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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시장’속 평신도 신앙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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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시장’속 평신도 신앙의 과제
  • 이병주 변호사
  • 승인 2014.09.24 0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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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칼럼]위로받는 믿음에서 씨름하는 신앙으로![2]

이 글은 이병주 변호사(기독법률가회 실행위원, 국제국장)가 인문학 서평 사이트인 아포리아 홈페이지(바로가기)에 2014년 8월 25일 올린 칼럼입니다. 주제는 매우 무겁습니다. 길을 잃은 양 같은 한국교회 평신도의 현주소를 그리고 있습니다.

평신도의 위로받는 신앙의 ‘과잉’과 ‘왜곡’을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씨름하는 신앙, 세속과 싸우는 믿음으로 나가야 할 당위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주제는 무거운데 글이 매우 따스합니다. 사회와 교회의 급진적 변화를 바라는 조급함에 대해서는 시간의 무게감을, 교회안에 안주하는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는 신앙에 대해서는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참 가치를 역설하며 아주 천천히 독자를 설득해 갑니다.

참고로, 이 변호사가 주장하는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는 일부에서 말하는 ‘자아의 죽음’이나 ‘자기부인, 자아 파쇄’ 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 변호사의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교회나 목회자를 위한 종교적 희생, 선교사급의 ‘헌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세속화된 평신도의 실체와 교회안에 안주하며 머무르려는 죄악된 자기에 대한 부인을 하고, 사회적 차원으로 씨름하는 믿음의 십자가를 지라는 견지에서의 ‘자기 부인’입니다. A4 용지 23페이지에 이르는 원 글을 3차례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측에 있습니다. [편집자주]

2.4. 위로받는 신앙의 과잉으로 인한 왜곡

⓷ - ‘교회 상품을 소비(消費)하는 평신도 신앙’
교회의 구조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수백 개의 교단으로 갈라지고 수만 개의 개별 교회(x)와 수백만 명의 개별 신자(y)의 일대일 대응 함수(x↔y)로 조직되고 작동하는 한국 교회는 현재 「객관적(客觀的)으로」 세상의 자본주의적 상품시장의 원리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도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실 것이고, 평신도들도 이 말에 불편함을 느끼겠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누구도 이것을 진지하게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결과는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고통스럽지만, 현실을 직시(直視)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완전자유경쟁 체제의 한국 기독교 시장에서, 평신도들은 소비자(消費者)가 되었고 개별교회와 목사님들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상품(商品)처럼 되었습니다. 이 상품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목사님의 설교와 교회의 건물입니다. 시장은 포화되었고 공급은 과잉상태입니다. 목사님들은 소비자인 평신도들이 ‘듣기 좋은 설교-위로의 설교’만을 원하므로 ‘정확한 설교-자기부인의 설교’를 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평신도들은 목사님들이 공급하는 설교와 말씀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은혜를 받다가 서서히 지루해 합니다. 교회 시장이 성장할 때에는 공급자와 소비자가 모두 웃었는데, 시장이 정체하고 후퇴하면서 공급자가 먼저 힘들어하고 소비자도 답답해합니다. 근본적으로 교회의 예배와 설교가 자유경쟁체제를 통하여 ‘판매(販賣)되고 있다’는 사실이 심각한 문제들을 만들어냅니다.

