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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건너는 3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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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건너는 3가지 방법
  • 장운철
  • 승인 2013.02.06 2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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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운철 목사의 세상읽기 Ⅱ/ 6.
▲ 사막횡단은 인생살이와 닮았다

‘예측불허(豫測不許)’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앞일을 좀처럼 알기 힘들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감(感)을 잡지 못할 때도 많다. 하긴 5분, 아니 1분 뒤의 일조차 알지 못하는 게 우리 인간의 능력(?)이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사막’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사막을 언급할 때, 뜨거운 태양, 끝없는 모래 언덕 등이 연상된다. 그것에 한 가지를 덧붙여 보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이라는 의미다. 큰 바람이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바로 눈 앞에 있던 모래 언덕이 자취를 감춘다. 반대로 하늘에서 ‘쿵~’하고 떨어졌는지 발 앞에 깊은 모래골짜기가 생기기도 한다. 나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전혀 다른 곳에 와 있는 느낌이다. 방향도 잃어버린다. 잠시 후에 어떤 일이 또 발생할지 그것도 예상할 수 없다. 그런 곳이 사막이다. 산봉우리에는 이름이 있어도 모래 언덕에는 이름이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지 않을까?

지금 뜨거운 사막 한 가운데 놓여있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느낌일까? 강렬한 태양과 뜨거운 공기가 우리의 목을 휘감는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모래 알갱이들이 또한 우리의 발목을 땅 아래로 잡아당긴다. 갈증이 난다. 피곤하다. 힘들다. 지친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이러한 사막을 건너가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치 사막과 같은 인생을 한 평생 살아가려고 한다면 또한 어떻게 해야 할까? 비법이라도 있을까?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스티브 도나휴, 김영사, 2005)이라는 책이 흥미를 끈다. 저자 스티브는 실제로 사하라 사막을 횡단했다. 사막에서 겪어야 할 일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 그 가운데 터득한 지혜를 6가지로 정리했다. 그는 사막 한 복판에서 인생을 발견하기도 했다. 사막을 건너간다는 것과 인생살이가 매우 유사함을 깨달았다. 변화무쌍한 상황을 뚫고 가야한다는 바로 그것이다. 사막에서 얻은 지혜가 우리네 인생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사막을 건너는 6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지도를 따라가지 말고 나침반을 따라가라.
2.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쉬어가라.
3. 모래에 갇히면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라.
4. 혼자서 함께 여행하기.
5. 캠프파이어에서 한 걸음 멀어지기.
6. 허상의 국경에서 멈추지 말라.

앞의 3가지 지혜에 특별히 공감이 간다. 읽는 도중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충분히 공감했기 때문이다. 사막을 건너본 경험이 없는 필자도 마치 사막 한 가운데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이렇듯 사막에서 마시는 음료의 맛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나침반을 따라가라.
보통 여행을 할 때면 여행지의 지도와 안내서 등을 챙긴다. 낯선 장소일수록 좀더 자세한 정보를 취득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여행에서는 예상치 못한 많은 일들을 만나게 된다. 교통편, 도로, 물가 등에서 적지 않은 당황스러운 일들을 만나게 된다. 그것조차도 예상을 했지만, 그래도 막상 그러한 예상치 못한 일들을 당하게 되면 난감해진다. 어쩌면 여행의 참맛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신선함과 긴장감이 어우러진 그 ‘무엇’, 그것을 맛보기 위함이지 아닐까?

