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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예쁜 여자입니다- 김희아 집사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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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예쁜 여자입니다- 김희아 집사 간증
  • 정윤석
  • 승인 2014.09.05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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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점, 안면장애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스펙으로 이겨온 당당한 그녀

김희아 집사(42, 구세군교회 부교)가 2014년 8월 29일(금) 원천침례교회(김요셉 대표 목사)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제목으로 간증을 했다. 그녀의 왼쪽 얼굴은 붉은 점으로 덮여 있었다. 오른쪽 볼은 상악동암 치료를 받아 부풀어 올라 있다. 그녀의 별명은 어렸을 때부터 ‘아수라백작’, ‘괴물’, ‘귀신’이었다. 부모는 3살되던 해 그녀를 보육원에 버렸다. 

▲ 2014년 8월 29일 원천침례교회(대표목사 김요셉) 강단에 선 김희아 집사

보육원에서 다른 친구들은 2~3명씩 후원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후원자가 한명도 생기지 않았다. 후원하려고 왔던 사람들도 그녀의 얼굴을 보면 돌아섰다. 10살이 됐을 때야 비로소 미국인 짐 위건, 구세군 목사가 그녀의 후원자가 됐다.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 갖지 않을 때 짐은 ‘희아야, 사랑한다’고 말해 준 첫 사람이었다.

김희아 집사가 중 1 때 만난 선생님은 그녀를 칭찬해준 첫 사람이다. 친구들로부터 ‘괴물’ 취급을 당하던 그녀를 보고 ‘희아’라고 불러줬다. 쉬운 수학 문제를 칠판에 적어 놓고 그녀가 풀 수 있도록 자신감을 불어 넣어줬다. 선생님 덕분에 친구들도 그녀를 ‘희아’라고 불렀다.

그녀에게 사랑을 베푼 남편도 큰 축복이다. 남편은 붉은 점을 갖고 있는데다 상악동암으로 투병하던 그녀의 곁을 묵묵히 지켜줬다. 그의 집으로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인사를 가던 날, 아버지는 “살면서 아픈 거 어떡하노? 행복하게 잘 살아라. 사랑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게 아니다”고 말하셨다.

지금 그녀에겐 예쁜 딸 둘이 있다. 딸들은 “우리 엄마는 왼쪽에 보라색 점이 있고, 안면 장애 3급이지만 늘 긍정적인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다”고 고백한다. 다음 글은 김희아 집사가 원천침례교회에서 간증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주>

2013년 1월 4일 KBS TV ‘강연 100℃’에 나오기 전에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랬다. “저, 얼굴 봐라, 얼굴 봤나!” 누구나 나를 보고 혀를 찼다. 그러나 이 방송이 나간 후 사람들은 나를 ‘희아 씨’라고 불렀다. 나는 41살에 새로 태어났다. 만일 내 눈에서 눈물을 봤다면 그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일 것이다.

‘키다리 아저씨’같은 후원자 짐 위건
나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나긴 했지만 부모님에게서 자라지 못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에 큰 점이 있었다. 3살 때 보육원 앞에 버려졌다. 보육원에는 100여명의 어린이들이 있었다. 나는 얼굴에 있는 점 때문에 그 후로 ‘괴물, 귀신’이란 별명으로 살아왔다. 그런 나를 누군가 ‘희아’(계집 희(姬), 예쁠 아(娥))라고 한 번이라도 불러주면, 그가 설령 어제 내게 침을 뱉은 사람이라 해도 나는 그 순간 그 사람이 세상 가장 고마운 사람이었다.

▲ 3살 때 보육원에 버려진 김희아 집사

내가 보육원에 있던 때 다른 아이들은 후원자가 2~3명이 있었다. 얼굴이 예쁜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후원자 2~3명이 기본이었다. 그런데 나는 얼굴의 점 때문인지, 후원자가 없었다. 내가 보육원 살면서 제일 부러운 것은 엄마, 아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점이 없는 아이들이 가장 부러웠다. 특히 성탄절이 되면 아이들은 후원자의 선물을 받고 행복해 했다. 나는 그런 후원자가 없었다.