(상품시장에는 금전적 거래가 있지만, 교회 시장에는 금전적 거래가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소비자들은 직접적인 형태의 대가 지급이 아니라 간접적인 형태의 헌금으로 교회시장의 경제적인 유통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떤 신문보도에 의하면 한국 개신교의 연간 헌금규모는 약 3조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헌금은 거룩한 것이지요. 그러나 헌금은 현실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은 누가 내라고 하지 않아도 헌금을 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 자꾸 헌금을 내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제일 큰 교단에서는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교인의 자격이 박탈되어 공동의회의 결의권과 투표권이 중지된다.’는 교단헌법 개정안을 제출했다고 합니다. 억지로 헌금을 내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헌금원리(고린도후서 9:6-7)에도 어긋나고 조금 어이가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오히려 교회의 상품경제성, 세속적 경제성에 대한 솔직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우선 소비자화된 평신도의 신앙적 조건을 봅니다. 평신도들은 목사님의 설교와 교회의 종교서비스를 통해 영적, 정신적 위로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데 만족하고(TV에서 엔터테이너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웃고 울며 힐링을 얻는 시청자와 비슷합니다), 스스로 신앙의 주체, 신앙의 생산자가 되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게 됩니다. 평신도 본인에게도 이것이 편하고 교회의 시스템도 평신도의 지나친 활동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소비자는 계속 소비자로 남아있는 것’이 공급자가 소비자 모두에게 편안하고 체계를 흔들지 않습니다. 평신도가 계속 신앙의 구매자로 남아있기만 하면 됩니다. 교회의 상품경제에서 평신도의 신앙적 발전은 ‘평신도를 깨워서 개별교회의 유지·발전에 헌신적으로 봉사하게 하는 정도’이면 충분합니다. 개별 교회에는 평신도에게 그 이상 복잡하게 머리를 쓰거나 고민할 것을 요구할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다음으로 이 문제에 대한 목회자들의 곤혹스러운 입장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초월(超越)’을 위해 세상의 ‘사(私)’를 버렸는데, 세상의 사(私)는 (교회의 자유경쟁시장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서) 슬그머니 거룩한 초월(超越) 사역의 중심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무슨 장사를 하려고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 아닌데, 사람들(평신도)에게 나를 팔아야 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려고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 아닌데, 직장(교회)에 취직하기 위해서 나를 팔아야 합니다. 세상의 영화와 성공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헌신했는데, 교회의 영화와 성공을 위해서 열심히 고민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세상의 자랑을 버렸는데, (교회를 통한) 세상의 자랑에 다시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상품경제의 나라를 버렸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세상보다 더욱 열악한 상품경제의 나라 속에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에 빠졌습니다. 구조적으로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의 자유시장 경제체제는 종교적 헌신이 헌신자의 생활적 이해관계와 연결되는 현실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헌신자,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신앙을 왜곡시킬 수 있는 커다란 위험입니다. 세상(시장)을 떠나서 시장에 들어온 현실, 이것은 ‘아무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회개할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상품경제 속에서 과연 온전한 교회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객관적 의문을 생각해 봅니다. ‘선택가능한 교회’ 속의 공동체는 실질적인 생활근거를 가진 공동체가 아니라 일종의 구매공동체, 팬클럽 같은 성격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개별 교회의 공동체를 약간 허구적인 공동체(fake community)로 만듭니다. 현실적으로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은 교인(평신도)들 간의 수평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지도자(목회자)와 소비자(평신도) 간의 수직적 공동체라는 성격이 더 강합니다.

저는 현실적인 개별 교회 내의 공동체성이 약하다는 점을 당위적으로 지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재의 교회구조 하에서는 개별 교회 내의 공동체성이 강하지 않은 것이 객관적으로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객관적인 한계가 있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주관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에 오히려 실수와 잘못이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구성원에게 공동체적 권리와 함께 공동체적 의무가 존재하여야 존속되는 단위인데, 구성원(평신도)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지금의 교회공동체에서는 사실상 구성원의 공동체적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조건과 내용과 형태의 신앙적 위로’를 선택한 소비자(평신도)들의 모임인 현실적 개별교회에서 주로 다루어질 수 있는 신앙의 내용은 ‘위로받는 신앙’입니다. ‘씨름하는 신앙’ ‘자기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신앙’은 교인들이 교회를 선택한 구매욕구의 내용 속에 들어있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이 우리 평신도들이 교회에서 ‘위로받는 신앙’만을 반복하고 ‘씨름하는 신앙’을 배우거나 고민하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개별교회 간의 ‘완전자유경쟁시장’이 되어버린 한국교회의 상품구조와 평신도들의 소비적 신앙행태에 대한 책임이 목회자에 있는지, 평신도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양쪽 다 전적인 책임을 묻기는 어렵고, 양쪽 다 상당한 책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도저도 아니고 목사님도 잘못이 없고 평신도도 잘못이 없는 태생(胎生)적 현실이라는 성격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체제의 국가에 태어난 책임이나 공산주의체제의 국가에 태어난 책임을 그 본인에게 묻기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어떤 체제로 인한 고통을 겪게 된 책임은 본인에게 없더라도 그 고통스러운 체제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평신도와 목회자들이 진정 회개하고 회심해야 할 핵심 내용은 ‘표면적인 악(惡)’, 즉 의식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착하게 사는’ 일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이면적인 악(惡)’, 즉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각자의 고의나 악의 없이 ‘상품화된 교회와 소비자화된 평신도의 시장구조 속에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팔고 사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2.5. 평신도 신앙의 허상(虛像)

⓵ – 기독교인의 선함과 교회의 의로움에 대한 오해: ‘선악과(善惡果)를 먹는 평신도 신앙’
믿음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사람은 선하다는 생각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교회는 의롭다는 생각이 따라옵니다.