인생도 마찬가지다. 공부, 결혼, 자녀양육, 노후 등의 삶의 영역에 대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 예상을 한다. 그리고 준비한다. 마치 여행을 떠날 때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대학을 나오면 어떠한 계열의 직장에 취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한다. 그러나 결과는 꼭 예상한 대로만 나오지 않는다. 변수가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누구나 신중하게 고르고 고른 상대와 결혼하면 정말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 여기에도 경우의 수는 엄청 많다. 자신의 심장이라도 빼어 줄만큼 사랑했다는 커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원수로 헤어지는 일이 주변에 널려있다. 자녀양육과 노후 준비 등의 영역에서도 다르지 않다. 특히 자녀 양육은 정말 어렵다. 열심히 준비를 하지만 인생은 예상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마치 사막에서 모래언덕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도를 따라가지 말고, 나침반을 따라가라’는 말은 사막 여행에서 ‘지혜’다. 사막의 지형지물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있던 길이 없어지고, 없던 길이 나타난다. 지도의 역할이 한정적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모래바람에도 변하지 않은 바로 그것, ‘나침반’이다. 어제 보았던 모래언덕을 보고 가면 안 된다. 지나온 모래골짜기를 보고 방향을 잡아서도 안 된다. 오직 나침반을 의지해서 걸어가야 한다. 나침반이 없으면 지도나 안내지도 소용이 없다. 그럼 우리네 인생살이에 있어서 나침반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위 책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 지침에는 ‘하라’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에게 진실하라, 인내하라, 그 순간에 몰입하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가져라, 긍정적인 마음 자세를 가져라, 하나님을 믿어라 등과 같은 말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단순하지만 강력한 방향 지침으로서 인생과 변화의 사막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안내해 준다.”(p.41)

생활의 원칙, 인생의 근본 기준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사업 실패 등으로 경제적 궁핍의 상황에 빠진 이가 소망, 목표, 목적을 세운다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다. 빚 청산, 재기할 자본 마련 등일 것이다. 그러나 나침반이 없다면 그 소망을 이루는 게 힘들다. 그에게 나침반의 역할은 무엇일까? 수학 기호로 표시한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지출<수입’이다. 지출이 수입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주는 교훈은 남다르다. 수입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지출을 그 이상으로 대폭 줄여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의미다. 사랑하며 사는 것, 신앙을 갖는 것 등이 바로 인생에 있어서 나침반에 해당된다는 말이다.

2. 오아시스
오아시스를 만나면 무조건 쉬라는 게 저자의 두 번째 당부한다. 만약 체력의 여유가 있다고 판단해 쉬지 않고 다음 오아시스까지 간다면 그곳에서 회복하는 데 4배의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여행에서 ‘쉼’은 액세서리가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기준’이라는 말이다. 정기적인 쉼을 가져야 한다. 예상한 때에 오아시스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오아시스를 만들어서라도 쉼을 가져야 한다. 쉼 없이 사막을 건넌다는 것은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불나방과 같은 자살 행위와도 같기 때문이다.

▲ 퇴직하고서야 아내를 발견한 남자. 그러나...

예를 들어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루 종일 수고한 교사에게는 말이 잘 통하는 동료들과 수다의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게 좋다. 그게 바로 오아시스다. 혼자서 일을 하는 직업인 역시 많은 이들과 교류하는 취미가 절실히 필요하다. 컴퓨터 일을 하는 이는 화분 가꾸기, 서비스업으로 과도한 친절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에게는 배구나 스쿼시 등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스포츠, 공무원이나 교사 등 규칙적인 생활의 직장인에게는 멋진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 여행이 적지 않은 오아시스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오아시스에서 특별한 보너스를 얻을 수도 있다. 같은 여행길의 동료를 만날 수 있다. 여행길에서는 스쳐지나가지만, 오아시스에서는 대화를 할 수 있다. 사람은 쉴 때 동료가 눈에 들어온다. 처음 만나는 이들 뿐 아니라 함께 길을 가고 있는 동료들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들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얻고, 경험을 나눌 수 있다. 위로해 줄 수 있고, 기쁨을 나눌 수도 있다. 이 보너스는 종종 여행의 본 목적보다 더 짜릿한 맛을 얻게 한다. 보너스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오아시스에 쉬어야 할 정도다.

