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3-25 15:18 (월)
컴퓨터가 우리를 속이는 날
상태바
컴퓨터가 우리를 속이는 날
  • 만나교회 장운철 목사
  • 승인 2014.08.26 06: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읽기 Ⅱ/ 8. 컴퓨터 세상

** 컴퓨터 세상

컴퓨터가 갈수록 지능화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컴퓨터 의존도도 높아지고 있다. 오늘 우리의 ‘컴퓨터 세상’을 대변해 주는 용어로 3가지를 들 수 있다. 웨어러블컴퓨터, 사물인터넷 그리고 인공지능로봇 등이다.

▲ 구글이 내 놓은 '구글 글래스'

웨어러브컴퓨터는 말 그대로 우리들 몸에 착용될 수 있는 기기를 말한다. 컴퓨터라고 하면 그동안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자판을 두드려 사용하는 기계 덩어리로 인식되어 왔다. 그것이 스마트폰과 테블릿 등 손으로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용도로 확장되었다. 이것이 이제는 안경, 시계, 신발깔창, 피부이식 센서 등 우리들 몸에 붙어버리는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 상당 부분은 이미 실행되고 있다.

구글에서 이미 ‘구글 글래스’라는 안경을 내 놓았다. 일반 시중에서 구입할 수도 있다. 아직 한국 시장에는 시판되지 않았다. 구글 글래스에 이런 기능이 있다. 내 앞에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고 눈동자를 오른쪽 위의 인터넷 화면을 보고 깜박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 직업, 수상 경력 등이 안경 화면에 뜨게 된다. 소위 ‘얼굴 인식’ 기능이다. 컴퓨터 검색창에 이름을 검색하면 나타나는 화면이 동일하게 안경 창에 보여지게 된다. 놀라운 일이다. 내 앞에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즉석에서 알 수 있게 된 일이다. 혹시 위험한 사람은 아닌지,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유명 인사가 스쳐지나가는 것은 아닌지 알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로 지목된 유병언 씨 찾기를 큰 이슈로 갖고 있다. 모든 국민이 이 구글 글래스를 착용하고 있다면 그와 그 관련자들을 찾는 데 훨씬 수월할 수 있을 것 같다.

구글 글래스의 단점이 있다면 눈을 사시로 떠야한다는 점이다. 눈동자를 위 상단의 인터넷 접속 렌즈를 보고 깜박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구글은 최근 ‘구글 콘택트 렌즈’까지 개발해 냈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이런 ‘얼굴 인식’ 기능은 개인신상보호를 위해 사용 금지된 상태다.

스마트워치, 즉 시계는 지금 삼성 등 여러 회사에서 출시해 놓고 있다. 스마트폰 기능의 축소판으로 출발했지만, 신발깔창이나 피부이식 센서 등과 함께 건강관리 등의 기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혈압, 혈당 등 내 몸의 상태를 즉석에서 파악 보고해 주는 기능이다. GPS 기능을 넣으면 치매 노인 실종이나 어린 아이 유괴 등의 사건을 예방,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점점 아이언맨이 되어가고 있다.

▲ ‘컴퓨터 세상’을 대변해 주는 웨어러블컴퓨터, 사물인터넷 그리고 인공지능로봇

어느 날 내 스마트폰에 다음과 같은 문자가 도착하게 될 것이다.
“00씨 냉장고에 우유가 다 떨어져가요. 제가 주문해 놓을까요?”
누가 보낸 문자일까? 그렇다. 냉장고가 나에게 보낸 문자다. 그 문자를 받고 내가 ‘OK’ 버튼을 누르면 냉장고가 스스로 인터넷으로 우유를 준문해 놓는다. 이런 세상이 곧 온다. 정말 꿈 같은 일들이다.

바로 ‘사물인터넷(IoT)’ 기능 때문이다. 사람과 물건, 물건과 물건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각 기기의 기능을 작동시킬 수 있게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물건이 인터넷으로 연결된 작은 컴퓨터가 된 셈이다.

내가 우리집 에어콘에 문자를 보질 수도 있다.
“나 오늘 출장가기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간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답장이 온다.
“네, 00씨 잘 다녀오세요. 집 걱정은 마세요. 저희가 잘 관리하고 있을게요.”
그리고 에어콘은 보일러, 청소기, 전등 등에 신호를 넣는다. 그러면 보일러는 최소 기능으로 작동하고 청소기는 구석구석 한 번 청소를 한다. 그리고 전등은 모두 소등하고 보안용 CCTV가 작동을 한다. 집주인이 없는 휴면 상태로 각 가전 기기가 스스로 작동이 된다는 말이다.