믿는 사람이 선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악해집니다. 교회가 의로우면 교회가 아닌 곳은 불의합니다. 더 많이 믿으면 더 많이 선해지고, 교회가 부흥하면 하나님의 의로움이 증명됩니다. ‘좋은 나라’와 ‘나쁜 나라’, 교회는 좋은 나라이고, 안 교회는 나쁜 나라입니다. 기독교인은 좋은 나라의 선한 백성이고, 불신자는 나쁜 나라의 악한 백성입니다. 교회를 위한 일은 좋은 일이고 교회에 손해가 가는 일은 나쁜 일입니다. 가르치는 목회자들은 평신도들보다 더 의롭고, 배우는 평신도들은 목회자들보다는 덜 의롭지만 그래도 불신자들보다는 훨씬 의롭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와 평신도들이 오랫동안 가져온 체감적 신앙적 상식(religious common sense)입니다.

신학적 논의를 떠나서 이것이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죄인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죄는 용서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죄는 매주 용서를 받으니, 똑같은 잘못을 해도 불신자는 계속 죄인으로 남고 신자는 의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 믿는 죄인은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믿는 죄인은 당당합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르고 그 밖의 세상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머무르니, 교회의 죄는 용서를 받고 교회 밖의 죄는 용납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이것이 현실일까요? 가능성과 현실성을 혼동하는 것은 아닐까요? 영화 ‘밀양’의 전도연과 김추자는 이것을 두고 ‘거짓말이야~’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의롭지만, 하나님은 믿는 ‘사람’과 현실의 ‘교회’는 100% 선하고 의롭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은 선한 일도 하지만 악한 일도 계속 벌이고 현실 교회는 의로움도 추구하지만 불의도 지속적으로 야기합니다. 선하지 않은 신자가 선하다고 생각하고, 의롭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고 죄인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의 가장 큰 죄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다.”-요한일서 1:8)

최근 십수년간 한국교회가 욕을 먹고 교회 지도자가 비판을 받을 때, 신자들과 교회는 불의한 세상이 의로운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라고 우리 자신을 옹호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워낙 많은 일들이 벌어지다보니 아예 교회가 욕을 먹고 지도자가 실족하고 한국 개신교가 비판을 받는 일에 대해서, 스스로 옹호하고 변론할 자신도 용기도 사라져가는 것 같습니다. 인간적이고 다정다감하고 불의를 규탄하는 프란체스코 교황이 다녀가자 세상의 불신자들조차도 그를 즐거워하고, 오직 독선과 이기주의로 브랜드화된 한국 개신교만 ‘휘청’거리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씩씩하게 생각해보면, 선하지 않은 것이 선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고 의롭지 않은 것이 의롭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괴로운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회개를 독촉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을 촉발하는 우리 믿음의 돌파구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린도후서 7:1). 우리의 오랜 신앙 습관과 소망과는 달리 한국 교회는 그리 의롭지 않고 한국 교회의 평신도들은 마냥 의롭고 선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황스럽지만 현실입니다.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제는 한국 교회 전체가, 한국 교회의 평신도 전체가 회개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회개를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선한 기독교인, 의로운 교회의 환상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악과’를 수시로 따먹어온 교회와 신자들의 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죄를 더 범하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회개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덴동산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이브의 행동이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 원죄입니다(창세기 3:6). 하나님만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실 수 있고, 인간이 하나님 대신 선과 악을 판단하는 심판자의 지위에 오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죄악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인간은 선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성경의 기본적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들은 선악을 판단할 능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선과 악을 온전히 판단할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린도전서 13:9-10). 그런데 많은 경우에 믿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들은 마치 선악을 판단하는 심판자의 지위를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보수와 진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간에 의견이 대립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믿는 사람들과 교회들이 지극히 보수적인 입장만을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과연 하나님 뜻에 맞는 것인지, 성경의 말씀에 부합하는 것인지 심각히 고민할 필요가 있고,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믿는 사람들이 믿음의 이름으로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을 제기해야 합니다.