교회는 어린 시절부터 다녔다.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교회 목사님이 늘 설교하셨다. ‘범사에 감사하라’였다. 나는 뭐를 감사해야 하는지 몰랐다. 얼굴에 점이라도 없다면 감사할 게 많을 거 같았다. 그런데 나는 후원자도 없고, 부모도 없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후원자 한명을 보내주세요.” 어느 날 어떤 엄마·아빠가 자녀들을 데리고 왔다. 보육원에 후원을 하겠다고 찾아왔다. 원장님은 나를 그들에게 소개해 주셨다.

흔쾌히 후원자가 돼 줄 것 같았던 그들이었다. 내가 인사를 한 다음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내가 길에서 봤던 여느 사람들과 동일한 표정을 지었다. 후원자가 되겠다고 왔던 그들은 그 후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나는 ‘부모님이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나를 늘 지켜보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짠’하고 내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도하며 바라던 후원자는 내가 10살이 돼서야 생겼다. 후원자에게 내 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그는 여느 사람처럼 외면하지 않았다. 후원자는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한다’며 ‘희아야 25살이 될 때까지 너를 후원할게’라고 말해줬다. 25살이 될 때까지 후원자는 나를 도와줬다. 그리고 25살이 되자 후원을 끊고, 다른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는 내게 소설 속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제루샤 애벗이라는 고아 소녀가 한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대학에 진학한 후 꿋꿋하게 자신이 원하는 일과 사랑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려낸 진 웹스터의 소설) 같은 존재였다. 그분은 내가 35살이 됐을 때야 비로소 만났다. 그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딸을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갔다.

하얀 백발의 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분에게 다가가 나는 “짐 위건!”이라고 불렀다. 그는 구세군 교회 목사님이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내게 ‘희아야, 사랑한다’고 말해 준 첫 사람이었다. 나는 영어가 되지 않았지만 우리들 간의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알러뷰, 땡큐!” 한마디면 됐다. 나는 짐 위건으로 인해 감사를 알았고 오늘의 감사와 축복을 만들었다. 짐 위건을 만났을 때, 나는 그분의 품에 안겨 한없이 울었다. 엄마가 있다면, 그래서 엄마에게 안겼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 후원자는 내게 그런 따스한 분이었다. 그분은 내게 편지를 쓸 때 ‘사랑하는 희아에게’라고 시작했다. 그 구절이 내가 살아갈 힘을 줬다. 그분은 미국으로 가셨다. 내가 시력이 남은 기간 중에는 그분을 한번 더 만나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하던 게 있다. 길거리에 커다란 개가 있어도 무서워하지 않았지만 사람들 눈 마주치는 건 정말 무서웠다.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학교 미술 시간에 준비물 없이 갔다. 선생님은 나를 앞에 앉히고 모델이 되라고 했다. 앞에 앉은 나를 보고 친구들은 그림을 그렸다. 지금까지도 나는 거울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예쁜 모습을 보여줄까, 머리를 가장 많이 신경을 쓰고 왔다. 하나님은 내 눈에 콩깍지를 씌워주셨다. 나는 내가 괴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친구들의 하얀 도화지에는 괴물, 귀신이라고 불리는 희아가 있었다. 나는 그 일 이후 땅만 보고 걸었다. 머리로 1/3을 가려야만 밖에 나가 길을 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하나님은 부모를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힘들 때마다 내게 한분 한분 귀한 사람들을 보내주셨다. 10대까지 후원자가 보내준 선물을 자랑하며 웃을 수 있었다. 보육원안은 슬픔과 괴로움, 아픔만 있지 않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부모와 헤어진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부모님과 조금 더 일찍 헤어져 대한민국이 키워준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린 나를 보면 “고아원 산다 카는데 얼굴이 저래가 우야겠노”, “여자는 얼굴에 상처가 있으면 안 되고 얼굴이 무조건 예뻐야 한다”고도 얘기했다.