인공지능 로봇은 과학의 ‘총아’다. 과학을 전공한 필자의 작은 생각이다. 최근 ‘유진 구스트먼’이라는 인공지능 로봇이 과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과학자들이 개발한 이 로봇이 인공지능을 판별해 주는 ‘튜링 테스트’를 처음으로 통과했기 때문이다. 튜링 테스트란 일반 사람이 로봇과 5분간 대화를 한 후, 그 로봇이 사람인 것처럼 느꼈다고 판단한 비율이 30%가 넘으면 ‘인공지능’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1940년 이후 약 75년 만에 ‘유진 구스트먼’이 그 테스트를 처음으로 통과한 것이다.

도대체 그 인공지능 로봇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까?
한국의 한 신문기자가 인터넷으로 그 로봇과 연결을 해 대화를 해 보았다. 13세 우크라이나 소년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그 ‘유진 구스트먼’과의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조선일보 2014년 6월 16일자).

“제 직업은 기자입니다.”
- 우크라이나에선 수년간 여러 기자가 죽었어요. 무척 위험한 직업이지요.
“한국에선 그렇게 위험하진 않아요.”
- 그래요. 실은 저도 농담한 거예요.
“그런 농담은 재미가 없는 걸요.
- 제 얘기에 도통 웃질 않네요. 당신은 장례식에나 어울리는 진지한 사람 같아요.

기자는 대화한 후 ‘섬뜩했다’고 평을 내렸다. 그 신문을 읽은 필자도 그랬다. 컴퓨터와 대화를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런 로봇이 앞으로 각 가정에 하나씩 존재하게 될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일본에서는 ‘페퍼’라는 이름의 감성 로봇이 내년부터 시중 판매를 한다는 뉴스가 떴다. 감성적으로 위로해 주는 등 말벗이 되어주는 로봇이다. 한국 돈으로 2백만원 정도라고 한다. 로봇 시대가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 2014년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한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그녀]

<그녀>(Her, 스파이크 존스 감독)라는 제목의 영화가 최근 개봉, 상영중에 있다. 2014년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이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데오토르는 아내와 별거중이다.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인공지능 컴퓨터 운영체제(OS)를 비싼 값에 구입했다. 이름은 ‘사만다’다. 데오토르는 사만다와 수시로 대화를 한다. 늘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만다와 대화하는 게 좋았다. 행복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컴퓨터를 말이다.

사람이 컴퓨터와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게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런 일이 정말 현실에게 가능하기나 할까? 그런데 위 유진 구스트먼과의 대화를 보면 왠지 긴장된다.

컴퓨터 세상이다. 컴퓨터의 인공지능이 갈수록 크게 향상되어가고 있다. 놀라울 정도다. 인간의 컴퓨터 의존도도 동시에 높아지고 있다. 금융, 통신은 물론 각종 정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가 컴퓨터로 연결되어 있다.

** 문제 발생

웨어러블컴퓨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로봇 등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이 조금은 섬뜩하지만 사실 ‘애교’에 불과하다. 컴퓨터로 인해 발생될 수 있는 문제를 상상해 본다면 말이다.

첫째, 어느 날 인공지능 컴퓨터가 인간을 속이는 날이 올지 모른다.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인간에게 줄 수 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중요한 약속시간이 어긋나고, 건축 현장의 측량 값에 오차가 생길 수 있다. 일이 망한 후에 컴퓨터는 ‘농담이었는데...’라며 웃고 만다. 그것을 바라보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 갑자기 현기증이 난다.

둘째, 어느 날 인공지능 컴퓨터가 우리의 영혼을 좀 먹을지 모른다. 이게 더 큰 문제다. 컴퓨터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을 수 있다.

“00씨(또는 주인님), 지금 아침 큐티(QT) 시간인데 많이 분주해 보여요. 제가 대신 큐티를 해서 교회 단체 SNS방에 그 결과를 올릴까요?”
“지금 기도 시간인데, 제가 대신 기도할까요? 안 하는 것보다 낫지 않나요?”
“요즘 찬양이 뜸해요. 제가 대신 할까요?”

이런 문자 아래 ‘Yes’, ‘No’ 단추가 보인다. 어떻게 할까? 만약 ‘Yes’ 단추를 누른다면 컴퓨터가 오늘 치 큐티를 정확히 요약 정리해서 같은 교인 모임에 문자를 보내게 될 것이다. 그 문자를 받은 성도들은 내가 성경 묵상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영혼을 쓰러뜨리는 일이다. 새로 찾은 사탄의 멋진 전략이 된다. 컴퓨터가 나를 지배하게 되는 재앙이 되고 만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예배, 큐티, 기도, 찬양 등 우리의 신앙행위가 기쁨과 영광이 아니라 의무와 숙제 등 강압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각종 신앙행위를 통해 참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컴퓨터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 너는 이렇게까지만 말해주어라. ‘주인님, 큐티 시간입니다. 오늘 묵상할 본문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18절까지입니다. 어서 일어나세요’라고 말이다.”