대체로 세상에는 부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기가 힘들어서 세상에 대해서 욕하고 삿대질하고 싶은 사람들이 절반 정도, 그리고 그런대로 안정이 되어서 살만한 사람들이 절반 정도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안정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보수적인 사람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들과 진보적인 사람 (살기가 어렵다고 소리 지르고 싶은 사람) 들의 비율이 절반씩으로 나뉘어져, 선거 때마다 치열한 싸움을 거쳐서 권력을 넘겨주고 넘겨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교적 살만한 사람들이 사회적 안정을 원하는 것이 100% 잘못된 것도 아니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변화를 요구하는 것도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일부 교회의 지도자들이 살기 힘든 사람들의 아우성에 대해서 쉽게 라벨을 붙이고 비난을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함부로 판단하시지 않으시는 일을 교회와 믿는 사람들이 마구 판단해 대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중산층화’, 한국의 개신교와 카톨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한국사회의 변화에 따라 교회의 구성원 또는 지도층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산층적 성향이 교회의 경향과 성격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명백히 세속적 본질을 가지는 중산층의 보수적이고 세상적인 이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세상에 선포되고 주장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악판단이 하나님의 선악을 가리는 죄악입니다. 이 잘못은 강단 위에 선 목회자들과 강단 아래에서 바라보는 평신도들이 공동으로 힘을 합하여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목사님들만 욕할 문제가 아니고 평신도들의 회개가 필요한 일입니다.

2.6. 평신도 신앙의 허상(虛像)

⓶ ‘잘 믿고 있다’는 착각, ‘열심이 있으나 열심이 없는 평신도 신앙’
마지막으로 살펴 볼 우리 평신도 신앙 현실의 문제는, 적당한 수준에서 ‘나는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안주하는 믿음의 착각과 신앙적 태만입니다. 이것은 각 개인의 수준에서 미분(微分)적으로 이루어지는 신앙 교육과 신앙적 비전 및 신앙실천의 과제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감격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신앙의 열심(熱心)은 우리를 이끌어 성경통독과 묵상으로, 전도의 부담과 열성으로, 교회의 봉사와 구역모임 등에서의 양육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성경통독과 묵상은 일평생 이루어져야 할 믿음의 기본활동입니다. 이것은 구역모임 등에서의 양육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깊어지는 성경지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함께 사람 앞에서의 교만을 낳기도 합니다. 전도와 양육은 하나님 믿는 일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처음의 열정에서 서서히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습관적인 종교활동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봉사와 섬김은 초기의 부담감만 조금 넘기면 인생의 즐거운 일이 됩니다. 즐거운 일은 계속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통독과 묵상과 기도와 전도와 교회 봉사와 구역모임에서의 양육은 잘 믿고 성실한 평신도 신앙생활의 기본 레퍼토리가 됩니다. 이 레퍼토리들을 합하여 ‘잘 믿는 평신도’의 모습이 완성됩니다.

이처럼 ‘잘 믿는 평신도’의 모습이 정착하는 데에 어떤 사람은 4-5년이면 충분하고 어떤 사람은 10년이 넘게 걸리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는 평신도 신앙의 발전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 뒤의 일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잘 믿는 평신도’의 신앙생활은 그 이후에 별다른 변화의 계기(모멘툼)을 갖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사가 장로가 되기도 하고 집사가 권사가 되는 변화가 있지만, 이것이 신앙의 결정적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인생에는 별다른 것이 없고 신앙생활에도 별다른 것이 없으니, 반복되는 과정과 실천을 잘 견디고 참고 인내하고 순종하는 것에 신앙의 정수(精髓)가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평신도 신앙교육의 내용과 입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에는 신앙생활에 관한 진리의 일부가 분명히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결과 잘 믿는 평신도의 신앙생활이 계속 믿음의 초급 중급 수준에만 멈추어 반복되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필요한 발전의 길로 더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반복되는 성경묵상과 전도양육의 주제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전도폭발, 사영리의 수준에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도전을 해봅니다. 믿음의 초심자와 경력자가 피양육자와 양육자가 되어 ‘믿음의 초등학교·중학교 수준’에서 계속 돌고 도는 것이지요. 일대일 성경공부의 내용에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의 신론과 구원론, 종말론, 전도와 교제와 성경론 등 기본적 교리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 모두 들어있지만,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자기의 십자가(十字架)와 자기부인(自己否認)의 길’을 걸어야 필요성과 방법에 대한 설명은 거의 들어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 중 자기의 마음과 분노를 다스리는 ‘성도의 사생활(私生活) 원리’는 QT 교재와 구역모임과 예배 설교를 통해서 많이 가르치고 배우고 나누지만, 성도의 신앙생활 중 세상의 직장과 생업과 사회와 정치적 영역에서 다른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 관한 ‘성도의 공생활(公生活) 원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고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지혜가 ‘교회에서는 개인 얘기만 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중 ‘하나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는 기도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뜻은 무엇이고 그와 관련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믿음의 고등학교·대학교 수준’에서의 교육은 커리큘럼도 없고 별로 언급이 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을 통한 구원과 죄사함은 매주 예배를 통해 선포되지만, ‘무엇을 회개할 것인가’ 하는 내용은 거의 분명치 않습니다. 죄의 고백과 회개는 아주 개인적인, 사생활 차원의 것들 뿐, 집단적이고 사회적이고 공적인 차원의 죄 고백과 회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평신도들의 회개는 아주 짧고 쉽고 편안합니다. 그 결과 ‘잘 믿는 평신도’의 신앙 내용은 오직 개인적이고 사생활적인 신앙의 내용과 주제로 반복되고, 「자기 십자가와 자기부인, 하나님의 뜻을 땅 위에 이루는 것, 공적이고 사회적인 회개」의 내용은 백지(blank)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믿는 평신도’가 신앙의 기본을 다 아는 것 같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많은 것을 모르고 있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신도 리더들은 더 배우는 것이 없으니 ‘본인이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열심이 대단한 것은 헌신자들의 열심도 있지만, 평신도들의 엄청난 열심 때문입니다. 평신도들의 이 열심이 초급/중급 수준의 개인적이고 사생활적인 수준의 묵상과 교회봉사에만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잘 믿는다’고 평가받는 평신도들이 사실은 ‘잘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다 안다’고 생각하는 평신도 리더들이 사실은 ‘많은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며, ‘열심히 믿는’ 평신도 일꾼들이 사실은 ‘대충 믿는’ 결과가 되어서, 마침내 세계 최고의 열심을 자랑하는 한국 교회(개신교)의 자부심과 명예가 땅에 떨어진 오늘의 비극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개별 교회의 운영 차원에서는 묵상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양육하고 봉사하는 ‘잘 믿는 평신도’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 전체의 올바른 신앙의 회복을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평신도,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자기의 삶에서 실천하는 평신도, 사생활과 공생활과 신앙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전면적으로 회개하고 돌이켜 살기 위해 노력하는 평신도’가 필요합니다. 개별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초등학교·중학교 수준의 신앙 교육을 넘어서 세상과 씨름하고 싸울 줄 아는, 고등학교·대학교 수준의 신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개별 교회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OO 교회의 평신도’로서가 아니라, 한국교회와 사회 전부를 놓고 교회와 세상에서 함께 고민하는 보편교회(universal church)적인 ‘한국 교회의 평신도’로서 믿고 실천하는 평신도 신앙이 생겨야 합니다.