‘희아’라고 불러 준 선생님
나를 후원했던 또 한분의 선생님이 계시다. 중1 때 선생님을 만났다. 나는 신학기가 싫었던 사람이다. 새롭게 만나는 아이들은 서로 ‘나하고 짝하자, 밥먹자’고 했는데 아무도 내게는 그렇게 다가오는 아이가 없었다. 자신감을 잃고 머리카락으로 얼굴 반을 가리고 있는 나를, 선생님은 가만두지 않았다.

▲ 2013년 1월 4일 KBS TV ‘강연 100℃’에 나온 김희아 집사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칠판에 쉬운 문제를 내고, 내 눈빛을 봤다. 나는 ‘할 수 있어요’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면 선생님은 나를 시켰다. 그리고는 “희야, 잘 했다”고 칭찬하셨다. 나는 1985년 중학교 첫 학기에 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다. 그분은 나를 ‘희야’라고 부르며 웃었다. 선생님이 나를 그렇게 불러주시자 아이들은 그때부터 나를 ‘희야’라고 불렀다. 학교가는 날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머리로 얼굴 2/3를 가리고 살았지만 그때 비로소 올백으로 머리를 묶었다.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의 눈이 저를 보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 선생님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있다. 때로 나는 선생님 같은 사람이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졸업하면 보육원을 떠나야 한다. 사춘기 때는 보육원을 나가고 싶어했다. 가방도 싸보고,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데 도망가려면 이상했다. 늘 귀신, 괴물, 아수라 백작이라고 부르던 아이들이 나를 ‘희야’라고 불렀다. 그 이름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이제 보육원에서 나가면 직장을 잡고, 얼굴을 수술하고 싶었다. 누가 나를 받아줄까, 취직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졸업을 앞두던 날 원장님이 나를 불렀다. “너 졸업하면 보육원에서 선생님 해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직업을 허락받았다. 20살까지 큰 점은 아픈 차별이었다. 손님 앞에 나설 수가 없는 아이였다. 후원자가 오셔서 파티를 열 때는 구석에 앉아서 과자를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얼굴에 점은 있지만 마음에 장애는 없었다. 그런데 없던 장애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무서웠다. 한번 두 번 나를 쳐다보는 것은 괜찮은데 사람들은 네 번, 다섯 번이고 내 얼굴을 구경하고 갔다. 내 얼굴을 보고 다시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 제일 고마웠다.

1991년 첫 월급 21만원을 받았다. 첫 월급을 받고 원장님께 빨간 내복을 선물해 드렸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돈을 모았다. 그리고 4개월을 모아서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갔다. 치료를 위해 병원에 누웠다. 통증 40분을 참으면 그 고통은 시선으로 받는 고통보다 나을 것이다.

보육원 선생님으로서 나는 아이들을 엄하게 가르쳤다. ‘아비 어미 없이 자란 아이들’ 소리를 듣는게 싫어서였다. “고맙고 감사합니다”를 가르쳤다. 어느날 아이들을 데리고 수양회를 갔다. 고개를 숙이고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는 “밥맛이야”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그 순간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제가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몰라서 저런 말을 했습니다. 저 분 벌 주지 마시고 축복해 주세요.” 나는 교회에서 그것을 배웠다. 내게 침 뱉는 사람이 있을 지라도 사람들을 위해서 축복하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을 향한 축복과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만일 내가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향해 “나쁜 × 지나가다 코나 깨져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축복하라고 하셨는지 나는 알았다. 내가 기도를 하는 순간 나는 울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은 아프지 않았다. 내가 고아라는 게, 붉은 점이 있다는 게, 현실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날 밤 나는 집에서 눈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저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손이 지우개였으면 좋겠어요. 제가 문지를 때마다 얼굴의 점이 지워지게 해주세요.”