** 컴퓨터 세상,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이런 컴퓨터 세상은 그리스도인이건, 비그리스도인이건 모두에게 동일한 환경으로 펼쳐진다. 그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1. 찬양하며 기쁘게 살자.
어떤 세상이 우리 앞에 나타나건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쁘게 살아야 한다. 찬양은 ‘주님을 주님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는 행위’다. 노래, 무용, 그림, 고백, 생각, 판단, 행동 등으로 우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다. 교회에서는 물론, 가정에서, 일터에서 동일해야 한다. 또한 푸른초장을 걸어갈 때든, 광야를 걸어갈 때는 역시 변함이 없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실 때의 일이다(눅 19:37-40, 마 21:1-17).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호산나, 호산나’ 큰 소리로 찬양을 한다. 길가에 자신의 겉옷을 깔고 종료나무 가지를 흔들며 왕으로, 메사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다. 이것을 본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불편하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불평을 늘어놓는다. 백성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비난 섞인 말을 내 뱉는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무슨 말인가?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 모든 피조물로부터 찬양을 받는 게 당연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the stone will cry out)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너무도 합당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말이다. 컴퓨터가 인공지능의 날개를 달아서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켜도 우리의 찬양은 결코 변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컴퓨터가 돌(stone)과 아주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컴퓨터의 핵심 부품 중 하나가 바로 반도체다. 그 반도체의 원료는 ‘규소’다. 그리고 그 규소는 모래에서 발견된다. 모래는 돌멩이가 부서진 것 아닌가.

당신의 애창 찬송은 무엇인가? 이쯤에서 한 번 읊조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2. 사귀며 기쁘게 살자.
‘사귀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서로 얼굴을 익히고 친하게 지내다’로 나온다. 비슷한 말로 교제하다, 내왕하다, 벗하다, 어울리다 등이 있다.

성경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수직), 그리고 나와 너와의 관계(수평)를 ‘사귀다’라고 표현한 대목이 있다. 다음과 같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5-7)

우리의 사귐의 대상인 하나님은 빛이시다. 어둠이 조금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귄다면 그 빛 가운데 들어감을 말한다. 하나님의 거룩, 진리, 기쁨, 평강, 영광을 맛보며, 누리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된다.

그런 우리가 그 빛의 힘으로 바로 ‘너’를 또한 사귀며 살아가게 된다. 서로 깨끗해지며, 거룩해지며, 평안해지며 그렇게 말이다. 우리의 인간관계는 폭이 넓다. 사랑스러워 보이는 사람에서부터 원수까지 다양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다면, 사랑스러워 보이는 사람들과만 사귀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관계 속에서 슬픈 일들이 참으로 많이 일어난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인한 지혜와 힘이 있다면, 인간관계 사귐의 폭을 점점 더 넓힐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크기는 ‘원수’까지다.

컴퓨터는 사귐의 대상이 아니다. 다스려야할 대상일 뿐이다. 하나님과 사귀며 살고, 또 그 힘과 지혜로 이웃과 사귀며 사는 것은 큰 기쁨이라고 요한일서 저자는 우리에게 교훈해 준다(요일 1:3-4). 이 기쁨을 컴퓨터에게 빼앗길 수는 없는 일이다.

-------------
장운철 목사의 세상읽기는 매우 희소가치가 높은 글이다. 서적·세상·사회현상 등을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이토록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조명해내는 글은 일찍이 어떤 사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성도들은 이 글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살아가야 할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들도 일독하면 매우 중요한 설교 소재를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장운철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B.A),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Th.M.)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AZUSA PACIFIC UNI.(아주사퍼시픽 대학교, M.A.R)를 졸업했다. 두편의 논문을 작성했다. ‘요한계시록을 오용해 나타난 최근 이단사상 비판’과 ‘An Evangelical Christian Perspective on Money’(언론에 나타난 세상, ‘돈’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등이다. 서울 상도동에서 만나교회(mannagu.onmam.com)를 개척,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천지 포교전략과 이만희 신격화 교리>(장운철, 진용식, 정윤석 공저, 한국교회문화사, 2007), <그리스도인들이여! 세상을 읽자>(장운철, 솔로몬, 2012), <이단들에 의해 잘못 사용되고 있는 핵심 성경구절 33가지>(장운철, 부흥과개혁사, 2013)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