아직도 뜨끈뜨끈한 한국 교회의 열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인생을 바친수많은 헌신자들의 열정이 있고,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보다 하나님 믿는 일에 더 인생을 걸고 사는 수많은 평신도들의 열정이 있습니다. 이 열정이 잘못된 길을 들어서 삐끗거리고 있습니다. 이 열정이 올바른 길로 돌아서면 됩니다. 포기하지 말고 이 열정을 올바른 길로 돌이켜야 합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망할 것이고 돌이키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교회도 돌아서고 목사님들도 돌아서고 평신도들도 돌아서야 합니다. 오랜 기간 한국교회의 은혜를 편안하게 누려왔던 평신도들이 돌아서야 합니다. ‘평신도를 깨워서’ 교회 일을 시키는 신앙실천이론으로는 부족합니다. ‘평신도들이 눈을 뜨고’ 자기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교회 안에만 묶어 놓지 말고, 세상 속으로 풀어 놓아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을 전도해서 다시 교회에 집어넣는 것만이 ‘신앙의 다’가 아닙니다.

믿음이 세상으로 흘러들어가서 세상 속에서 힘을 내고 꽃을 피우는 길을 내야만 합니다. 이것이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사야 43:19). 광야와 사막과도 같은 세상을 두려워하여 교회 속에 숨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도(道)』와 『인간의 연약함과 이기심을 이겨내며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교회에서 나와 세상 속으로 나가는 평신도의 신앙, 세상과 신앙 간의 긴장(緊張)을 잃지 않고 나와 남과 세상을 너무 선하게 낭만적으로 보다가 세상에 넘어지는 바보가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와 남과 세상의 악성에 비관하고 절망해서 쉽게 투항하고 결국에는 세상에 아부하며 살아가는 간신으로 전락하지 않는, 담대하고 강인한 평신도의 인생, 평신도의 신앙을 만들어 내자고 하나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한국 교회의 모든 평신도 동료들께 제안합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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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이병주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 변호사 자격을, 2001년 미국 Harvard 법률전문대학원에서 법학 석사(LLM)를, 200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법무법인 세종에서 2013년 6월까지 재직했다.

2006년 '빛과 소금' 잡지에 운동권에서 기독교인 변호사로 전환한 인생 역경을 담은 글을 발표한 이후, 기독법률가회의 활동적인 멤버로서 세상속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삶과 고민에 관하여 많은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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