이 기도를 하면서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너무 문질러서 얼굴의 살갗이 벗겨졌다. 그러다 내게 보였다. 주님이 보였다. 주님이 울고 계셨다. 뜨거운 눈물을 그분도 쏟고 계셨다. 한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는데, 나를 만들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는데 나는 내 얼굴의 점을 지우기 위해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하나님, 다시는 얼굴 때문에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기쁨으로 울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 자신을 사랑하도록 도와 주세요.” 그리고 나는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다. 하나님은 정말로 지워 주셨다. 얼굴의 붉은 점이 아니었다. 점은 남겨졌지만 내 마음의 붉은 점을 지워주셨다. 그날 밤 주님은 내 눈에 감겨졌던 감사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 그 후로도 사람들은 악담을 멈추지 않았다. “저것도 얼굴이가? 내가 저 얼굴이면 나는 죽었다.” 다행히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는다고 하셨다. 내가 이렇게 태어난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 얼굴의 붉은 점을 보고 어떤 사람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내게 남자친구를 소개해준다고 했다. 내가 화장을 하지 않고 나가면 대한민국에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남자 친구를 만나는데 화장도 예의라 생각했다. 예의를 억수로 많이 갖췄다. 변장을 했다. 소개 받은 남자와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내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 “내 점이 보였나? 티가 났나?”라고 생각했다. 점 크다고, 뚱뚱하다고 도도하지 않은 게 아니다. 여자는 똑같다. 결국 남자가 내게 전화번호를 물었다. 심장이 박수를 쳤다. 들뜬 목소리로 말하고 싶지만 도도하게 전화번호를 말해줬다.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고 헤어졌는데 남자에게서 전화가 안 왔다. 내가 전화 한번 해보고 후회하자고 생각해서 당시 삐삐를 쳤다. 빨리빨리도 넣어야 한다.

통화를 하고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화장을 1시간 동안 하는 것도 고문이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 친구를 만나면서 나는 늘 기도했다. “친구가 제 마음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마음을 보게 해주세요”라고. 만난 지 16번이 지났을 때였다. 여건상 한달에 2회를 만났으니 8개월이 지날 때였다. 그가 “희야씨,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붉은 점, 상악동암 투병에도 곁을 지켜준 남자

▲ 김희아 집사의 안면 장애, 상악동암 투병 후에도 그녀를 지켜준 남편 박상문 씨

내 마음이 어땠을까?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름답게 느껴질 거다. 나는 그날 정말 무서웠다. 이 사람이 내 얼굴의 점을 알고, 보육원에서 자란 고아라는 걸 알고도 나를 사랑할까? ‘내 점을 알고 나를 버리면 어떡하지?’ 정말 두려웠다. 그를 24번째 만날 때였다. 1년이 지난 셈이다. 대구에서 오후 3시에 만나기로 했다. 화장을 하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내가 보육원 선생님으로서 화장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친구 집에서 ‘변장’을 하고 나가기 위해 보육원을 나왔다. 그런데 그 근처에 있던 남자친구가 화장하지 않은 내 모습을 봤다.

점을 보고 나서도 그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자신의 옆의 여자 친구의 자리를 그대로 비워뒀다. 예전처럼 그는 내 손을 잡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눈에 콩깍지를 씌워주셨다 생각한다. 나는 이제 행복을 꿈꿨다. 1년이 지나고 만난 지 2년이 될 때까지 얼굴의 붉은 점은 그의 눈에 익숙해진 거 같았다. 성탄절이 되기 전, 또다른 만남이 시작됐다. 코에서 코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침만 해도, 하품만 해도, 폭소를 터뜨려도 코피 코피였다. 병원을 갔다. 대구의 큰 병원을 갔는데 코안의 조직을 떼어내곤 검사를 했다. 의사는 나를 내보낸 다음 직장 동료에게 ‘악성종양’이 코 안에 생겼다고 했다. 병명은 이름도 희귀한 ‘상악동암’이었다.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고 수술하는 날 의사는 내게 “김희아 씨. 수술하면 얼굴 오른쪽의 뼈가 잘려나갑니다. 얼굴에는 뱃살을 이식하고 목에는 구멍을 내야 합니다. 얼굴에 뱃살이 자리잡지 못하면 썩어서 내려 앉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주저 앉았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콧대도 높이지 않아도 됐어요. 점이 없어지기를 바란 것도 아니예요. 사람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게 저의 성탄 선물입니까? 얼굴의 반이 잘려 나가면 저는 이 세상 어떻게 살아 갑니까? 하나님, 이 시간 이 자리에 저를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제 마음 전할 말이 없습니다. 아픈 눈물 받아 주는 엄마의 품도 없습니다.” 그 때 나는 찾아야만 했다. 상악동암을 갖고도 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감사를 찾았다. 병원 12층에서 하늘을 봤다. 밤 하늘의 별을 봤다. 수술 후 깨어나면 저 별을 볼 수 있을 것이기에 감사합니다. 죽을 것 같은 통증이 사라질 것이니 감사합니다. 가장 힘들고, 가장 아픈 고통을 표현할 말이 ‘감사’라는 고백이었다.