<어바웃 슈미트>라는 영화가 있다. 한 노인이 사무실에서 시계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시계 바늘이 오후 5시 정각을 가리키자 그는 옷과 가방을 챙기고 사무실을 한 번 더 둘러본 후 퇴근을 한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회사생활이다. 정년 퇴임을 한 것이다. 퇴임한 그가 어느 날 아침 깜짝 놀라며 일어난다.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는 여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도대체 누구지”
낯선 한 여인이 자기 침대 옆에서 코를 골며 잠자고 있는 게 아닌가. 가만히 보니 그 여인은 바로 자신의 아내다. 코를 골며 피곤하게 자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퇴임하니까 이제야 그게 보인 것이다. ‘짠~’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위해 묵묵히 뒷바라지는 해준 은인이다. 그는 청소하기, 장보기 등 집안 일을 도우며 아내를 새롭게 알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다. 우체국 갔다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카펫 위에 쓰러져 있다. 그 옆에서 청소기는 ‘윙~’하며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짐작했던 대로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아시스를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장면이다.

3. 타이어
‘아이고 이런~’
자동차 뒷바퀴가 그만 사막 한 가운데 모래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운전자는 가속기를 밟으며 핸들을 이리저리로 움직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마다 바퀴는 오히려 더 깊숙이 모래에 뿌리를 내렸다. 삽을 이용해 바퀴 앞부분에 모래를 다져 넣기도 해보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사막의 태양 아래 자동차도 여행객들도 모두 짜증나고 지치기 시작했다. 이때 한 동료가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운전자는 고집을 부렸다.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며 자신의 방법을 고집했다. 태양은 비웃듯이 계속 이글거리고 있었다.

자동차 경주 중 ‘락크롤링’(rock crawling)이란 게 있다. 속도 경기가 아니다. 4륜구동 지프차로 바위를 오르는 경기다. 집체만한 바위도 있다. 90도 가까운 경사 언덕을 엔진 소리 크게 울리며 슬금슬금 기어 올라가는 경주다. 잘못하면 자동차가 미끄러져 뒤집히기도 한다. 이 경기의 요령 중 하나는 타이어에서 바람을 1/3정도 빼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타이어와 지면의 접촉면이 많아져서 미끄러지지 않고 힘을 많이 받아 바위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결국 운전자가 생각을 바꾸었다. 동료의 말대로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기로 했다. 그런 후 다시 가속기를 밟았다. 그러자 자동차는 굉음을 내며 모래 웅덩이를 박차고 올라왔다. 거짓말처럼 자동차가 그 웅덩이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기뻐했다. 동시에 서로 간에 쌓였던 불신의 앙금도 순간 사라졌다. 빠진 바람처럼 날아가 버렸다. 타이어에서 바람을 뺀다는 것은 인생살이에서 우리들의 고집, 자아를 버림을 의미한다. 고집을 버리면 의외로 문제가 쉽게 풀린다. 그동안 내가 못 보았던 게 보이기 시작한다.

위의 3가지 지혜를 그리스도인의 경우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에게 나침반, 오아시스, 타이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a. 언약을 따라가라.

▲잘 달리기 위해 바람을 빼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사사 중 유일한 여자였던 드보라가 활동하던 때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평안을 누렸다(삿 5:31). 사사가 죽자, 이후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이웃 국가 미디안의 공격을 받아 7년 동안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극심한 경제적 궁핍이다. 숨겨놓은 양식도 어느새 찾아내 빼앗아 가고 만다. 이제 굶어 죽게 생겼다. 마치 물 없이 사막을 걸어가야 하는 것과 같은 인생살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나침반이다.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 언약(covenant)이 바로 나침반의 역할을 해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허락해준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가 요구한 바도 없다. 아니 우리는 그러한 요구를 할 만한 자격도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없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사막을 건너가기 위해서 말이다. 그 언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이를 한 마디로 줄이면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라고 할 수 있다. 푸른초장의 인생길을 걸어가든, 사막이나 광야와 같은 길로 걸어가든 이 나침반을 따라가야 한다. 반드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7년만에 다시 하나님을 찾았다. 도와 달라고 소리높여 부르짖었다. 이에 하나님은 다시 사사 한 명을 세우신다. 그 유명한 기드온이다. 그러나 기드온도 처음에는 자신 없다고 거부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못하겠다고 발을 뺐다. 이때 그에게 나타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는 것이다(삿 6:16). 바로 언약이다. 그것이 사막을 건너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이요, 힘이요, 위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위 언약의 말씀을 수시로 되뇌어야 한다. 그게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많은 기도 제목들에 공통적인 응답이 있다면 무엇일까? 바로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는 것일 게다. 이보다 더 확실한 기도응답이 또 어디 있겠는가?

