으로 다수의 ‘현실적인 씨름’이 더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3. 씨름하는 믿음과 위로받는 믿음의 협력적 긴장, 교회 속의 신앙과 세상 속의 신앙

이 글은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을 한국 교회의 평신도 신앙 현실의 문제점과 관련한 핵심적 원인으로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위로받는 믿음’이 없이는 ‘씨름하는 믿음’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 세상과 삶을 향한 평신도 신앙의 회개운동은 ‘씨름하는 믿음’의 회복뿐만 아니라 ‘위로받는 믿음’의 진정한 뒷받침이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과잉’된 위로받는 믿음은 세상의 위로를 구하고 세상과 화합하고 교회를 소비하는 등 문제들을 낳지만, 믿음의 시작인 ‘위로받는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힘을 얻지 않고는 사람의 힘만으로 자기의 삶과 싸울 수도 없고 세상에 맞설 수도 없습니다.

연악한 아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장성한 청년과 어른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연약한 아이일 때 나를 만나서 안아주신 하나님은, 장성한 어른이 된 나에게 나의 인생과 세상에지지 않고 맞서 씨름할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연약할 아이일 때에는 매주 자신을 찾아오는 나를 반겨주신 하나님은, 장성한 어른이 된 내가 세상이 주는 시험에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세상을 시험에 빠뜨리려는 당당함과 패기로 맞서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십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린 믿음에도 중요하고 장성한 믿음에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싸우기도 하고 은혜도 받아야 하고, 둘다 해야 합니다. 하나만 있으면? 위험합니다.

우리가 추구하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구는 유년기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받아 세상 앞에 당당하게 서서 하나님과 함께 세상에서 씨름하는 어른의 믿음입니다. 여기에는 씨름하는 믿음과 위로받는 믿음이 모두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한국 교회는 위로받는 믿음의 강력한 원천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힘과 에너지를 우리가 잘못 받아썼을 뿐입니다. 씨름하는 믿음은 현실적인 교회생활보다는 교회 밖의 세상에서 더 많이 이루어지는 성격의 것입니다. 장성한 믿음은 교회에서 위로받는 믿음의 힘을 얻어 교회 밖의 세상과 삶에서 씨름하는 믿음을 펴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수백 개의 교단으로 갈라지고 수만 개의 개별 교회가 단독으로 움직이는 한국 교회의 분열 때문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당이 나뉘어 있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교회 건물에 따라 나뉘어 있을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를 함께 바라보고 건물로 지어진 교회와 세상에서 움직이는 신도들의 교회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바라보고 움직인다면, 한국교회는 교회당을 건축하다가 성장이 멈춘 교회가 아니라, 이제 교회의 천장이 막혀 교회 문을 열고 성도들의 삶이 이루어지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3.4. 전문적 교리 신학과 평신도 삶의 신학

‘씨름하는 신앙’의 전개를 위해서는 이제 사영리와 전도폭발, 일대일 성경공부의 한계를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도의 공생활 원리도 정리를 해야 하고, 성도들이 현실적인 삶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지에 대한 길도 제시되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성도들의 일하며 먹고 사는 생활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냥 좋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저주로 그냥 무의미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깨닫는 세상과 인생과 직업과 세상일에 대한 깊고 풍부한 이해와 연구가 필요합니다.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전개되어 온 기독교와 신학에는 이 모든 내용과 고민들이 각 세대를 통하여 진행되어 왔을 것입니다. 평신도들은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이 내용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그냥 배우기만 할 것이 아니고 스스로 찾고 만들어내야 할 영역이 있습니다. ‘실천’과 ‘경험’을 통한 ‘현실 세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법이 무엇인지 의학이 무엇인지 교육이 무엇인지 정치가 무엇인지 노동이 무엇인지 장사(상업)가 무엇인지 기업이 무엇인지 다스리는 일(정부)가 무엇인지 평신도들은 세상에서 무궁무진한 실천적 경험을 해왔고 그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의 신앙적 회개운동으로서 ‘씨름하는 믿음’이 온전하게 진행되기 위한 이론적 기반과 지침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교회 지도자들에 의한 전문적 교리 신학의 발전과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한 삶의 신학이 함께 발전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도 한국 교회의 평신도들의 실천적 지성적 분발이 더욱 필요합니다.

4. 결 론: 우리는 망하지 않을 수 있다: 한국 교회의 기승전결(起承轉結), 새로운 평신도 신앙운동의 의미와 역할 - “전(轉)”

2014년은 한국 사회에도 엄청난 고통과 문제를 던져주었고, 한국 교회(개신교)에도 엄청난 좌절과 실망을 가져다 준 한 해입니다.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긍휼 없는 발언들이 남발되는 종교, 여러 종교 중에서 가장 종교지도자들의 실족과 스캔들이 빈발하는 종교, 세상의 고통에 가장 둔감한 종교, 이것이 마치 한국 개신교의 사회적 이미지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교회는 자랑을 잃고 평신도는 자부심을 잃고 목회자들도 자신감을 잃은 것 같습니다. 분열된 한국교회는 공적 질서를 잃고 각각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기 21장 25절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외통수의 막다른 지점에 이른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 고칠 능력이 없이 무너져 내리는 구체제, 앙시앙레짐(ancient regime)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아직 젊고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아직 구원의 기쁨과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힘이 빠져 시드는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힘이 넘쳐 힘을 잘못쓰다가 옆길로 빠진 교회입니다.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우리 사회의 이웃들은 아직 예수님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회는 아직 ‘반기독교인’이지 ‘반기독교’가 아닙니다.

한국교회 평신도 믿음 생활의 현실을,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과 ‘씨름하는 믿음’의 결핍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길게 살펴보았습니다. 목사님들이 잘못 가르치고 이끌어온 잘못도 있겠지만, 평신도들이 세상의 위로를 교회에서 구하고 세상과 갈등하지 않는 편안한 신앙을 추구하고 손님처럼 구경꾼처럼 목사님들의 신앙을 구경하는 책임이 있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왜곡된 경향이 우리의 믿음을 교회당으로 국한시키고 세상과 삶 속에서의 믿음을 없애 버린 것도 확인했습니다. 저는 ‘평신도들의 회개’가 우리의 믿음을 살리고 한국 교회를 살리는 가장 필요한 오늘의 회개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능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조로 발전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소멸의 위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의 ‘기(起)’ 단계를 넘어 성장의 ‘승(乘)’ 단계로 넘어 방향을 돌이키는 진정한 발전의 '전'(轉)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리 겁을 먹고 실망하고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수백 수십만 명의 평신도들이 돌이키면 됩니다. 그동안 신앙의 구경꾼으로 잠자던 우리 평신도들, 세상 속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고 스스로 믿음의 주인공이 되어, 믿음으로 세상을 감당하고 다투는 믿음의 씨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를 소망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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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이병주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 변호사 자격을, 2001년 미국 Harvard 법률전문대학원에서 법학 석사(LLM)를, 200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법무법인 세종에서 2013년 6월까지 재직했다.

2006년 '빛과 소금' 잡지에 운동권에서 기독교인 변호사로 전환한 인생 역경을 담은 글을 발표한 이후, 기독법률가회의 활동적인 멤버로서 세상속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삶과 고민에 관하여 많은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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