얼굴의 반이 잘려 나간다고 했을 때, 나 이제 어떻게 사느냐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울면 그날 밤 우셨던 주님의 얼굴이 생각났다. 감사는 병원에서 나를 웃을 수 있게 했다. 대야에 코피를 받아가면서 수술실에 들어갔다. 13시간의 수술이 끝났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25년 동안 ‘희야’라고 불리지 않았는데 그 해 12월에 ‘희야’로 불렸고, 사람들의 위로와 사랑을 받았다. 얼굴의 암보다 사랑 받은 감사가 컸다. 퇴원할 때 마음이 아팠다. 간다고 말할 수 있는 곳, 퇴원한다고 말할 곳이 없었다.

퇴원 후 작은 옥탑방에서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수술 했으니 잘 챙겨 먹으라’고 했다. 그 말이 너무 아팠다. 건강을 위해 내가 뭔가 차려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같이 밥 먹을 사람, 같이 병원 가줄 사람이 필요했다.

상악동암은 생존확률 10%라고 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웃으면서 산다는 것은 감사 때문이었다. 아픔도 달란트다. 저 얼굴이면 난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한다. “맞아요. 당신이 살 수 없으니까 제게 이 얼굴을 주셨지요.”

고난을 보고 좌절하지 말고, 앞으로 손을 뻗어서 우리를 맞아 주시려는 주님에게 손을 뻗어보자. 우리에겐 감사할 게 많다. 살아가는 과정이 행복이었기에 그게 내겐 축복이었다. 내게 점이 없었다면 25살 한창 때 암이 걸리는 것을 감당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암이 찾아왔지만 남자친구는 나와 함께 투병 생활을 했다. 남자친구와 결혼 얘기를 하면서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했다. 나는 최악의 조건을 가진 여자였다. 어떤 아빠가 나같은 여자를 만나게 하는 걸 허락할까. 기도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남자친구 아버님 앞에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앉았다. 수술로 변한 얼굴로 아버지 앞에 앉았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살면서 아픈 거 어떡하노? 행복하게 잘 살아라. 사랑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게 아니다.” 이 말을 하시곤 아버지는 결혼 승낙을 해주셨다.

내가 웨딩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리라고는 식장 앞에 서기까지 믿어지지 않았다. 식장을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말했다. “신랑이 참 멀쩡하다.” 나는 속으로 말하고 싶었다. ‘남편에게도 점이 있는데 작을 뿐이고, 저는 좀 클 뿐이에요.’ 장애가 아니라 상처의 크기와 모양이 다를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가장 큰 자원 봉사’를 말하고 싶다. 누군가 넘어졌을 때 일으키는 것, 따듯한 밥 먹여 주는 것, 다 좋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장애인 한번 더 쳐다보지 않는 것도 자원 봉사다라는 거다. 그 사람 만났을 때 양쪽 입 꼬리를 올려서 웃어 주는 것이 정말 소중한 자원봉사다.