b. 하나님 기뻐하시는 틀(프레임)을 만들어라.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구체적인 몇 가지 방법을 명령하셨다. 기드온은 3가지 일을 단행했다. 자신의 아버지 집에 있던 바알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박살을 냈다. 둘째는 인근 산꼭대기에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제사(번제)를 드렸다. 셋째는 쪼개진 우상의 재료를 태워 번제용 도구로 사용했다(삿 6:25-27).

한 마디로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틀을 다시 만들고 살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오아시스다. 그곳에 참 쉼이 있다. 평안이 있다. 그렇게 할 때 참된 이웃이 보인다. 실제로 기드온의 행동으로 인해 기도온의 아버지 또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눈을 다시 뜰 수 있었으며, 믿음의 아들(기드온)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삿 6:31).

하나님보다 ‘우선’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용히 우리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자.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그 일에 대한 ‘의도’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것인지 말이다. 또한 그 ‘방법’이 정당한 것인지도 신중히 살펴보자.

c. 두려움을 버리고 믿음을 가지라.
이제 전쟁이다. 기드온도 군사를 소집했고, 미디안도 이웃국가와 함께 더욱 강력한 군대를 조직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두렵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지만, 전쟁에서 꼭 질 것 같다. 군사 수 등 객관적인 전략에서 한참 밀린다는 게 그 이유다.

그래서 기드온은 하나님께 한 번 더 질문을 던진다. 전쟁 못하겠다고 강짜 부리려는 식이다. ‘양털 사건’이 그래서 나왔다. 양털 한 뭉치를 마당에 두고 밤 사이에 그곳에만 이슬이 내리게 해달라고 했다. 하나님이 응해주자 이번에는 그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해달라고 한 번 더 조른다.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도 응답해 주었다(삿 6:36-40).

질문 하나를 던져 보겠다. 필자 스스로에게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던지고 싶은 내용이다.

문) 오늘날 기드온과 같은 두려운 전쟁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도 ‘양털 사건’을 그대로 재연해서 하나님께 조르면 우리 하나님은 기드온 때처럼 동일하게 응답해 주실까?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어리석은 요청을 들어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으라’는 것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양털 사건을 ‘기록’으로 남겨 놓도록 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 기록을 읽고 동일한 믿음을 가지라고 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막과 같은 험한 세상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뒤따라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에 귀를 기울이면 ‘담대함’이 생긴다.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언약이 살아서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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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운철 목사의 세상읽기는 매우 희소가치가 높은 글이다. 서적·세상·사회현상 등을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이토록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조명해내는 글은 일찍이 어떤 사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성도들은 이 글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살아가야 할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들도 일독하면 매우 중요한 설교 소재를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장운철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B.A),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Th.M.)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AZUSA PACIFIC UNI.(아주사퍼시픽 대학교, M.A.R)를 졸업했다. 두편의 논문을 작성했다. ‘요한계시록을 오용해 나타난 최근 이단사상 비판’과 ‘An Evangelical Christian Perspective on Money’(언론에 나타난 세상, ‘돈’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등이다. 서울 상도동에서 만나교회(mannagu.onmam.com)를 개척, 5년째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천지 포교전략과 이만희 신격화 교리>(장운철, 진용식, 정윤석 공저, 한국교회문화사, 2007), <그리스도인들이여! 세상을 읽자>(장운철, 솔로몬, 2012), <이단들에 의해 잘못 사용되고 있는 핵심 성경구절 33가지>(장운철, 부흥과개혁사, 2013)가 있다.
<교정재능기부> 이관형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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