외국인을 보면서 알았다. 외국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눈을 돌렸다. 설령 눈이 마주치면 입꼬리를 살짝 올려 주며 미소를 보여 줬다.

세상에서 엄마가 가장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딸들
결혼 후 자녀가 태어났다. 기도했다. 제발 점이 유전되지 않게 해주세요. 이 세상에서 예쁜 아기들을 보셨겠지만 내겐,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쁜 아기였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붉은 점이 있는 내가 낳았다! 너무 감사했다. 이 아기를 낳고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기 낳고 나니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 그대로였다. 웃고 있으면 울고 있는 모습이 보고 싶었고, 가만히 있으면 발을 간질러 보았고, 품에도 꼭 품어봤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고. 나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도 불공평한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사랑받지 못했지만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모성애를 주셨다. 그게 내 사랑의 시작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넘어져도 감사하는 걸 가르쳤다. 넘어져도 “이 정도 밖에 안 다쳤네? 하나님이 지켜 주셨다.”고 기도하는 걸 가르쳤다. 아이도 감사를 배워서 “오다가 넘어졌는데 이거 밖에 안 다쳤어요.”라고 말했다.

소꿉놀이를 하면서 아이가 장난을 걸어왔다. “엄마, 제가 엄마하고 엄마가 아기를 해야 해요.”
내가 말했다.
“엄마, 배고파!”
아이가 말했다.
“아이, 우리 아기 배고파? 맘마 줄게 조금만 기다려.”
아이의 음성을 통해 나는 엄마의 음성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빗물처럼 눈물이 흘러 내렸다.
“엄마, 나, 아파!”
“우리 아이 아파? 엄마가 나을 때까지 너를 지켜줄게!”

나는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 내가 사람의 딸로 태어난 것인지 확인하고 싶다. 아이가 팔 베게를 하면서 말했다. “엄마는 엄마가 없어서 불쌍해.”
만일 내 아이가 엄마의 모습이 싫고 부끄러웠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엄마는 엄마가 없어서 좋겠다, 다행이다”고.

나는 살면서 티비에 나오고 싶은 때가 있었다. 큰 딸아이의 글 때문이었다. 딸은 ‘우리 엄마는 왼쪽에 보라색 점이 있고, 안면 장애 3급이고, 엄마가 부끄러울 때도 있지만 늘 긍정적인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감사로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딸에게 좀더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TV 출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방송국 주부강사 뽑는 프로그램에 나가게 됐고 거기서 우승을 하게 된다. 행사장에 가니 화려하고 예쁜 이 땅의 어머니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주눅이 들었을까?

아니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스펙, 감사의 스펙이 내 안에 있었다. 하나님 백을 믿고 그 자리에 섰다. 대기자들에게 사탕을 하나씩 돌렸다. 그리고 “제가 1등 할테니 사탕 드시고 마음 아파 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성령님은 내 입을 통해 할 말을 다 하셨다. 최고의 심사평을 받았다. 심사평을 듣고 대한민국 유일의 강사로 만들어 주셨다. 사람들이 꿈을 꾸라고 할 때 나는 꿈이 없었다. 꿈을 꿀 수도 없었다. 하나님은 내 입에서 꿈이 나오게 해 주셨다. “저는 강사가 될 거고, 책을 쓸 거예요. 교회 다니며 간증할 거구요. 티비에 나올 거예요.”

하나님은 2013년 1월 KBS를 통해 나를 강사로 만들어 주셨다. 강연 100℃에 나와서 하고 싶은 말을 엄마에게 고백했다. “엄마, 저를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큰 복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어나자마자 당신에게 아픔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나를 가슴에 품고 얼마나 당신은 아프고 무서웠습니까? 아기를 낳았지만 낳았다고 자랑도 못하고 손가락질 받고 얼마나 아픈 눈물을 삼키셨습니까? 이런 저를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보고 싶습니다. 엄마·아빠를 만지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고아로 버려졌지만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가정을 선물로 주셨다. 축복을 외면하고 원망만 하고 살았다면 나는 이런 기쁨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내 인생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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